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최울가가 서울서 전시를 한다기에, 정 동지를 앞 세워 평창동 ‘가나아트’로 갔다.

 

월요일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1, 2, 3관으로 이어지는 넓은 전시장에 회화는 물론 조각과 드로잉까지

60여점이 제 자리를 지키 듯 경쾌한 놀이마당을 펼치고 있었다.

 

제목으로 내건 ‘화이트, 블랙, 레드+’ 시리즈는 물론 최근에 시작했다는 스티커 입체화도 있었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다.

세삼 그의 천진무구한 즉흥적 자유로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여느 작품처럼 무거워 보이거나 난해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재미와 즐거움이었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나 어항, 물고기나 새, 그리고 상형문자 같은

기이하고도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나열이 산만하지 않고 절제돼 보이는 까닭이 뭘까?

그건 바로 인간이 언어로 소통하기 전부터 남긴 벽화 이미지, 즉 원초적 미의식의 발로라 여겨진다.

 

왜 최울가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화단에서 한국의 대표작가 중 한사람으로서 주목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5년 전, 최울가 작업실에서...

 

난, 최울가를 40여 년 지켜보았다.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며 작업하는 터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만나면 술도 받아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는 아우 같은 벗이다.

 

오래전 부산 남포동에 국악을 들려주는 ‘한마당’이란 술집을 차린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며 그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물론 그 때는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 무렵 자주 드나들던 화가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이존수와 박광호도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점도 우연치고는 남다르다.

 

다들 나름의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한 사람은 대학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 돈은 벌었지만 돈이 사람을 망쳤고,

고집스러운 한 사람은 돈이 없어 고생하다 안타깝게 이승을 떴다.

그러나 최울가는 돈에 집착하지 않아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정선 집 화재로 모두 태워버렸다.

 

오래 전 박광호도 자신의 그림을 모두 태운 적이 있지만,

최울가도 10여 년 전 뉴욕 그라피티의 자유분방함과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실험적인 설치미술에 충격 받아 이전에 그려놓은 작품 200점을 미련 없이 불태워버리고 재충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애착가진 그림들은 왜 불과 연관이 있을까?

 

30년 전 최울가가 선물했던 불 탄 작품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 오는 날 개울가에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아래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동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당시 최울가 작품은 대부분 시적인 천진난만함이 깔려 있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작품마저 소실되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돈이 없어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카메라를 전당포에 잡혀도

그림들은 팔지 않았는데, 그마저 나에겐 욕심이었단 말이던가?

 

이제 최울가의 사는 방법과 작품세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Black & White’ 시리즈로 뉴욕 화단에서 주목 받은 최울가는 국내는 물론 파리,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세계무대를 누벼왔다.

‘Black & White’ 시리즈에는 일상적 삶과 관련된 요소들로 채워졌다.

관계성 없는 사물들의 무질서한 공존은 작가가 가진 무의식의 세계였다.

 

특징짓는 검은색과 흰색은 그가 생각하는 우주와 빛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색이다.

이  두 가지 색을 사용해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다.

 

최울가는 30년 넘게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았다.

뒤늦게 파리국립장식예술학교와 베르사유미술학교를 나와 2000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으로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자리가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삶의 공간을 떠나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자 앞에는 유목민이란 말이 항상 따라 다닌다.

아마 그의 몸에 새로운 땅을 찾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나보다.

 

유목민처럼 떠돈 것은 그 낮 선 이질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다시 동질적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현실적 공간이 작가의 몸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으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데도,

낮 선 세계, 즉 새로운 장소에 거주하는 경험 자체가 작품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리고 삶터의 이동이라는 유목성이 최울가 예술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중복되는 이미지와 중첩적인 텍스트 사이의 유동성이 최울가 예술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본질적으로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던가?

그 유동성이 특정한 감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초월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왔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해 꿈을 꾸 듯 동화 속 한 장면을 대하는 것 같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은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이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도 한 몫 했다.

마치 아이들의 낙서와도 같은 그의 작업은 눈에 익숙한 잘 그린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대상의 재현이 목표가 아니라 원초적 미의식에 바탕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하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의 끝없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끌어 낸 것이다.

 

최근 그는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더욱 다양한 매체와 형태의 작업을 시도한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그림이 그중 하나다.

그의 신작 ‘Beetle Series’는 입체평면 스티커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이전에도 종종 스티커를 배경에 부착해 화면에 변화를 주곤 했으나,

이번 연작들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벽면에 붙이고 노는 것을 연상시킨다.

시계, 꽃병, 사람 머리 같은 시리즈를 구성하는 이미지를 에폭시 스티커로 채워놓았다.

재료든, 형식이든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림에 표기된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에 다름 아니다.

기호로 채워진 그 촘촘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일 것이며,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그만의 놀이 법인 셈이다.

 

그의 그림들은 원초적 자유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본연으로 돌아가라고 노래한다.

도식화된 삶을 살아가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깨우침을 준다.

 

최울가 최근모습, 인터넷에서 스크랩

 

최울가의 ‘화이트, 블랙, 레드+’전은 오는 30일까지라 며칠 남지 않았다.

(평창동 가나아트 / 02-720-1020)

 

사진, 글 / 조문호

 

전시를 보고나서 담배 생각이 나 옥상으로 올라가다 깜짝 놀랐다.

누구 작품인지 모르지만, 소녀가 거꾸로 서서 쩍 벌린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투 강박관념에 나도 모르게 줄행랑쳤다

아이구!  숨차...

 

지난 29일, 김윤수(1936~2018)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1주기를 맞아  묘비 제막행사에 이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추모제와 추모전도 열렸다.

 

이어 김윤수 저작집 간행위원회장을 맡은 유홍준씨가 나와 그동안의 편집 과정을 설명했다.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어렵사리 분류했는데, 책을 펴낸 출판사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창비’ 직원들이 나와 미망인 김정업씨에게 책을 전해주는 전달식도 가졌다.

 

백낙청씨는 추모사를 통해 30년 이상 계간지 ‘창작과 비평’ 발행인으로 일하신 선생이 계셨기에 오늘의 ‘창비’가 가능했다며 김윤수 선생을 그리워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관장은 추모사에서 선생께서 남긴 방대한 원고와 자료들을 정리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아카이빙하겠다는데, 사회자인 임옥상씨는 "전관예우가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임진택씨의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추모공연으로 추모제는 마무리되었다.

 

또한 ‘서울옥션하우스’에서는 신학철씨를 비롯한 50여명이 출품한 1주기 추모특별전이 개막되어 5일까지 열린다

 

김윤수 선생은 민족예술과 민중미술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얼리즘 미학의 대부로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맹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장, 계간 '창작과비평' 발행인을 역임하셨다.

 

이번 1주기를 맞아 김윤수 선생의 저작집(전3권 / 가격100,000원)도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저작집은 김윤수 선생이 별세한 후 김윤수 저작집 간행위원회(위원장 유홍준)가 구성되어

지난 1년 동안 김윤수 선생의 저술과 자료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미술비평과 명작해설, 전시회 소개문 등 예술현장에 몸 담은 고인의 흔적을 주제별로 묶었고,

후학들의 회고담과 인터뷰를 부록에 담기도 했다.

 

'리얼리즘 미학과 예술론'에는 미학자로서의 기조를 담은 글을 모았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작가론'에는 우리 미술사와 근현대 작가에 관한 작가론 등 미술사가로서의 글이 담겼다.

'현대미술의 현장에서'는 미술평론가로서 현장비평에 몰두하며 쓴 글이 실렸다.

 

유홍준씨는 간행사에서 "펴내고 보니 마치 살아생전 선생의 모습뿐 아니라 좀처럼 뵐 수 없었던 모습까지 다시 만나는 것 같고,

선생의 예술적, 학문적, 사상적 깊이에 더욱 깊은 존경심이 일어 난다"고 적었다.

 

출판사측은 "선생은 일생 동안 누구보다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예술가와 독자를 설득해왔고,

예술의 창조성이 가장 빛날 때야 비로소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며

김윤수 선생이 남긴 인간과 예술에 대한 성찰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 될 것"이라 했다.

 

추모제가 끝나고, 두 곳에 나누어 마련된 만찬장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하여 선생을 기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 함께한 분은 다음과 같다.
김정업, 백낙청, 유홍준, 임옥상, 김정헌, 윤범모, 임진택, 채희완, 두시영, 김영종, 이태호,

최종태, 주재환, 심정수, 신학철, 박종관, 이애주, 박재동, 김정환, 민정기, 성완경, 공선옥,

김건희, 노원희, 임정희, 박홍순, 이종구, 박은태, 장경호, 김영동, 최석태, 김천일, 홍선웅,

이광군, 곽대원, 김종근, 김준권, 박불똥, 조경연, 박세라, 정재안, 김천일, 정영신, 손병주,

서인형, 노형석, 손기환, 김이하, 정영철, 조명환, 노광래 씨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신학철작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리얼리즘 미술을 재조명하는

한국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고 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현실과 발언'전으로 시작되어, 1984년 '한강미술관'개관, 1985년 '아랍미술관'의 

'20대의 힘'전 사건, 1985년 '민미협'창립, 1986년 '그림마당 민'개관 등은 70년대 이후 모더니즘 일색이던

화단에 큰 변혁을 일으키며 '80년대 미술'을 꽃피웠다.


작품들이 철거당하고 작가들이 연행되는 등 많은 질곡의 세월을 거쳤으나,

뜬 구름 잡듯, 현실을 무시한 예술지상주의에 쐐기를 박고, 미술이 사회현실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아무튼 기존의 미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면, 그 대척점엔 이른바 '민중미술'을 포함한 '리얼리즘 미술'이 있었다.


이 기획전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민중미술’의 구작들이 주를 이루었다.

민중미술계열 전시였으나, 이와 전혀 무관한 오치균, 고영훈씨를 끼워 넣어 기획의도를 아리송하게 했다.



콜라주 기법을 통해 역사의 흐름과 모순을 그려 낸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황재형의 사북탄광 풍경과 광부,

그리고  이종구의 쌀 포대에 그린 농민들의 모습,  형상의 근원을 찾아가는 권순철,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의식의 각성과 시각적 혁신을 보여주는 임옥상의 들불,

실경 산수를 새롭게 해석하는 민정기씨 등 우리나라 민중미술가 여섯 명이 참여했다.


이 전시는 우리 미술사의 한 부분을 다시 보여 준다는 것 외는, 큰 의미는 지니지 못했다.

참신한 기획력이 없고, 전시 구성도 왔다 갔다 했다.

민중미술 작가군에 끼지 않는 이질적인 작가를 뒤 섞어 놓은 것도 속보인다.

사실 단색화그림의 인기에 이어, 민중미술이 뜨고 있는 현실을 간파한 기획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민중미술의 특징은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향수를 돌아보다 것 보다, 현재 진행형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많은 민중작가들을 제외한 채, 유명작가 위주로 향수를 건드린다는 건, 다분히 장삿속이다.

이건 오히려 민중미술의 힘을 꺾으려는 의도가 숨은 게 아닌 가 의심된다.

그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지난 달 ‘인사가나아트’에서 열린 “7인의 사무(또)라이”전을 들고 싶다.

이 전시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젊은작가들이 모여,

없는 돈 끌어 모아 대관료까지 물고 열었으나, 전시 직전 갤러리 측에서 제동을 걸었던 전시다.

결국 전시장 입구에 가림 막을 치고 미성년자는 볼 수 없는 전시로 합의하여 전시는 치렀지만,

지레 겁먹어, 스스로 본색을 더러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화예술로 돈 버는 이가, 무슨 권력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단 말이냐?

못된 자본권력이 문화권력으로 둔갑해 예술가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가나인사아트' 전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2월 28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3,000원


글/ 조문호


전시된 황재형 작품일부


신학철작


신학철작


황재형작


황재형작


황재형작


이종구작


이종구작


권순철작


권순철작



임옥상작


임옥상작



민정기작


민정기작


오치균작


오치균작


고영훈작


고영훈작


위 아래 작품은 신학철씨의 작품으로 기존작품과는 전혀 다른 서정적 향토성을 띄고 있다.

소장자는 본 전시자문을 맡은 유홍준교수


 

가나아트센터의 이호재(61) 회장


수집한 200여점·부동산 기증

국내 미술계 대형화랑인 가나아트센터의 이호재(61·사진) 회장이 사재와 소장품을 기증해 재단법인 가나문화재단을 꾸렸다.

김형국 재단 이사장(전 서울대환경대학원 교수)과 윤범모(가천대 교수)·임옥상(작가) 이사는 27일 낮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단 출범을 발표했다.

김 이사장은 “이 회장이 가나아트센터와 서울옥션의 경영 경험, 그간의 미술재(美術財) 축적을 공익화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함에 따라 그의 사재와 소장품을 기반으로 재단을 세우게 됐다”고 밝혔다. 재단은 창립 자본금 3억원 규모로 이 회장이 당분간 매년 3~5억 정도의 운영자금을 출연하게 된다. 이 회장은 아울러 그가 20여년간 수집해온 한국 근대미술가들의 작품 200여점을 비롯한 개인컬렉션과 부동산 등을 재단에 기증하기로 했다.

국내 화랑주가 사재를 털어 공공적 성격의 문화재단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단 쪽은 앞으로 작가들의 국내외 작업실 입주·창작 지원과 국내 화랑주들의 회고록, 미술관련 출판 지원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월북작가 등의 미공개 미술자료 공개전, 가나아트 소장 컬렉션전을 해마다 열며, 3년 안에 미술관도 세우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국내 화랑주가 미술관을 만드는 첫 사례로, 서구의 세계적인 화상 바이엘러와 매그의 뮤지엄 등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재단쪽은 설명했다.

한겨레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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