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벽과 나 사이’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몰려 나왔을까?




▲윤길중,석인1 경기도 수원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윤길중,석인2 경기도 시흥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윤길중,석인3 경기도 용인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윤길중,석인4 경기도 용인



그렇지만 그 형상을 새겨 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윤길중,석인시리즈1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윤길중,석인시리즈2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끔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1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2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에 걸렸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사진=조문호)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지난 4일 어렵사리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했다.
보름 전에 설렁탕 사 주겠다며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늦은 것이다.

마침, 정선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캐 왔기에 약수동을 찾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잘 걷질 못한다는 것이다.
좋아하시는 설렁탕집도 멀어서 못 간다고 했다.

먼저 ‘한미미술관’에서 열리는 황규태선생 전시에 못 가봐 걱정이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황선생과의 각별했던 사연들을 줄줄이 풀었다. 미국으로 경향신문 특파원1호로 가게 된 동기,
황선생께서 LA 동아일보지사를 설립할 때 만류했던 일, 대구 차용부씨가 미국 공부하러 갈 때, 부탁했던 일 등

그 오래된 이야기들을 소설책 읽듯 슬슬 풀어냈다. 아흔 여섯의 연세를 무색케 했다.

그 다음엔 스튜디오 조명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붙었다.
동아일보사에서 여성지를 복간할 무렵, 일본의 고단샤출판사를 들렸는데,
그 곳의 스튜디오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텅스텐 조명을 사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새로 나온 스트로보에 홀딱 반한 것이다.

그 때부터 동아일보 김상만회장을 설득시켜 장비를 구입하고,

충무로 광고사진 스튜디오에서도 모두 구입하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보급했는지 코맷트 스트로보 회사에서 선생님을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그 덕으로 열악했던, 신구전문대와 돈보스꼬 대학 사진과에는 스트로보를 그냥 보냈다는 것이다.

“아이구 선샘 예! 배고파 죽겠습니더. 고마 밥 묵고 이야기 하입시더.”
다리가 아파 멀리는 못가시고, 가까운 곳의 된장끼게에 비벼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나왔을까?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 조문호사진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전시장 풍경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전시장 풍경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석인 시리즈



그렇지만 그 형상을 세겨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석인 시리즈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석인1 / 경기도 시흥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석인3 / 경기도 용인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석인2 / 경기도 수원



가끔은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품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석인4 / 경기도 용인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을 얻었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전시된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글 / 조문호


































 




지난 달, 임재천씨 전시에서 작당한 일이 하나 있다.
인천의 김보섭씨가 민어회가 맛있는 철이라며, 한 번 놀러오라 했다.
모두들 가겠다고 했으나, 술자리에서 오간 말이라 새겨듣지는 않았다.
그런데, 4일 오후5시, 인천역에서 만나자는 이규상씨의 메시지가 떴다.

그 날은 이명동선생 댁에서 시간을 보내 허급지급 달려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출 수 있어 한 숨 놓았는데,
‘차이나타운’방향으로 나가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김보섭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안미숙씨 내외, 엄상빈,

김 헌, 남 준, 이영욱씨 등 일곱 명이 나와 있었다.

다들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김보섭씨와 남 준씨는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
무더운 날씨라 땀이 줄줄 흘렀으나, 역전의 용사다웠다.
김보섭씨의 안내로 변모하는 차이나타운을 거쳐,
김보섭씨 ‘바다사진관’촬영 현장이었던 만석부두로 옮겨갔다. 

찍을 때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더 친숙하게 닥아 왔다.

윗도리를 벗은 채 당당하게 포즈를 취한 그 어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 인간과 연결된 구체적인 장소성이 주는 의미가 현장감을 더했다.

뜻밖에도 김보섭씨의 ‘바다사진관’사진을 인근에서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그 동네에 ‘우리미술관’이란 조그만 갤러리가 있었는데, 마침 초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사실, 사진전은 사람들이 많은 서울의 큰 전시장에서 하는 것 보다,
사진의 배경이 되어준 동네전이 사진을 찍은 작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느낀다.
나도 ‘두메산골사람’전시를 그 사람들이 사는 분교를 돌며 한 적이 있기에, 
김보섭씨의 자부심이 점쳐졌다.

여태껏 인천을 여러 차례 오갔지만, 만석부두 후미진 곳을 골고루 돌아 본 적도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현장을 기록해 온 김보섭씨의 안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장답사에서 재 인식된 것은 김보섭씨의 인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었다.
긴 세월 인천의 역사적 현장들을 기록하며, 그만큼 껴안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이런 사람에 감사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 가까이 돌아다니다, 모두들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보섭씨는 식당 집 할머니가 인간문화재급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그 큰 민어를 여유롭게 다루는 걸 보니, 일단 보통 솜씨는 아니었다.
드디어 민어가 상에 올랐는데, 살점을 듬성듬성 잘라 푸짐했다.
입에 들어가니 살살 녹는데, 오죽 맛있었으면, 엄상빈씨는 집사람 걱정을 해댔다.
집에 남겨 둔 마나님 생각에 차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같이 오기로 했지만, 허리를 다쳐 못 왔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끓인 서더리탕 안주에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으나, 술을 자제해야 했다.
술 취해 오버해 대면, 아내가 난처 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누라 눈치도 봐가며, 알아서 기야 살아남는다.
갈 길도 먼데, 부루퉁해 있으면 입장 곤란하거던...

어쨌든, ‘바다사진관’ 답사도 답사지만, 맛있게 먹고,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성남훈의 '파리' 빈티지 시리즈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에서...SPACE22, 23일까지




꽁꽁 얼어붙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사진이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SPACE22’가 시도한 아트마켓 프로젝트 '셀렉션 앤 컬렉션(Selection &Collection)에서다.


스페이스22가 선정한 작품을 일반인들이 소장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사진시장의 숨통을 튀워 전업 작가들을 지원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집시’ 10장의 소장용 시리즈(뮤지움 퀄리티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 프린트 수작업)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Selection &collection'프로젝트 1호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의 사진이 선정되었는데, 앞으로도 새로운 작가들을 선정해 이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된다고 한다.


지난 3일,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처음 열린 성남훈의 파리 빈티지 시리즈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은

개막 첫 날부터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며 사진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전시에 투자한 전액이 환수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집시’ 10장의 소장용 시리즈(뮤지움 퀄리티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 프린트 수작업)



'셀렉션 앤 컬렉션'에서 판매되는 모든 작품들은 미술관에 소장되는 수준의 화이버베이스 인화지에

수작업으로 프린트된 사진인데다, 거품을 걷어낸 가격으로 판매한 것이 주효했다.

전시작을 갤러리 수익이 포함되지 않은 특별가로 판매한 것은 비영리 대안공간 ‘스페이스 22’의

아트마켓 프로젝트였기에 가능했다.



▲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된 사진들이 좋았다는 점이다.

드레스를 휘날리며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집시소녀나 바이올린 선율로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한 집시사진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규격별로 다양화 된, 10장으로 장정된 소장용 시리즈도 인기였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성남훈 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파리'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아련한 시절의 파리 사진학교 첫 과제부터 리베라시옹 신문에 20일 간 연재한 파리 20개 구의 이방인의 시선,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옴직한 아이들 사진 등, 당시의 40여장도 빈티지 프린트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 공개되는 ‘파리’ 빈티지 시리즈 _ 파리 사진학교 이카르 포토 재학시절 과제 사진, 1990년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은 잘 알려진 사진가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보도사진 콘테스트인 '월드 프레스 포토'에서 두 번이나 수상했고,

프랑스 파리 사진대학인 이카르 포토(Icart Photo)에 재학 중에 '집시' 사진으로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르 살롱'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1999년에는 인도네시아 민주화과정을 취재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월드프레스포토에서 '일상뉴스 부문'에 선정됐고, 2009년에는 옛 동티벳 캄지역 비구니승려의 포트레이트인 '연화지정' 시리즈로 '포트레이트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 있는 수상작들이 모두 전시된다는 것이다.



▲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국내외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코소보,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발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지역, 소외지역을 다녔으며,

아직까지 유민들의 부유하는 삶을 기록하는 중이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성남훈은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리, 아이, 집시들의 사진은 기억의 서쪽이다.

불안한 20대의 나를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자 얼어붙은 나를 깨트려준 작은 바늘 같은 것이다."


‘미진프라자’의 후원으로 기획된 성남훈의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은 오는 23일까지 이어진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작가의 해설로 듣는 전시는 8월 11일(목) 6시부터 8시까지 SPACE22 세미나룸에서 진행된다.

(SPACE22 / 02-3469-0822)



▲개막식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성남훈씨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오는 3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문진우, '비정도시'사진집.(눈빛출판사, 12,000원)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의 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거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문진우, 1985 부산 해운대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 건방이 들어 인간성 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문진우, 1984 부산 충무동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태껏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문진우, 1987 부산 기장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문진우,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나게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산복도로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 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하야리아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가 문진우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의 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 조문호 사진가



사진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사진의 꽃이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최근 들어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연 이어 볼만한 다큐멘터리 사진전들이 열리고 있다.

권철의 ‘독대’나 양승우의 ‘청춘길일’ 등 둘 다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한 사진가들이다.

특히 조폭들의 삶을 다룬 양승우의 ‘청춘길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권철은 제주에서 풀빵장사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양승우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조직폭력’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뒤늦게 사진학과 후배였던 아내를 맞으며 노숙자 신세는 면했다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말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에선 일용직 자리마저 쉽지 않아 일본에 눌러 있다고 했다.

건축현장 노가다로 일하며 사진작업을 잇는 그의 생활은 눈물겹다.

이번 전시 뒤풀이에서 눈물을 훔친, 그 아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실을 매개로 하는 다큐작업을 그렇게 띄엄띄엄 찍어 어떻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다큐사진가들은 대학교 문전이나 기웃거리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한다.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진가들은 행여 사진으로 돈 생길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려 아귀다툼이다.

반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 온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숱한 빚을 안고 살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내년이 ‘87민주항행’ 30주년이라 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사겠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민주항쟁을 기록한 세 명의 사진을 구입한다고 했다.

그 쪽에서 원하는 오십여 장의 이미지를 보내고는 꿈에 부풀었다.

쓰러져 가는 정선집도 수리하고, 잘 하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서다.

그런데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마지막 결재라인에서 ‘87민주항쟁’ 자체가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이유는 아닌지...


사실, 이것이 정부에서 기록 사진가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혜택이기도 하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는 것이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서는 한 가닥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그 구멍이 바늘구멍보다 작아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현실이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술인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작업실에 앉아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역사박물관의 사진 소장 율을 대폭 확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시스템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다큐멘터리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여유가 있는 분은 사진 한 점이라도 소장해 주고, 사는 게 그렇고 그런 분들은 사진집이라도 한 권씩 구입해주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다큐사진 시리즈는 한 권에 12,000원이라 별 부담도 없지만,

유익한 사진들이 실려 있어 구입 가치가 높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진실이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가려진 세상의 위장막을 걷어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요한 것이다.

다큐 사진가가 살아남아야 세상이 밝아진다.





덥지근한 장마철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전이 열렸다.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의 청춘길일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숱한 전시를 하였건만, 고국에서는 처음 있는 전시다.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해, 아내가 쉬는 날을 택해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여기 저기 볼일이 많아 차를 끌고 나왔는데, 정차 중에 브레이크가 밀려 경미한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간신히 처리하고 전시장에 들렸더니, 양승우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남진 관장도 있었다.



몇 일전,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들을 보아 기대는 했으나, 전시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전시장 가득 돈 냄새와 여자냄새, 마약 같은 찐득한 냄새들이 진동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듯, 내면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오랜만에 사진다운 사진을 보았다.





시를 보고 말한 미술학자 이태호 교수의 말이 적확했다.
고급스런 하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질스런 고급문화를 본다.

양승우의 사진을 보면 그동안 우리 다큐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참으로 소심하고

착하게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본 작가의 첫인상은 폭력배처럼 우락부락한 것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겸손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력을 읽었을 뿐이다.






조직 폭력배로 삶을 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친구가 사진 찍는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내세우는 사회에 감춰진 이면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에 앞서,

사진가로서 죽은 친구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사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스스로에게 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명분 있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양승우 사진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돈 없는 죄와 못 배운 죄를 짊어 진

사회적 약자에 다름 아니며,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찐득한 모습 뒤에 인간적인 애잔함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양승우의 사진이 껄끄럽거나, 그 사진 속의 사람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 그렇지, 어느 정도의 양면성은 다 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섹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앞서 언급했지만, 충무로 역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차가 밀려 앞 차를 받은 일이 있었다.

경미한 충격이지만 내려 보니, 차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인사사고로 접수하라는 것이다.

영업용 기사야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지내며 일당을 받아 낼 욕심인지 모르지만,

뒷자리에 앉은 보험회사원까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예전에는 목이라도 움켜지며 아픈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의리 하나로 뭉쳐 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양승우는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에 전전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가부키초의 야쿠자를 시작으로 고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곤타씨 등 서너 개의 테마를 동시에 찍었다.


20여 년 동안 열 번 이상의 사진전과 네 권의 사진집을 냈고, 열 번 이상의 사진상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의 인 비트윈 아트 갤러리소속작가지만,

여전히 일용직 노무자로 일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참한 현실이다.






언급한 이력이나 유명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진들이 주변을 오가며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함께 즐기며 찍지 않고는 이렇게 강력한 소구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교도소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각오로 온 몸을 바쳐 즐기는 사진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전시된 사진들은 옛 친구들과 놀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폭집단의 실상이지만, 일본의 야꾸사들을 찍은 사진집도 펴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조직폭력배 친구들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달랐다.

찍으려는 작가의 진정성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주변의 누군가에 카메라를 쥐어 주고는 자신이 사진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양승우의 사진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가 셔터를 눌렀나 보다 함께 교감하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진가가 찍어 온 야쿠샤, 노숙자, 동성애자 사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듯 친밀하다.

어디가 진실이고 허구인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신이 당하는 현실 속의 분노와 욕망의 찌꺼기까지 과감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밑바닥 인생의 솔직하고 과감한 접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안겨 준다.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을 담아낸 이 자전적 기록들은 누가 뭐래도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사진가이건만, 살아가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에 들어 와 살고 싶지만,

한국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들어,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산단다.

그 것도 몇 년 동안 길거리에 노숙하며 살았는데, 사진과 재학 때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전시 개막식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고집스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오신 여성분들이 볼 때는 제 사진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진이냐?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싸울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답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27양승우사진집 청춘길일이 나왔다,
가격은 12,000원이다.


글 / 조문호








좌로부터 필자 조문호, 양승우 부부, 뒷줄 김남진 브레송관장과 장터사진가 정영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