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가 운영하는 민예사랑’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434]

북한의 개풍군을 코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살림집에 들어앉은 '민예사랑'의 전시는 꽃 피는 오월 한 차례만 열린다.

그곳은 정원이 아름다운데다 고가구들이 적절히 배치된 공간의 아늑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감에 빠져들게 한다.

 

넓은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 등 몇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나무들과 어울려 있고,

전시된 작품이나 생활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주변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전시 분위기가 작품의 격조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놓인 작품 역시 격조가 높아야 차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 20 정동지 연락을 받아 달려갔는데, 

전시도 궁금했지만 오월의 민예사랑정원이 더 그리웠다.

전시장에 초청작가는 보이지 않고 몇몇 컬렉터만 돌아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초대된 일본 판화가 노다 테츠야는 도쿄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는 후나기 켄지에게 사사 받아 염유석탄가마를 축조하는 등

독보적인 작업을 펼쳐 온 작가다.

그리고 이영재는 카셀 미술대학 도예과 연구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독일에서 도자 공방을 운영하는 등 모두 일가를 이룬 명장들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부드러운 톤의 판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품격있는 조선 가구가 배치된 적절한 공간을 마치 자기 자리 찾은 듯한 도자기가 얄밉도록 앙증맞았다.

숨결이 느껴지는 질감과 우아한 자태의 작품들은 마치 아름다운 삼중주를 듣는 듯 빠져들게 만든다.

 

노다 테츠야의 판화 작품은 너무 오래되어 곰팡이가 번진 듯한 부드러운 계조로 표현되었는데,

세월을 한 참 거슬러 간 오래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작가의 시대적 사유가 내포된 심상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조선 도자의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예가 이시야마 토시키의 작품은 개성이 뚜렷했다.

흙 색깔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기법을 여러 작품에 접목해 독창성을 부각시켰다.

다완의 은은한 빛깔이나 개성적인 형태가 낯설지만 친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 문화가 참 좋다. 멀찌감치서 보기도 하고, 푹 파묻혀도 보는 그것이 마음을 향기롭게 한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형식에서는 벗어났지만, 우리 고유의 멋을 풍기고 있었다.

 

한국적 선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도예가 이영재의 사발과 호리병은

우리 전통 도자의 멋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모양세는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보면 볼수록 심미감을 더해주는 깊은 맛이 있었다.

 

판화가 노다 테츠야의 섬세한 터치와 일본 북해도의 자연을 닮은 이시야마 토시키 도자기,

그리고 한국적 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영재의 도자기가 어울린

민예사랑초대전은 오는 27일까지 열린다 (전시문의 / 010-5357-5256 )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서울아트가이드10월호]















문영태 3주기를 맞아 열린 유작전이 지난 2일 성황리에 막을 내리며,

유작전을 추진한 추모위 쫑파티가 열렸다.

지난 12일 오후6시 인사동 ‘자희향’에서 열린 추모위 만찬에는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김진하, 장경호,
박 건, 양정애씨 등 일곱 명이 모여 뒷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불똥씨와 홍선웅씨는 사정에 의해 못 나왔다.






이번에 열린 추모전 외에도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와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가 출판되었는데,
그동안 묻혀 있던 문영태 작업과 업적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추모집을 제작한 김진하씨는 처음엔 자료가 부족하여 난감했으나,
뒤늦게 ‘시대정신’에 대한 좌담회 자료와 ‘분단풍경’을 기록한
슬라이드 필름을 찾게 되어 진척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출판된 문영태 추모집 출판은 한국미술사의 소중한 자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찾아 낸 자료를 바탕으로 문영태의 작품세계는 물론 민중미술에 끼친
영향력을 일목요연하게 편집한 김진하씨의 저력도 돋보였다.





문영태 화백의 ‘심상석’ 연작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이나,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베인 문영태 최고의 역작이다.
문영태의 작업이 그 이후로 중단된 것도 
더 이상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이 날 추모회 만찬에서 나온 이야기로는 김포 ‘민예사랑’ 전시에 이어
서울전시도 한 번 가질 것이라고 했다.
볼 사람이야 보았겠지만, 전시장이 너무 멀어 일반인들의 접근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일정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김진하씨의 새로운 기획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인사동에 있는 ‘자희향’은 처음 가 본 집이지만, 음식이 맛있었다.
함평에서 나오는 '자희향 탁주'를 내놓는데, 도수는 일반 막걸리보다 높으나
약간 단맛이 있어 입에 착 달라붙었다.
난 소주파라 맛만 보았지만, 괜찮은 술이었다.
그리고 게장이나 가자미찜, 돼지수육 등 모든 음식들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벽에걸린 조선중기 여류시인 이매창의 '증취객'이란 시도 눈에 들어왔다


"술 취한 손님이 옷자락을 잡아당겨
비단저고리 찢어 놓았지
비단저고리야 아까울 것 없지만
님이 주신 정마저 찢어질까 두려워요"



 
다들 거나하게 취했으나, 헤어지기 아쉬운 것 같았다.
이인철씨가 발동이 걸렸는지 노래방에 가자고 충동질했다.
다들 가까히 있는 ‘국악’이란 노래방으로 옮겼지만, 혼자 도망쳐야 했다.
이제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2차는 꿈도 못 꾼다.
봄날은 이미 가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홈문영태뒤13.jpg
0.27MB




문형태형을 처음 만난 건, 80년대 후반 인사동의 부산식당에서다.

인사동 '그림마당 민'의 관장으로 있을 때, 화가 박광호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나,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데면데면, 마음의 후원자로 술친구로 한 30년 같이 지낸 것이다.

 

친밀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인사동을 처갓집처럼 오가던 화가 이청운, 최울가, 이존수, 박광호씨와 더불어

부산서 올라 온 떨거지라는 공감대였다.

서로 의기투합해 만나지는 않았지만, 인사동 술집을 들락거리다 수시로 만났다.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분단풍경이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며 딱 한 번 있었다.

기획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에 존경감이 일었는데, 사진에 대한 생각들이 남보다 앞서고 있었다.

한 개인을 24시간 기록하고 싶다고도 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친구다.

선비 같이 어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 성품을 가졌는데, 사진판의 김문호씨와 비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1980년대에는 민중, 민족미술운동 기획자로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을

기획해 미술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90년도에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 때는 진보잡지에 우리 문화에 대한 독보적인 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글이 너무 좋았다.

 

팔방미인처럼 다 방면에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그림은 한 점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가 화가라는 사실조차 잊고 산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기억나는 건, '시대정신' 표지사진에 실렸던 심상석心像石이란 제목의 세밀하게 그린 연필화가 유일했다.

두상에 상처 난 형상의 돌을 그린 건데, 강력한 저항이 느껴지는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강원도 정선으로 흘러들었고, 그는 서해안 최북단인 김포에 자리 잡았으니,

쉽게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가끔 지인들 전시뒤풀이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김포에서 민예사랑이란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문화에도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매사에 사심이 없었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 지며 조용한 스타일이지만 한 고집하는 사람이다.

언변이 자분자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의 핵심은 강건하고 논리적이다.

 

뒤늦게 그의 대표 작업인 심상석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졌다. 특히 주변 친구들의 작품 칭찬에 몸이 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155월경 그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살고 있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오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를 하루 남기고 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내 장재순여사와 함께 사는 민예사랑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북한을 눈앞에 둔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문형의 신작이냐?'고 물었더니, 최선호씨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영태 전시로 알고 일정까지 바꾸어가며 달려왔는데, 허 탕 친 것이다.

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2인전을, 문영태 전시로 착각한 것이다.

 

함께 동행한 정영신씨에게 문형 작품이 좋은데, 보여주질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 놓았더니

작품도 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말이야. 전시 한 번 해볼까.”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날 문영태씨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럿 어울려 음악회를 즐기는 등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달 후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날 찍은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 때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니,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의 초청 전화도 우연이아니라 미리 계산된 듯한 의심마저 들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앞설 뿐이지만, 기어이 그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토록 널 내세우기 싫었던가? 이 고집불통 같은 친구야!”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전 작품은 물론 생각의 면면까지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3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유작전과 도록제작을 위한, 작품촬영을 부탁받은 것이다.

심상석에서부터 청년 시절의 스케치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작업노트는 물론 일기장까지 샅샅이 훔쳐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꼼꼼한 성격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일기장에서부터 그림대회 상장까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일기장에는 유난히 새에 대한 글이 많았다. 서재에서 보이는 북녘을 바라보며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때로는 깊은 생각에 미처 잠들지 못했는지, 이런 글도 적혀있었다.

이 깊은 밤에 개는 왜 끊임없이 짖고 있는가? 무슨 일로 짖는가?”

 

일구구오년 유월 초하루라는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인철과 유은종이 들리다.

같이 마을을 돌며 구경하다

인철이 녹슨 칼 하나를 주워 나에게 주다.

칼을 받다,

이 칼은 무엇인가.

이 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칼이다.

 

우연히 마주친 사물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상흔을 형상화 하는 작가로서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반가움이 서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은 80년 광주의 상흔을 상징화시킨 심상석시리즈였다.

작업노트에 그려진 형상성의 스케치나 메모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했는지 고스란히 들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꼼꼼한 친구로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품보관이 엉망인 것이다.

쌓인 먼지는 차지하고라도 작품 곳곳에 곰팡이 자욱이 무성했다.

난 직감적으로 의도적인 방치라 생각되었다.

심상석의 세월의 풍화를 보여주고 싶었거나, 아니면 작품을 돈으로 여기는 현실을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민중문화운동가다웠다.

그만의 뚝심과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기 위해 미망인 장재순여사에게 이 것 저 것 물어보았다.

문영태씨와 맺어진 연은 녹번동 화실에 그림 배우러 다닌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사동에서 그림마당 민에서 일하며 호구지책으로 차린 게 민예사랑의 시작이었는데, 문영태씨의

우리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는 곧 바로 아내에게 직결되어 민예사랑이 인사동의 명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업가적 역량으로 가게를 일으켜 세운 아내에게 고마움도 컸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돈이란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요물이란 것을 잘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아내가 가게에 나간 후에는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가끔 있었던 두 내외간의 언쟁도 모두 술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민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고민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던, 그가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이 고집스러운 민중문화운동가 문영태를 더 그립게 하는 것이다.

 

저승에 따라 가면 문화백을 만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나 있다.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비평을 왜 중단했냐고? 왜 절필했냐고..”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출간한 "心象石 문영태"에 게재한 글입니다.

 

 

 

 

 

 

 

 

 

 

 


心象石·문영태
문영태 유작展 / MOONYOUNGTAE / 文英台 / painting


2018_0519 ▶ 2018_0602



문영태_분단풍경_35mm슬라이드 7매_1991~6(추정)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510d | 心象石·문영태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519_토요일_04:00pm

주최 / 문영태 추모위원회

(신학철_조문호_홍선웅_장경호-이인철_박불똥_박건_김진하_양정애)


민예사랑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434

Tel. +82.(0)10.5357.5256


전시를 기획하며 ● 문영태 兄은 1980년대 문화를 통한 민주화운동으로, 엄혹했던 5ㆍ6공 독재권력을 관통했던 작가이자 기획자다. 작품·전시기획·출판기획·여타 시민들과의 현장문화운동·저술가로 활동했다. 이번 전시는 그 궤적 중 작품만으로 구성했다. ● 그리고 1990년대 사진작업 '분단풍경'까지 전시된다. 분단국의 작가로서 민주화와 분단 극복을 위해 실천했던 작업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문영태 兄은 문화적 관념성을 띤 70년대의 '심상석'으로부터 80년 광주를 통해서 상처받은 이웃을 그린 '심상석-狀況'으로 이웃과 시대현실을 작업에 수용하고, 마침내 직접 몸으로 횡단하며 촬영한 DMZ 250km '분단풍경'을 통해서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로 변모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운동가 문영태의 실천과 더불어 그의 작품이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가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 1980년대 초반부터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 40년 역사전, 민족미술협회 창립, 그림마당 민, 여타의 출판기획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 90년대의 민속학적 문화론에 의한 저술활동 등 다양한 문영태의 실천은 우리미술문화의 내·외곽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문영태 兄의 작고 3주기를 맞아 그의 헌신성을 기념하는 '문영태 추모위원회'에서 기획 및 진행했다. 동시에 문영태 兄의 화집 겸 활동 자료집인 『심상석·문영태』와 문집인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性』도 함께 발간했다. ● 또 생전 문영태 兄이 거처하던 김포 <문수산방>이 이번에 전문 전시공간인 <민예사랑>으로 새로 단장하게 되어서, 그 첫 전시로 『심상석·문영태』전을 열게 되었다. 의미있는 일이다. 마침 남북간 종전과 평화 논의가 무르익고 있는 지금, 통일염원과 작업으로 긴 시간을 보낸 문영태 兄의 유작전이 열리는 건 더 반갑고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문영태 兄의 추모와 더불어, 분단을 넘어 통일을 위해 애썼던 兄의 염원까지 함께 아우른 이 유작전과 출판 기념회에 많이 참석하셔서 고인의 민주화와 통일에의 의지,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도 함께 느끼시길 바랍니다. ■ 문영태 추모위원회



문영태_분단풍경-을지전망대_35mm슬라이드_1991~6(추정)

 

변혁기의 作家, 혹은 志士 - 작가·선비·지사 영태형님은 사람들에게 인정 많고 관대했으되 그의 세계인식은 매우 단단한 분이었지 싶다. 80년대를 오로지 미술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신학철 선생 말씀처럼 큰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지사였다. 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등의 활동 땐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이며 지원을 했고, 민미협창립과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운동의 전면에 나설 때도 그랬다. 90년대 이후 김포로 낙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운동에 관한 자신의 전력을 자랑하거나, 타인들을 비방하거나, 서운해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여러 지식에 관해서는 달변이었지만, 미술판 얘기가 나오면 먼저 상대방의 말을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듣고 나서 말했다. 선비 같은 담담함. 신사이자 지사였다. 그러나, 확고한 세계인식과 담백한 인격은 작가로서의 출세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작가는 자신의 내·외면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해서 집요한 욕망으로 표현하거나 발언하는 존재인데, 그러기엔 영태형님은 그 품성이 너무 담백했다. 또 개인적 작품보다는 미술운동이라는 명분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온존한 개별성과, 시대현실과 더불은 운동미술과의 사이에서 작업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을 것이다. 괴리와 간극이 컸고 고민이 많았을 터인데, 작가적 욕망보다는 문화운동가의 대의를 선택했기에 영태형님의 작업은 자연스레 소극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람의 재주는 그릇과 같아서 모나고 둥글고 한 것을 함께 갖출 수는 없다"라는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한 구절을 옮겨 썼듯이, 그 스스로가 대의와 명분에 따라 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여겨진다. 그림마당 민 관장직을 내려놓은 이후인, 91년도 '경의선' 모임을 통한 분단현장과 DMZ를 탐사한 사진작업의 국토문예적 '다큐' 혹은 '르포르따쥬' 작업은 영태 형님의 미술운동가와 작가 사이 간극을 성공적으로 좁혀주었다. 민중미술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수용한 작업이고, 또 그 개념적 접근이 성공적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찌프차와 발로 답사하며 기록한 이 작업들을 형님은 개인전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작가 문영태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80년대 미술운동으로 중단되었던 작가로서의 위치를, 이 변주된 장르와 형식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2000년대 이후엔 거의 형님을 만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세속의 출세에 초탈한 선비라서 그랬을까. 맑은 물에 사는 물고기가 탁류에선 살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랬을까… ● 언급했듯이 문화운동가인 영태형님은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로 진보운동권 및 문화운동 사이 각 장르 간의 연대와 공동활동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나 엄연히 그의 미술운동의 출발점은 화가였다. 80년대 초중반 당시 20대였던 나를 비롯한 또래의 후배들에게 문영태 형님(이하 존칭 생략)은 스타였다. 후배들의 미술운동을 뒤에서 진심으로 지원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81년도 개인전의 '심상석' 연작의 깊은 인상 때문이기도 했다. '심상석'으로부터 문영태란 작가의 이후 작업과 운동은 시작된다.

 


문영태_분당풍경-경원선_35mm슬라이드_1991~6(추정)

 

 

심상석 心象石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 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다. 그리고 그 인과의 단서로 ''이란 연결고리가 작용하는 보통명사다. 그런데 약간 갸웃거려지는 게 있다. 보통 '형상'이라고 하면 '코끼리 '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이 붙은 '형상 '을 쓰는데, 그래야 '마음이 새겨진 돌의 형상'이라는 의미가 정확해지는데, 문영태는 굳이 ''을 쓴 것이다. 한문 내지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이유가 있을 터, 곰곰 생각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본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모 박사가 전한 '코끼리' 문자가 만들어진 과정 얘기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거기에서의 설명은 이렇다. 본디 고대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코끼리를 묘사하는 설만 풍성했다. 말이 있으면 표기할 문자가 필요한 법. 코끼리를 묘사할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코끼리를 본 적조차 없으니 난감한 일. 결국 살아있는 코끼리를 히말라야 넘어 중국으로 운송하기는 불가능해서 코끼리 뼈만이라도 갖고 오게 했다. 그리고는 갖고 오는 도중 순서가 바뀐 뼈를 바닥에 나열하고 살이 없는 그 형상에 다녀온 사람의 설명과, 문자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을 첨가해서 ''이란 문자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치하며 그 상형을 본뜬 모양이다. ''이란 글자는 상형이되, 입체가 아닌 평면적 형상이고 거기에 상상과 추리가 개입된 문자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문영태가 이미 개념적으로 규정된 형상을 의미하는 ''을 선택하지 않고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으로 '심상석 心象石'이란 작품제목을 정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물이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돌이라는 의미. 즉 현상인 마음과 물질인 돌의 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숱한 사람(민중)들의 접힌 주름 속의 삶과 상처와 애환에 대한 그의 마음을 표제화한 의도를 말이다. '심상석'연작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종이는 펄프성분이 많은 다소 거친 마닐라지 계열 같다. 충무로 인쇄골목 지업사를 돌며 물어보니, '코끼리 똥지'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래서 습기에 약한 그 용지엔 현재 얼룩덜룩한 무늬가 자연스레 남아있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텍스쳐 효과를 위해서 표면이 거친 이 용지를 선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의 형상들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 타제·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로부터, 심리에 이르는 형상성, 기복적인 민중신앙과 같은 샤먼이나 토템적 아우라(1977-78),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한(1979-80),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1980),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문영태_心象石 78-4_펄프지에 연필_122×168cm_1978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이 흔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다.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이 작가가 지향했던 세계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신학철 선생의 언급처럼, 문영태의 초기 작업은 오윤의 그것처럼 기층민중적 한·투박한 생명의지·토속신앙적 생명관 등이 얽혀져 있다. 문영태가 자신의 호를 귀신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의 '집신集神'이라는 전통적 샤먼의 의미로 지칭했음을 보면 그것은 더 선명해진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 글쓰기를 통해서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 문화를 연구했음을 보면 그의 내면적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미술로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믿고 지향했을 터다. 그러니까 1977~79년에 이르는 작업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돌 자체에 대한 관념성(일테면 청마의 '바위'처럼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의지나 경외심 같은 샤먼적 요소)이나 석기시대 도구 같은 호모사피엔스의 문화인류학적 시점이 공존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민중들의 주름진 삶의 표정이,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두부에 가해진 물리적 상흔이 주 테마로 등장한다. 돌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작가의 경험적 서사에 의해서 어떻게 심리적인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민중성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이 작품들은 증거해준다. 특히 마지막 심상석에서는 광주항쟁에서 군부가 광주시민들에게 가한 폭력성이 물리적 상흔(Scar)과 정신적 상처(Trauma)로 동시에 흔적화된 묵시적 형상성으로, 그리고 비판적 정치성으로 확장된다. 이 단계가 비로소 '심상석'이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을 그 내용으로 견인해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심상석 연작은 여기에서 중단된다. 그 이유는 문영태가 80년대 내내 작업실에서의 작품제작보다는, 미술현장에서의 기획과 운동으로 활동의 방향성을 틀어버려서다. 작품의 소통을 통한 내용전달의 간접적 정치기능보다는, 실질적인 저항을 이끌어 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문화운동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1984년의 '힘전'사태를 통해서 현실권력이 미술에 가하는 부당한 탄압과, 이에 대치하는 조직인민족미술협의회가 생기기 전 80년대 초반 미술운동의 양상은 다양했다. 현실과 발언을 필두로 광자협·임술년·실천그룹·에스파그룹·목판모임 나무 등과 같은 정기적 단체전은 차치하고라도, 젊은 의식전·80년대 미술의 조망전·횡단전·시대정신전·토해내기전·거대한 뿌리전, 삶의 미술전·푸른 깃발전등의 단발 기획전, 거기에 문영태가 주축이 된 민중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공동으로 작업과정을 공유하는 시민미술학교의 개설 등 그 양상들은 쉽게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게다가 작품의 경향들은 풍자적인 사회적 발언뿐만 아니라, 서술적 역사성, 개인적 실존성과 심리, 문명비판, 꿈과 환영을 그린 초현실성 등 70년대 모노크롬 미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상성의 경연장이었다. 전두환정권의 탄압으로, 민미협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독재권력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미술운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양상을 중심으로 전열이 가다듬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략 이 시기부터 문영태의 '심상석'작업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학적 입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필요한 조직적 미술운동의 입장에서 '심상석'과 같은 내용과 형식의 미술은 구체적인 기능이 어려운 것이었다. 미술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기획과 더불어 그림마당 민의 전시까지 관여하면서 따로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정치미술의 환경과 문영태 본연의 민중적 생명관은 쉽게 용해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시대였다. 정치와 미술전·통일전·반고문전·여성과 현실전·탄압사례전·풍자와 해학전 등을 통해 공권력과 마찰한 현장인 그림마당 민책임자로서 더더욱 '심상석'과 같은 상징적 관념성은 진행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작가는 체질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인식으로 작업할 순 있으나, 의식과 체질로 작업하는 이에게는 쉽지 않다. 심상석은 그런 체질을 반영하는 유형의 작업이었다. '심상석'90년대 분단현장을 가로지르는 현장 다큐사진작업 전인 83~87년 시기, 간간히 단체전에 발표한 복사기를 활용한 흑백 몽타쥬 작업의 게릴라성에 주력하되, 회화작업을 계속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진다.

 

 



문영태_心象石_종이에 복사작업_26×32cm_1983

 

문화운동 기획들 '심상석'개인전(1981, 관훈미술관), 겨울 대성리전(1981~83)의 현장 작업 이후, 종이판화(紙版畵)개인전(1983, 그로리치화랑)을 전후해서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미술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동안의 작업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의 결과였을 것이다. 문영태 본인의 개인적인 관념세계와 시대현실과의 결절점에서, 작가이자 지식인의 실천적 미술을 지향한 것이다. 이미 '겨울 대성리전' 기획팀에의 참가도 기존 제도적 미술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띈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공고화한 사회적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 동시대적 책무를 수행하는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행동이라 여겨진다. 여기서부터 문영태의 미술에 대한 실천은, 시민들을 향한 구체적인 소통을 담보하는 '문화운동'으로 바뀐다. 일반시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시민미술학교(1984), 뜻이 맞는 후배들이 창립한 서울미술공동체(1984)의 회원가입, 화가 박건과 '시대정신기획위원회'를 결성하고 1983년 제1시대정신기획 및 1984년 한국 최초의 미술무크지시대정신지 창간(1984~1986),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아랍미술관, 1985), '20대에 의한 힘전' 탄압사태 대책기구,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아랍미술관, 1985), '해방 40년 역사전'(광주, 대구, 부산, 마산, 서울, 1984)참여, 이후 민족미술협의회창립위원(1985), 김용태·홍선웅·유홍준과 더불어 민미협의 전시기구인 그림마당 민(1986)운영에 관여하고, 또 관장을 역임(1987~88)하면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7년 정치와 미술·우리시대의 판화전·장망 판화전·우리시대의 성전, 만화정신전, 통일전·천상병 시화전·반고문전·기금마련전·여성과 미술전·통일전·중국목판화전·풍자와 해학전·그리고 기타 여러 재야단체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기금마련전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림마당 민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림마당 민은 그 한 해 전에 개관한 비판적 형상미술 중심인 한강미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안공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림마당 민은 제도권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과감히 수용하며 5공 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미술문화운동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문영태의 진정성과 헌신성이 그 바탕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영태는 민중문화협의회(1984)-민중문화운동연합(1987)-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1989)에도 참가하며 문예운동을 실행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 및 대학가의 각종 집회 현장과의 연대와 이미지 제공을 실행했다. 대표적으로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의 시위현장에서의 대형 초상화와 소형전단목판화(류연복 판각)를 기획해서 미술의 현장적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이런 가파른 운동의 와중에 문영태가 개인 작업을 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그 결과, 90년대가 되었을 때, 화가의 리듬과 체질적인 내면의 드러냄이 중단되어 버린 상태에서 다시 화가로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대신 변혁기 미술의 대 사회적·정치적·역사적·문예적 기능과 가치를 깨달았던 문영태는 사진매체를 통해서 다큐사진으로 작업을 전환한다. 80년대를 통해서 대중적 미디어가 갖는 위력을 절감한 터라,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90년대식 역사적 담론을 위해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그 활동의 결과물들로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다. 또한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사람이라는 글+사진집도 간행한다. 사진과 미술과 출판과 춤을 엮어낸 실험적 기획이었다. 90년대라는 바뀐 문화지형에서의 능동적인 발언을 모색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전통적인 민중문화와 민속문화의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1996~19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와 같은 민속사회학적 글이 그것이다. 사실, 문화운동가로서 문영태는 일찌기 출판미디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미술보다 대중적인 출판미디어의 소통성을 일찍 깨달아서 그렇겠지만, 그 자신의 독서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시장 미술로부터, 현장미술, 그리고 출판미디어의 활용 모두를 아우르며 미술이 어떻게 동시대적 문화로 그 정치성을 확보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시대를 증거하는 아카이빙 기능에 대한 판단도 있었을 것이었다. 분단풍경 이전인 80년대에도 부정기 간행물이자 전시도록을 겸한 시대정신1·2·3권을 비롯해서, 정기간행물이자 민미협 회지인 민족미술, 80년대 탄압미술사례집등의 발간에 관여하며 동시대 문화의 정치적 운동성과 그 당위에 대한 소통공간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기획력과 실행력,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80~90년대를 관통하면서 민족민중미술에 뚜렷한 문화운동의 족적을 남긴 문영태였지만, 작가로서는 다소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운동으로 인한 본인의 작업단절도 그렇지만, 90년대 야심차게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작업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해서다. 화가가 다큐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천성이 무욕인 문영태는 자신의 작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작가로서의 지명도를 확보하는 데 대해선 무심했을테니 더 그렇다. 그래서 힘들게 DMZ를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발표도 하지 않고, 타계할 때까지 그의 서재 깊숙한 곳에 보관만 한 것이다. 물론 90년대 후반의 사회평론 길디새집연재에 대한 글쓰기의 연구와 부담감이 작용했었을 터이지만, 어떻게 보면 문영태는 참으로 욕심 없는 사람이라서 한편으론 아쉽다. 운동가로 또 한 인격체로서는 지금까지도 존경할 만한 선배지만, 그의 투명한 빈 마음으로 인해 축소된 작가적 활동은 우리 미술계에선 공실률이 커서 그렇다. 다만 이번에 그가 불편한 몸으로 직접 국토를 횡단하면서 남긴 90년대 '분단풍경' 다큐사진의 발견은,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작가로서 문영태의 삶과 내공도 기획자로서의 그것 못지않게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팔방미인. 속되지 않음으로 속세의 출세는 못했으나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롯이 순수한 사람이자 운동가이자 작가로 남는 존재. 문영태는 바로 그런 선배였다.

 



문영태_心象石_펄프지에 연필_61×267cm_1982

 

분단풍경 1991년 문영태는 사진가 이지누와 화가 16, 17명으로 '경의선' 그룹을 조직한다. 그림마당 민관장을 그만두고 난 얼마 뒤다. 이때 활동한 내용들을 엮은 책이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다. 그리고 곧 이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분단된 국토의 현장과 현실을 조망하는 작업을 자신의 작업테마로 잡고 사진가 이지누·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분단현장. 그 공간은 한반도 왼쪽 끝 서해 백령도부터 오른쪽 끝인 동해 고성·양양의 7번 국도에 이르는 DMZ 남쪽, 북위 38~37°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서해안 교동도부터 서도면-강화도-김포반도-자신의 집이 있는 월곶면 보구곶리-임진강-오두산전망대-전곡-통일촌-도라산전망대-경의선잔해-경원선-전진교-철원-월정리-구철원-백마고지-태풍전망대-평화의 댐-생창리-백골전망대-땅굴-적근산·대성산-명월리-양대리-해안분지-땅굴-심곡사-을지전망대-도솔산-대암산-삼재령-까치봉-통일전망대-7번 도로 해안 등 한반도의 중앙을 수시로 횡단하면서, 90년대의 분단현장·분단현상·분단문화·야생식물·문화재·풍경·사람들의 모습 등 인문지리적 요소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35mm 슬라이드가 대략 수천 장 남아있으나, 96년부터 사회평론 길디새집에 연재하는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20년 이상 장기보관만 한 탓인지, 슬라이드 표면의 화학적 변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아쉽다). '심상석'과 같은 내면적 관념으로부터의 회화작업에 비해서, 역사적 현실인식이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다큐사진의 소통성은 문영태에겐 분명 매력적이었다.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객관적 '인식'으로의 작업태도 변화는 결국 '회화'에서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탈바꿈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0여년 만의 사진을 통한 개인 작업으로의 전환도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영태는 이 작업도 공동체적인 입장과 미학을 바탕에 두고자 했다. '경의선'모임을 조직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기존의 사진가들과는 또 다르게 화가들의 시선이 반영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것이고, 동시에 사진가들과 보다 풍부한 내러티브와 형식의 결합도 바라서였을 것이었다. 분단시대 '분단'의 전형성을 찾기 위해서 동료작가들과의 공동체적인 협업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인 공론화를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선후배나 동료들과의 인간적인 스킨십을 좋아했던 그의 성격상 작업과정도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발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경의선'은 각 작가들마다의 스케줄로 인해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영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진가 이지누, 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155마일 DMZ를 횡단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때 동행한 김하기는 이 경험을 써서 답사기행집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문학동네, 1995)를 발간했다. 회화·지판화·드로잉·복사와 마스타 인쇄방식의 판화·사진작업을 진행했던 문영태의 궤적 중에서 80년대 초반의 '심상석'90년대의 '분단풍경' 사진작업이 문영태 작가궤적의 뼈대로 보인다. 대략 15년여의 간극을 둔 시각물 작업인데, 이 두 작업의 내용만큼이나 그 장르와 매체적 특성도 다르다. 또한, 주관적인 내면·이웃들의 삶의 애환·거기에 80년 광주의 상흔을 오버랩하면서 민중적 서정성과 서사성을 확보하는 단계가 '심상석'의 진행과정이었다면, 10여 년의 문화운동가를 거친 후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에선 철저하게 역사적 현장성을 기록하는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가 된 점이 달라진 점이다. 이 분단풍경 사진 작업으로 인해, 문영태가 문화운동가가 아닌 분단을 말하는 작가로서 최소한의 자기 소임이자 책임을 다했다고 여겨진다. 현재 남아있는 수천 장의 분단풍경 사진들은 동시대 현실과 역사를 관통하려는 문영태의 실존적·실천적인 작가적 '태도'를 증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겸허하고 성실하게 분단현장을 답사하고 연구한 정직성의 증거물이다. 작가적 성공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이 땅의 민중미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작업이었던 듯싶다. 그래서인가,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미술'에 대한, 혹은 '작업'이라는 것에 대한, 아니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선험적·제도적 명제를 버리고 그저 담백한 인간 문영태의 흔적인 자연스런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 이전에 민중미술가·문화운동가·인간 문영태의, 속기나 작위성 없는, 선비·지사·민중적 작가의 풍모가 환기되어서 그럴 것이다.

 


문영태_心象石-狀況_펄프지에 연필_53×53cm×4_1980


 

글쓰기 다재다능한 사람은 남기는 것도 여러 가지다. 문영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로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습득한 여러 지식의 잡학/박학다식, 미술에 관한 전문적 지식, 여타 인문학에 관한 폭넓은 독서는 문영태의 평소 언변과 잡설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평소 과문하다가도 대화가 될 양이면 그의 눈은 반짝이고 집중도는 깊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문영태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예의 그 느리되 약한 경상도식 억양으로 즉흥적이고 재미있는 얘기를 엮어냈다. 이쪽저쪽, 전통/현대, 한국/외국, 미술/인문, 고전/뉴스 등을 넘나들면서 여타의 우스개 농담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즐겁게 얘기할 때면, 말뚝이의 그것처럼 재미와 흡입력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 형님은 장편을 쓰면 정말 잘 쓰시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글쓰기도 그랬다.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김포에서 집중한 글쓰기, 특히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보면 온갖 지식들이 종횡으로 엮여진 이야기꾼의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특한 문장과, 구어체, 가끔씩 구사되는 비문, 그리고 술에 취해서 쓴 듯이 널뛰는 단락 넘나들기 등은 그야말로 생생하게 날 것의 이야기체다. 재미지다. 잘 다듬어진 글쟁이들의 세련됨에 비하면 이 덜 다듬어진 문체의 맛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진중하다가도 가볍게 직진하고, 심각하다가도 농담이 튀어나오고, 인문적이다가도 세속적 세태가 엮어지면서 한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처럼 풍자적이고도 해학적인 입담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이르면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젠더적 사유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걸진 음담패설로 전통적 풍속에 대한 재미를 돋우면서도 그 행간에서 남성중심의 위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한 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정치·사회·민속·민예·미술·여성·역사·신화·그리고 풍속에 관한 다양한 시점(視點)으로 통섭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성에 관한 이 글은, 글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고담준론의 학자가 아닌, 전래적 이야기꾼이나 판소리 한가락처럼 민중적이다. 탁빼기 왕대포 한 잔 마시며 말하고 듣는 얘기처럼 흥취도 돋는다. 술술 읽힌다. 찰지다. 그래서 문영태'()'이다. 거기에 비하면 2001년에 디새집에 연재한 문영태의 궁시렁궁시렁-한국의 집 이야기는 훨씬 소담하다. 재미진 요소를 빼고 다소 담백하게 썼다. 집을 의인화해서 접근한 민속적 생태성에 관한 서술방식이 새롭다. 아마도 화가의 글쓰기라 그런 모양이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한 서술성보다는, 그런 고착된 시선이나 감성의 서술방식을 전복하는 입체적 시각과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파격에 대한 문영태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 글쓰기는 문영태의 작품·미술운동과는 또 다른 인문과 그의 삶이 교직된 세계다. '학자'라고 하는 특정한 영역으로 좁혀지지 않는 지식인이자 이야기꾼으로 자기 역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던 셈이다. 김포에 은거하며 평소 관심 있었던 전통적 민중성과 민속적 영역에 대한 홀로서기 같은 작업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글쓰기에서도 문화운동가로서 문제의식은 여전히 드러난다. 미술운동판을 떠나 유유자적하게 책읽기와 한학(漢學), 그리고 낙서들을 즐기면서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통찰은 가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질이다. 그 기질이 오롯이 드러난 작업이 글쓰기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다른 장르이자 내용인 그림도, 사진도, 글쓰기도 모두 문영태'()'이다. 팔방미인이되, 무엇을 하든간에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영태는 '자기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그의 인격 아닌가. 영태형님 전 민예총 이사장 김용태 선생이 타계했을 때 영태형님은 한겨레신문의 길을 찾아서-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란 연재기획에 추모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 시절의 추억 중에 이름 장난의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김용태 이사장, 문영태 본인, 후배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의 이름 마지막 글자로 말장난 농을 한 것이다. 이렇듯 이름자로 농을 할 만큼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현장에서 작고한 김용태 선생과 영태형의 헌신적인 역할과 동지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치열했으되 여유가 있었고, 긴박했으되 위트가 있었고, 조직적이었으되 인간적 의리가 있었다. 게다가 문화운동의 중심에서 동지애까지 끈끈했다. 그렇게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가로지르며 맺은 인연의 끈은 아직도 그를 흠모하는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 질기게 남아있다. 문화운동 하는 입장이니 본인도 별로 수입이나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도 어려운 후배의 전시에서는 그림을 사주었고 술값도 도맡아 내주었다. 그리고 명분 있는 사업엔 사재를 아낌없이 냈다. 시대정신발간도 그랬고, 그림마당 민의 운영도 그랬고, 디새집발간 때도 그런 태도였다. 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선 영태형님과 비교적 적게 어울린 어린 후배였다. 술자리도 그리 많이 가지지는 않았다. 다른 동료작가들과는 달리 화곡동이나 김포 형님 댁으로 가서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미술판에서 형님의 순수한 활동은 늘 보았고, 그런 형님을 마음으로 존중했다. 90년대 이후 가끔 내 사무실에 들러 장익화 형과 나를 앉혀놓곤 신명나게 얘기하거나, 인사동 길에서 홀로 마주칠 때의 다소 쓸쓸한 듯 조용한 미소를 대할 때나, 형수님과 퇴근하는 형님께 예의바른 인사를 할 때면 악수를 하며 인자한 표정으로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좋았다. 사람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영태형님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나 후배라는 형태 없는 물을 담아내는 형태가 있는 큰 그릇이기도 했고, 또 그런 여러 타인이라는 그릇들이 둥글든지 모나던지간에 각자의 그릇 형태에 담담하게 자신을 맞추어 주는 물이기도 했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이란 노자와, 이율곡의 '水逐方圓器 空隨小大甁'이라는 구절도 떠오른다. 그 많은 선배·동료·후배들과 함께하며, 그 다른 여러 개성들을 담아내는 그의 유연함의 크기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서 커진 마음으로 인해 가능했을 거다. 화단의 선배나 또래 작가들을 만나서 영태형님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이렇듯 같은 말을 한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태형님은 인자한 선배이자, 열정적인 문화운동가의 순수한 모습으로 비친다. 고행의 한 시대를 그리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런 삶은 쉽지도 않고 또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다. 80~90년대 작가시절, 그리고 인사동 문화운동시대, 그 이후 김포로 은거한 90년대 말부터의 고독한 글쓰기 세월, 그 격랑을 영태형님은 작가로, 문화운동가로, 학자로, 의리있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자신의 진짜 삶을 품위있게 살아냈다. 그래서 나는 영태 형님을, 그 삶의 궤적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는 사유가 깊었던 작가, 이 일치했던 문화운동가, 보고 따를 만한 진짜 '선배'이자 '형님'이었다는 생각에 말이다. 김진하

 

Vol.20180519b | 문영태 유작/ MOONYOUNGTAE / 文英台 / painting

 






장재순 (민예사랑 대표)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규태 (사진가)  (0) 2018.06.28
김영진 (화가)  (0) 2018.06.23
이정황 (영화감독)  (0) 2018.05.21
정동용 (시인)  (0) 2018.05.21
이종구 (화가)  (0) 2017.12.16



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













 

 

 


최북단마을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려...

[서울문화투데이]2018년 05월 22일 (화) 13:34:56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문영태추모위원회’에서 기획한 문영태 유작전이 지난 19일 오후4시, 북한을 눈앞에 둔 최북단마을 김포 월곶면에 자리한 갤러리 ‘민예사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유작전은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을 운영하는 미망인 장재순씨가 미술관을 새롭게 개관하며 마련하였다.

민중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에는 80년대 작업한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에서 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 심상석-상황, 종이에 연필, 53X53cmX4


3주기에 맞춰 마련한 문영태 유작전 개막식에는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의 사회로 진행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문영태의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분단의 문제로 보인다. 그의 ‘심상석’(心象石) 연작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기에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모더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자화상,종이에 연필, 31X49cm, 2002


이재권 동문은 ”대학 다닐 때의 문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도 도를 보는 관점, 칼라를 보는 관점이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다고도 했다.


린다노클린은 "예술의 목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그 시대의 세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상이나 상징보다는 사회적 제 조건과 보다 간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 장재순'민예사랑'대표 Ⓒ정영신


민중문화운동가였던 문영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을 추진하였고,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면서 출판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동시대의 삶을 성찰해왔다.


▲ 천지인 115X77X20cm 상석에 조각 1995


화가 박건씨는 1980년 문영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시대정신>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술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담론지로서 나중에 ‘민미협’과 ‘민예총’으로 가는 다리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문영태는 “공공성과 민중문화에 대한 존중감이 높은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 나무화랑 대표이자 평론가 김진하씨 Ⓒ정영신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문영태의 심상석 연작은 1977녀부터 1983년까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심상석’은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이다.


▲ 심상석-결합, 종이판화, 44


타제 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심상석’작품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며,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한,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의 흔적이 심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라며,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난다고 작가론에 적었다.



▲ 심상석 78-3, 종이에 연필, 168X122cm, 1978


특히 문영태는 1990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 작업도 했다. 문영태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물로 ‘눈빛출판사’에서 ‘분단풍경’사진집을 펴냈다.

▲ 국도 7번 도로변- '분단풍경'사진집에서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로는 김포 월곶리 자택에 칩거하며 평소 관심가진 전통적인 민중성과 민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문화를 연구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지향해 왔다.


▲ 시대정신 창간호,1983-1987


새롭게 자리잡은 ‘민예사랑’개관과 문영태 3주기 유작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예총’이사장 박불똥씨, 화가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씨, 사진가 조문호, 판화가 홍선웅, 미술평론가 김진하, 동영상을 제작한 양정애씨등 ‘문영태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친지와 많은 지인들이 찾아 와 고인을 추모하며 유작전을 관람했다.



▲ 김포 월곶리 '민예사랑' 전시된 작품 Ⓒ정영신


이날 추모전시에서는 ‘나무아트’대표 김진하씨가 만든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 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선생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까지 한데 모아서 엮었다.



▲ 좌)'심상석-문영태'도록표지, 우)'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책표지


문영태선생의 유작전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문의 (010-5357-5256 민예사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