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씨 부부가 녹번동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두 내외분을 만나 ‘할머니 추어탕’에서 반주를 곁들인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따라 소주도 입에 짝짝 달라붙었지만, 대화마저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라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로 10여 년 전 노인자씨가 인사동 골목에 차렸던 술집, ‘작은 뜨락’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일 년 남짓에 문 닫고 말았지만, 그 곳은 인사동 풍류객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추억의 대폿집이었다.

‘실비집’을 비롯하여 ‘시인통신’, ‘하가’, ‘누님칼국수’, ‘레떼’, ‘평화만들기’, ‘귀천’, ‘수희제’ 등의

사라진 업소들이 인사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작은 뜨락’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낸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원래 건물 옆의 쓸모없는 골목에 천막으로 위를 가리고, 건물 벽에 좁은 선반 식 테이블을 붙여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서양식으로는 스탠드바이고 우리식으로는 그냥 포장마차다.

폭이 너무 좁아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만 놓았는데,

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려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벽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낙서나 그림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볼거리를 더했다. 

 

기억자로 된 작은 목로주점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내 가깝게 되어버리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술집이었다.

그 곳으로 고양이가 생선냄새 맡듯 인사동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툇마루’ 바깥주인이었던 박중식시인, 전설의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관훈미술관장으로 일했던 서양화가 장경호씨,

‘작가폐업’이란 카페를 운영하다 풍기로 떠나버린 소설가 배평모씨, 서양화가 김진두씨와 그에게 그림 배웠던 헨리 윤,

인사동에 목맨 김명성시인,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막사발 전도사 김용문씨,

천연염색 한다며 술에 염색된 이명선씨 등 인사동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사동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대폿집을 차린 노인자씨는 술장사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를 처음 해본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큰스님을 모신 포교사 노릇으로 세계 곳 곳을 돌아다녔다는데,

봉사활동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굶주린 원주민들을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단다.

오히려 돈 버는 일보다 쓰는데 이력이 붙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술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손님이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술꾼들의 취향을 몰라 손님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리석 하게 장사를 하니 인사동 예술가들이 ‘작은 뜨락’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기도 했고,

원가가 적게 드는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려 ‘작은 뜨락’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토록 정들었던 ‘작은 뜨락’이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모두들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취객들의 주벽도 그리 심하지않아, 폐업한 동기가 늘 궁금했다.

아마 단골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다. 보기 싫어도 차마 말 못하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이 세상 어느 곳에 '작은 뜨락'처럼 정겨운 목로주점이 다시 생겨 날 수 있을까?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조그만 바구니 하나가 손님 스스로 먹은 만큼만 내라고 기다려주는

이런 촌스러운 술집이 말이다.

예술을 알고 인사동 낭만을 체득한 사람들도, 사람보다는 돈을 더 반기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사동의 낭만과 멋도 그대로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처럼 넘실댄다면 그건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 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은 채 건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의 낭만과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들어 부쩍 ‘작은 뜨락’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술 취한 도공 김용문씨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도 듣고싶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6일 오후3시부터 ‘아라아트’지하1층 커피숍에서 김명성씨 석방을 원하는 인사동 예술가들의 탄원서 서명 작업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민 영, 무세중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인식, 최백호, 기국서, 김신용, 배평모, 조문호, 정영신씨가 직접 탄원서를 작성해 왔고, 강 민 선생님을 비롯하여 조경석, 이명희, 무나미, 정기범, 최혁배, 이행자, 강선화, 김상현, 김완기, 이경숙, 전인경, 허미자, 황예숙, 김희갑, 노광래, 편근희, 윤재문, 전인미씨 등 많은 사람들의 서명이 이어졌다.

서명하러 직접 인사동으로 나 온 분들도 많았지만, 카톡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가르쳐 주어 위임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 김가배씨와 ‘아리랑 명품관’ 유재만 대표는 서명하러 왔다 성금을 내 놓기도 했다.
서명 하루 만에 무려 240여명이 탄원서에 서명해, 빠른 시일 안에 담당 변호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의 김명성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본 탄원서 서명에 동참해 주신 많은 분들께 거듭 감사 말씀드린다.

 

 

 

 

 

 

 

 

 

 

 






김명성씨에게 전해 줄게 있어 인사동을 찾았다.
지난 5일 오후9시 무렵의 '노마드'엔 풍기에서 대하소설 쓰는 배평모씨가 왔었고,  

현장스님과 유진오, 정기영씨도 보였다.
안쪽 구석자리에는 김명성씨 혼자 앉아, 일찍 부터 술이 취해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 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께서 김명성씨의 시에 대한 평론을 문예지에 쓰셨는데,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는 것이다.

뒤 늦게 술판은 무르익었고, 그 날 술 좀 마셨다.
새벽 세시가 넘어 녹번동 서부감자탕에서 한 잔, 우리 집에서 한 잔하는 것으로 끝냈지만,  

비좁은 방에서 개같이 끼어 자야했다. 

 

“아이구! 속 쓰려~” 

 

 

 

 

 

 

 

 

 

 

 

백남이 (시인)

 

 

신동여 (도예가)

 

고) 이선관 (시인)

 

 

김언경 (설치미술가)

 

 

이청운 (서양화가)

 

 

 

고) 김영수 (사진가)

 

 

고) 천상병 (시인)

 

박신정 (조각가)

 

 

김신용 (시인)

 

고) 홍수진 (시인)

 

윤희성 (카페주인)

 

장 춘 (불화가)

 

 

윤소정 (영화배우)

 

김상덕 (무직)

 

고) 박재삼 (시인)

 

최울가 (서양화가)

 

배평모 (소설가)

 

고) 이종문 (음악인)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낸 소설가


장편 "러부 할 알리"
"젊음의 지평"
"지워진 벽화"
"하늘로 가는길"

"파랑새"
중편 "돌 하르방"
단편 "소멸되어 버린 섬"
"지평 그 너머"
"보석의 가치"
"돼지 꿈" 등 다수 발표
93 대산재단 문학인 창작지원 (소설부문)수혜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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