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 장경호의 '묵시'전에는 반가운 손님이 많았다.

 

뒤풀이 집으로 정한 낭만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전시장에서 만났던 김진하, 이정황, 안원규, 류연복, 우문명, 김정업, 박윤호, 배성일, 정동용,

황준연, 최석태, 김세규, 조준영, 정희섭, 심정수, 김재홍, 최민화, 박불똥, 전강호, 신동여씨 는 물론,

신학철 선생을 비롯하여 칡뫼김구, 나종희, 임경일, 이강군, 양상용, 김영진, 이명희, 김수길, 김정대, 강경석

서인형, 이명신, 김이하, 조경연, 박은태, 김윤기, 박영애, 임정희, 김정환, 황정아, 이재민, 이도윤, 김상천,

이현정, 김보영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늦게는 현장스님, 이효상, 노형석, 하태웅씨도 오셨다. 

 

전시를 축하하는 자리지만 술로 한세상 인사동을 풍미했던 당사자는 뇌경색에 졸아 술 한 잔 마실 수 없었다.

 

다들 장화백의 빠른 회복을 바라며 대신 마셨다.

 나는 너무 마셔 이틀을 드러누웠지만... 

 

어쨌거나, 장화백 덕에 인사동 풍류객들이 모처럼 한 자리 앉아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싫어 생 지랄발광을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울긋불긋 꽃처럼 돋아난 화려한 물질문명에 슴이 턱턱 막혔다.

지난26일 성균관로 정문규미술관에서 열린 김재홍 초대전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을 보면서다.

 

  2년 전 보여준 거인의 잠에서는 갈갈이 찢기고 망가진 땅 즉 병든 국토를 이야기 했다면,

이번에 보여 준 깨어나는 몸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정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물질문명, 즉 돈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케 하는 리얼리즘이라 듯이,

작가 김재홍이 전해주는 시어들은 절규에 가깝다.

 

   

김제홍은 정치적 모순이나 불안한 한반도 평화, 환경의 황폐화, 물질문명에 병든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 등

동시대인이 처한 삶의 문제점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화산이나 지구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핵폭탄 등을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한 작품에서는

보들레르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그대의 증오로 저주받은 이 씨앗은

나를 짓누르는 분노를 솟구치게 할지니

독기 품은 새싹이 돋아나지 못하도록

늦기 전에 이 나무를 아주 비틀어 놓으리라!“

-보들레르의 시 축복’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여행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죽음의 길에서 새로운 미지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목숨 걸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악의 꽃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다.

 

  김재홍이 추구해 온 일관된 작업은 우리민족이 겪어 온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민주화 과정을 겪는 지난한 시대적 사건에서 부터,

국토의 분단과 자연의 황폐화 그리고 핵 확산이 가져올 종말적 위기론까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가 배경으로 끌어들이는 인간의 몸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며 세상이다.

분단의 상처나 핵폭발로 일어 날 비극적 상황을 몸의 상처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반성케 한다.

 

  아래 글은 홍경한 미술평론가의 전시 서문에서 한 단락 옮겼다.

 

김재홍은 정치적·사회적 관계망 속에 거주하는 실존이 겪는 삶의 냉혹한 현실을 기록하고

시대의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을 품격 있게 다룬다.

또 다른 역사화로 <근정전>을 잇는 <안타까운 유산>에서처럼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강력한 논평이 된다.

 

  물론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바로 그의 작품은 형식상 사실주의적 경향을 따르지만 입체적 상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입체적 상상은 상징적인 요소에 의한다. 작가는 상징을 통한 직관성을 회피하는 대신 작품마다 시어(詩語)를 심으며 현실 인식과 성찰의 행간을 만든다. 예를 들어 폭탄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들어선 대지 혹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몸을 그린 <거인의 잠>, <야만의 흔적> 연작은 거칠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다룬 진혼곡이다. 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기록과 생채기들은 엄혹한 현실의 투영이면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익명의 상흔이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26일은 청승맞게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성균관대 부근에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문규씨 집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어렵사리 찾았지만 많은 분들이 뒤풀이 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일 이층에 나누어 내건 대형 작품에 압도되었지만 손님이 너무 많았다.

뒤늦게 작품 보랴 인사 나누랴 정신없었는데, 단양 사는 김언경씨 모습도 보였다.

 

주인공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박불똥, 조경연, 장경호, 박흥순, 안원규, 박상희, 이필두,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최운영, 류충렬, 나종희, 황준연, 이인철, 김진하, 류연복, 이재민, 양상용, 이현정,

칡뫼김구, 성기준, 두시영, 박은태, 곽대원, 손기환, 한상진씨 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화가들이 나왔다.

 

  임정희씨는 동행한 독일 문화비평가 안드레아스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뒷풀이 집인 한국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넓은 식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마침 장경호씨가 자리를 잡아 놔 끼어 앉을 수 있었는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은 갤러리측에서 낸다기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마신 것 까지는 좋았으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탈이었다.

옆에 앉은 손기환씨가 술잔만 비면 따라주는 바람에 정량을 한 참 초과했는데,

문제는 술이 취하면 오버 하는데 있다.

 

  평소엔 말을 잘 하지 않지만, 술이 취하면 검정되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까발리거나 고집하는 게 문제다.

그 날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며칠 후 끝나게 될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시에 꽂혀,

전시 끝나는 다음 날 인사동 거리 전을 하자고 고집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설치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이며 관리는 어떻게 한다는 등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이인철, 김진하, 최석태씨 등 가까이 있는 모든 분에게 반복했으니,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전시장은 텅텅 비고 거리에는 사람이 넘쳐나는 문제점의 대안을 찾고 싶은 궁여지책으로,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을 열면 행인들에게 오래된 추억을 소환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술자리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었다.

술 취한 자의 행복한 노래 쯤으로 여겼으면 좋으련만, 미운 살 박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술이 취해 최석태씨 도움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갔는데, 길거리에서 중국 통 이강군씨를 만나기도 했다.

 

  대학로에서 버스로 출발해 갈아 탄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보니 목적지에서 두 구역이나 지났는데, 술김에 걸었으나 너무 무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시장 찾느라 많이 걸었는데, 며칠은 고생하게 되었다.

부산 같다 온 휴유증도 이틀 만에 간신히 가라앉히고 나갔는데 말이다

사람도 아닌 송장이 사람 행세하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이 전시는 1126일까지 열리니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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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

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지난 1011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57th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들이 나서고 예술하라‘, ’네오룩이 후원한 이 전시는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김진하씨에게 드리는 상이자 짐이다.

 

30여 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바라는 전시다.

 

  사실나무아트'그림마당 민'을 이은 인사동의 자존심이었다.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아트'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현장성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작가가 동참한 것이다.

 

  원로급에 속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화백을 비롯하여 김보중, 김상구, 김억, 김재홍,

 김주호, 김준권, 김진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송창, 안창홍, 윤여걸,

이동환, 이인철, 이태호,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최경선, 최병민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민중미술가 24명이 작품을 내 놓았다.

 

  늦장 부리다 지난 14일에서야 정동지 만나 전시장에 들리게 되었는데,

주말을 맞은 인사동과 연결된 송현동 주변에는 가을 소풍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원조를 만난 듯 눈에 익은 작품이 늘렸다.

 

  송현동 꽃밭 가는 길은 북새통이라 사람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옆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에 사람이 없어니, 기분 더럽더라.

이건 모르는 국민들 잘못이 아니라 이끌고 알려야 하는 정치와 행정의 잘못이다.

 

  전시장은 홍성미씨가 지켰고, 옆 베란다에서 손기환, 김진하씨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는데, 몸이 불편해 끌고 나온 차가 발목을 잡았다.

딱 한 잔만 얻어 마셨는데, 그 맛에 끌려 인사동 벽치기 골목을 배회했다.

 

  사실은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이태호씨가 새긴 홍범도장군 벽화가 보고 싶었다.

마치 유목민상표처럼 유목민앞을 버티고 섰는데, 골목 분위기가 꽉 잡혔다.

이놈들! 어디 나타나기만 하라” 는듯 골목을 지켜주니, 어느 잡귀가 얼씬거리겠나?

 

  ’57th갤러리에서 열리는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오늘이 마지막이라 보실 분은 서둘러야 한다.

일단 좋은 작품이 많다.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함께하는 의미는 더 크다.

 

사진, / 조문호

 

'plan B'를 위하여

나무아트 기금마련

2023_1011 2023_10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보중_김상구_김억_김재홍_김정헌_김주호

김준권_김진열_류연복_박진화_손기환_송창

신학철_안창홍_윤여걸_이동환_이인철_이태호

이흥덕_장경호_정복수_주재환_최경선_최병민

 

후원 / 예술하라_네오룩

 

관람시간 / 12:00pm~06:00pm

 

57th 갤러리

57th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17

(송현동 57번지) 2

Tel. +82.(0)2.733.2657

www.57gallery.co.kr

@57gallery_official

 

나무아트... 1. 지난 35여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이념대립 너머 개별 미술가들의 실존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

 

김보중_나무에 오르다_종이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0
김억 _ 제주용연 _ 한지에 목판 _99×31cm_2023
김재홍_거인의 잠-202105-1_아크릴채색_130.3×97cm_2021
김정헌_풀,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21
김준권_자작나무숲의 가을2_유성목판_32×50cm_2018
류연복 _ 겨울삼선암 _ 소멸다색판화 _60×30cm
박진화 _ 초상 _ 연작
손기환 _Wow !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50×50cm_2023

2. 현존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포괄적 공공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나무아트.

 

신학철 _ Ⅰ -4  한국현대사 _2013
이동환 _ 뒷다리에 힘 팍주고 … _ 유성목판 _25×20cm_2023
이인철 _ 사과 - 탄
이흥덕 _ 소녀 _ 캔버스에 유채 _33.5×33.5cm_2023
장경호 _ 묵시 - 순천
최경선 _ 비오톱의 저녁 _ 캔버스에 유채 _60.5×72.7cm_2017
송창 _ 섬강풍경 _ 캔버스에 유채 _31×41cm_2004

3. 공간의 역사와 성격을 스스로 아카이빙 하며 한국 동시대 미술사의 뿌리이자 줄기가 되고 있는 공간. 그 미술 공간의 디렉터, 비평가, 미술사가로 현장에서의 노동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고투에 찬 미술지식 노동자 김진하. 노역의 퀄리티를 갖춘 채 동요하지 않는 정신. 해방 이후 이런 전시공간과 전문가는 일찌기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나무아트'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더욱 더 한국 당대 미술에 기여할 수 있기 바라며, 이 행사에 저도 마음을 보탭니다. 강성원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를 저지하기 위한 33인의 그림전이

인사동 아르떼 숲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바다에 흘려보내는 방사능 오염수가 자연환경은 물론

인간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과학적이고 안전하다'는 내용의 홍보물까지 제작하여

일본을 대변하고 있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다.

국민 세금을 일본 정부의 만행을 감싸는 데 사용해 할 말을 잃었다.

 

인류의 공유 자산인 바다를 더럽히는 건 미래세대에게 대죄를 짓는 일임에도,

일본 정부에 항의하여 중단시키기는 커녕 조장하는 것이다.

 

국민 앞에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친일을 넘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이성을 잃고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윤석렬 정권은 말할 가치도 없지만,

국민의 대변자인 여당의 태도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으로 당명부터 바꾸어라.

 

그들 앞에도 닥칠 일이지만, 그보다 국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정치의 비참한 말로를 보지 않았던가.

 

의식 있는 작가들이 마냥 두고 볼 수 없어 먼저 불을 지폈다.

아르떼 숲정요섭씨가 나서서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전시 장소가 한정되어 33명의 작품만 걸었지,

천명이고 만 명인들 나서지 않을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작품을 내건 작가는 다음과 같다.

강용면, 고경일, 김건예, 김봉준, 김용주, 김재홍, 김진열, 류경희, 류연복, 류재현, 박건, 박근수, 박야일,

박은태, 박재동, 서혜경, 성효숙, 아트만두, 유진숙, 윤석남, 이윤엽, 이난영, 이달비, 이소리, 이익렬,

이익태, 이인철, 이현정, 전승일, 정영창, 천광호, 칡뫼김구, 한주연 등 33인이다.

 

아래는 일본 핵 오염수 투기에 반대하는 33인 작가의 성명서다

 

결국 일본정부는 핵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말았다.

 

인류는 <코로나19>라는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이웃한 생명을 함부로 대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온 인류가 공포에 떨던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일본 정부는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파괴 행위를 또 저지르고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거드는 국가도 있고, 반대하지만 소극적인 국가도 있고, 일본산 해산물 수입을 전면 중지하는 국가도 있지만 이들 국가는 저마다 국제정세를 따져 자국의 이익 계산에 몰두할 뿐, 바다가 망가지는 것에 대하여 마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바다가 망가지는 것은 국가 이익을 넘어 지구 생명이 망가지는 것이다.

 

바다는 곧 하늘이다.

 

땅과 하늘을 잇는 생명의 고리는 곧 <>이다. 물만이 지구 생명을 살게 한다. 석촌호수 담수량의 4분의 1이나 되는 오염수를 30년에 걸쳐 바다에 버리겠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는 자연에게 인류가 저지른 폭력적인 행위 중에 단연 최악이다. 그들은 변명으로 과학을 들고나오지만 30년 동안 버린 뒤에도 지구 생명에게 안전한지와, 100, 200년 뒤에도 안전한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커녕 데이터도 없다. 원자로 냉각수와 원자로 폭발로 인한 핵 오염수는 전혀 다르다.

 

바다에 버리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은 없는지 묻는다.

 

단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핵 오염수를 온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의 터전인 바다에 버리는 행위는 반인륜적이며 반생명적이다. 숱한 생명을 살상한 태평양 전쟁의 전범국가로서 자숙하고 또 자숙해야 할 일본의 후안무치한 핵 오염수 폐기행위를 동시대 미술인으로서 강력히 규탄한다.

 

대한민국 정부에 묻는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정부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인류에게 숱한 가해를 저지른 일본은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이 해야 할 배상을 대신 하겠다고 나서더니, 이제는 일본의 핵 오염수 투기마저 적극적으로 거들고 있다. 국민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다. 국민 불안과 일본 편들기 중에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바다에 버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라고 요청한 적이 있는지 묻는다.

 

핵 오염수 투기를 하는 당사국이 발표하는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

 

또한 이에 동조하는 국제기구 및 우리 정부의 데이터도 신뢰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해양투기를 당장 중단하고 이해 관계국을 제외한 제3국이 연대하고,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한 기구를 세워서 뭇 생명에게도 공정이 담보된 조사와 감시를 해줄 것을 제안한다. 생명평화예술을 지향하는 전세계 예술인에게도 핵오염수 투기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 나설 것을 호소한다.

 

2023923

일본의 핵오염수 투기를 반대하는 작가 33인 일동

 

지난 923일 오후 2시에 열린 작가 발언대에는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고경일, 김봉준, 김용주, 류연복, 박 건, 박재동,

성효숙, 이달비, 이익태, 이현정, 천광호, 칡뫼김구씨 등의 참여작가들이 나와 각자의 소견과

문제점을 제기했고, 출품 작가 외에도 장경호, 김이하, 정덕수, 배경애, 김지소, 황준연씨 등 많은 분이 참여하여

핵 오염수 방류를 성토했다.

 

전시작품들 대부분이 핵 오염수 방류에 따른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말하고 있으나,

김재홍작가의 그림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친일 권력자들을 풍자했다.

 

그리고 이익태 작가의 그림은 사람이 물처럼 흘러 내리는 형상이라 소름 끼쳤다.

 

김봉준 작가는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달비씨 그림은 바다에 편지가 든 병 하나가 떠 있었다.

그 병 속에는 후쿠시마에서 쫓겨난 소녀가 쓴, 바다에게 사죄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악몽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눈앞에 다가올 현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현정의 그어지다, 지우다퍼포먼스가 벌어졌다.

 

관객들이 색깔 묻은 붓으로 그리는 족족, 작가는 닦아 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자욱은 남았다.

 

나중엔 사람들이 붉은 뜨게 실에 낚시처럼 걸려들었다.

 

바다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닦아내는 행위에서 위안부는 왜 떠오를까?

 

그 또한 일제가 저지른, 인간으로서 저지르지 못할 죄악이 아니었던가?

 

성효숙 작가가 상처받은 자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장면에서 한 가닥 희망도 보였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아래는 문화비평가 정요섭씨 전시 서문에서 잘라낸 글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를 빌려 쓰는 세대입니다. 지구를 이 지경으로 파괴시킨 것도 모자라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바다에 버리는 것은 유의하고, 유의하고 또 유의할 일입니다. 안전하다고 우길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국익을 말하지만, 국민의 생명, 지구의 안녕보다 우선한 국익이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잔꾀로 상대를 속인다는 조삼모사를 떠올리는 까닭입니다.

작가는 시대 의제를 상정하는 사람이라 여깁니다. 이 해괴한 상황에 대해 작품으로써 발언해야 할 때입니다. ‘아르떼 숲은 시대 의제를 비켜 가지 않고 작품으로 맞서 온 33인 작가의 작품으로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를 의제로 삼아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지구 생명 모두의 부릅뜬 관심과 움켜쥔 참여를 바랍니다.

 

전시는 1012()까지 열립니다.

명절에도 오후 6시까지 볼 수 있으니, 구경하세요.

그냥 넘길 수 없는 눈 앞에 닥친 심각한 문제기도 하지만, 작품이 아주 좋습니다.

추석연휴를 맞아  도랑 치고 게 잡으러, 가족들과 인사동 나오세요.

 

사진, / 조문호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지난 5월17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좋아하는 화가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라, 기대했던 전시였다.

 

전시장으로 가다 지리산에 은거하는 무예가 하태웅씨를 만났다.

그 역시 ‘모심’전을 보고 가는 길이라는데, 그날 일진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그 날은 가야 할 전시가 세 곳이나 되어 ‘일타삼피’라며 좋아했으나,

반가운 분들 만나다 보면 술에 녹초가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덱스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창성의 ‘나는 시민군이다’전과

김진열의 ‘모심’전은 민중의 한과 연결되어 궤를 같이한 전시라고 느껴졌다.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민중들의 아픔을 담아내는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4시에 개막식이 열린 ‘나는 시민군이다’부터 보고 갔더니,

김진하관장과 나종희씨 두 분만 남아있고 모두 뒤풀이 집으로 가버렸다.

 

전시된 작품을 돌아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레오록’에 소개된 작품을 보긴 했으나 실제 작품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만든 작품들은 마치 찢기고 분열된 민중의 노동이고 상처였다.

투박한 질감은 존재 자체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용도를 다해 휘어지고 녹슬거나 쇠락한 사물을 연결하거나 덧붙인 형체 위에

붓질한 드로잉은 막 쌓아 올린 토담처럼 간결하면서도 원시적 편안함을 주었다.

 

투박한 조형적 감수성이 빚어낸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경외감이 일었고,

버려진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역동적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작가의 삶이 베인 원시적인 힘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직관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물질과 거침없는 붓질에서 민중의 울림이 일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김진열씨의 생명존중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비평 ‘투박한 존엄, 그 생명의 모심’으로 부족한 소견을 대신한다.

 

“김진열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윤의 판화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처럼 익명적 민중성을 확보한다. 다만 오윤이나 리베라가 객관적으로 기호화된 인물의 전형성을 확보했다면, 김진열의 인물들은 정서를 환기하는 추상적 기운으로 기능하는 점이 다르다. 김진열의 작업이 사실주의적 재현성보다는 표현주의적 속성에 가까운 건, 정형적으로 패턴화된 캐릭터를 부여받은 인물 구성 방식에서 이탈하는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인해서다. 그런 면에서 김진열의 비정형적 형상성의 회화적 긴장감은 오히려 싱싱하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05243701

전시는 5월30일까지 열린다.

 

작품에 대한 여운을 안은채, 뒤풀이 장소인 ‘사랑채’로 갔더니, 김진열씨 외에도 미술평론가 최석태,

화가 장경호, 김 구, 손기환, 김재홍, 이태호, 이재민, 이운구, 이흥덕, 조신호, 김이하시인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앞쪽에는 지방에서 오신 손님들이 계셨고 다락방까지 가득 차 끼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가운 분들 사진 찍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신 술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주를 드시는 분이 없어, 탈 많은 막걸리를 마신 게 마음이 걸렸다.

 

정동지를 '사랑채'에 남겨둔 채, 이창성씨 뒤풀이가 열리는 ‘부산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막식에서 사람이 많아 인사도 드리지 못한 이창성선배께 인사도 드리고,

시민군 방송원이었던 차명숙씨 더러 40여 년 전에 찍힌 예쁜 모습에 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왜 술만 취하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놈의 술만 들어갔다 하면 180도로 바뀌어 버린다.

정동지라도 같이 있으면 덜 할 것 같아 부산식당으로 불렀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김문호, 이규상씨와 ‘사랑채’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김문호씨와 이규상씨는 언제 갔는지도 모르겠고, 정동지마저 줄행랑쳤다.

오죽하면 인사동 물귀신 장경호씨가 택시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겠나?

뒤늦게 찍은 사진을 보니, '예당'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임경일씨 모습도 보였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해, 술 자리는 일체 가지 않기로 맹세했으나, 이 역시 개 맹세 될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0작성]

지난 2일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재홍씨의 ‘거인의 잠’이 개막되는 날이라 서둘러 인사동 '나무화랑'으로 갔다.

 

여지 것 전시 개막식을 비롯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온 금기를 깰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공이 만만찮은 재홍씨의 작품도 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역전의 화가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었다.

 

안국역에서 내려 지하도로 올라가니 화가 김 구씨와 류연복씨는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렸다 일산 손장섭선생 상가에 간다”고 했다.

나 역시 문상도 가야지만 전시장부터 들렸다. 매번 꾸물대다 늦게 오는데, 전시장 문 닫을까 서둘러 올라갔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아직 많은 분들이 계셨다.

전시작가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김정헌, 박불똥 조경연 부부, 이태호, 이재민, 박세라씨 등 여러 명이 작품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리뷰를 보아 대략의 내용은 알았지만, 작품 앞에서니 마치 스스로를 바라보는 듯한 먹먹한 느낌이 일었다.

상처투성이의 노쇠한 몸이 품은 의미야 해석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희멀건 잿빛 형상들이 피폐한 자본주의에 병든 인간들의 내일을 예언한

죽음의 묵시록처럼 다가왔다. 거인의 잠이 거인의 죽음으로 비친 것이다.

 

작가는 선문답처럼 ‘거인의 잠’이란 제목만 붙여놓고 일체의 말이 없었지만, 인체의 부분으로 상처 난 땅을 형상화한 상징적 이미지였다.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폭력과 굴곡의 세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묵언의 땅인 것이다.

 

김재홍씨가 3년 전에 보여 주었던 인간 탐욕의 폭력성을 고발한 “살”전 과는 또 다른 울림이었다.

그는 인간을 향한 폭 넓은 주제를 택하지만, 핵심을 상징화해내는 탁월한 작가적 역량을 가졌다.

그래서 또 다음 전시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 전시는 오는 15일까지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사람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20년도 더 지났지만, 처음 대면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자라섬에서 열린 자연설치미술전에서 김언경씨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첫 인상이 착한 시골선생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단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작가였다.

 

각설하고, 전시장에서 내려 와 뒤풀이 장소로 정해진 ‘유목민’으로 갔다.

 

술집 골목 초입부터 화가들이 자리 잡아 앉을 틈이 없었다. 코로나 시국의 손님 없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신학철, 이요상선생을 비롯하여 김건희, 김언경, 차기율, 이필두, 최운영, 나종희, 류충렬, 최석태, 우문명, 유근오, 성기준, 김영진,

조신호, 장경호, 김경서, 최완수, 그리고 배우 이재용씨 등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역전의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뒤늦게는 불화가 이인섭선생과 장 춘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조명환씨도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술 마시느라 혼자 바빴다.

홀짝 홀짝 마신 술에 가랑비에 옷 젖듯 취해 버렸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소리도 나지 않는 목소리로 돼지 목 따듯 노래까지 불렀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만의 사건인가? 대취 했지만 기분 좋게 마시어 그런지 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다들 떠난 뒤에도 ‘유목민’ 주인장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박혜영, 장춘씨와 어울려 마셨는데,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훨씬 지났더라.

 

원님 덕에 나팔 분 최고의 날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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