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은 김준권, 박불똥씨의 전시가 동시에 열려
옛 민주투사들이 인사동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전시가 파한 후 ‘부산식당’에서 ‘영빈가든’을 거쳐
밤늦게는 ‘소담’에서 ‘무다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무다헌’에는 박불똥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장경호, 최석태, 김정대, 
이명지씨 등 10여명의 장정들이 마지막고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안쪽에는 신경림, 정희성, 신학철선생 등 고참들이 죽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철사령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안돼요”
참모총장격인 신경림선생께 삿대질로 힐책을 한 것이다.
유리한 고지만 쫓는 우유부단함에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다.

그 수행관 격인 김태서장교가 신학철사령관을 나무라자
장경호장교가 김태서를 제지했다.
결국 참모총장께서 퇴청하여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자칫했으면 12,12사태가 아니라 12,10사태가 날 뻔했다.

사진,글/ 조문호

 

 

 

 




용태형’의 유언대로 유골은 신촌 봉원사에 안치되었다.

한 때 세들어 살았던 봉원사 사가에 대한 추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봉원사 주변 길들을 돌아다니며 오랜 기억 조각들도 찾아보았다.

저돌적인 성격에 상처받았던 생각도, 잔잔한 정에 코 끝이 찡하기도 했다.

 

 

추모회 때는 ‘용태형’의 정확한 나이를 알게 되어, 실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동안 나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행세하며 항상 동생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도 한 살 적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같은 입장이던 김정헌씨가 오죽하면 조사 제목을 “야 임마! 용태”를 추도함“

이라 적었겠는가?

 

 

“이젠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것이 더 서러운 처지가 되었으니,

그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끔 봉원사에 들려 술 한 잔 올릴테니 저승 소식이나 전해주고,

부디 극락왕생을 누리시게나

 

 


 



















                                              옛날 '용태형'이 살았던 봉원사 집이다










                                                아래사진 두 장은 사진가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이다.

                                            


인사동에서 노제를 마친 '용태형' 시신은 백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인상무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용태형' 부디 극락왕생 하소!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김태서 (문화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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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9일은 채현국선생께서 팔순을 맞는 날이었다.  

 

노광래씨로부터 전화는 왔으나 시간과 장소는 좀 있다 연락하겠다는 것이다.
아마 선생님께서 본인 스스로 잔치 상을 차리기도 그렇지만 평소 자신의 일로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후6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기에 선생님께 인사 전화를 드렸더니 빨리 인사동으로 나오라고 재촉하셨다.

부랴부랴 축하선물로 드릴 작품 한 점 프린트해 나갔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그나마 들어가시는 채현국선생 내외분과 구중관씨를 골목 입구에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안내된 술집에는 신경림선생을 비롯하여 강신옥, 김태서, 최혁배, 장경호, 노광래, 편근희, 남민우씨가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채선생님께서는 팔순을 알리지 않은채, 인사동에서 만난 분들과 점심 때부터 술을 드신 모양이었다.  

 

남의 일에는 팔을 걷어 부치지만 스스로의 일로 내세우지 않는 선생님의 성품을 알면서도,

미리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팔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알게된 공윤희씨도 달려왔으나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모두들 ‘노마드’로 자리를 옮겼지만, 술이 취한 분들과 서로 사이클이 맞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배성일씨와 나재문씨도 만났지만, 그냥 줄행랑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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