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4년 6월26일 서울 경운동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의 다섯번째 주제전 ‘6·25전’ 출품작으로 첫선을 보인 <디엠제트>는 작가 김용태의 대표 걸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사진콜라주라는 새로운 형식과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의 사진’을 내건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문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훗날 재전시회 때 원본이 아니라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사진작가 고 김영수가 찍었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여섯번째로 조각가 이태호씨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주제전 ‘6·25전’에 출품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가 김용태의 대표작 <디엠제트>(DMZ)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진 190장 콜라주 작품 ‘DMZ’
사진속 한국 여성과 미군 통해
휴전·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호소력있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훗날 “여성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진들을 없애 원본은 이제 없다
‘DMZ’는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위에서 폭발하고 사라졌다

 

■ ‘현실과 발언’의 청년시대

 

 

1980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흉흉하고, 불길하고, 우울했던 해로 기억된다. 기억 속에서는 내내 계엄령 아래서 살았던 것 같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그 엄청난 소식도 ‘카더라’와 소문에 의해 더듬더듬 알게 됐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고, 친구들이 어디론가 잡혀갔고, 갑자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해 12월 말 밤늦은 귀갓길에서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병원에서 누워 있던 그때 ‘현실과 발언’의 최민과 성완경 두 분이 찾아왔다. 회원으로 같이 활동해보자 했다. 두 분의 방문 자체가 황송해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무조건 “예”라고 답했다.

 

 

‘미술은 현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게 당시 미술인 대부분이 인정하는 정답이었다. 미술은 냄새나고 구차스런 현실을 떠나 어떤 고상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현발’은 그 이름에서부터 정답을 무시하고, ‘현실’ 뿐만 아니라, ‘발언’까지 들고 나온 미술그룹이어서 당연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 창립전이 ‘촛불전시회’가 되고, 결국 취소되는 사태를 겪은 뒤 나는 현발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꼼짝없이 모더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작가주의에 찌든, 이리저리 집단으로 몰려다니거나, 누굴 대표해 발언하거나, 또 그런 일로 쓸데없이 주위의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름 깐깐한 미술쟁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현발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참여하고 있던 여러 미술그룹 가운데, 현발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는 ‘학벌’이니 ‘동문’이니 하는 게 없었고, 강요되는 ‘선후배 서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 앞에서 그런 것들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현발은 재미있었고, 지적 자극과 도전이 있었다. 회원들은 음주가무에 있어서도 탁월했지만, 토론과 의견 개진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연구하는, 그리고 미술이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반영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연습장이자 경기장이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많은 회원들이 당시 미친 듯한 속도로 ‘산업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사회 현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부는 그러한 현실을 강요하거나 주도하는 정부 혹은 대기업 등 권력에 예리한 관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현발의 주제전 ‘제2회 도시와 시각전’과 ‘제3회 행복의 모습전’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4회전의 주제는 ‘6·25’로 정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6·25는 최대의 사건이었지만 한국 미술에서 그것을 다룬 작품은 실로 미미했다. 그러한 한국미술사의 기이한 현상을 두고 자성하는 의미의 토론을 하다가 ‘6·25’가 그 해 전시의 주제로 정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 김용태의 작품 ‘디엠제트’의 폭발

 

 

그 ‘6·25전’에 김용태는 작품 <디엠제트>(DMZ)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용태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며 손님들이 촬영한 뒤 찾아가지 않고 있는 사진들을 구해 왔다. 그리고 검은색 배경 위에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영어 대문자로 ‘DMZ’를 만들었다. 모두 800여 장을 수거해 왔다는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사용된 사진은 180여장으로, 크기는 3×5에서 11×14인치까지 다양했다.

 

 

되돌아보니, 작품 ‘디엠제트’를 나는 3회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났다. 맨 처음은 역시 현발의 <6·25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84년 인사동 아람미술관에서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88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민중미술전>(민중 아트-어 뉴 컬처럴 무브먼트 프롬 코리아)에서였다.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2012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현실과 발언-30년전>이었다.

 

여기서 작품 <디엠제트>의 특징과 내 느낌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 감동은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의 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작품이 아니다. 또한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 작품처럼 작가가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조작하거나 합성해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된 사진을 김용태 작가가 발견해 수집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발견된 사물’이다. 그 사진들은 원본 자체에는 아무런 조작 없이, 작가에 의해 디엠제트라는 글자로 배열됐을 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차용’ 방식이다.

 

 

그 사진들이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 주변의 사진관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8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장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런 점을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도 모더니즘의 ‘보편성’의 개념에 대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용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지닌 호소력과 설득력이다. 그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개념과 기호로 소통하고 공감을 나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는 일종의 ‘개념미술’이다. 그것은 한국의 당장의 현실을 얘기할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라는 추상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과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가 하면, 우리가 여전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상태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그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은 미군 병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한국의 여인들과, 병사의 배경에 있는 풍경들에 관심을 간다. 사진 배경에는 한국의 기와집과 초가집 등 그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가 하면, 국적 불명의 고층 빌딩이 즐비한 대도시도 있다. 그야말로 모두 ‘키치’들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 앞의 미군 병사들이 비선택적으로 한국에 와서 삶의 한동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시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는 배경의 글에서 한국을 지옥이라 했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도 나는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글에서 한국은 우리가 사는 한국이 아니다. 군 복무로서 한동안 보내는 그들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제대 뒤 흔히, 근무하던 부대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차원일 것이다.

 

 

그 사진들이 내게 의미있는 이유는 병사들의 포즈나 배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 그 구조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특별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한국 여인이 흑인과 백인 아이를 함께 안고 있는 사진이다. 완전히 다른 피부색의 두 아이를 가진 그 여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결코 나만의 체험이 아닐 것이다.

 

 

지난 ‘현실과 발언 30년전’의 인터뷰에서 김용태 작가는 전시회 이후 생각해보니 자신이 그 사진에 나오는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 사진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품 ‘디엠제트’의 원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 뒤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은 사진작가 김영수의 사진 복사본이다. 이는 개념미술가로서의 김용태를 잘 드러내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작품=물건=상품=매매’라는 도식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디엠제트’ 이후, 미술 현장을 떠났다. 그 대신 삶의 현장으로 갔다. 문화를 통한 사회변혁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였다.

 

 

■ ‘디엠제트’를 입체작품으로 세우자

 

 

김용태 작가가 투병중일 때 나는 작가에게 작품 ‘디엠제트’를 입체로 제작해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입체작품 <러브>(LOVE)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 ‘LOVE’란 글자를 회화로뿐만 아니라 입체작품으로도 만들어 세계 여기저기에 세워놓고 있었다.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디엠제트’가 ‘러브’보다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조각가인 내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병석에서 일어나 함께 일도 하고 재밌게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용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제 이 제안은 수사를 넘어 하나의 필수 사업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통일되는 그날을 위해 그의 작품 ‘디엠제트’가 기념비로 서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되어,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래서 디엠제트도 사라진 뒤, 그 땅 한가운데에 김용태의 ‘디엠제트’ 기념비가 서는 것을.

 

 

이태호 / 현실과 발언 동인·경희대 교수

 

 

1984년 ‘6·25전’ 출품작 <디엠제트>에 쓰인 실사 사진 가운데 일부.

 

 “우월감 젖은 미군의 점령군 행세 폭로한 것”

 

용태형이 말하는 ‘DMZ’

 

 

“다섯번째 주제전 ‘6·25’을 2개월 남짓 앞둔 1984년 4월의 어느 일요일, ‘현실과 발언’ 회원 일행은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타고 있었다. 봄이었으나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동두천 기지촌’에라도 가보자는 한 회원의 제안에 따른 길이었다. ‘아직 많은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므로, 어쩌면 특수한 문화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들을 품고서였다.”

미술작가로서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인 ‘디엠제트’(DMZ)의 창작 과정과 ‘6·25’전의 의미에 대해 고 김용태 선생이 직접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현실과 발언>, 열화당 펴냄

 

 

4월 동두천 기지촌 답사 때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김용태 선생이 사진관을 순례하며 수집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들의 기념사진들이다.

 

 

 

사진속 체념한듯한 여성의 사진
뇌리에 깊게 남아 작품 만들어
미군 장교들이 사진 뜯어내기도
“진정한 작품 이해 없었다”고 회고

 

 

 

“버스에서 내려 약 15분간 걷다 보니 ‘내국인 출입 금함’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골목에 당도했다. … 우리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장면은 사진과 진열창 속의 많은 컬러사진이었다. … 그 사진들 중에서 국제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웃고 있었으나 특히 여자의 표정은 삶을 체념한 듯한 우울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계속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두천을 다녀온 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 어느 날 중앙청 앞 신호등에서 멈춘 출근 버스 속에서 본 풍경이 자꾸만 아롱거렸다. … 조선조 태조 4년에 창건된 광화문, 그 지붕의 잿빛 기와와 화려한 단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그 아래쪽 붉은 대문, 노랑머리의 키 큰 외국인과 곱슬머리의 젊은 한국 여인, 해태상, 동상마냥 서 있던 전투경찰의 자세, 일제 때 지어진 중앙청 건물, 그 뒤쪽의 장엄한 인왕산 등등.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동두천 사진관에서 느꼈던 ‘분단의 현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김용태는 혼자서 동두천을 여러 차례 오가며 진열창 속의 사진들을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관 주인과 장기·바둑·화투를 놀아 주고 때로는 막걸리를 대접하며, 한 장에 300~500원씩 흥정하거나 1천~2천원까지 지불하며 모두 800장을 모았고, 그 가운데 190여장을 골라 출품했다.

 

 

마침내 그해 6월26일 아람미술관에서 열린 ‘6·25’ 주제전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사진 콜라주 형식의 ‘디엠제트’는 전례없는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정작 김용태는 관객의 반응을 두고 “내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왜 이런 사진들이 미술전시회에 나와 있는가란 의구심과 6·25란 역사적 주제와 이 사진과의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많이 받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이에프케이엔>(AFKN)의 프로듀서였던 테리 크라우제의 제안으로, 85년 2월 한달간 미8군 영내에서 ‘2인전’이 열렸는데 첫날부터 일부 미군 장교와 대부분 한국인인 그 부인들의 항의로 사진들이 떨어져 나갔고, 특히 미8군 최고층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서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불쾌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용태는 “동두천 사진들은 그들이 우월감에 젖은, 즉 점령군이란 명목 아래 과시해온 많은 행위들 중에 하나의 표시를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기고문을 마무리지었다.

 

 

[한겨레신문]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80년 10월 창립전부터 화단은 물론 문화계 전반에 충격을 던졌던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89년 말 발전적 해체를 결의한 뒤 90년 창립 10돌 전시회로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다. 사진은 90년 10월6일 서울 관훈미술관 3층에서 ‘현단계 미술운동과 창작의 문제’를 주제로 열린 창립 10돌 기념 토론회로, 앞줄 왼쪽 넷째부터 임옥상, 유홍준, 원동석, 한 사람 건너 김정헌, 강요배씨. 객석 맨 오른쪽 고 문호근, 그 뒤로 심광현(안경 쓴 이)씨 등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다섯번째로 작가 임옥상씨가 1979년 말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 때부터 시작된 35년 인연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사람 선별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사가 끼어있냐
한번 투시로 꿰뚫었다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고 품었다
그 규모가 일개사단은 넘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관여하면서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당연히 주변에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늘 무관이고 빈주머니였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 ‘용태 형’의 미스터리


“임 작가, 차비 있냐?” ‘용태 형’은 누구에게나 헤어질 때 꼭 차비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막상 차비를 받아 가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형은 역시 누구에게나 ‘작가’란 칭호를 붙였다. 물론 화가 동료들에게 말이다. 내게 처음 작가 칭호를 붙여준 게 아마 용태 형일 것이다. “임 작가” 얼마나 친밀한가! 여기에 차비까지 걱정해주니 뭘 더 바라겠는가. 나는 명색 대학교수였고 형은 늘 직업이 불안했다. 그런 형이 차비를 물으니 감동일 수밖에.


형은 두어 번 잡지사 주간을 맡은 적이 있었으나 길지 않았다. 도무지 가만두지를 않았다.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호출(?), 차출(?)되는 것이 형이었다. 아니 제일 먼저 스스로 손들고 뛰쳐나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두 망설이고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형은 즉발적이고 즉각 자원하고 나섰다. 모든 일이 다 민주화와 민중문화운동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그는 비록 미술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넓고도 넓었다. 어찌하다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난 사실 잘 모른다. 미스터리다.


나는 1979년 연말 ‘현실과 발언’(현발) 창립 무렵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일면식이 없었다. 아니 전혀 알지도 못했다. 이름도 듣지 못했다. ‘현발’ 창립 준비모임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 김용태요!” 하면서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인데 처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도 곧바로 반말세례를 받았다.


현발의 공식적인 회의는 성완경 선생이 이끌었다. 최민 선생과 성완경 선생은 마치 의견을 조율이라도 하고 나온 듯 쿵짝이 잘 맞았다. 그러나 비공식 부분은 용태 형 몫이었다. “술 들어. 안 마시나? 마셔! 노래해봐, 뭐야? 빨리빨리 해! 그만 따져. 하면 하는 기지!? 치아라! 좋아. 됐어.” 모든 추임새는 그의 몫이었고 오락 진행도 그의 뜻대로였다. 그렇다고 회의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회의에 활력을 넣는 것, 그래서 회의를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현발 회의는 노는 것인지 장난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정말 재미있는 장면을 항상 연출했다. 그 가운데 용태 형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현발의 목적보다도 그 모임 분위기가 좋아서, 사람들이 좋아서, 용태 형이 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다. 어떤 감각 더듬이로 사람을 선별하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의 선별 능력은 가위 동물적이다. 저자가 순수하냐, 혹은 사가 끼어 있느냐를 꿰뚫었다. 술좌석에서는 곧잘 술잔이 날아다녔다. 그의 성질은 그만큼 단호하고 과격했다. 그의 웃음은 너털웃음이지만 그의 안광은 야수처럼 꽂혔다. 지금도 그 앞에서 발발 떠는 자들이 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는 한번 그의 직관력으로 파악된, 그래서 그 한번 투시로 통과된 자는 그대로 믿었다. 아니 믿음을 넘어 품에 품었다, 챙겼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늘 품고 보살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일개 사단은 족히 넘을 것이다. 나도 그의 품속에서 따뜻했다. 언제나 불러주고 놀아주고 안아줬다.


현발 초기 우리는 매일 만났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어디에선가 누군가들은 만나고 있었다. 나는 비록 광주나 전주에 있었지만 ‘언제 서울에 가나’만을 생각하고 기다렸다. 최민 형의 광화문 작업실, 용태 형의 관철동 사무실이 1차 모임 장소이자 사랑방 구실을 했고, 주변 술집으로 2차, 3차가 계속되었고, 끝내는 누군가의 집에까지 가서 합숙하기 예사였다.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았으나 김정헌 형 집, 용태 형 집이 제일 개방적이었다, 편했다.


또 워크숍이, 스터디 모임이 계속되었다. 우린 모두가 쇼맨십이 대단했다. 농담할 줄 모르는 자, 즉각적으로 웃을 찰나를 못 맞추는 자, 노래 시켜도 빼는 자, 술을 못 마시는 자들은 설 땅이 없었다. 못 마셔도 마시는 척, 마신 척해야 했다.


우리는 전시회에서의 겨루기보다 술판 겨루기가 더 빡셌다. 술판이 주 무대고 전시는 뒷전이었다. 이게 더 정확하다! 아니 술안주를 위해 작품을 하는 것처럼 술좌석에선 작품 품평회가 질펀하게 농반진반으로 난무했다.


권력의 중심 그러나 빈 주머니


시국에는 격랑이 휘몰아쳤다. 나라는 풍전등화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갔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녹록지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비록 ‘졸개’들이었지만 그 뿌리는 깊고 깊었다. 민주화와 연계된 민중문화운동의 초반은 문단에서 이끌었지만 그 뒤를 화단이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시각예술과 활자예술의 차이랄까. 민족미술협의회, 그림마당 민, 걸개그림, 벽화, 판화, 만화. 이제 그림은 먹물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용태 형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사이 용태 형은 이미 그림판을 떠나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언젠가 프랑스 유학 중이던 최민 형이 용태 형에게 그림 그리라며 유화 물감을 사서 보낸 적이 있다. 나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자고 권유를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84년 현발 동인들의 주제전 <6·25> 전시회 때 <디엠제트>(DMZ)를 끝으로 그림을, 작품을 손놓았다. 그러고선 민족미술협의회,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만들었다.


용태 형이 아니었으면 못 할 일들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시간이, 절대적 시간이 형에겐 부족했다. 어느 때부턴가 나도 형을 보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입성하고 민예총이 자리를 잡으면서 형의 행동반경은 더욱더 넓어졌다. 이젠 전국을 망라해야 했다. 엔지오(NGO)로서 지오(GO) 영역까지 깊이 관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노무현 정부 때는 정치적 입김이 더 커졌기에 또 더더욱 그랬다. 어느덧 형은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신은 공정(?)하게도 형에게 돈 관리 능력과 사람 관리 능력까지는 주지 않았다. 전술은 뛰어났지만 전략엔 약했다. 민예총이라는 전국 조직을 움직이기에 자본은 항상 구멍이 났고 사람을 꿰뚫던 안광도 한계가 있었다. 용인술에 문제가 있다 보니 조직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떠났다. 새로운 기획과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그 인력과 자본으론 역부족이었다. 회원과 그 힘으로 조직이 움직여야 하는데 형은 늘 정치적 방식으로 해법을 찾았다. 정부와 밀착하는 만큼 일의 신선도가 흐려지고 의미도 바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창출하는 데 일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은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권력은 인격이 없다. 권력은 지배할 뿐이다. 권력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은 상처받지 않는다. 권력은 붕괴한다. 인간도, 예술도, 철학도, 과학도, 역사도 권력에겐 의미가 없다. 권력은 오직 권력만이 목적이다. 용태 형은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가? 아니다. 권력이 용태 형을 삼킨 것이다. 그가 권력을 탐했거나 쫓아다녔다면 오늘의 모습일 수가 없다. 대신 남 좋은 일만 했다. 빈털터리.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아니 권력의 중심에서도 그는 늘 무관이고 빈 주머니였다. 물론 한때 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을 쓴 적도 있으나, 실은 모두 다 심부름, 즉 ‘따까리’, ‘설거지’ 자리였다.


나는 계속 의문을 갖는다. 왜 그림 작업을 포기했을까. 작업하자면 그는 “됐어!” 그 한마디였다. 용태 형은 아마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더 큰 작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을 말이다.

 
그의 대표작 <디엠제트>만 해도 그렇다. 이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이로운 작품, 작업이다. 의정부, 동두천 미군부대 주변 사진관에서 기지촌 여성들 사진을 수집하여 만든 이 작품은 우선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라는 통념에 젖어 있던 나의 뒤통수를 쳤다. 분단의 비극, 처연한 현실 앞에 나는 말을 잊었다. 미군 병사의 품속에서 웃고 있는 우리의 동시대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은 그대로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DMZ, 맞다! 디엠제트는 바로 저 여인들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결코 지옥에 갈 수 없다. 여기가 지옥의 한가운데인데 더 이상 다른 지옥이 또 있겠는가?’ 사진 속의 미국 병사는 말한다. 여기 한국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용태 형은 미술의 허망함을 보았을 것이다.


이 사진을 모으며 기지촌을 배회했던 용태 형에게 미술은 한낱 배부른 자들의 유한취미로 비쳤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움직여야 변한다고, 미술만으론 안 된다고 새기고 또 새겼을 것이다. 스스로 붓을 꺾고 현장에 뛰어들었던 낭만적 혁명가, 김용태 형! “형, 오늘 차비 있어? 오늘은 내가 형 차비 줄게!”


임옥상 화가·임옥상미술연구소 소장

 

 


김용태 선생은 1980년대 10년을 관통한 ‘현실과 발언’ 시절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사진은 87년 봄 남양주 능내리 한강변에서 ‘현발’ 정기 워크숍을 마치고 찍은 것으로, 왼쪽부터 김용태, 임옥상, 두 사람 건너 김정헌, 김선화·박재동 부부, 박세형, 김건희·신금호 부부, 강요배. 앞줄 왼쪽부터 주재환, 김용태 선생 부인, 민정기, 안규철씨.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놀기도 잘 놀았어…서로 얘기하고 싶어 죽는 거지”

 

용태 형의 ‘현발’ 회상

 

“모두들 흩어져라!” 고 김용태 선생이 회상하는 ‘현실과 발언’ 결성 배경은 1979년 ‘12·12 쿠데타’의 공포와 겹쳐 있다.

 

“그해 ‘10·26’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가 터질 때였다. 여느 때처럼 청진동 중국집에서 ‘현발’ 창립 동인들이 거사(?)를 모의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김윤수 선생이 어떻게 알고는 뛰어들어와 고함을 질러 혼비백산했다. 음식을 시켜놓았는데 먹어보지도 못하고 흩어졌어. 김 선생은 70년대 초반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해직된 경험이 있어서 일종의 행동요령을 알고 계셨던 거지.”(<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마포의 <미술과 생활>을 떠나 78년부터 주재환과 함께 일하던 김용태의 종로 ‘관철동 편집실’은 사실상 ‘현발’의 회합 장소로 쓰였다. “관철동이라는 데가 명동에서 넘어오는데, 집세가 좀 쌌어. 그래서 번역하시는 분들, 신경림 선생, 민영 선생, 천승세 소설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방에 와서 죽치고 있었어. 매일 같이 살았어. 그래서 문인들하고도 거기서 잘 어울렸지.”

 

‘술객’ 모임이 토론자리로 발전
“현발은 우리 나름대로의 반란”

 

하나둘 모인 ‘술객’들로 시작된 관철동 모임은 ‘10·26’ 이후까지 주말마다 한가지 이상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로 발전했다. “어느 날 손장섭 선생이 ‘미술 하는 사람이라고 그림만 그려야 되겠나.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한다. 정물이나 풍경만 그려서는 안 된다’고 했던” 순간을 김용태는 ‘현발’ 태동의 계기로 기억한다. “특히 성완경의 주장은 영향이 컸어요.” 그 무렵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예술의 사회현실 참여 사례를 집중적으로 소개해 미술인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유신 말기까지 이어진 관철동의 주말 토론 모임에서 멤버들은 예술가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나름의 견해를 발표하고 차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찾아 자연스럽게 ‘현발’이 탄생했던 것이다.

 

화제와 파문을 던진 80년 1월의 ‘현발’ 창립전 구상도 술자리에서 나왔다고 김용태는 기억한다. “저녁이면 답답하고 그러니깐, 관철동 설렁탕집에서 막걸리 한잔씩 먹는데, 어느 날인가 원동석이 ‘내년에 ‘4·19’ 20돌인데 가만있어서 되겠는가? 의기투합해서 전시회를 준비하자’ 했어. 그러면서 멤버들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을 벌이게 된 거지.”

 

79년 11월 가장 막내 격인 윤범모가 “솜씨 좋게” 문예진흥원 미술관을 대여하면서 본격화된 창립전 준비 당시의 분위기를 그는 한마디로 “참 진지했다”고 증언했다. “긴장된 사회 속에 살다 보니깐. 우리 나름대로는 반란이지. 음모를 꾸민 거지.”

 

유신 말기, 술집에서조차 대여섯명만 모이면 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현발’의 결성은 모임 자체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김용태의 기억 속 그 시절은 여전히 ‘낭만이 살아 있던 시대’였다. “놀기도 잘 놀았어. 말하기 좋아하는 신경호·임옥상·노원희·박재동·강요배가 나타나면 서로 얘기하고 싶어 가지고 죽는 거지. 시끌시끌하고 재미있어.”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의 주인공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김용태(그림·박재동) 선생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아니다. 올해 들어 투병 중에도 회고록 구술을 해오던 그는 지난 5월4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기꺼이 그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나섰다.
지난해 12월 8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투병을 응원하고자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47명은 지난 3월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형>을 펴냈고, 화가 43명은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어 후원했다.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이들 가운데 20여명이 필자로 참여해 1970~90년대에 걸쳐 민주화운동의 큰 축으로 자리한 민중문화운동사의 주요 마디를 되짚어줄 예정이다. 또 그 마디마디를 술과 차비를 챙겨주며 ‘접착제’처럼 이어준 ‘인간 용태 형’의 일화도 들려준다.
첫번째 필자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2회에 걸쳐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적 의미와 ‘용태 형’이 차지한 자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윤범모,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씨 등이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린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에는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한 80여명의 문화예술인을 비롯해 여러 지인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민중문화운동 세대의 잔치판이 됐다. 앞줄 왼쪽부터 부인 박영애씨와 김용태 선생, 황석영 작가, 박현수 교수,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부영 전 의원, 이재오 의원, 원경 스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신경림 시인, 임재경 선생,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강연균 전 민예총 공동의장, 문재인 의원 등이다. 사진 장성하 사진가 제공


 문화라곤 ‘시낭송’ 고작이던 시절
‘현실과 발언’ 창립하면서
민중의 삶 예술로 담기로 작심했다


광주학살 뒤에도 용공조작…
재야 투쟁대열 서서히 정비돼
시·노래·춤·걸개 등 문화예술투쟁
그 중심에 용태 형이 있었다


 82년 인제 내린천 여행 계기로
문화·언론·학계·청년층 등
민주화 주력부대 벽 허물어져


용태 형이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그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보는 연재 기획의 총론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왜 하필 나일까 생각해봤다. 용태에게 정을 느끼는 후배들, 용태에게 신세진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용태에게 술도 많이 얻어 마시고 바둑내기 돈도 얻어 쓴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징역산다고 정치한다고 용태와 살갑게 자주 만나지도 못한 필자에게 왜 총론을 맡기느냐 말이다.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거니 하고 믿는 처지였으니 내 몫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받아들였다.


필자가 용태를 만난 것은 1977년 연말이 아니었나 싶다. 유신시대 말기 숨막히는 암흑기, 두셋만 모여도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붙던 시절, 대화는 산이나 들로 나가 산개 들개처럼 떠돌면서 나눠야 했다. 잠행의 시대였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불같은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일망타진당하자 한편으로는 낙담을, 한편으로는 더 굳은 다짐들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돌려보고 김남주·조태일·양성우의 시를 읽으면서, 때로는 문익환 어른의 ‘꿈을 비는 마음’을 성래운 선생의 낭송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행사도 드물었거니와 문화를 곁들인다고 해도 시낭송이 고작이었다. 뒤돌아보면 엄혹하기는 했어도 그때 시대정신은 시와 소설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강만길 선생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77년 말 필자가 2년6개월 징역 만기를 채우고 나왔을 때 함께 모이자고들 해서 동아투위에서 송년회를 열었다. 태화관이라는 중국집에서 모였는데 반유신 인사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민족-민주선언’ 같은 성명서도 낭독하고 술도 어지간히들 마셨다. 백기완·고은 선생을 앞세우고 동아투위 동료들과 김용태·김학민·이신범 등이 9평 청운아파트 우리집에 들이닥쳤다. 용태의 선동으로 고은 선생의 흰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지금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된 네살배기 딸아이가 “왜 신발에다 물 마셔?”라고 물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용태와 인연을 맺었다. 폭압은 질식할 듯 심했지만 그 대응은 아직 떠들썩한 시적 낭만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 후반을 미술잡지 편집실을 어정거리던 용태는 유신군부독재의 정치적 폭압, 비대해져가는 재벌, 거기에 짓눌린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79년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하면서 불온한 저강도 문화 비정규전을 시작했다.


시대의 담금질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79년 ‘10·26 사건’ 이후 군부 내의 대립 갈등을 예상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가 그처럼 전광석화처럼 감행될지는 몰랐다. 필자는 10·26 직후 계엄령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80년 ‘서울의 봄’도 5·18 광주학살도 감옥에서 겪었다. 살인적인 삼청교육도 대구교도소에서 받았다. 81년 3월 삼청교육을 이수해 ‘순화’되었다고 해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분명한 것은 ‘광주’ 이전과 이후는 다른 시대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도피중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만남도 줄어들었으며 떠들썩한 술자리도 별로 없었다. 늘어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등산 모임이었다. 이름들이 이상했다. 거시기, 머사니, 무명, 바가지 등등. 거시기 산악회에는 이돈명·리영희·송건호·강만길·백낙청·박현채·박중기·김정남·조태일 등 당시 재야의 중심에 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무명에는 신경림 시인을 좌장으로 정희성·안종관 등 문인, 김종철 등 동아투위 해직언론인들과 김학민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바가지에는 홍성우 변호사를 좌장으로 정태기·신홍범·최병선 등 조선투위 해직언론인과 소장 변호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들은 산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바가지를 캠프로 삼고 여기저기 비정규 회원으로 기웃거렸다.

그런가 하면 ‘기파’(棋派)가 있었다. 산에 가기 싫어 주로 관철동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진 치고 앉아 바둑을 벗삼고 저녁이면 인사동 대폿집을 전전하는 인사들이었다. 당시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성유보가 한국기원 발행 월간지 <바둑>의 편집을 맡고 있던 연유도 있었다. 여기서 단연 중심 인물은 용태였다. 임재경 선생과 황명걸 시인 그리고 박종태 전 국회의원도 단골이었다. 산파들도 산행을 끝내고 저녁에는 기파들과 한자리에 어울리곤 했다. 값도 싸고 자리도 널찍한 ‘이모집’이 단골이었다.


82년 여름 “우리도 여름이니 남들 간다는 바캉스 좀 가자”는 공론이 돌더니 7월 하순 강원도 인제 내린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문인, 화가,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제적학생 등 시대와 불화하던 인물군이 어지간히 모였다. 무슨 토론이 되겠는가. 처음부터 술로 시작해서 밤새 술로 지새웠다. 내린천 깊은 골에서 발가벗고 밝은 달밤에 밤새 요즘 말로 하면 캠프파이어를 했다. 고은·조태일·송기원·여운의 광태가 빛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몫이 용태의 할 일이었다. 어디서든 용태의 메마르고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슨 대단한 결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풀고 온 뒤에는 모이라면 잘 모이고 얘기하면 합의도 잘됐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임을 계기로 문화계·학계·언론계·청년층 등 민주화운동 주력부대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듯싶다.


점차 용태의 그 비범한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할 시간과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시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학교 옥상에서 밧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다가 추락해서 죽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분신을 하고 투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적학생 그룹을 학림·무림·부림 등 무협소설의 ‘강호제현’ 같은 이름을 붙여서 용공 사건들을 조작해내고 있었다. 이제 80년 광주학살 이래 납덩이 같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휘장을 찢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했고 재야에서는 청년들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부문별 지역별 조직으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조직되었다. 야권과 재야의 투쟁 대열이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민민협에는 민청련이 함께 회원단체로 들어와 있었고 용태가 사무처장을 맡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구성단체가 되어 있었다.


 민문협에는 청년문인·놀이패·노래패·화가들이 운동 현장과 결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와 노래와 춤 그리고 걸개그림 등 문화예술이 투쟁의 주요 부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총참모장이 바로 용태였다. 거기에 지금은 세상 떠난 지 20년도 넘은 김도연이 있었다. 민청련과 민민협, 그리고 민문협의 고리로 용태와 함께 움직인 김도연·박인배·정희섭의 활약이 컸다. 용태는 회의를 하러 민민협에 들르면 조그만 짬을 내서라도 민민협의 사무처장 박계동과 어울려 바둑을 뒀다. 김도연까지 어울려 뒀다. 필자는 일하는 사무실에서 바둑 두는 것에 질색했다. 한번은 바둑판을 문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부영 해직언론인 전 국회의원 -

 

 

1980년대 초 서울 서대문 봉원사 근처에 있던 ‘용태 형’의 집들이에서 김용태(왼쪽) 선생이 특유의 몸짓과 함께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부르 자 후배 화가인 민정기(오른쪽)씨가 옆에서 기타 연주 춤으로 흥을 돋우고 있다.

 

술자리 무르익으면 바지춤 추어올리고 ‘산포도~’

 

백기완 선생도 “용태 형” 불러
노래 열창할 땐 다들 배꼽 잡아
헌정문집 표지도 그 모습 담아

 

 

‘산포도 익어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 떠날 때 소매 잡고/ 뒤따라 서던/ 흙묻은 그 가슴에/ 순정을 남긴/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잊겠네.’

헌정 문집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의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제목은 그의 애창곡 ‘산포도 처녀’(1966년, 남상규 노래, 이인권 작곡, 월견초 작사)에서 따왔다. 또 김용태를 아는 모든 이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용태 형”이라고 불렀다. 1987년 대선 때 그가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모셨던 백기완 선생도 그렇게 부른다. 워낙 감투나 직함 같은 허식을 싫어하던 그가 그렇게 불러주길 원해서였다.

문화예술인 47명이 글품을 모아 펴낸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표지.

 

 

“용태 형의 ‘산포도 처녀’를 언제부터 듣게 되었는지는 기억하기 어렵다. 나름 상당한 훈련을 쌓으시고 이 정도면 ‘현실과 발언’(현발) 모임에서 발표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데뷔하신 것 같다. 어느 날, 음식점 방 안에서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서 마치 무대에 오르는 것같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산포도~’를 부르는데,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지춤을 배꼽 상당히 위까지 걸치는 아주 촌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하셨다.”

화가이자 후배인 민정기가 책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산포도 처녀’의 기원에 대한 일화를 보면, ‘현발’을 결성한 1979년 무렵부터 ‘십팔번’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현발 모임은 학연, 지연, 작가, 평론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그룹 운동이다. 토론이 시작되면 얼마나 말씀들이 풍부한지 언변과 지식이 너무도 모자란 나는 그저 아무 소리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최민,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오윤, 김정헌, 임옥상, 노원희, 김건희 등 여러 분들이 포진하여 앉은 술자리가 아닌가. 나는 그저 소주잔만 기울이다가 ‘민정기도 한마디 해봐’ 하면 그땐 취한 김에 용감하게 일어서서 ‘노래라도 한 곡조 불러보겠습니다’ 하면서 ‘첫사랑’을 부르는데 그때쯤이면 대개 무거운 주제를 잠시 멀리하고 재치와 재기, 노래, 입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여흥시간에는 각자 재미있는 것을 개발해서 발표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는데 … 용태 형의 ‘산포도~’도 이때쯤으로 어슴푸레 기억된다.”

이처럼 ‘용태 형’은 술자리가 무르익거나 토론이 뜨거워지다 못해 싸늘해지면 스스로 벌떡 일어나 오직 이 노래만을 불렀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도 “(용태 형은) 오로지 ‘산포도 처녀’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며 “작은 키에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챔피언벨트를 찬 권투선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창할 때는 다들 박수를 치기보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헌정 문집의 표지로 쓰인 그림도 바로 화가 강요배가 ‘산포도~’를 부르는 용태 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한겨레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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