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6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민중미술의 거장 신학철선생의 포토꼴라주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질곡의 한국현대사로 엮어 낸 포토꼴라주 작품은 지난 10월 6일부터 오는 11일 1일까지 열린다.

 

‘나무아트’와 ‘유목민’을 오가며 벌어진 보름 동안의 전시로 녹초가 되었으나 쉴 수도 없었다.

이어지는 전시가 신학철선생의 포토꼴라주 전이기 때문이다.

 

신학철 선생은 아직도 청년처럼 피가 끓는다.

얼마 전 '인사동 사람들' 사진을 찍기 위해 어렵사리 인사동에 나오시게 했는데,

그 날 핸드폰으로 보여 준 최근작 두 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현대사와 연결된 ‘갑돌이와 갑순이’ 시리즈로, 춘화도 그처럼 힘찬 춘화는 여태 보지 못했다.

온몸에서 힘이 솟구치는 그게 바로 신선생의 열정이고 에너지의 소산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두 남녀의 사랑에 의해 민족 통일이라는 거대 담론까지 만들었다.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희망찬 앞날을 기대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선생의 얼굴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깔려있다.

우리의 근대사가 가슴 아프듯 선생의 삶 또한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거다.

그 가슴 아픈 한이 그림 속에 배어들어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한때 공안당국에 의해 압류된 전시작품 ‘모내기’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지만,

이미 선생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야 잘 알려져 신학철 선생을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선생의 작품세계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굴곡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번에 보여준 포토콜라주 작품들은 선생의 자전적 체험과 역사의식을 담아낸 소중한 전시임이 틀림없다.

사료로서 사진보다 더 진실성을 가진 매체가 어디 있겠는가?

사진을 채집하고 맥락을 연결하거나 축소 또는 확대의 복사과정을 거치는 등,

종이에 흑백 사진을 오려 붙여 가며 누적된 역사의 층위를 이루어 낸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성된 틀이 캔버스에 옮겨지며 완전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 포토꼴라주는 캔버스에 옮겨지기 전의 작품으로, 사진으로 치면 필름 원판에 해당하는 셈이다.

선생의 작품가격은 서민들이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싸지만,

소장 가치가 높은 포토꼴라주 소품 한점이 250만원 정도라니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전시가 시작되는 지난 6일 오후 다섯 시경 전시장에 들렸는데, 생각보다 덜 붐볐다.

어느 방송 팀이 촬영을 하고 있었고, 신학철, 이효상 선생 내외분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이종승, 송 창, 정영신씨도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아는 작품도 있었으나 처음 보는 작품이 많았다.

역사적 팩트와 작가 내면의 무의식을 긴밀하게 콜라주한 작품에서

작가의 치열한 정신력과 탁월한 조형적 능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개인에게 판매할 작품이 아니라 역사박물관에서 일괄 소장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

아무리 거리두기로 외출을 삼가해도, 틈내어 꼭 한번 관람하시길 바란다.

 

전시 뒤풀이 장소로 정해진 ‘유목민’으로 갔더니

김정헌, 장경호, 박윤호, 황경애씨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춘천에 계시는 황효창화백 내외분도 오셨으나

술 한잔 드시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라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박불똥, 조경연 내외를 비롯하여 송창, 나종희, 방기식, 김진하,

김구, 박세라, 김세균, 장의균, 장 춘 노광래, 최효준, 김이하, 조준영,

황정수, 우문명, 조명환, 이인섭씨 등 많은 분이 오셨더라.

 

반가운 분들이 많은 이 좋은 날, 몸이 편치 않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쉽지만 줄행랑쳤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월2일 오후6시, '인디프레스'에서 ‘한국현대 형상회화 2016’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화가 장경호가 인사동 ‘관훈미술관장’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열어 온 전시다.

한 푼 없는 가난한 화가 입장에서 매년 치룬 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아직까지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형상미술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고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형상미술은 80년대 초반, 민주화가 진행 중인 시대에 격렬한 예술로서 시대적 위기에 맞선

인간과 삶의 문제를 풀어가던 우리 미술의 한 축이기도 하다.

그 무렵 세상 밖으로 밀려나온 민중미술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당시 한강미술관장으로 있을 때, 젊은 에너지를 일으켜 장경호를 민중작가로 보는데, 그 건 아니다.

민중미술보다 형상미술이 삶과 시대현실에 더 강하게 다가가게 했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경호는 화가이기에 앞서 이론가이고 기획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통해 잘 못된 세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진정한 형상미술 작가가 얼마나 될까?

그 해답으로 장경호가 끌어낸 작가가 이번에 출품한 작가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술을 제대로 모르는 내가 보아도 참신하고 신선했다.

지난 해와 달리 박불똥에서 정복수로 일부 선수가 교체되었지만, 모두가 말하려는 개성이 뚜렷했다

공성훈,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차혜림, 최경선, 최경태, 황세준씨 등 열 한명의 작품이 걸렸는데,

내가 몰랐던 또 다른 가치를 일깨우게 한 전시였다.

장비처럼 호방하게 생긴 장경호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그림이 많지 않다.

왼 만하면 내 놓아도 될 텐데, 쪽팔리기 싫어 지우기를 반복하니, 그림이 남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좋지만, 오래전 본 최시형의 초상화가 더 강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올 해 중에 열릴 ‘나무화랑’ 초대전이 벌써 기다려지는데, 이 친구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

술 자리를 넘보아 그게 맘에 걸리지만, 살아남기 위해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

‘한국현대 형상 회원전’에 장경호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가 주도하는 전시이기도 하지만,

형상미술하면 그를 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날 작가들 외에도 김세균 정의당 공동대표인 김세균선생,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사진가 정영신, 강고운시인,

김정대 관장, 노광래 관장, '아라리오 서울'의 박선영씨, 배성일씨 등 많은 분들과 어울려 ‘청하’에서 취했다.


이 전시는 통인동에 있는 '인디프레스'(010-7397-8498)에서 2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전시장에서 만난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와 신화철 화백


어느 애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하나 뿐인 나의 아들에 대한 회한은 남다르다.
왜냐하면 애비구실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을 ‘햇님’이라고 지었겠는가.
밝고 강하게 살라 붙였건만, 눈물을 더 많이 흘리게 했다.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자식까지 팽개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부산에서 사진 한다며, 무작정 상경했던 시절이었다.
석관동에 셋방 하나 얻어 살았는데, 대책없이 사창가에서 윤락녀들
사진이나 찍고 있었으니 집안이 편할리가 없었다.
결국 이혼하여 아내와 아들은 연고지인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 서서 울고 있었다.
내 마음에 큰 대못을 박았다. 그렇게 헤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내가 아들에게 한 것이라고는, '경성대' 사진과에 다닐 때 등록금 보내준 것뿐이다.
그 것도 등록금 때문에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으나 
아들 대학졸업과 동시에 그만두었다.

그 이후 아들은 패션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돈이 되지 않아 사진을 접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료기 외판원에서부터 온갖 일을 다 한 것으로 알지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거나, 지역 봉사하는 사진들을 만나면
속이 터졌다. 그래서 정의당원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말릴 일은 아니었다.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누군가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지 것 정치판을 더럽다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급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오염이 안되었다고 판단한 정의당에 들어가, 아들과 동지가 된 것이다.
나야 정치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에 불과하지만,
아들은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김제남의원 지역보좌를 맡고 있었다.

몇 일 전 신학철선생으로 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노동 정치 연대’ 상임대표로 있는 양경규씨와 같이 저녁식사 한 번 하자는 것이었다.
아들과 함께 오라기에 물었더니, 양경규씨를 돕기 위한 자리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3일 오후, 약속장소인 인사동으로 나갔다.
먼저 신학철선생을 만나러 간 ‘인사아트’ 전시장에서 양경규씨를 만났다.
노동분야 전문가인 그에 대한 이력은 알고 있었으나, 첫 만남인 셈이다.

만찬장소인 ‘하늘풍경’으로 옮겼더니, 정의당 공동대표인 김세균선생도 오셨더라.
그 날 자리는 노동과 예술을 연대하려는 양경규씨의 의도에 만들어졌다.
정의당 전사로 발 벗고 나선, 그를 돕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정의당의 대소사를 기록하고 알리는 일은 물론, 노동운동에 사진을 활용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대기업의 횡포와 각종 탈법과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불공정,
힘없는 소수자에 대한 멸시와 핍박 등 공정 사회로 가려면 한 참 멀었다.
이런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투쟁은 다수 대중과 더 멀어질 뿐이다.

인간적인 접근으로 대중의 힘을 결집시키야 할 양경규씨의 지혜가 절실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의당 김세균 공동대표


좌로부터 양경규, 김세균, 신학철선생


'노동 정치 연대' 양경규 상임대표





정의당 은평구위원회 사무국장 조햇님






좌로부터 조문호, 신학철, 김세균, 양경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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