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980년대 홍등가 풍경 찍은 사진작가 조문호

 

 

송화선기자 spring@donga.com

 

 

1983년, 사내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사진 작업에 빠져 부산살림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지 1년쯤 된 참이었다. ‘월간사진’ 편집장을 맡으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가족의 이해는 얻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과 남편의 무심함에 지친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떠나버렸다.

 

“생각해보면 삶의 나락이었죠. 그때 여기서 위로와 안식을 얻었어요.”

 

어느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사내와 바로 그곳,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답십리로 11길) 근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당시 서울 제일의 홍등가로 손꼽히던 곳,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젊은 여인들이 색색의 등불아래 서서 오가는 사내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이른바 '588'이다.

 

조문호 작가(사진)는 젊은 날 그 거리에서 자신의 소매를 붙드는 여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신세타령 듣고 속내를 나누다 몸과 마음까지 주고 받았다. 그렇게 1년여간 부대낀 기록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해 1985년 사진 부문 대상을 받았다. 조 작가를 만난 건 당시 기록들을 모아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사진전 '청량리 588'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펴냈다.

 

588의 직업인 

 

30년 전 그가 남겨둔 기록의 더께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누구나 볼 수 있는 뻔한 뒷골목 풍경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 중에서도 가장 음습한 곳., '집창촌'이라 불리는 그 거리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만져질 듯 생생히 담겨 있다.  조 작가는 " 그 해 동아미술제 사진 주제가 '직업인'이었다. 나는 588 여인들'이야말로 이 주제에 적합한 피사체라고 여겼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찍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여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대가로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며, 남는 것은 알뜰히 모아 고향 어머니에게 부치던 이들이었다. 한 여인은 그의 작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 "직업인이라는 주제가 마음에 든다"며 여기서 일하는 게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나를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도움 덕에 조 작가는 여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화장을 고치고 '직업적 노동'을 수행하는 순간의 모습가지 렌즈에 담았고, 그중 6점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했다. 1985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조 작가의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홍등가'는 감히 어느사진가가 손대기 어려운 상황 하의  직업인을 심층적으로 깊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이었다'고 평했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뒷골목 사람들의 삶을 낱낱이 기록한 건 분명히 작업의 장점이었을 것이다. 그중 몇몇 작품은 센세이셔널하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오히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차분히 앉은 채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마치 렌즈 너머 작가를 응시하는 듯 보이는 한 여인의 표정이었다. 조 작가는 그 사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 아이가 바로 정숙이"라고 했다.  처음 그의 작업에 공감을 표했고, 친구들을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응원해 준, 조 작가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름이다. 조 작가는 최근 펴낸 사진집 서문에 '정숙아! 혜련아!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집을 혹시 보게 되면 내게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게'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청량리 거리를 걸으면서도 '혹시 정숙이가 여기서 뭐라도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요"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했다.

 

한국 현대사의 뒷골목

 

"우리는 그 시절, 이 작업을 통해 588에서 일하는 여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현실의 벽이 높았죠. 1990년 프랑스문화원에서 '전농동 588번지 기록전'이라는 사진전을 열면서 이 여인들을 초대한다고 하자 언론의 관심이 온통 여인들에게만 집중됐어요. 결국 아무도 전시회에 오지 못했고, 제 시도가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조 작가는 588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정숙이'도 만나지 못했다. 자신의 의도가 세상 안에서 왜곡돼 그들에게 상처로 남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 때문에 그동안 촬영한 사진과 필름도 꺼내 보지 않았다. 최근 588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곧 그 공간이 영영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문호사진작가의 사진 속에는 1980년대 '588'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민낯이 생생히 담겨 있다.

 

 

2012년 12월, 서울시는 전농동 588번지일대 재정비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라면 2017년에는 그 자리에 60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주상복합 마천루들이 주위를 두르게 된다. 마침 출판사로 부터 사진집 출간 제의를 받은 조 작가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순간을 담은 기록으로 이 작업을 세상에 꺼내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만큼이나 노인이 됐을 그 시절 여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고 했다.

 

10년 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정영신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요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인생의 굴곡을 함께 건넜던 이들도 부디 행복했으면 하는 게 조 작가의 바람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서, 588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다시 한 번 뒷골목 풍경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이제는 30여 년 전 그 시절처럼 그들 안에 들어가 부대끼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기록자로서의 구실은 다하고 싶다고 한다.


[아트&아트인] 80년대 사창가 공개한 사진작가 조문호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기자]

서울 청량리 일대 집창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전이 인사동 아라아트 2층 전시관에서 열린다. 사진작가 조문호가 1984-1989년까지 전농동588번지 일대 홍등가를 담은 이번 전시는 ‘청량리588’이란 제목으로 관객을 만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멸시 받았던 윤락녀는 그들 역시 인간임을 말하고 있었다.

 


사진작가 조문호의 ‘청량리 588’사진전이 오는 3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서울 동대문구 일대 집창촌의 모습을 담은 67점의 사진은 전시와 함께 ‘청량리 588’(눈빛출판사) 사진집으로도 출판되었다.

“그들도 똑 같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 온 조 작가는 당시 홍등가를 찍기 위해 현장에 기거했다. 건달들의 폭력과 성병 등 숱한 고난이 동반됐지만 조 작가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매춘을 우리 사회의 필요악으로 보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매매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생활고에 찌들려 몸을 팔았던 윤락녀는 시대적 희생양으로 부각됐다. 조 작가는 “가난한 것이 죄일 뿐 누가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처음엔 냉대했던 그곳의 여성들은 서서히 조 작가에게 마음을 열었다. 조 작가가 카메라를 들었을 때 이들은 이미 서로를 누이동생으로 불렀다. 때문에 조 작가는 성매매 여성들의 생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친근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조 작가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며,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멸시 섞인 시선, 얼굴조차 마주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천대가 윤락녀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작가는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몸 파는 창녀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인으로 봐달라며 5년을 공들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힘들게 찍은 사진을 모아 1990년 2월 전시회를 가졌으나 언론은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두고 ‘선정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조 작가와 생각을 같이하며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고 했던 사진의 주인공들은 전시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난 조 작가는 필름을 창고에 처박았다. 사진집 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이 춘화와 같은 이야깃거리로 변질될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행여 잘 살고 있는 누이동생들의 삶이 망가질까봐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조 작가는 먼지 쌓인 필름을 다시 꺼냈다.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 더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 작가는 “사진에 찍힌 그때 그 사람도 보고 싶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며 “전시장에 찾아와 자신이 찍힌 사진을 찾아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청량리 588’ 사진전 전시
집창촌 직접 머물며 촬영
성매매 여성들 애환 담아

훌륭한 사회사적 기록물인 조 작가의 작품은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기쁨과 뿌듯함에 조 작가는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 여성들을 상대로 남김없이 상금을 썼다고 한다. 전시 서문을 쓴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는 “그들이 받은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 작가의 사진은 기술적으로 뛰어 난 사진이 아니다. 어찌 보면 촌스럽기까지 한 구성과 스타일은 오히려 그의 작업을 돋보이게 한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애틋함이 녹아 있는 사진들을 보다 보면 1980년대의 정취가 눈시울을 자극한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대, 국가의 최우선 정화 대상이었던 이들은 한곳에 모여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 우리와 똑같이 살고 싶은 욕구에 충실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조 자가는 자신의 작가노트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너희가 보고 싶다. 연락 한 번 주렴. 내가 소주 한 잔 살게. 그리고 부디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사회사 기록

그간 아시안게임, ‘민주항쟁, 두메산골 사람들, 5일장, 강원도 동강, 인사동 등을 소재로 작업해 온 조 작가는 이번 전시로 한국 사진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향수에 젖고 싶은 성인이라면 전시가 열리는 ‘아라아트’를 찾아보면 어떨까. 단 19세 미만은 관람불가다.

angeli@ilyosisa.co.kr

 

[조문호 작가는?]

 

조문호 작가는 194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30여 년간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홍등가’로 대상을 수상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 대상과 2007년 강원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선정된 바 있다. 주요 전시로는 민주항쟁 기록전(1987), 전농동588번지 기록전(1990), 동강백성들 사진전(2001),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사진전(2002),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2004),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2007)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이야기>, 천상병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등이 있고, <월간 사진> 편집장과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석>

 

‘장에 가자’ 전시에 이어 ‘청량리588’까지 45일 동안 계속된 전시로 곤욕을 치루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술 마시는 게 즐겁기는 했으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터진 입술은 아물지 않고, 매사에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지난 10일 전시작품은 철수했으나, 쉴 형편은 아니었다.
이틑 날 오후2시부터 ‘시사저널’ 김진령기자 와의 인터뷰 약속이 있었으나,
우편물 보내느라 늦어 약속시간을 20분이나 넘겼다.
매번 반복된 질문에 답하는 것도 지겨워 개인적인 신세타령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지면에 나와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한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아라아트 사무실에 올라갔더니, 채현국선생과 구중관, 공윤희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채현국선생은 유명세 타느라 엄청 바쁘시단다.

양산 학교 일 챙기기도 바쁜데, 인터뷰에다 틈틈이 초청강연까지 있어 인사동에서 뵙기가 쉽지않다.
그 날도 짐 보따리를 뒤적여 복사한 잡지 인터뷰기사를 보여주었다.

오후 4시 무렵, 인사동거리에서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을 만났다.
‘이문설렁탕’에서 김회장을 비롯하여 대신증권의 김송규전무, 이흥탁부장, 송재엽씨 등

몇 명이 모여 수육에다 막걸리를 마셨는데, 모두들 너무 급하게 마셨다.
한 번에 다섯 병씩 시킨 막걸리가 순식간에 열 다섯병이나 되었는데, 따르기가 무섭게 마셔 재켰다.

급하게 마시면 금새 취하는 체질이라, 눈치 껏 마시기는 했으나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취해 버렸다.

헤어지는 길에 김명성, 박인식, 김종숙씨도 만났으나, 갈 길이 멀어 헤어졌다.

그 날 밤 청량리588을 촬영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해 모범택시를 잡아 타고 588가자며 잠이 들어버렸는데, 깨어 보니 588 홍등가에 내려 놓았다.
정신없이 내렸더니, 사방에서 잡아 당겼다. 나를 일본 사람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588을 기록한 사진쟁이랬더니, “아! 오빠가 그 사람이구나!‘라며 놓아 주었다.

정신차려 외각을 돌며 588의 야경을 찍고 있는데, 왠 사내가 나타나 카메라를 내 놓으란다.
'왜? 카메라를 달라냐'고 물었더니, 금지구역을 찍었다는 것이다.
그럼, 마음대로 지우라고 했더니, 열심히 지우고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집에 돌아 와, 지운 CF카드를 다시 복원시켰다.

사는 재미는 반전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청량리588' 사진전을 준비하며, 25년 만에  다시 홍등가를 찾았다.

사 반세기가 지났으나 588의 골목과 집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곳 철거 된다기에 서 너 집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단지 입구만 일률적인 샤시 문으로 교체되었고, 대기실에 앉은 여인들의 패션이 파격적일 뿐이었다.

잊었던 긴 세월을 후회하며, 남아있는 골목 풍경들을 하나 하나 기록했다.

 

전농동 588번지 일대 업소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업소 문은 걸려 있었고,
간혹 임대한다는 글귀가 유리창에 붙어 있기도 했다.  

 

‘아라아트’ 휴관일을 맞은 지난 2일,  ‘주간동아’의 현장 인터뷰 요청으로 다시 들렸다. 

가슴을 겨우 가린 브래지어와 엉덩이 골이 훤히 보이는 짧은 팬츠를 입고 앉은 여인들이

지나치는 이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온 60대 초반의 아저씨가 일을 치룬 후, 아가씨의 배웅을 받기도 했고

선그라스를 놓고 나간 20대의 청년을 아가씨가 불러 세우는 등, 홍등가 풍경은 여전했다. 
 
“65층 주상복합 건물이 이 자리에 들어서면 어디로 갈 것이냐?”고
손님을 기다리던 성노동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저씨! 이곳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끝까지 지킬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힘의 논리에서 버텨낼지 모르지만, 마지막 그 날까지 기록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권 때 성매매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성매매를 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백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성적 파트너를 구하기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장애인 등

성적 소외자들의 해소 공간을 막아버리면, 성범죄만 더 늘어나게 된다.

'풍선효과'만 낳은 성매매 특별법 이후 성매매 수법과 장소도 더욱 교묘해졌다.

 오피스텔 걸, 안마방, 키스방 같은 변종 업소들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

 당시 성 노동자를 강력하게 단속하던 김강자 종암경찰서장도 마지막엔 공창제를 부르짖지 않았던가.

최근 '성매매 특별법'이 헌법재판소의 도마 위에 올랐는데, 헌재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린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달 25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전시장에서 1980년대 서울의 유명한 사창가였던 청량리 588번지의 매춘부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조문호(68) 씨가 83년부터 88년까지 5년간 청량리 588을 드나들며 찍은 사진작품들이다.

사진 속에는 당시 청량리 588의 풍경은 물론 매춘부들의 생활 모습, 심지어 섹스하는 사진 등 쉽게 볼 수 없는 모습들이 담겨있다. 조 씨는 “다른 사진작가들이 쉽게 찍지 못하는 매춘부들의 생활과 애환을 담고 싶었다”고 사진을 찍은 이유를 설명했다.


1980년대 서울 '청량리 588'. 매춘부들이 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남성에게 호객행위를 하고있다./사진=조문호(68.다큐멘터리 사진가)

 

매춘부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몰래 사진을 찍다가 깡패들에게 걸려 수차례 구타를 당했고, 찍은 필름을 빼앗기기도 했다. 하지만 깡패들에게 맞았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됐다. 조 씨는 “하루는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 자신을 때린 폭력배가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술을 권하며 내가 매춘부들의 사진을 찍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니 오히려 그가 나를 때린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사진을 잘 찍을 수 있게 도와주더라”고 했다. 또, 직접 사창가 안 여인숙에 들어가 5개월간 생활하며 매춘부들과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먹고 술잔도 함께 기울이며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매춘부들은 가난이 싫어 돈을 벌거나 부모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창가에 들어온 여자 등 돈에 얽힌 사연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조 씨는 “비록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봐주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청량리 588' 사진전을 연 조문호(68.다큐멘터리 사진가) 씨./차재문 기자

 

사실 이번 사진전은 1990년 2월에도 열렸다. 당시 사진 속 주인공들이 조 씨의 사진작품을 보러 올 것을 약속했지만,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사진전을 통해 사진 속 주인공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번 ‘청량리 588’ 사진전은 오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2층에서 전시된다. 선정적인 사진이 많기 때문에 19세 미만은 관람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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