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하는 이상구씨는 서울역 지하철 11번 출구에서 올 겨울을 보낸 사람이다.

밤늦게 돌아오다 보면, 늘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고 있었다.
따끈한 빵이나 고구마를 사와 이불 속에 밀어 넣어도 미동도 안했다.
만사가 귀찮은 듯 보였다. 낮에는 어디서 지내는지, 늘 밤늦게 잠자리를 폈다.
지난 16일엔 모처럼 일찍부터 자리 깔고 앉아 있었다.

기회다 싶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아제는 소원이 뭔기요?” 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뭉칫돈이나 여자, 대궐 같은 욕망의 찌꺼기들을 들먹일 줄 알았는데, 뒤통수 쳤다.
“소주 한 병과 김밥 한 줄” 아주 현실적인 소원이라 기꺼이 삼천 원을 내 놓았다.






술친구로 지내던 김씨가 내려오니, 술 사오라며 시켰다.
그는 꼼짝도 않고 입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학창시절에는 야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는, 왕년의 자랑도 했다.

대개 그들을 인생패배자처럼 생각하지만,
더러는 아무런 욕심 없이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도 있다.
추운 날씨에 노숙인 보호소에 가지 않는 것도 사람이 만든 규칙이 싫어서다.






술을 홀짝이다,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야?'기에
“성은 조가고 하는 일은 사진기사다, 앞으로 조기사라 불러”했더니.
사진기자거나 사진작가지 기사가 무어냐며 나무랐다.
“기는 적을 記자고 사는 베낄 寫라 했더니, 그때야 ”말 되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서기’에서 일하는 이애신씨가 나타나 이상구씨에게 이 것 저것 물었다.
묻는 이야기라고는 언제부터 나왔냐는 등 뻔한 얘기들이지만,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없냐?'는 물음에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것이다.
귀찮게 굴어 약 올리려고 거짓말했는지 모르나,
기초생활수급자면 길거리에서 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노숙 인에는 대개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아직 욕망의 찌꺼기가 남은 초짜는 늘 이글어진 표정이지만,
모든 욕망을 내 던진 고수들은 그냥 허허실실이다.
모든 걸 버렸다면, 그게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들 생불 만나거들랑, ‘소주 한 병과 김밥 한 줄’의 시주를 하라.

사진, 글 / 조문호















일을 줄이려 잘 나가지 않으니, 이젠 다른 일이 꼬리문다.
다음 달 열리는 오일장 박람회 일로 급히 정선에 다녀와야 했다.
당일치기지만, 집에도 가지 않고 그냥 올 순 없었다.
지난달 심은 고추와 옥수수에 거름도 주고 물도 줘야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필요해 검사만료일이 다 된, 폐차 직전의 고물차를 불러냈다.

부랴부랴 ‘성산자동차검사소’부터 달려갔으나,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오후6시가 가까워서야 순서가 돌아왔는데, 우려대로 불합격이었다.
매연 1% 초과에다 파손된 후미 등 때문에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깨진 아크릴만 교환 할 수 없어, 통째로 갈려면 가격이 만만찮았다.
정선 갔다 와서 해결할 생각으로 동자동으로 돌아갔다.
분향소에도 들려야 하고, 용성이네 쌀을 전해주는 등,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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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분이 돌아가신 동자동 분향소는 30분이나 늦었지만, 다들 기다려 주었다.
연고자 없는 세 분의 상주가 되신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우건일, 조두선,
김정호, 선동수, 박정아, 이난순씨 등 여러 분이 남아계셨다.
쪽방에서 돌아가신 채로 발견된 김동휘씨의 장례는 내일이라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드릴 수가 없었다.

저승에서나마 사람대접 받기를 염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잘 때는 한없이 자지만, 안 잘 때는 허구한 날 날밤을 깐다.
틀에 짜인 규칙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잠자는 건 죽는 연습이라는 생각이다.
광주 518묘역에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한 두 시간만 눈을 붙이고 정선으로 떠나야 했다.



 


오전에는 군청에서 일을 보고, 오후에는 만지산집에 들렸는데,
얼마나 가물었던지, 말라죽은 야채 모종이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다.
물 퍼 나르고 거름 뿌리느라, 오줌 누며 거시기 볼 시간도 없었다.

어두워서야 간신히 마무리하고 산꼭대기 사는 최종대씨 집에 올라가
늦은 저녁밥을 얻어먹었더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떠나려 했으나, 한 시간만 눈 부쳤다 가라며 두 내외가 붙들었다,
그 한 시간의 잠은 꿀맛이었다. 짧은 시간의 천국인 셈이다.





서울로 돌아오니, 오전 두시가 지나버렸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 온 걸 축하한다며 정영신씨와 술잔을 들었다,
작년 무렵 만지산에 들어 온,  치정에 얽힌 여인네 이야기를 안주 삼았다.
꽃뱀처럼, 어리숙한 촌 남정네들을 녹여 단물만 빨고 내친 놈이 한 둘이 아니라는데,
믿기지 않는 소문이었다. 와전되었기를 바라지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채, 그 이튿날은 온 종일 자동차검사에 매달려야 했다.
정선가는 비용에 맞먹는 후미 등 값 줄이려 장안동 중고가게를 누벼야 했다.
그 다음은 매연이 문제였다. 검사소에선 1% 초과로 배기통만 털어 오라 했는데,
브란자를 수리해야 한다며 상당한 수리비를 요구했다.






아는 정비업소에 찾아가 부탁하니,
한적한 곳에 가서 패달을 밟아 공회전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처음부터 왜 검사대행업체에 맡기지 않았냐고 했다.
고물차는 대행업소에 맡기면, 아무 탈 없이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런 불법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도장을 찍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안전문제인데 어떻게 아직까지 그런 게 통하는지...





어렵사리 검사는 받았지만, 이박 삼일동안 바쁘게 돌아 다녀야 했다.
쪽방에 올라와 라면 한 그릇 끓여먹고 컴퓨터를 켜니,
그때야 쌓였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 놓은 채, 누가 업어가도 모를 상태로 뻗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이튿날 점심 무렵이었는데, 장장 열 몇 시간을 잠든 것이다.
차라리 영원히 잠드는 것이 더 편할 법 같기도 했다.

사진들은 몇 일전에 찍은 동자동사람들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는 황춘화씨 쪽방에 볼 일이 있어 올라갔다.
몇 일 전 내 방의 쌀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지방가기 전에 줘야 편할 것 같았다.
쌀 포대를 안고 좁은 계단의 오층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려니 숨이 찼다.
쌀 포대를 계단에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5층 정재헌씨 쪽마루에 정재헌씨와 정용성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용성이 녀석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 꼴로 술을 마신 듯 해, 꼬라지가 거기 뭐꼬? 술 좀 거마 무라했더니,
계단 내려오다 넘어졌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비켜 가지 못하는 팔자인지 모르지만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가파른 계단이라 손잡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건물 주인에겐 통하지 않는단다.

 





가진 자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대개 빈민들의 고충이긴 했으나,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중재를 해 주던지,
아니면 상담소에서 직접 손잡이를 좀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매일같이 술이 취해 오르내리는데, 여지 것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신기하다.
날카로운 시멘트에 부딪혀 그 정도 다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용성이 더러 쌀 가져왔다고 했더니, 냅다 달려가 옥탑 방까지 들어 올려주었다.
다친 용성이 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술 취한 황춘화씨는 방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 대책 없는 두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억장이 무너졌으나, 방법은 없었다.
술을 끊으려면 병원생활을 해야 하지만, 당사자의 의지도 병원비도 없다.






걱정만 남긴 채 돌아오려니, 용성이가 손을 내민다.

돈 좀 달라”는데, 냉정해져야 했다.
그 간절한 눈빛을 거절하지 못해 주어 온 것을 후회했다.
그 돈으로 소주 사 마시니 내가 알콜 중독을 도운 격이다.
이제 돈은 줄 수 없다고 잘랐더니,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돌아서는 마음이 아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절대 신은 없다. 있다면 그건 사기일 뿐이다.

착한 놈은 고생하고, 나쁜 놈이 잘 사는 더러운 세상 아니던가?

일층으로 내려오니 구멍가게 앞에 이준기씨와 강완우씨가 있었다.
술이 한 잔 된 이준기씨가 반갑다며 하소연을 풀어놓더라.
어떻게 배붙이고 살던 서방을 교도소에 집어 넣냐?는 것이다.
사연인즉, 친구가 아내에게 손 지검을 했는데, 경찰을 불러 구속시켰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니 화가 났겠지만, 참아야 했다.
다 돈 없는 이들의 서러움이다.






동자동엔 한 가닥 희망을 가지며 참 사람과, 절망을 술로 잊는 사람만 산다
알콜에 중독되거나, 몸과 마음을 심하게 다친 저승 대기자들이다.
하기야! 난 담배 중독자니, 남의 말만도 아니다.
오래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라며 스스로 위안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동자동 쪽방 촌 빈민들이 연이어 세상을 등지고 있다.
혼자 어렵게 연명하던 독거들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 듯하다.

술로 위안하다 더러는 병원으로 옮겨져 운명하기도 하지만,

외부와의 왕래를 끊은 채 혼자 쓸쓸히 생명줄을 놓는 사람도 있다.

말로만 듣던 독거사가 빈민촌에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일 오후 무렵, 동자동 ‘식도락’에 합동분향소가 차려진다는 메시지가 떴다.
급히 지방 갈 일이 있어, 성산동자동차검사장에 있을 때였다.

고물차 불합격 판정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즈음이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철상할 시간까지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서둘렀다.

다행히 김정호씨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허급지급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이 날의 상주로 나선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우건일, 김정호, 조두선, 이원식, 선동수씨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난순, 박정아씨는 주방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날은 윤정수(82)씨와 은진기(67)씨, 두 분의 장례식을 치루었고,

김동휘(72)씨는 내일 장례를 치룬다고 하였다.


다들 무연고자라 '동자동사랑방'에서 어렵게 장레를 치루는데,
내일은 정선군청에 약속이 있어 조문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은 조의금이나마 맡겨두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김동휘씨는 쪽방에서 쓸쓸이 세상을 떠난 분이라,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드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세상에서 받은 설음과 고통 다 잊으시고, 편히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매년 오월 이맘때만 되면 광주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간,

피 비린내 나는 '광주민중항쟁'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않다.

바쁘게 살다보니, 희생자 묘역에 좀처럼 참배할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 13일 ‘동자동 사랑방“식구들이 망월동으로 떠난다는 전갈을 받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기회다 싶어 만사를 제쳐두고 따라 나선 것이다.

김호태회장을 비롯하여 우건일, 박정아, 선동수, 허미라, 김종호, 양정애, 김영애

김원호, 강동근, 구도원, 전도영, 한갑석, 김재호, 이태헌씨 등 여러 명이 함께했다.
‘한국주민운동교육원’에서 실시하는 ‘5,18 광주 민중항쟁 역사기행’ 나들이였으나,

열사들이 잠든 성지를 두 번째로 참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5,18광주 민중항쟁이 일어 난 그 당시엔 부산 남포동에서 음악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취미로 시작한 사진에 빠져 장사는 뒷전이었을 때다.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찾아오시어 광주에서 무장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한다는 말씀을 주셨다.

선생과 함께 광주에 가고 싶어, 사진기자로 일하는 친구들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나,

곽을 철통같이 막아 기자들도 마음대로 들어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는 언론에 자갈을 물려 광주에 관한 소식은 입으로만 전해지는 믿기지 않는 소식뿐이었다.

몇 일후 어렵게 ‘타임’지 한 권을 구해 보았는데, 표지는 뜯겨졌고, 기사 부분 부분이 검은 매직으로 지워졌지만,

광주항쟁의 윤곽과 끔직한 현장사진을 여러 장 접할 수 있었다.


그 천인공노할 학살사건을 엉거주춤 덮었지만, 결국 비밀은 오래갈 수 없었다.

아직까지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같은 국민을 그토록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길거리에 쓰러진 수많은 주검들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 장면을 뒤늦게 대하며 치를 떨어야 했다.





먼저 5,18 묘역 입구에 도착하여 다들 추모글을 써서 메달았다.

'민주의 문'을 거쳐 '민주광장'과 '추념문','참배광장'에 다 달아 열사들의 영전에 묵념을 올렸다.

광주빈민운동의 선구자이며 광주민중항쟁의 투사였던 김영철씨,

‘오월광대’로 알려 진 예술가 박효선씨 묘역을 차례로 찾았다.

들불야학에 함께하며 지역주민운동에 앞장 섰던, 그들을 기억해야 했다.






참배와 성지 순례가 끝난 후, 5.18 자유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영화도 보았고, 당시 형무소 주위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전남일보 사진기자 신복진씨와 동아일보 기자였던 황종건씨의 사진이 많았다.

다들 당시에는 신문에 사진 한 장 내보내지 못하고 숨겨두었으나, 뒤늦게 공개한 사진이었다.

사진집에서 본 사진이지만, 다시 한 번 울분이 치솟았다.


문제는 그토록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점이다.

무기징역을 받아 사면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흉악범을 사면시켰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땅에 정의가 서게 하려면 당연히 사형시켰어야 했다.

망월동에 묻힌 열사들을 편히 잠들게 하려면, 늦었지만 다시 단죄해야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빨래집게 사진 나눔전도 열려...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기자



서울역과 건너편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외딴섬처럼 둥지를 튼 동자동 쪽방촌은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코앞에 두고도 ‘동자동 쪽방촌’을 물어야 할 만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가려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지난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아 동자동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열렸다.



▲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의 '동자동사람들' 빨래줄 전시풍경


‘동자동 사랑방’(대표 김호태) 가족들의 힘으로 마련한 어버이날 잔치는 올해로 여덟 번째라고 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사는 쪽방촌 빈민들에게 이날만큼은 한 가족이 되어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약주를 곁들인 음식을 대접했다.



▲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동자동 쪽방주민들 외에도 노숙자들까지 모여 모처럼 정담을 나누는 즐거운 자리였다. 평소엔 공원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이날은 행사장에서 준비한 주류에 한해 마실 수 있도록 배려 해 잔치 분위기를 돋구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이 펼쳐진 '새꿈 어린이공원'


이날 잔치는 관이나 민간단체에서 후원을 전혀 받지 않고,

동자동사람들의 조그만 성금으로 만든 소박한 자리였지만 300여명이 모여드는 성황을 이루었다.

김호태 회장은 “이날의 잔치비용으로 250만원이 들었는데,

한 푼 두 푼 229명이 낸 모금액이 공교롭게도 지출과 맞먹는 2,513,230원이었다”며 "욕심 없는 사람들의 행복한 잔치마당"이라고 말했다.



▲ 잔치가 끝난후 '동자동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이 정성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다함께 협력해 잔치를 진행했는데,

쪽방 주민들보다 더 어려운 노숙인들을 대접하게 되어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특히, 이날 어버이날 잔치의 색다른 이벤트로,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사진 나눔전이 함께 열렸다.

공원 주변 나무 사이로 쳐진 빨래 줄에는 A4 규격의 사진 135점이 만국기처럼 걸려 전시됐다.


쪽방사람들의 초상사진, 결혼사진, 시위나 단체사진, 살아가는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 '동자동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이주한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와 7년째 동자동을 기록해온 사진가 김원씨



이 사진은 지난해 10월, 동자동으로 이주한, 다큐멘터리사진가 조문호씨가 찍은 사진으로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했다.

서로 보기 싶게 빨래 줄에 걸어 전시를 하고, 잔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본인 사진은 스스로 가져가도록 진행했는데,

쪽방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 동자동사람들이 전시된 사진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


37년째 동자동에서 살고 있다는 이재화(81)어르신은 사진을 품에 안으면서 “내 영정사진으로 간직하고 있겠다”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에 조문호 사진가는 “경제적 여건으로 다 만들지 못해 아쉬웠다”며,

“빠진 분들은 오는 추석잔치에 다시 빨래줄 전시를 열어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다.



▲ 이재화(81세)어르신이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또한 ‘동자동사람들’을 7년째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김원(53)씨는 “이곳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는다.

일주일만 건너뛰면 기다리고 전화하는 이들 때문에 매주 오게 된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회에서 나누어주는 물품이 아니라, 자기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라고 말했다.



▲ 주민자치회 김만귀(48) 위원장이 자신의 합동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날 잔치에는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회장과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우건일 이사장,

남영동 동장 마필승씨가 나와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을 열고 있는 동자동사람들





동자동 사랑방’은 주민이 주인인 아주 민주적인 협력체다. 여기는 갑 질하는 이도 없고, 완장부대도 없다.

서로 돕는 자치단체로 주민들과 소통하며 정 나누는 행복한 보금자리다.
이 야박한 세상에 정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 끼 천원으로 식사 할 수 있는 ‘식도락’과 책을 나누어보는 도서실을 운영하며,

어려운 분들의 선반을 만들어 주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때로는 잘 못 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연대투쟁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연고자 없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랑방 식구들이 상주가 되어 장례까지 치러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을 길들이는 무차별한 지원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자립을 돕는데 있다.

그리고 ‘동자동 사랑방‘에서는 매년 어버이날과 추석을 맞아 주민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한다.

지난 5월8일의 어버이날에도 어르신들에게 꽃을 달아드리며,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잔치를 열었다.

오전10시부터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열린 이 날 잔치에는 주민 3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잔치 비용도 관이나 단체에서 후원 받은 것이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하였다.

필요한 예산이 250만원이었는데, 229명의 주민들이 낸 모금액이 2,513,230원에 달해, 신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 협력한 애착의 결과였지만, 사랑방 식구들이 하나같이 손발을 걷어 부쳤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쪽방주민은 물론 더 배고픈 노숙인까지 대접하는 고마운 자리가 되었다.

이 날 잔치에 곁들여 그동안 찍은 사진을 돌려드리기 위한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 사진 나눔 전도 가졌다.

다 뽑지는 못했으나, 그 중에서 135장을 골라 빨래 줄에 걸어 서로 돌려 본 후 잔치가 끝난 후 가져가게 했다,

누락된 사진과 다시 찍는 사진들은 올 추석잔치에서 돌려드리기로 하였으나, 장수사진 촬영에 주력할 생각이다.

이번 어버이 날 잔치에는 사랑방 식구들이 아침8시부터 몰려 나와 각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침식사를 드시지 못한 분도 많았지만, 점심마저도 주민들 챙기느라 못 먹은 채 다들 정성을 다했다.

음식이 소진되어 주민들이 떠나갈 무렵에는 쓰레기 치우고 주변 정리하느라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다들 집기들을 옮겨가고 나니, 그 때 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취재하러 왔던 정영신씨 따라가 비빔밥 한 그릇 얻어 먹었는데, ‘식도락’ 골목에 사랑방식구들이 몰려 있었다.

“식사하지 않고 어디 갔다 왔냐?”며 중국집 ‘태향’으로 안내했다.

김호태회장을 비롯한 여러 주민들이 식사를 끝내고 소주 한 잔 나누며 뒷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앞에서는 강동근, 김정길, 김정호, 강병국, 임수만씨 등 여러 명이 설거지하느라 분주했다.

이날 뒷마무리하며 끝까지 남은 분으로는 우건일조합장을 비롯하여 박정아, 선동수, 허미라, 김창헌, 차재설, 박희봉,

박용서, 조두선, 전인중, 한정민, 최순규씨 등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다.


'동자동 사랑방' 화이팅!



사진,글 / 조문호


































오늘 아침 문재인씨가 대통령 되었다는 소식을 페북에서 알았다.
반가웠지만, 홍준표 득표의 쪽팔림과 심상정 몰락에 마음이 엿 같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며, 점심 먹으러 ‘식도락’으로 갔다.

빵으로 때울까 생각하다, 오늘 세월호 리본을 만든다기에 내려간 것이다.
다행스럽게 입맛도 없는데, 식도락에서 국수를 끓여 놓았다.
요즘 쓸 수 있는 이빨이 아래위로 두 알 뿐이라 밥 먹기가 영 힘든데,
물 국수라 잘도 빨려 들어갔다.

난순 여사가 비벼 먹는 비빔국수도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것도 욕심이라며, 눌러앉아 리본 만들기를 기다렸다.






허미라씨를 비롯하여 김정호, 선동수, 박정아, 유한수, 김호태,
김창헌, 이인자, 강병국, 조남철씨 등 일꾼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곳에서 세월호 리본을 세 번째 만들었으나, 아직도 다들 서툴다.
규격화를 거부하는 인간 본능이라 믿고 싶었다.

모두들 세월호에 가득 찬 진흙을 호미로 퍼내는 심정으로 리본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새로 뽑혔지만, 아무도 정치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많은 주민들이 정의당을 지지했기에, 비참한 결과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와 힘을 모아 적폐를 하나하나 청소할 것으로 위안했다.






먹을 것이 마땅찮아 서울역 ‘롯데마트’에서 베지밀 한 박스를 사왔다.
4층까지 기어 올라와서는 쪽방에 퍼져버렸다.
한 숨 자고 일어나 빵에다 베지밀 까지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오후 아홉시가 넘었지만, 동내 산책이라도 나가야 했다.
밤에는 술 마시는 회사원들 뿐이라 잘 나가지 않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공원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형님이라 불렀다.
돌아보니 정용성이었다. 이 녀석은 지 애비 벌 되는 놈을 늘 형님이라 부른다.
불렀던 사연인즉, 지 애미와의 실랑이 때문이었다.






두 모자가 술을 너무 좋아해 매점에서 소주 두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사서는,
아들은 시원한 공원에서 마시자 하고, 애미는 쌀쌀하니 방에서 마시자며
서로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지원군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들 반 술은 되었지만, 나만 말짱해 일단 중재안을 내 놓았다.
30분만 마시고, 방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사실은 내가 더 술이 고팠기 때문이다.
용성이 녀석은 기분이 좋아 노래를 불렀다.





멜로디는 분명 투쟁가였으나,
가사에는 압박과 설음에 해방된 민족까지 뒤 섞인 묘한 노동가였다.
반세기 동안 정치꾼들의 놀음에 길들어 온 우리민족의 자화상이 아니라 자화가였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로지 잘 사는 것만 지향해 온 민초들의 슬픈 노래였다.






약속시간이 되어 다들 황춘화씨 따라 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방은 5층에서도 옥상까지 올라가야 하는데다,
계단도 가파르고 좁아 힘든 코스지만, 한 잔 더 마시려면 따라가야 했다.
소주와 안주가 담긴 오븐을 들고 올라갔는데, 다들 바빴다.

술 취한 용성이는 방 치우러 가는지 먼저 올라가 버리고,
황춘화씨는 4층에 있는 술꾼 정재헌씨 집부터 들어갔다.
이 양반은 술 취해 자고 일어나, 그 때야 허기를 메웠는지 이를 닦고 있었다.
이 판에 어울리면 힘들 것 같으니, 제발 제발이라 부르짖었다.






알 중 어미와 아들, 그리고 좃 중 셋이 모여 오붓하게 한 잔 했다.
술이 취해 오가는 이야기들은 도무지 사이클이 맞지 않았다.
켜 놓은 텔레비 마저 사이클에 문제가 생겼는지 펄펄 거렸다.
내가 텔레비 죽이라니까, 이번에는 손바닥 만한 라디오를 켰다.

두 모자가 매일 같이 함께 술을 마시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대화의 칸막이처럼 켜 놓는 것이다.





대화 칸막이로는 내 노래가 더 좋다며 한 가락 뽑았다.
‘봄날은 간다’를 불렀는데, 목이 메어 그만 울음이 되어버렸다.
좃이 피면 같이 웃고, 좃이 지면 같이 우는 대목에 못 미쳐,
용성이 모자 앞에서 쪽팔리게 울어버린 것이다.
놀란 두 사람이 무슨 사연인지 의아해 슬픈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황춘화씨와 정용성씨 모자는 동자동에 들어 온지가 삼십년이 넘었다.
동대문에서 양동으로, 양동에서 동자동으로, 마지막 쫓겨 온 곳이 동자동이었다.
황춘화씨가 기초연금 70만원 받아 23만원 방세 제하고 사니 보나마나 뻔하다.
거기다 두 사람이 매일 마셔대는 술값도 장난 아니다.


얼마 전에는 술이 취해 넘어진 용성이가 허리를 다쳤단다.
술만 마시면 아프지 않은데, 술이 깨면 아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기회에 진단서를 끊어 제출하면 자기도 기초생활 수급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오늘 진단서를 끊어 왔다며 보여주었다.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으나, 병명이 탈골이 아니라  알콜 중독에 의한 의존증이라 쓴 것 같았다.
수급자 자격에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일 할 수 없는 환자는 분명해 수급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아니라면 모든 걸 적게 주고 피해가는 잘 못된 법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다.

황춘화씨도 몇 일 전 이웃집 개에 팔을 물려 붕대를 감고 있었다.
기사가 준 돈으로 첫 병원비는 치렀지만, 앞으로가 문제라며 걱정했다.
추측컨대, 그 기사라는 사람은 기자를 잘 못 알아들은 사진가 김원씨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몇 달 전 사진 찍지 말라며 화 낸 것을 사과했다.
난 잊은 지 오래되었으나, 그는 여지 것 잊지 않고 있었다.
'맞은 놈은 다리 펴고 자지만, 때린 놈은 오무려 잔다'는 옛말이 생각나 혼자 키득거렸다.

사는 꼴이 기가막혀 제일 필요한 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쌀이라고 했다.
난 밥을 해먹지 않아, 내방에 있는 쌀 포대를 가져가라 했더니,
두 모자가 차례대로 내 손을 부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착한 양을 굽어 살펴 인도하라”는 기도였다. 아~ 니미 기분 이상하데...





이미 자정이 지나 일어났더니, 황춘화씨도 따라 일어났다.

계단이 위험해 술 취해 떨어질까 걱정된다며 따라나선 것이다.
‘아지매 걱정이나 하이소. 다시 올라 갈라 카마 힘든께 내려 오지마소“ 해도
기어이 따라 내려와 배웅했다. 법 없어도 살, 참 착한 모자였다.

어쩌면, 말년까지 마흔여섯이나 된 아들녀석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자식 놈이 그때까지 장가 안가고 밤낮으로 엄마 술친구 되어 줄 놈이 있겠는가?
다들 혼자 사는 쪽방에서, 엄마와 살 부대끼며 사는 맛이 부러울 것이다.

헤어지며 잡는 손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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