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이명동선생님 자택을 방문했다.
지난 삼월 중순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처음 찾아뵙는 문안 인사였다.

약수동 아파트에 혼자 계신 선생님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초췌했다.
말씀으로야 혼자 있으니 편하다지만, 마음고생에 몇 년은 더 늙으신 것 같았다.
이게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차이인 것 같았다.
몸 단장이나 먹는 것에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선에서 가져 온 두릅도 사모님이 계셨던 예전처럼 그리 반갑지 않은 듯 했다.
맛있는 음식도 혼자 드시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사모님께서 돌아가시던 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몸이 불편해 요양원으로 옮기기 위해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고 한다.
앰블랜스를 기다리며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이며 편안한 죽음인가? 분명 축복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동아일보'에서 평생을 보내셨기에 신문도 ‘동아일보’를 보았고,
혼자 돌아가는 티브이도 A채널만 틀어놓고 계셨다.

거기다 '사진예술'까지 정기구독하고 계시니, 정치판이나 사진판 돌아가는 사정을 나보다 더 많이 알았다.

옛 제자였던 김희중(에드워드 김)씨가 중풍이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국 들어와 다방마담이었던 여자를 잘 못 만나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하셨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업소에서 일한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안 일은 도우미가 찾아 와 도와준다고도 하셨다. 

이제부터 몸을 추슬러 가까운 곳이라도 산책을 즐기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사모님 걱정에 외출을 삼갔지만, 가까운 사진전에도 살살 찾아다니시며,

후배들에게 옛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격려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4년만 지나면 백수이시니, 부디 건강을 잘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글 / 조문호










약수동에 계신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 댁을 찾아 갔다.

사모님 점심 챙겨드리고 나오셨다는 선생님의 체력은 여전 하셨다.

이제 일흔도 안 돼 빌빌거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120세가 아니라 더 높게 잡아야 되겠네요랬더니 씰데 없는 소리라신다.

입에 발린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아흔다섯이니 선생님 건강 상태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또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상황묘사까지 생생하다.

 

주문한 설렁탕이 나왔으나 수저만 담그신 채, 연신 말씀을 하신다.

이 날은 평소에 듣지 못했던 사진계 뒷이야기라 귀가 쫑긋했다.

글로 옮기기 곤란한 웃고 넘길 이야기라 그런지 더 흥미진진했다.

선생님께서 긴 세월 모셨던 분의 이야기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동아일보에 계실 때 있었던 신문사이야기로 옮겨갔다.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필름을 관리해 조사국으로 넘겼는데, 한꺼번에 폐기처분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이미지도 아니고 매일 매일 찍어오는 필름 관리가 힘들었는지 모르나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소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찍었던 4,19당시의 특종사진들을 비롯한 모든 사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용 하려면 당시 신문을 복사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록 동아일보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사진 가치에 대한 인식들이 부족한 시기기도 하지만, 보관 관리에 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때다.

차라리 회사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기자들에게 돌려주어 관리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현대사를 증언할 중요한 사진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일부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이나, 사진기자 수첩에 끼어 흘러 다니던 필름들에 의해

그나마 우리의 현대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들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차라리 그 땐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뒤집으려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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