5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려


권용택작 '촛불이 햇불되어'


암울한 시국을 예술로 저항하는 ‘순실뎐’이 지난30일 오후 5시에 개막되어 오는 12월5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강원도 리얼리즘 성향의 예술가들이 마련한 이 전시는 서울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병신무란 하야제’에 이은 두 번째 시국 전이다.



황재형작 '소가 넘어간다'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는 예술가들의 저항전은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최형순(미술평론가)씨는 “시국선언이 쏟아질 때 우리 예술가들은 촛불의 머릿수 하나를 채우는

일만으로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황효창작 '웃기는 세상'


시국선언과 같은 시국 전시회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책임’이라는 데 뜻이 모였다”고 말했다.


“속아 넘어가다”를 풍자한 황재형씨의 작품 ‘소가 넘어가다’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 되는 날 그린 작품으로,

작가의 분노가 그대로 화폭에 녹아 있었다.



박종혁 작 '그래도나는부자다'


황효창 작가의 ‘웃기는 세상‘은 인형을 통해 그들을 조롱하였고,

촛불이 횃불 되어’를 선보인 권용택 작가는 춘천 지역 국회의원 김진태씨가 “촛불은 촛불일 뿐이지,

바람이 불면 다 꺼진다”고 한 발언을 겨냥해, 촛불이 들불로 번지는 것을 형상화했다.



류정호 작가, '근본이 흔들리면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종혁 작가의 ‘그래도 나는 부자다“는 난장판인 시국에 버텨선 밝은 가족의 모습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제기하였으며,

삽자루를 탁자의 다리와 받침으로 활용한 목공예가 류정호의 작품은 ’근본이 흔들리면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김진열 작 '집단 우울증'



길종갑 작가의 ’촛불집회‘는 광화문 집회현장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였으며,

김진열의 ’집단우울증‘은 김을 붙여 진태란 글만 표기하기도 하고, 새 열 마리를 그려 ’씹새들이 좆이로구나‘며 국정농단을 힐난했다.


김용철 작 '코리안 나이트'


김용철 작가의 ‘코리안 나이트’는 권력을 감싸고 있는 돈과 잡신들로 현 시국을 비판하였으며,

사진가 조문호는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과 ‘시국 몸짓’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조문호 작 '분노의 몸짓'



김대영 작가의 ’농단-자멸‘은 뒤엉킨 시국현실을 추상적으로 암시하였으며,

침몰하는 세월호의 아픔을 의혹으로 표현한 서숙희의 ’안면수심‘은 마음이 아팠다.



김대영 작 '농단-자멸'



이 밖에도 신대엽, 이광택, 백중기, 전형근, 박은경, 박종혁 작가 등 16명이 발표한 40여점의 작품들이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신랄하게 비판, 조롱하고 있었다.



서숙희작 '안면수심'


그리고 80년대 시국 작품들도 몇 점 선보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광혁 작 '하야기원탑'외



황재형 작가는 “비선에 의한 국정농단, 국정교과서의 파행,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 작성,

독점적 소수가 추진한 문화융성 등 현 시국이 우리를 그냥 있지 않게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암울한 시대에 / 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인가? / 그 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이다 /

암울한 시대에 대해’ 혁명을 노래한 독일 시인 브레히트의 시 ‘모토’를 떠올리는 시국 특별전이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2월2일 / 조문호기자/사진가



황재형작 '알혼섬' 2016 캔버스에 연필 162.2X112.1cm



‘춘천시문화재단’에서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강원 춘천까지-가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지난13일에는 역사학자 주재혁의 ‘바이칼과 아리랑’에 대한 강연도 있었다.
“바이칼호반 원주민 부리아드 코리족은 코리안(고려인)이란 종족이름을 가졌다, 이태리인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바이칼호반 코리족들은 ‘아리랑’가락이 본래 당신네 가락이 아니고 우리 가락이었다고 말했다”며 우리 민족의 뿌리였음을 강조했다.



길종갑작 '바이칼 답사기'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개막식에는 참여작가인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황재형, 황효창씨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최형순, 춘천문화재단 상임이사 이치호, 화가 함 섭, 장경호, 노용춘, 전강호, 도예가 신동여, 사진가 정영신, 하재은, 최용주, 목공예가 류정호, 시나리오작가 최근모 등 100여명이 참석했으나, 대개 모르는 분이 많았다.



권용택작 '바이칼-오대산천까지' 2016 캔버스에 아크릴, 먹 324X260.6



이 전시는 바이칼 현장답사를 해가며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으려는 기획 의도는 좋았으나, 준비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 원형의 동질성이 작품 여기 저기 드러나 있고, 작품 곳곳에 선조들의 영혼이 떠도 는 것 같았다. 



이재삼작 '달빛' 2016 charcoal on canvas 80x194cm


 
이재삼의 작품 ‘달빛’은 ‘저 알혼섬이 영혼의 섬은 아닐까?’하는 몽환적 분위기로 끌어들였다. 물안개의 미묘한 질감 또한 이재삼의 목탄화가 아니면 아무도 살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황재형 역시 목탄으로 그린 작품이 있었다. 높은 절벽아래 이는 물빛을 담은 알혼섬’이란 작품은 대자연의 위엄 속에 마치 선조들의 혼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권용택의 작품 ‘바이칼-오대산천까지’는 바이칼에서 시작된 우리민족의 이동경로가 느껴지고 있었다. 수원화성과 오대산, 바이칼에 이르는 대서사가 한 프레임에 나누어지고 있었지만, 이질감 없는 동질성으로 응축되었다.
 


황효창작 '바이칼의 혼'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cm



인형을 통해 우리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황효창의 ‘바이칼의 혼’은 나무에 얼 킨 오방색 천으로 우리 무속신앙의 원형을 보여주었으며, 길종갑의 작품 ‘바이칼 답사기’의 강렬한 원색적 터치는, 알혼 섬이 맑고 깊은 생동의 기운으로 넘치게 했다. 김대영의 ‘알혼섬의 사랑바위’는 그의 방식대로 오방색과 왕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바이칼을 시원의 의미를 가진 민족의 양수로 표현하고 있었다. 김용철의 ‘바이칼의 노래’는 아리랑이라는 음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동질성을 나타냈다.



김용철작 '바이칼의 노래' 2016 한지위의 아크릴릭 250x90cm



  서숙희작 '바이칼 가는 길-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채색 117x73cm



또한 서숙희의 ‘샤먼을 부르는 바람’이라는 작품은 바이칼에 이는 바람을 그렸는데, 그 시적 분위기가 독창적이었다. 신대엽의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이란 작품은 옛 풍속도나 신선도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묘미가 있었다. 우리민족 고유의 가락 잡힌 낙천성이 깃들어 있었다. 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사람에서 찾았기에,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남자의 몸을 바이칼 호수 변에 세우기도 했다. 




 신대엽작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 2016 리넨에 먹과 채색 210x400cm



전시장을 메운 작품들은 텅 빈 가슴을 어루만지는 한 구절의 시, 내면에 깃든 잠재력을 일깨우는 음악, 새로운 힘이 솟게 하는 춤사위 같이 감상자들을 피안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김대영작 '알혼섬의 사랑바위'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130,3cm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최형순은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작가들이 바이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담은 아리랑으로 펼치는 우리민족의 이야기가 다채롭다. 강원도 작가들의 전국적인 유명세도 상상이상이다. 불의에 기웃대지 않는 작가적 자존심도 그 크기에 못지않다. 살아있는 땅의 역사에 살을 부비며 그 안에 깊숙이 배어있던 모습들도 그대로 들추어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려하는 진실의 태도를 거기서 배운다. 미래를 맞는 준비도 거기서 가능하다. 이들이 펼치는 그 미술 자체가 겨레의 노래이며 아리랑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글 / 조문호



조문호 작 '바이칼에서 길종갑' 2016 잉크젯프린트 110x 210cm








 


황재형작 '칸차르다흐 2016 캔버스에 유채 162.2x112.1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춘천까지-


최형순 / 미술평론가







황효창



바이칼의 혼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200x200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 광화문에서 2016 캔버스에 유채 100x100




길종갑


바이칼 답사기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화전 2014-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7점)


화악산기 2015-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5





김대영



알혼섬의 사랑바위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 x 130.3


숲길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 97


상춘의 봉의산길 2016 캔버스 위 아크릴 193.9x 97




김용철



바이칼의 노래 2016 한지 위의 아크릴릭 250x90







조문호



길종갑 2016 바이칼 110x210


김의권 1991 울산 언양 110x210


전강호 2008 양주 송추 110x210





권용택



바이칼-오대산천까지 캔버스에 아크릴, 먹 324.4x 260.6


오대천의 수달 2011 캔버스에 아크릴 162x 130


산불 2000 캔버스에 아크릴  184x 73





황재형


알혼섬 2016 캔버스에 연필 162.2x 112.1


역사는 선비와 함께 흐른다 2014,7 캔버스에 목탄과 짚신 259,1x 162,1


아! 이르쿠츠크 2016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97x162.2 /  33,4x53





이재삼



달빛- moonscape- 2016 charcoal on canvas 80x 194


달빛- moonscape- 2013 charcoal on canvas 227x 543


달빛- moonscape- 2009 charcoal on canvas 259x 582






서숙희



바이칼 가는 길 - 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17x 73


바이칼 가는 길 - 샤먼을 부르는 바람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62x 97


반짝이는 나무 2016 리넨에 아크릴 채색 116x 73





신대엽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모든 것인 2016 리넨에 먹과 채색 210x 400

 번개시장 2007 순지에 먹과 엷은 색 200x 250


백작도 2015 순지에 먹과 엷은 색 162x 127







'춘천시문화재단'이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바이칼에서 강원춘천까지-전이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립니다.


시작되는 13일 오후1시부터 역사학자 주재혁씨의 ‘바이칼과 아리랑’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있고, 개막식은 오후3시에  있습니다.


참여작가는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10명입니다.


많은 관심과 관람을 바랍니다.

사진은 지난12일 전시 준비를 하는 참여 작가들과 관계자들의 모습입니다.



























서숙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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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집과밤_린넨에 아크릴릭_73x53cm



서숙희의 집과 밤그림전 개막식이 지난 9일 오후5, 통의동 류가헌에서 있었다.

그 전시장은 여러차례 가보아, 위치엔 신경 쓰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나 경복궁역에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얼마나 헤매었는지,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어렵사리 찾았더니, 작가 서숙희, 신대엽 부부는 물론 황효창, 길종갑, 김대영, 최형순, 이수환씨등

춘천의 화가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다. 뒤늦게 사진을 찍었으나 그의 설거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며, 뭔가 아련한 몽환적 기억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인적 드문 곳에 자리 잡은 구멍가게나 집들의 흔적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분명 오래 전 만났던 풍경이었다.

 

낮과 밤으로 나뉘어 그려진 집을 비롯해 물이나 풀, 창고 등의 형체가 희미한 안개나 어둠에 묻혀있었다.

선묘 형태로 형체를 흐릿하게 드러내며, 색채 깊숙한 곳에 묻힌 이담의 작품은 언뜻 추상화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그림들은 마치 슬픈 상처를 가린 듯, 아늑한 꿈 속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서숙희씨는 왜 그토록 집에 집착했을까?

인간의 삶이란 모든 것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집에서 비롯되지만, 또 집에서 매일같이 밤을 맞이한다.

집은 작가의 많은 기억들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였기에 집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작품에는 변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도사리고 있었다.

오직 서숙희 만이 회억하며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되었다.

작품은 작가 스스로의 위안이기도 했지만,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도 위안을 안겨주었다.

    


2015 밤길_린네에 아크릴릭_53x33cm


 2016  여름밤_리넨에 아크릴채색_73x61cm


2015 숲속의 집-밤_린넨에 아크릴릭_91x61cm


2016 밤_순지에 아크릴채색_53x34cm


2016 망초꽃핀 운동장_리넨에 아크릴채색_73x60cm


2015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_린넨에 아크릴릭_52x52cm



메밀꽃 필 무렵이란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내 머리 속에 남은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술을 마시다, 다시 전시장에 들려 찬찬히 그림들을 둘러보다 무릎을 친 것이다.

맞다! 고등학생 시절, 버스 차장 때문에 본 풍경이었네

갑자기 아득한 추억 속의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그 추억은 반세기 전, 고등학교 다닐 무렵, 집에 가는 시외버스 탔을 때 일이었다.

그 날 처음 본 버스 차장의 매력에 끌려, 우리 동네를 지나치고 마냥 따라 간 것이다.

종점은 표충사인접 마을이었는데, 도착하니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소녀는 숙소로 사라져버렸는데, 이미 돌아 갈 차도 끊겨버렸다,

 

희미하게 길과 집들이 보였지만, 내가 안착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릴없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본 희미한 풍경들이, 바로 서숙희의 그림 속에 똬리 틀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산길을 지나치던 자동차의 희미한 불빛도 보았고, 들어가 쉴 수 없는 집이나 창고도 보였고,

여기 저기 파수꾼처럼 버틴 희미한 나무도 보았던 것이다.

 

길섶에 앉아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소녀 생각에 밤을 꼬빡 지센 것이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었더라면,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녘의 풍경을 바라보며 돌아 왔던, 무모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결론적으로 서숙희씨가 말하고자 하는 그림 이야기는,

잊혀져가는 그리움의 기억을 찾아내고, 슬픈 상처를 다독이며 서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류가헌’(02-720-2010)에서 열리는 이담 서숙희 그림전은 24일까지 이어진다.

이 살랑대는 봄날, 그 아련한 그리움의 풍경  찾아 가보자.

 

사진,/ 조문호





































































 

 

 

 

 

 

 

 

 


이담 서숙희_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_리넨에 아크릴채색_52×52cm_2015



춘천에서 활동하는 이담 서숙희씨의 ‘집과 밤’ 네 번째 개인전이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류가헌’에서 열린다.

낮과 밤을 나눈 그의 그림들은 일련의 그림 솜씨나 말 솜씨로,

보는 사람의 아늑한 감성을 건드리며, 말 걸어 오고 있었다.

보일락 말락  산길을 지나는 자동차의 자취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리게 했고,

안개에 가린 듯한 희뿌연 그림들은 마음속에 가라앉은 사무친 그리움을 들춰냈다.

조근 조근 속삭이는 말들은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듯, 긴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 하창수씨가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이 조용히 읊조려준다."했듯이

“내 그림이 다른 사람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뜻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  
그 아늑하고 그리운 환몽(幻夢)의 세계로 여러분을 모신다.
개막식은 오는 19일 오후5시, ‘류가헌’(02-720-2010)이다.

글 / 조문호




이담 서숙희_숲속의 집-낮_리넨에 아크릴채색_91×61cm_2015

이담 서숙희_숲속의 집-밤_리넨에 아크릴채색_91×61cm_2015

이담 서숙희_집과밤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환몽(幻夢)처럼,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리운...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 그림의 제목이다. 제목이 아니었으면, 저 옛날 매화초옥도에 그려진 초가집처럼 은자연한 풍경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구멍가게'이니 의당 손님이 나들어야 할 텐데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니 사람의 왕래가 적고 가게의 목적인 장사가 잘 될 턱이 없다. 그런데도 구멍가게 혹은 집을 둘러싼 초목은 푸르고, 나무는 점점이 흰 꽃을 피우고 의자들은 비어있으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내다'에서 느껴지는 자의성처럼, 마치 일부러 그렇게 인적 드문 곳에 가게를 낸 것처럼도 여겨진다. 가게라는 세상과의 소통창구를 열어둔 채로, 자연 속에 홀로 의연하다. 마치 그림이 안개 같은 입자로 "그래도 괜찮아."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다.

 

'산을 지나가는 자동차' 또 다른 그림의 제목이다. 역시 제목이 아니었으면, 비구상 추상화라고 여겼을 법한 그림이다. 그런데 어둔 밤중에 홀로 서서 막연한 기다림으로 저 멀리 '산을 지나가는 자동차'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별빛 같은 점으로 나타난 자동차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어떻게 선으로 사라져가는 지를. 그 불빛에 어떻게 산이 능선을 내보이며 제 형체를 잠깐 드러냈다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 묻히는 지를. 한 순간 설렘으로 환해진 마음이 어떻게 가뭇없이 그리움으로 어둑해지는 지를... 산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지만, 그 설렘과 그리움 사이의 어느 지점을 자동차는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림을 보는 동안 "나의 어둠을 당신도 아는구나."라고 속엣 말로 되뇌게 된다.

 

낮과 밤으로 나뉘어 그려진 '숲 속의 집'을 비롯해 '물과 풀' '여량철교' 등의 제목을 한 다른 그림들도, 같은 화법(畫法) 또는 화법(話法)으로 말을 걸어온다. 말을 걸어옴으로써,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게 한다.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 서숙희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나를 위로하기 위한 노력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또 이 그림들에 대해 소설가 하창수는 이렇게 썼다.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이것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히 읊조려준다." 그리고 덧붙인다. "짙고 깊게 화폭을 파고들어간 안개는 강의 흐름을 감추고, 자잘하게 절개한 상처와도 같은 무수한 세필자국을 감추고, 아득한 환몽(幻夢)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글의 결미처럼, 화가 서숙희의 네 번째 개인전인 집과 밤의 그림들은,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리고 그립다. 류가헌

  


이담 서숙희_여량철교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이담 서숙희_벚꽃놀이_리넨에 아크릴채색_73×53cm_2016

이담 서숙희_망초꽃핀운동장_리넨에 아크릴채색_73×60cm_2016

이담 서숙희_산을 지나가는 자동차_리넨에 아크릴채색_117×73cm_2016

이담 서숙희_산을 지나가는 자동차_순지에 아크릴채색_120×83cm_2015




그림이라는 이름의 자아, 혹은 위안과 꿈 - 이담 서숙희의 2016년 전시회에 부쳐


잭슨 폴락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한 미술담당 기자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 기자는 시니컬하지만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지. 그래서 훌륭한 화가는 그 자신을 그린다고. 그런데……" 기자의 말을 가로챈 친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니까 자넨 폴락의 그림에서 그의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군. 하기야 이런 추상화에서 화가의 자아를 발견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하고 아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어진 기자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니, 폴락의 자아가 이렇게나 깊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중이야."

 

서숙희의 2016년 전시회 그림들 앞에서 이 일화를 떠올린 건 형체를 색채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거나 두터운 색채의 안개에 숨긴 채 보일락 말락 드러내는 그녀의 그림이 폴락의 추상화들과 겹쳐진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청회색 가스층에서 발견한 화가의 자아에 나 또한 "이렇게나 깊었나?"하고 놀랐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본 것이 그녀의 자아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그렇듯, 온전히 감상자에 의한, 감상자를 위한, 감상자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의 그림들에서 본 게 그녀의 자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림에서 발견되는 자아란 무엇이며, 그림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지며, 훌륭한 화가가 그 자신을 그린다는 건 무엇이며, 그 자신을 그리는 일은 또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이 짧고 얕은 나는 한 가지 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답은 "오직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오직 그만이 그릴 수 있으므로 '자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고, 그래서 그 그림이 가치 있는 그림인 것이다. 요컨대, 서숙희의 그림은 오직 그녀만이 그리며, 그녀만이 그릴 수 있다. 어디에서도 나는 그녀의 그림과 같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 '개성'이라는 단어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그녀의 독특과 유별은 무너뜨릴 수 없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서숙희의 지난 전시회들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들려준 감상의 변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위안'이었다. 그녀의 그림들에서 받게 되는 위안은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붓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독특과 유별이 화가 서숙희가 가질 만한 자부심이라면, 감상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받아가는 위안은 인간 서숙희에게 가져다주는 소중한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선물은 10년 전인 2006년의 전시회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에서 듬뿍 받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이담의 그림에서 몇 줄의 시를 읽고, 어떤 이는 조곤조곤 긴 사설을 듣는다. 어떤 이는 그녀의 그림 앞에서 쓸쓸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어떤 이는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이 상반된 반응이야말로 서숙희라는 화가의 매력이거니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게 없는 그녀 특유의 '머뭇거림'이 그 이유다. 그런 그녀야말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 않을까."

 

위안은 대상과 감상자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을 때 얻게 된다. 그래서 우러러 보아야 하는 존경과 다르다. 위치를 달리하면 위압이 되는 존경은 그래서 위안을 주지 못한다. 태생부터 '높은 곳'과는 거리가 먼 서숙희에게 위안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의 머뭇거리는 발길은 그녀의 손을 잡게 하고, 대상에 대한 그녀의 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며, 내면을 향한 그녀의 침잠은 우리를 서두르지 않게 만든다.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이것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히 읊조려준다.

 

서숙희의 그림들은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과도 같다. 2006년과 2011, 두 번의 전시회에서 그녀의 그림들이 보여준 '변화'는 보기에 참 좋았다. 정통 문인화가 한 굽이를 흐르며 담묵과 순정한 선묘의 '사라지는 것들'로 바뀌고, 선묘가 옅은 안개에 가려지며 침잠의 여울로 건너간 것이 다섯 해 전까지의 일이다. 이제 2016년으로 건너온 그녀의 강은 또 한 번의 '다름'을 보여준다. 짙고 깊게 화폭을 파고들어간 안개는 강의 흐름을 감추고, 자잘하게 절개한 상처와도 같은 무수한 세필자국을 감추고, 아득한 환몽(幻夢)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그녀가 오래, 그녀만의 그림으로, 늘 변화를 꿈꾸며 우리 곁에 있기를 빈다.


소설가 / 하창수


이담 서숙희의 ‘집과 밤’ 네 번째 개인전이 지난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낮과 밤을 나눈 그의 그림들은 일련의 그림 솜씨나 말솜씨로, 보는 사람의 아늑한 감성을 건드리며, 말 걸어오고 있다.


낮과 밤으로 나뉘어 그려진 집을 비롯해 물이나 풀, 창고 등의 형체가 희미한 안개나 어둠에 묻혀있다. 선묘 형태로 형체를 흐릿하게 드러내며, 색채 깊숙한 곳에 묻은 이담의 작품은 언뜻 추상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마치 슬픈 상처를 가린 듯, 아늑한 꿈속으로 이끌어 준다.



선 2015_idam_차가 잘 다니지 않은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_린넨...


보일락 말락  산길을 지나는 자동차의 자취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리게 했고, 안개에 가린 듯한 희뿌연 그림들은 마음속에 가라앉은 사무친 그리움을 들춰냈다. 조근 조근 속삭이는 말들이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듯, 긴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서숙희씨는 왜 그토록 집에 집착했을까?
인간의 삶이란 모든 것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집에서 비롯되지만, 또 집에서 매일같이 밤을 맞이한다.

 


선2016_idam_망초꽃핀 운동장_린넨에 아크릴채색 73x60



집은 작가의 많은 기억들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였기에 집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작품에는 변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도사리고 있었다.
오직 서숙희 만이 회억하며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되었다.


작품은 작가 스스로의 위안이기도 했지만,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도 위안을 안겨주었다.
서숙희씨가 말하고자 하는 그림 이야기는, 잊혀져가는 그리움의 기억을 찾아내고,
슬픈 상처를 다독이며 서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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