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길거리 거품과 꼬마 여권 화가

영국 인디펜던트 지 2일자에는 한국에 관한 재미있는 사진 2컷이 실렸다. 이 중 커다란 거품사진은 기자도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인사동 쪽에서 보았던 광경이다.

▲ 2 June 2014 Tourists react to a large bubble created by a street performer in Seoul Ed Jones/AFP/Getty Images(관광객들이 길거리 공연자가 만든 커다란 거품에 즐거운 반응이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기자 눈에는 사진 속의 사람도, 기자가 본 그 순간의 사람들도 관광객이 아닌 우리 시민들이었다. 하긴, 저꼬마 아이는? 하 하 ...

 

그 날 기자가 인시동에서 보았던 순간에는 거품이 잘 만들어지지 않아서 사진 찍는데 실패하곤 아쉬어 했다.  바로 그 거품이 영국 일간지에 실리다니 '호기심을 갖게 되는 사람의 느낌은 비슷하구나.'란 생각을 다시하며 우리 사진 대신 인디펜던트 지의 사진을 올린다.

 

또 다른 사진은 한국에 여행왔다  4살짜리 아들의 귀여운 장난 때문에 공항에 발이 묶인 중국인 가족의 사연으로 보는 이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재미난 그림들

 

보도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 성 천(陈)씨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공항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여권이 낙서장으로 변한 것을 알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씨가 웨이보에 공개한 웃음을 안겨주는 여권 사진.  큼지막한 눈, 턱에 난 수염, 사진 옆에 자리한 정체불명의 캐릭터까지. 이는 모두 천씨 아들의 작품이었다.

 

 

 

▲ 2 June 2014
Diners take lunch suspended in the air above the Parc du Cinquantenaire in Brussels."Dinner in the sky" is an "unique occasion" to discover Brussels's high cuisine and enjoy a spectacular view of the city from the air GEORGES GOBET/AFP/Getty Images.  (World News in Pictures. The Independant.)브러셀의  "Parc du Cinquantenaire" (50주년 공원) 공중에 떠있는 하늘 식당에서의 식사! 멋진 경관과 고품격 요리를 즐기는특별할 경험.

 
로타리 회원들과 그의 친구들이 시드니 하버 브릿지에 올라 세계 기록 갱신에 도전하고 있다. 한 순간에 가장 많이 올라간 사람들과 깃발들.
 

 

 

▲ 30 May 2014
Rotary members and friends climb Sydney Harbour Bridge in an attempt to break the World Record for the most people on the bridge at one time and also the most flags on the bridge at one time in Sydney  (World News in Pictures. The Independant.  PETER PARKS/AFP/Getty Images)

 

[고양인터넷신문 / 이나미]

 

박찬숙 앵커가 찍은 사진 작품 ‘모정’.

 

“새벽을 깨우는 것은 불면의 밤만은 아니었다. 보는 이의 느낌대로 새벽의 색깔은 하루를 열고 있었다. 날마다 다른 색깔로 새벽을 여는 곳에서 나의 새벽을 열었다.”

이런 글을 내걸고 사진 개인전을 연 건 카메라를 산 지 6개월 만이었다.

“40여 년간 카메라에 찍혀봤으니 사진을 찍으면 잘 찍을 거요.” 30여 년을 사진작가로 산 김 사장의 권유였다. 그길로 카메라를 한 대 샀다.

그해 2011년은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비가 내렸다.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비를 멋있게 만날 수 있는 곳을 고민했다.

들판은 물에 잠겨 하얀 광목이 펼쳐진 듯했다. 산골짜기에는 빗물이 모여 비탈길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로등에는 대여섯 마리의 까치가 모여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둔치는 폭우에 잠겨버렸다. 구조용 장비들은 강변도로, 올림픽대로 위에 냉큼 올라와 있다. 수위를 가늠하는 한강다리의 눈금 수치가 걱정스러워졌다.

그렇게 비는 내리고 또 내렸다. 내가 찍을 수 있는 것은 비뿐이었다. 물뿐이었다. 몇 달을 이어가는 장마 속에서 사람들은 걱정이 쌓여갔다. 사는 것에 대해, 그리고 피해에 대해.

가끔 그 틈새에 펼쳐지는 구름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런 날은 한강다리 위나 아파트 옥상에 사진애호가가 구름처럼 몰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엄청나게 좋은 카메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에 놀랐다. 삼각대를 뻗쳐놓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주눅이 들곤 했다. 개인전은 한 번도 안 한 아마추어라면서도 저마다 소유한 카메라의 가치는 물론이고 몇 십 년간 사진을 찍으며 경험한 무용담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완전 초보인 나는 저물어가는 현란한 저녁놀은 그냥 놔둔 채 아무것도 재미있게 해보지 못하고 이 나이가 된 것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새벽 나들이

커튼을 젖혀보고 빛이 보일 듯한 새벽에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짙은 남청색 구름이 품고 있던 붉은빛을 슬쩍 보여주는가 싶더니 어느새 명주 필을 풀어놓은 듯 한 자락 다홍치마가 펼쳐지고 태양이 말간 얼굴을 내미는 새벽은 너무도 아름다워 셔터를 누를 타이밍도 놓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장마 속에 축복처럼 찾아오는 빛의 선물은 잠깐이었다.

다시 비는 시작됐고 나는 습관적으로 장마를 뚫고 새벽을 만났다.

모두가 자고 있는 것 같은 새벽에도 밤새 내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들이 있었다. 노란 비옷을 입고 진연두색 청소차 꽁무니에 서서 매달려 가는 그들을 쫓아 노란 비옷이 눈치 못 채게 며칠을 찍기도 했다.

비와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아파트단지들은 윗부분만이 드러나 마법의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법사가 휘젓고 다니는 어느 굴뚝에선가 엄마 잃은 아이의 울음이 들릴 것 같은, 아련한 어린 시절 읽었던, 제목도 잊어버린 동화가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한강다리의 교각이 없어지기도 했다. 강에서 피어난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다리를 덮었다.

정훈희의 안개가, 김승옥의 안개가, 윤정희의 안개가,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의 카사블랑카가 뒤섞여 온갖 안개가 내용을 설정하는 데 얼마나 아름다운 장치인가 생각했다. 안개처럼 사라져간 세월과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장마가 편해졌다.

우산을 쓰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강가를 걸었다. 어제보다 더 차오를 물 때문에 좀 더 위로 올라서서 걸으면서 부풀어 오른 강물 위를 떠다니는 오래된 나무 찬장, 작은 냉장고, 나뭇가지들이 엉킨 무더기 위에 얹힌 잡다한 옷가지들, 색 바랜 장난감들, 고단한 삶들이 떠내려와서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차오른 강물 때문에 강변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됐을 때 못 다니는 길도 많아졌다.
비 내리는 새벽에 차도 별로 없는 고속도로를 달려 다른 도시를 가보기도 했다.
강원도 산속에 무궁화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꽃술이 선명한 자주색 무궁화, 상아색 무궁화, 하얀색 무궁화…. 달리아도 그 무거운 머리를 숙여 내 어린 시절을 불러주고 있었다.
벌개미취라는 이름보다 훨씬 단정한 보라 꽃도 시계처럼 열려 있었다.

왜 해가 있어야 꽃은 피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쏟아지는 비 속에서 꽃은 확실한 표정으로 제각각의 모습으로 선연히 웃고 있었다. 우산을 목덜미에 끼고 허리를 굽혀 꽃 가까이 렌즈를 대고 빗물에 잠긴 꽃의 얼굴들을 만났다.

영월 청령포 가는 날도 간간이 비가 내렸다. 배를 타고 청령포로 건너갔다.


단종의 가슴

조선 6대 임금 단종. 12세에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17세에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강물이 휘돌아 육지로 나갈 수 없는 청령포에서 노산대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갇혀 있었다.

강봉된 단종이 매일매일 올라서서 한양을 바라봤다 해서 이름 지어진 언덕 노산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곳에서 팔을 뻗어 절벽 아래 강물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절벽에 붙어 있던 두 개의 작은 풀더미가 소년의 가슴처럼 찍혀 있었다.

가슴속 돌은 단종의 단단한 분노, 마른 풀잎은 끝없는 절망, 연초록 이파리는 세 살 연상의 아내 정순왕후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희미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강물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비열함을 알기나 하는지 지금도 모른 척 흐르고 있다.


이런 글로 전시된 사진에 생각을 보탰다.

유례없는 폭우를 동반한 긴 장마는 8월 말쯤 끝나가고 6개월 동안 찍은 사진은 컴퓨터 속에 수만 장 쌓였다.

개인전, 그냥 해야겠다.

프로급 아마추어가 되려면 100세는 되어야 할 것 같다. 광학 기술의 엄청난 발전으로 나 같은 초보도 찍고 전시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됐다고 생각하자.

인사동의 한 갤러리를 예약했다.



박찬숙
● 1945년 경기 수원 출생
● 1968년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 1968년 KBS 공채 1기 아나운서 입사
● 1976~2004년 시사프로그램 앵커
● 2004~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 동서문학상 신인상, 한국방송대상 앵커상, 국정감사 우수의원 4회 수상
● 저서: 소설집 ‘사막에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칼럼집 ‘세상을 연다, 사람들을 연다’ 등
● 現 채널A ‘토요뒷담’, MBN ‘박찬숙의 시선’ 앵커


[스크랩/신동아 5월호]

잊혀진 대한조국의 소중한 사진자료

우리의 마지막 황실 사진자료로서 잘 간직해 후세에 전해야합니다

서울대박물관이'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특별 사진전을 개최했다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호머 헐버트(1863~1949)의'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호머 헐버트씨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
.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 왼쪽 사진 ; 고종, 순종,

오른쪽 ; 독일어로‘Palastdame’(궁녀),
영어로‘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 대원군,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상중의 연미복 입은 고종황제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伊藤博文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영녕전 참배의식중인 영친왕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 고종의 모습 (1918년1월15일촬영)

 

경성 일출심상 소학교시절의 덕혜옹주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1월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하는 영친왕

 

홍릉입구의 홍살문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해지지 않는 문이다.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융희황제(순종)의 장레식(국상)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나인들 모습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3월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사진인듯.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교과서에 쓰여진‘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융희황제(순종) 장레식(국상),국상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

(1918년 1월25일촬영)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영친왕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19년2월9일 고종황제가 승하한 창덕궁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은 이 사진은 1918년1월21일 촬영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가마에 탄 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1월13일오후9시,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이 촬영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으로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사진
1962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左부터)
 

 한자리에 모인 구한말 황족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은 사무관

대원군의 생일 기념사진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1906년 2월)통감을 설치,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길은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2월 3일, 73세로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의 순종과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내용 미상

 

소재 불명

 

 운현궁 양관

 

창경궁 궁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

[사진 마을] ‘데이트 파파라치’ 천대필씨

 


‘파파라치’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에 등장한 신문사의 사진가에서 나온 말로 주로 연예인 같은 유명인사들의 사생활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파는 직업군을 가리킨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인사를 열린 공간에서 망원렌즈로 몰래 찍어 개인 블로그에 올리거나 언론에 제공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물론 공인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은 노출되지 않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연예인 사생활 촬영은 불법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경우는 광장에서 몰래 찍으면 당연히 법에 저촉된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의 데이트 장면을 청계천, 인사동, 삼청동 등 야외에서 몰래 찍어왔는데도 신고를 당하거나 경찰에 끌려가지도 않고 오히려 (찍힌 당사자로부터) 고맙다는 인사와 사례비를 받는 ‘착한’ 파파라치가 있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포털에서 ‘데이트 파파라치’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천대필(39·공무원)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천씨는 2012년부터 주말을 이용해 연인 중 한 명의 의뢰를 받아 당사자들의 데이트를 들키지 않고 찍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의뢰를 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여자가 8 대 2 정도의 비율로 더 많다. 천씨를 지난 18일에 만났다.

─‘데이트 파파라치’라는 용어가 생소하다. 설명을 좀 해달라. 혹시 불법은 아닌가?

 

“연인들 중에 한 명이 자신들의 데이트를 ‘몰래 자연스럽게’ 찍어달라고 에스엔에스(SNS)로 의뢰하면 2시간가량 찍어주고 원본 파일을 400장 정도 이메일로 넘겨주는 일이다. 2년가량 30~40건 정도 했다. 당사자들이 부탁하는 일이고 야외에서만 촬영하니 불법은 아니다.”

 

─(의뢰하는 사람이) 연인관계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조심스러웠다. 의뢰가 들어오면 두 사람의 관계부터 확인한다. 의뢰인 아닌 나머지 상대방이 찍힌 것을 알고도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확인하기 위해,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라고 확인한다. 그리고 두명의 사진을 따로 보내라고 하여 둘의 얼굴을 익힌 다음 데이트 당일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셀카’를 보내오라고 해서 또 확인한다.”

 

─아… 최소한 그날까진 연인이란 것을 확인하는 장치가 되겠다.

 

“그런 뜻도 있지만 내가 그 커플을 찍기 위해선 그날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시간가량 찍게 되면 결국 (의뢰인의 파트너가) 눈치채지 않겠는가?

 

“한번도 들킨 적이 없다. 자연스런 데이트 장면을 찍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청을 에스엔에스로 하기 때문에 의뢰인조차도 끝까지 내가 어디서 찍고 있는지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데이트 장소가 워낙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의 파트너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그런 적도 없다. 자신의 연인이 기념일 등을 이유로 깜짝쇼로 준비한 것인데 다들 마음에 들어하더라고 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여자들의 경우 화장을 안하고 나왔거나 예쁘지 않게 나온 것에 불편해할 수 있겠다던데?

 

“의뢰인이 여자라면 화장을 하지 않을 리가 없고 남자가 의뢰했다고 하더라도 데이트할 때 예쁘게 꾸미지 않는 여성들이 있겠는가?”

 

─만약 사진을 찍어준 연인이 나중에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하나?

 

“세 커플 정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카페에 걸린 사진 내려달라고 연락이 와서 알게 되었다. 다 내렸다.”
사진을 의뢰한 사람의 반응이 궁금했다. 2년 정도 전에 천대필씨에게 의뢰해 데이트 장면을 ‘찍힌’ 강아무개(여성)씨에게 이메일로 질문지를 보냈다. 강씨는 포털에서 파파라치 데이트를 찾았고 색다른 데이트 겸 남자친구에게 생일선물로 주려고 의뢰했다고 한다. “몰래카메라는 유명인만 하는 거잖아요?”라며 강씨는 만족을 표현했다. 혹시 사진 원본이 유출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원본은 작가님의 포트폴리오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내가 모르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불쾌할 것 같아요”라고 했다.
이에 대해 천대필씨는 “의뢰인에게 넘겨주고 나면 바로 삭제했다. 그런데 언제쯤인가 의뢰인이 사진 파일을 날려먹었다고 나에게 원본이 남아 있는지 묻더라. 그래서 요즘은 의뢰인과 상의해서 1년만 보관하고 있기로 했다. 그 후엔 지운다”고 밝혔다.

사진 천대필씨 제공


연인 중 한명 의뢰받아 촬영
동선 갑자기 바뀔 땐 애먹어
들킨 적은 여태 한번도 없어
뒤늦게 알게 된 파트너도
정성스런 마음에 기뻐해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돈을 벌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합법적으로 사람을 찍을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쉬는 날 아들을 찍어봤는데 우연히도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찍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 이게 사진의 매력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다. ”

─일이 재미있는가?

 

“의뢰인을 놓친 경우도 있었는데 에스엔에스로 위치를 물어봐서 찾기도 했다. 왜 놓치냐면 여성이 의뢰한 경우였는데 ‘데이트남’이 갑자기 동선을 바꾼 경우다.”

─여자들이 의뢰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데 왜 그럴까?

 

“기념일 사진을 찍자고 하면 남성들은 굳어진다. 그래서 여성이 의뢰하고 나서 나중에 사진을 주면 놀라면서도 좋아하는 것이다. 심지어 셀카를 찍을 때도 남성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진다. 나로서도 여성들이 의뢰하는 쪽이 편하다. 결과물이 훨씬 자연스럽게 나온다. 데이트는 주로 여자들이 리드하는 편이라서 의뢰한 여성은 사진에 찍힐 것을 고려해 팔짱도 끼고 스킨쉽도 하는데 남성이 의뢰하면 이게 도무지 그림이 안 된다. 그냥 두 시간 내내 걷기만 한다.(웃음)”

 

강아무개씨의 남자친구도 역시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남자친구는 촬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한 달 뒤 생일선물로 사진첩을 받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파트너가 숨기고 촬영을 의뢰했으니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지 물었더니 “처음에는 놀라움이 가득했지만 불쾌하다는 느낌보다 정성스러운 마음에 대한 기쁨이 더욱 크다”며 “매우 아름답게 찍어주었기 때문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고 원본 사진이 유출되어 잘못된 용도로 사용된다면 그에 맞는 대응을 해야겠지만 카페에 걸리는 것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변에 소개하고 싶은지를 물었더니 여친 강아무개씨는 소개했다고 말했고 남친은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좋은 것은 혼자만 누리고 싶기에 너무 많은 이가 한다면 그 희소성이 떨어질 것 같다”고 답했다.

 

천씨가 그동안 찍은 커플 중엔 결혼으로 연결된 사례도 너덧 차례 있다고 했다. 데이트 파파라치를 의뢰했던 어떤 커플은 결혼사진까지 부탁했다고. 천씨는 “찍어준 커플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 아니냐. 외모와 상관없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 연인들은 꼭 결혼 소식이 들려와서 흐뭇했다”고 말했다.

 

매그넘 사진가 마틴 파는 <스몰 월드>라는 사진집에서 전세계 유명 관광지에서 기념물을 등진 채 카메라를 향해 부동자세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풍토를 보여준 바 있다. 배경만 다를 뿐 언제나 카메라를 의식해서 취한 포즈는 모두 똑같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데이트 파파라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은 이야길 한다. 항상 예쁘게만 찍히려고 해왔는데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표정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연인의 진정한 매력을 사진 속에서 찾아내기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한 사진과 달리) 오래 두고 볼수록 당시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경험도 있다고 한다.

 

한겨레 / 글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청송 주왕산에 있는 주산시는 1721년 경종원년에 완공한 농업용 저수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김기덕 영화로 유명세를 떨친 곳이다.

주산지는 영화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풍경이 모두 독특한데,
그냥 색깔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주산지의 이미지 자체가 확 바뀌는 것이다.

주산지하면 우선 신록의 왕버들 물빛 그림자와
물안개 자욱한 몽환적 새벽풍경을 꼽을 수 있다.
가을엔 피 빛으로 물든 산하 또한 절절하다.
그러나 인적 없는 고요 속에 고고한 나목의 자태를
드러내는 겨울풍경이 그 중 으뜸이다.

올 가을엔 새벽을 깨우며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한번 푹 빠져 볼 작정이나
주산지의 명물 왕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사진들은 지난  10일 청송, 도평장과 화목장 가는 길에 들려 찍었다.

 

 

 

 

 

 

사진 찍던 장터사진가 정영신씨가 인기척에 돌아보고 있다.

‘한국 포크의 거장’ 한대수(66)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사진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학생은 커녕 대학생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인 60년대, 한대수는 문화의 용광로 미국 뉴욕의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암실에서 필름을 매만지던 유일한 한국인 히피(Hippie)였다.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히피 문화를 받아들인 그의 음악은 가죽부츠를 구겨 신고 장발을 풀어헤친 외모만큼이나 당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섰다는 상찬을 받았지만, 당대에 그는 도망치듯 다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잠시 접은 그는 미국에서 사진작가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진작가 한대수는 대중이 잘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인생인 셈이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63) 연세대 교수, 변우식(43) 팝아티스트와 함께 ‘꿈꾸는 삼총사’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한대수가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지난 2000년 개인 사진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포크 음악의 전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 연세대 교수, 변우식 팝아티스트와 함께

‘ 꿈꾸는 삼총사’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가 전시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는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 작품,

헤럴드경제 /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한대수는 “60년대엔 미국 히피 문화를, 7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왔다”며 “보관 중인 필름이 50만 컷이 넘는데, 가능하면 일흔이 넘기 전에 정리하고 싶다. 이번 전시회는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온 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달리며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60년대, 한대수는 미국에서 공대와 경영학이 아닌 ‘돈이 되지 않는’ 전공으로 학업을 마친 괴짜였다. 사실 그의 첫 전공은 놀랍게도 수의학과였다.

한대수는 “조부가 수의학을 전공하면 목장을 주겠다고 제안해 뉴햄프셔주립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며 “캠퍼스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중 사진잡지 ‘파퓰러 포토그래피’,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 등을 접하고 사진에 매력을 느껴 수의학과를 중퇴하고 1967년 사진 전문학교인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한대수의 조부는 학비 지원을 중단했다. 고액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꼬박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야 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한대수는 “60년대는 음악, 미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문화가 폭발적으로 융성한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였고, 사진 역시 예술의 한 분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며 “지금도 뉴욕에서 유명한 식당인 ‘세렌디피티 3’에서 일하며 비틀스의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팝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수많은 명사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이 같은 경험은 고스란히 내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줬다”고 회상했다.

한대수의 사진작가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뉴욕의 ‘컬러 하우스’ ‘크로마 카피’ ‘스피드 그래픽스’ 등의 스튜디오에서 광고사진작가로 근무했다. 한때 그는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부 기자로 일하며 (주)헤럴드와도 밀접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건축사진가 너대니얼 리버만(Nathaniel Lieberman)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베스트셀러 건축사진집 ‘맨해튼 라이트스케이프(Manhattan Lightscape)’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대수는 “예전에는 사진을 배우려면 렌즈와 카메라의 특성, 현상과 인화, 모델을 다루는 방법 등 다양한 것을 익혀야 했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필름회사 코닥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지난 2012년 파산 신청을 했다. 지금 이 나이에 나는 젊은이들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마돈나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무리 많은 영화에 출연했어도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나 역시 뮤지션과 사진작가 둘 다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느끼고 바라봐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한대수는 이번 사진전에 초심을 담은 15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그중 7점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한대수는 뉴욕으로 건너가 암실에서 직접 사진을 인화했다. 그는 오랜만에 뉴욕에서 맡는 현상액과 인화액의 냄새가 반가웠다며 사진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설했다.

한대수는 “사진은 순간이다. 지지고 볶고 찐빵을 만들든 말든 사진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며 “1948년 영도다리, 2014년도 인사동 사진 한 장은 역사를 말해준다. 이는 어느 미술과 조각과 문학이 할 수 없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사진은 미술을 모방하면 안 된다. 사진은 사진, 미술은 미술”이라며 “순간의 표정에는 그 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나는 이스탄불의 어린 소녀의 눈물, 모래내 시장의 할머니 손의 주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대수는 지난해 핵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담은 싱글 ‘누크 미 베이비(Nuke Me Bady)’를 발표하고 최근 김광석 추모 앨범에 참여해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는 등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한대수는 “이제 주변에 내가 앨범을 만들겠다면 발 벗고 나서줄 실력파 음악인들이 너무 많아 고민이 즐겁다”며 “머지않은 시기에 새로운 정규 앨범으로 돌아올 생각”이라고 전했다.

 

 

 

금정총림 범어사가 사진명상가인 관조 스님의 20만장에 달하는 유작필름을 경내 성보박물관에 관리 보관한다.

범어사(주지 수불 스님)와 관조스님문도회(대표 승원 스님)는 4월10일 범어사 주지실에서 ‘관조스님 유작필름 관리 및 사용에 관한 협약식’을 가졌다. 협약을 통해 범어사와 문도회 측은 공동의 협의 아래 관조 스님의 사진작품 전체에 대한 관리와 활용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기로 했다. 문도회 측은 지난해 1차분 파일 100개를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입고했으며 협약식을 통해 관조 스님의 유작필름 19만 7846장과 이를 247개의 파일로 정리한 목록집 전체를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입고했다.

10일, 문도회와 관리․사용 협약
범어사성보박물관 수장고 보관
문도회 “범어사는 스님 의지처”

관조스님 문도회 대표 승원 스님은 “스님의 입적 후 작품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과정만 6년이 걸렸는데 이제야 은사 스님께서 항상 정신적 의지처로 삼으셨던 범어사로 모든 작품 파일을 이관하게 됐다”며 “앞으로 은사 스님의 작품은 범어사와 함께 전시, 출판 등 공동사업을 통해 한국불교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협약의 의미를 설명했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도 “엊그제 스님을 보내드리는 영결식을 치른 것 같은데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정성을 다해 스님의 작품을 분류하고 정리해 온 문도회의 효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다시 범어사에 기증한다는 사실에 부담도 큰 것이 사실이지만 스님의 작품을 통해 불교미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한편 관조스님문도회는 오는 9월24~30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2층에서 ‘관조스님 석불 사진전’을 개최한다. 또 석불 사진집 출판과 전자책의 한글판 및 영문판 제작 등도 추진한다.

법보신문 /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오는 15일까지 윤주영 사진전 '잔상과 잠상전'이 열린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열정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윤주영 작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생각없이 그냥 셔터만 누를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전에 어떤 것을 어떻게 찍을 지를 먼저 생각하고 찍은 사진을 보는 이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할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문공부 장관을 포함해 국회의원 및 정계활동을 해 온 그가 50이 넘은 나이에 사진을 시작하고 그후 35년 동안 70만 장의 인물과 다큐사진에 전념해 왔다.

"왜 인물사진만을 찍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사진은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고 기록을 하려면 인물위주로 가기에 자연히 인물을 찍게 됐다"고 답했다.

사진을 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작품을 존경하며 배우고 있는 만큼, 그의 남은 작품생활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건강이 같이 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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