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의눈멂- Blinding Scenery’전이 안양 두나무아트큐브에서 지난 6일 열렸다.

 

지난 7일 아산 꿈에실농장가는 길에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정동지 전시도 있었지만, 몸이 편치 않아 오랫동안 아산에 들리지 못했더니,

지난 추석에는 아산 농장 식구들이 서울로 올라 오기도 했다.

 

  가을걷이라 해야 고추 밖에 없지만 겸사겸사 시간 내어 안양 한상진씨 전시부터 들린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전시 작품들을 보고 있으니 작가가 나타났다.

 

전 날 인사동 정복수씨 전시장에서 만남에 이은 연이은 만남이었다.

 

  전시장에는 수묵드로잉을 비롯한 페인트작업이 걸렸고

바닥에는 버려진 사물들을 채집하여 가지런히 진열해 놓았는데,

사진으로 본 작품의 느낌과 실제의 느낌이 너무 달랐다.

 

  눈멂이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중지'의 순간으로,

길을 가다 만난 풍경과 풍경 속에 담긴 삶의 모습이 아련하지만 친근하게 다가왔다.

 

  대상을 만나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그치며 그려 낸 작품에는 고요한 울림이 번지고 있었다

찰나가 전해주는 잔잔한 울림으로, 마치 수행자의 묵상처럼 고요한 정적감도 감돌았다. 

 

  볼수록 풍경 속으로 빨려 가는 심오한 흡인력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난 계곡의 돌들도 저마다 소리를 내고,

말없이 흐르는 구름마저 손짓하며 암시한다.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그의 되돌아 봄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곳에는 이름 없는 풍경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보잘것없는 사물들,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자연을 인위적인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사유에 있어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작가가 그려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작업 속에는 이러한 전통적 사유와 함께 우리가 성찰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 두나무아트큐브

 

  이 전시는 안양시 예술로공원에 있는 두나무아트큐브에서 111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한상진'눈멂, Blinding Scenery' :: 인사동 사람들 (tistory.com)

 

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 볼만한 전시가 너무 많았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세계적 오염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을 비롯하여

나무화랑의 구경숙전 마킹스’, 그리고 김경서의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젖은 땅’,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등 보아야 할 전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연휴가 끝나는 지난 4일은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십여 년에 걸쳐 해왔던 일 중의 하나가 인사동 전시 안내하는 일인데,

월말에 나오던 서울아트가이드소식지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을 헛걸음친 것이다.

 

  연휴라 그런지 인사동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 북인사마당은 구경꾼들이 진을 쳤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에도 관람객이 몰렸다.

방류하는 일본보다, 동조하는 윤정부 대응에 더 분노하는 분도 있었다.

 

  삼일이나 지나서야 서울아트가이드가 나왔는데,

인사동 간 김에 네오록에서 보았던 구경숙의 마킹스보러 나무화랑에 갔다.

 

  전시 보는데, 차 빼라는 전화가 걸려 와,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6일에서야 다시 인사동에 나갈 수 있었는데,

마침 전시 작가인 구경숙씨도 만날 수 있었다.

 

  마킹스는 건강을 잃은 작가가 긴 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신체적 반응과 살아야 하는 절박함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먼저 몸의 흔적을 판각하고 탁본 기법으로 찍은 뒤,

이를 한지로 릴리프 하여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노작이었다.

 

 전시장에서 내려와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를 가기 위해 인사동 11길로 들어서다

토포하우우스앞에 붙은 김경서의 젖은 땅전시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다.

 

  아는 분이기도 하지만, 한때 몰입했던 늪에 관한 전시라 눈이 번쩍 뜨였다.

90년대 환경사진가회에서 일할 때, 전국 늪지를 찾아다니며 우포늪 사진집을 발간한 적도 있었다.

더구나 우포늪은 고향에서 가까워 어릴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 아닌가.

 

  전시장에 올라가 보니 작가인 김경서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걸린 작품들은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사진처럼 재현했지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늪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장 재현에 머물지 않고, 늪이 숨 쉬는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늪지를 탐사해 낸, 늪에 대한 내공이 대단했다.

 

  문제는 매달 인사동 전시 소개에 공을 들여 온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보지에 사진전문갤러리를 비롯한 많은 갤러리의 정보가 등제 되지 않아

레오록이나 페이스북 등 여기저기 뒤져 찾아내기도 하지만,

볼만한 전시를 추려 올리는 과정에서 '인사아트센터''경인미술관', '토포하우스'

대관 위주의 갤러리는 경력 작가들이 잘 찾지 않아 소홀했던 점이 문제였다.

 

  내가 인사동에 관한 기록을 하게 된 것도 어언 40여 년이 되었다.

변해가는 인사동이 안타까워 옛 풍류객을 찾아다니며,

인사동에 관한 전시나 행사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흐르는 물길은 되돌릴 수 없었다.

17년 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이 창립되어,

창예헌카페를 개설한 것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시작이었다.

 

  그 뒤 창예헌이 해체되어 이름을 유목민으로 바꾸었는데,

그마저 유목민이란 주점이 생기면서 유목민카페도 폐쇄되었다.

대신 인사동 사람들블로그를 개설하여 중요한 기록들은 옮겼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자료를 잃어버린 안타까움도 남는다.

 

  다음블로그 인사동 사람들을 운영하기 시작한 십 년전 부터 '인사동과 서울강북지역 전시안내'를

매월 초 올려가며 인사동에 관한 이야기와 전시리뷰를 포스팅해 왔는데,

특정 전시 리뷰를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해, 한 달 동안 로그인을 못 하게 하는 갑질에

네이브블로그인 인사동이야기를 새로 개설한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을 비롯하여 사진에 관한 포스팅이 무려 6,300건이 넘어 옮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곳의 블로그를 같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두 블로그에 매일 한 꼭지씩 올린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자료를 블로그에서 찾을 수 있으니, 내에게는 족보나 마찬가지다.

김경서씨 작품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전시 이야기를 하겠다.

 

  정복수씨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보기 위해,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로 발길을 옮겼다.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였다.

 

  주인공인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자궁으로 간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 사주 보는 점집에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부각 되었는데,

마치 너 자신을 알라는 듯, 묵시적 가르침의 뉘앙스도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어찌 보면 길 잃은 인간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겼더니,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손님의 술값이나 식사비를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황순미대표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뒤풀이 값 내는 곳은 흔치 않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돈을 쓰면 반드시 돌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미처 소개하지 못한 전시나 상세한 전시리뷰는 아래의 인사동사람들블로그를 참고하세요

인사동과 강북지역 갤러리, 202310월 전시 일정

https://mun6144.tistory.com/6866

33인이 불 지핀 후쿠시마 조삼모사핵 오염수 투기를 당장 중단하라!”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3369414

구경숙'마킹스 Markings'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5682853

김경서'스스로 살아 숨쉬는 젖은 땅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30335687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찾아가다.

https://mun6144.tistory.com/6868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1’전이 106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화가 정복수는 반평생을 억눌린 인간의 본성이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인체 구조로 표현해 온 작가다.

 

그는 탐욕의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인간의 절단된 몸을 그려 왔다.

 

오래전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충격이었다.

마치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온 것 같았다.

작업실에는 사방에 해체되고 절단된 인체가 걸려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형체나 표정에서 사악해지는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짐승 같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생존을 그린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건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닌가?

갑자기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를 엿 볼 기회라며 들어갔는데, 마치 사주 보는 점집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다가왔는데,

마치 스스로를 알라는 듯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간 회귀의 욕망을 부추겼다.

어찌보면 길 잃은 인간들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서문으로 대신한다.

 

영원한 청춘일듯하던 인생도 종국에 는 맞닥뜨리는 게 있다. 생명체라면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 생장해서 성숙해지 는 만큼 소멸이 가까워지는 게 세상 이치다. 생명의 끝 지점. 자궁으로부터 출발 했으나 결코 자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회귀 불가능은 더욱 회귀에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 도저함의 사막에서 마지막 한 방울 생명수가 모래 사이로 스 며들어 버렸을 때, 마침내 우리의 모든 기억에서 자궁이 지워지는 암전 상태가 된 다. 페이드 아웃. 디 엔드. 이름하여 죽음.

 

정복수의 그림엔 항상 무엇인가 하는 인간들이 즐비했다. 50여 년의 화력을 돌이켜보면 초지일관 무엇인가 행위 하는 인간을 그렸다. 뱉고, 욕설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싸우고, 자위하고, 섹스하고, 거부하는 인간들. 그야말로 본능의 상태에서, 짐승과 같이 생존의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한, 생래적으로 죽음과는 거 리가 먼 듯한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존경연장이자 투기장이었다.

 

그 숱한 공격적 동사형의 인간을 그리던 정복수도 이제는 그의 그림의 출발 지점인 10대 시절보다 좀 더 먼 과거를 유영해보려는 모양이다. 출생의 기표인 지문과 손금이라는 나침반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또 타고 난 눈빛과 얼굴과 성정을 참조하면서,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사건들과 섭취했던 온갖 욕망을 하나 둘 해체 하며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은 회갑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미래에 의 욕망과 그에 비례하는 기억의 축적이 느리게 진행되고, 그 이후에는 과거로의 회귀 욕망의 증대와 추억을 망각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생태성으로 구성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화 두로 삼았으되, 결국은 그 중간 지대인 현실에서의 번뇌와 고통과 헤맴으로 인해, 자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 일게다.

 

그래선가, 이번 근작들에선, 정복수 특유의 이빨, 성기 노출, 사정과 같은 이미지들은 많이 소거 됐다. 대 신에 자궁으로 가는 지도’, ‘깊은 인생’, ‘너무 깊은 생각’, ‘생각의 입’, ‘생각의 핏줄’, ‘을 찾는 방법’, ‘인간 은 무시무시한 벌레등과 같은 철학적 사유를 동반하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화가도 인간인 이상 그의 나이 에 비례해서 자기 존재성이나 내면을 반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만큼 삶에 대한 내밀한 관념 과 인식을 화면에 드러내게 된다. 정복수의 근작도 이런 경향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 복수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여전히 치열하다. 힘을 빼려는 자의, 힘을 빼는 과정에 집중하는 치열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채굴하고, 다시 묻고, 또 그 옆의 구멍에 천착해서 관통하고 나간 뒤 근처에서 돌아오기 위한 구멍을 다시 판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정복수의 기본적 태도다. 버리기 위해서 버 리는 것에 더 깊이 몰두하는 습관이나 체질과 같은 태도 말이다.

 

한편, 그 치열한 자궁으로의 회귀 욕망과 기억과 기록을 더듬는 정복수의 진술은 남은 삶에의 욕망이자, 더불어서 죽음의 길을 순연하게 찾기 위해 작성하는 지도다. 정복수에게 그림은 그 지도를 제작하는 것으로 부터 그 지도에 표기하는 메모와 주의사항들을 꼼꼼하게 형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고. 자궁에서 나 왔을 때부터 그의 의식에 지문처럼 새겨진 죽음에 대한 메멘토 모리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저항-확인-수 용해온 지난 50년의 작업적 변증이, 정복수에게는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그의 본능과 의지의 생산 과정이었 다고 하겠다. 기실, 그게 화가의 일이다. 그가 출발해서 떠나왔던 자궁 입구를 찾기 위해 그리는 삶과, 마침 내 그곳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그리기를 멈추는 것 말이다. 그 궤적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게 바로 작가적 삶과 죽음의 표지일지니, 여적 그리고픈 인간이 많다는 정복수에게 자궁으로 가는 지도는 또 새 로운 인간 유형을 탐색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67년을 걸어온 만큼 회귀하는 길 또한 만만치 않게 길 터 이니, 그가 그릴 인간들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격렬한 본능보다는 존재를 사유하고 탐 색하는 깊은 인간형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김진하(미술평론)

 

전시 개막 시간을 밝히지 않아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공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겨야 했다.

 

'부산식당'에는,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 많은 손님들 마신 술값이나 식사비가 만만 찮을텐데,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 황순미씨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 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화끈하게 뒤풀이 비용 내는 곳은 처음 보았다.

"돈은 이렇게 기분 좋게 쓰면 되돌아 가는 거야!"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정동지를 담보로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눈멂, Blinding Scenery

한상진/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1006 2023_1101 / 월요일 휴관

한상진 _ 검은 산 _ 종이에 수묵드로잉 _ 양구에서 _42×29.7cm_2023

 

초대일시 / 2023_100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나무아트큐브

DOONAMOO ARTCUBE

경기도 안양시 예술공원로 131번길 49

@doonamoo_artcube/

www.youtube.com/@Doonamoo_Artcube

 

두나무아트큐브에서는 한상진 작가의 눈멂, Blinding Scenery을 기획하였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과 회화(painting) 그리고 버려진 사물을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 넣는 오브제(objet)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주로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낯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 담긴 삶의 모습들, 친근하면서도 낯선 언어들과의 만남,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의 되돌아 봄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곳에는 이름 없는 풍경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보잘것없는 사물들,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자연을 인위적인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사유에 있어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작가가 그려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작업 속에는 이러한 전통적 사유와 함께 우리가 성찰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한상진_적벽_종이에 수묵드로잉_금산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바람처럼_종이에 수묵드로잉_정독도서관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묵상 Meditation_종이에 수묵드로잉_신도림 마로니에_42×29.7cm_2023
한상진_피어나다_종이에 수묵드로잉_반려식물, 옥상드로잉_42×29.7cm_2023

길 위에서, 멈춰서서,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순간을 작가는 '눈멂'이라고 말한다. 눈멂이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중지'의 순간이 아닌가... 중지의 순간-이끌림, 의식과 의미가, 이성의 구조적 판단이 멈추는 응시의 순간, 수행자의 묵상처럼 찰나가 전해주는 울림을 그는 마음의 숨결, 몸의 감각을 통해 화면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2023년 전후, 풍경과 사물을 응시해온 수묵드로잉을 포함하여 페인팅 작업 그리고 채집된 오브제로 재구성된 가변설치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2005년 전후 문명의 침실연작, 2008년 전후 FLASH GARDEN연작, 2011년 전후 응시와 명상연작, 2014년 전후 소요逍遙-흐르는 풍경, 무경계, NO BOUNDARY, 미명微明연작 등, 실험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20여 회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두나무아트큐브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5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6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7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8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9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눈멂-Blinding Scenery 나는 이름 없는 풍경들이나 버려지고 오래되어 허름한 사물들에 이끌린다. 의미화되거나, 화석화되거나, 기호화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응시의 순간이 작동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상의 바라봄이며 시선이 시선 속에 그 이상의 나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삶의 계기들은 거부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친밀하고도 낯선 모호함을 숨기고 있다. 문화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은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 기능하며 독자의 체계와 공명하겠지만, 이미지가 그 너머의 타자성을 품을 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밝은 방에서 제기한 개념 푼크툼(punctum, 푼크툼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의미로, 이미지를 봤을 때 다가오는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말한다)처럼 숨겨진 틈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때로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분열의 시간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시간의 나눔과 선형적인 구분 사이에 있다. 동일성을 배제한 타자들의 목소리는 어두운 심연에 몸을 움츠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 또 다른 소리의 형상이며 침묵 또한 온전하게 의미로 정립되는 것을 방해한다. 동행하던 내 안의 내가 길 건너 저편에서 손짓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겹침(overlapping)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온전치 못한 불가능한 의미의 세계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어가는 순간들은 길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흐린 날의 기행, 목적 없이 떠나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은 변증법적으로 충족시켜가는 과정이 아니며, 다시는 고유성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실패하는 여행이다.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미 죽은 것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벗어남, 회의, 전락, 공포의 감정, 무의식... 존재는 언어적인 의미로 해석이 안 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유한성의 무한한 지속을 존재의 참을성(patience)이라고 한다. 의미는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어떤 것에 속하려고 하는 강박은 의미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연기는 나에게 종결되지 않는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는 의미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풍경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중지의 순간에도 흐르는 풍경은 고유한 자리가 없다. 죽음은 죽임으로 종결되지 않는 욕망이다. 흔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은 시간적인 차연으로 존재함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벌거벗은 풍경으로서, 재현 불가능한 풍경으로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1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2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3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4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5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사성암四聖庵_구례-지리산 가는길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
한상진_길 위에서, 20221008 경북-문경에서

기억할 수 없는 타자,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살아 숨 쉬는 죽음의 순간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가 육명심(陸明心) 선생은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이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겼듯이, 그런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진집 백민(白民)에 수록된 윤세영 선생의 글을 참조하자면 1970년대 말 시작된 백민(白民)연작은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고 있었던 기층민, 삼베나 모시옷을 입은 옛 삶의 원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템적인 분위기는 사진들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정면성에 나타나 있고 바라봄과 보여짐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 서로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관계의 형성은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육명심 선생의 작품집 백민은 시대의 풍경을 호명하는 것이고 오늘날 기층민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해준다. 나에게 존재란 그리고 그림이란 이름 없는 것들 속에서, 그 관계 속에서 삶-죽음을 호명하는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을 묵시해 왔다. 정치적인 형세,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적 풍경 속에서 자본의 흐름이 존재를 지배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서구의 그것보다도 더 비자연적으로 획일화시키고, 물질화된 환경 속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과 소비 속에서 남겨진 잉여, 의미로부터 버려진 사물과 풍경들은 일렁이는 시선의 동일성 속에서 나를 애착(affection)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 위에 떨어진 열매, 투박하게 마모된 조약돌, 빛바랜 플라스틱이나 유리 파편들, 녹슨 쇠붙이, 바닷가에 떠내려온 부유목, 수변 풍경, 적벽... 풍상이 담긴 나무들, 나타나고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 하늘과 땅의 경계가 그려내는 모호한 풍경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거칠고, 아름답고, 숭고하고 강렬히 눈을 멀게 하고, 삶 속에서 헐벗은 파편으로 흐르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텅 빔을 나로 하여금 반복-공유하게 한다. 위와 같은 여정 속에서 작품으로 등장하는, 오브제(objet), 최소한의 재료나 물질의 옷을 입은 형과 상의 속삭임들, 미완의 흔적들은 손에 잡을 수 없는 형상들이 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무경계(no boundary)란 완결되지 않은, 종결될 수 없는 이미지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물들, 그러나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온다. 실패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나서며 풍경을 소요(逍遙)하는 것은 아무런 구분도 가능하지 않은 어둠, 바깥으로 열리는 텅 빔을 환대하려는 태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상진

 

 

지난 삼일절엔 동자동 사진 찍느라 고향에서 열리는 '영산삼일민속문화제'는 커녕 '탑골공원'도 못갔다.

봄바람에 치마가 날리는 게 아니라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만 휘날렸다.

 

그 이튿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정동지와 전시 보러 나섰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김동진의 ‘나의 살던 고향’ 부터 들렸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은 조용했다.

 

전시작들은 작가의 고향인 만덕동의 오래전 모습을 살벌한 도심풍경에 빗대어 그리워했다.

자연과 주변 환경만 바뀐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바뀌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라져버린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진가의 고향노래였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며,

고향이란 말조차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추억의 서사다.

 

이 전시는 3월 12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인규씨의 ‘산 넘어 남촌'을 찾아 인사동으로 넘어갔다.

이 전시 역시 고향에 대한 향수로, 전시장 입구에는 ‘갤러리의 봄’이란 또 다른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봄은 실감할 수 없으나, 전시장은 온통 고향을 그리는 봄 노래였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전시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정복수, 김 구, 장경호씨가 있었다.

 

작품들은 고향의 봄을 연상케 하는 소담한 풍경이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이나 초가집과 구릉들이 나열된 공간구성.

거기에 평면적인 입체감을 두리 뭉실하게 드러내어 꿈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한 풍경으로 끌어갔다.

 

단조로운 내용이 오히려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일체의 기교로부터 탈피한 그리기의 원형을 보여 주는듯한 소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원초적 미감의 봄바람 같은 분위기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화면은 조선 민화 같은 담백한 맛을 내는데,

마치 동화를 보는듯한 유치찬란함 그 자체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전시로, 13일까지 열린다.

 

화가 정복수씨의 술 마시러 가자는 꼬임에 끌려 장경호, 김구씨와 ‘사랑채’로 내려왔다.

운전 때문에 막걸리 한 잔만 마시기로 했으나, 한 잔으로 끝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모시고 가야할 차주 눈치 보느라 술인지 맹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개마서원’의 장의균씨 내외와 안원규씨도 합류했다.

 

아직 보아야 할 전시가 남아 있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갤러리담’에서 열리는 한상진씨의 ‘무경계’를 찾아 가다 거리에서 춤평론가 이만주씨를 만나기도 했다.

 

‘갤러리담’에는 전시작가 한상진씨를 비롯하여 최석태씨,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이사장 등 반가운 분도 여럿 있었다.

 

전시된 주요 작품은 먹 드로잉이었다.

작업실 주변이나 길에서 만난 하잘 것 없는 사물들을 형상화했다.

풀포기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렸다.

 

본래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버린,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착의 발로였다.

변해가는 사물이나 풍경처럼 세월을 멈출 수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담은 것 같았다.

무미건조하고 불안한 일상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말로는 지난 전시보다 훨씬 단단해진 미감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이 전시는 3월21일까지 열린다.

 

재미 사진가 김인태선생의 ‘선율’전이 열리는갤러리인사1010’으로 발길을 돌렸다.

 

15년 만에 찾은 김인태씨의 귀국 초대전은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국 대자연의 풍광을 보여주었다.

80년대 중반에 발표한 광활한 사구의 기하학적 구성을 드러낸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번 '선율' 전에 나오는 작품들은 때로 사색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특히 시들어가는 꽃송이를 크로즈업 한 사진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있다.

 

김인태의 ‘선율’전은 14일까지 열린다.

 

마지막으로 박진흥전시를 보러 '갤러리 더원'에 들렸다.

박진흥씨는 박수근화백의 손자이고 박성남화백의 장남이다.

삼대째 그림을 그리지만, 박진흥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해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박진흥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

박진흥씨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이 열리는 ‘갤러리 더원’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시도 보지 못한 채 뒤풀이 장소인 ‘마중’으로 가야 했다.

 

'마중'에서 전시 작가인 박진흥씨는 물론, 부친 박성남화백도 만났다.

오랜 만에 만나 반갑기 그지없으나, 박성남씨의 능글능글한 농담은 변함 없었다.

 

작가의 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다시 인사동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시는 13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봄바람 맞으며 전시보러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무경계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0302 ▶ 2023_0321

한상진_몸의 풍경, 풍경의 몸_종이에 수묵드로잉_각 42×29.7cm_2019~20

초대일시 / 2023_030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3월21일_12:00pm~03: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한상진의 『무경계』 전시를 기획하였다. 작가의 먹 드로잉을 살펴보면, 그는 작업실과 길에서 만난 어떤 사물들을 A3 크기의 드로잉 종이에 시간을 가지고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감자, 모과, 그리고 빈 화분 속에 자라는 풀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주변의 사물과 풍경들을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작품이 되어 전시장에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는 종이에 먹 드로잉을 비롯하여 작품 30여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고 이번이 스물두 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부유목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불나무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구름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Burn Out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풍경 속의 풍경 ● 나타나고 사라지는 풍경, 여기에서 풍경이란 세계를 구획하고 질서지우는 방식의 풍경화가 아니라 비전체로서의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작업은 인위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밖이란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시적인 언어의 내부가 열리는 자리이다. ● 나의 그리기는 고요하게 내려놓는 순간에 발생한다. 소요(逍遙)하는 시간 속에서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는 텅 빈 시선, 판단하지 않는 태도,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不二)을 깨닫는 시간 속에서 경계(境界)는 사라지고 삶의 유한함 속에서 손에 잡을 수 없는 무한한 것과 만나게 하는 과정이다. ● 회화(繪畵)는 드로잉의 확장된 자리이며 심연의 공간이다. 따라서 드로잉은 회화를, 회화는 드로잉을 서로 대리, 보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드로잉은 공간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평면의 공간속에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행위와 과정을 통해 목소리를 발하는 사후적 결과물이다. ● 무미한 침묵 속에 펼쳐지는 물질과 흔적은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신의 영역을 통과하여 만나게 되는 지지체는 접촉의 촉지적 순간 안에서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것이 되어가며, 손에 잡을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은 시간의 명료함을 열고 공기 속에 살아 숨 쉬는 호흡과 감정의 진폭이 되어, 풍경의 몸속에서 흔들린다.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소멸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2

한상진_흙으로부터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한상진_묵상默想_종이에 수묵드로잉_42×29.7cm_2021

'화면에 일획을 긋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다.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는 여정이며 시작과 끝의 시간을 넘어선 일획은 평면과의 접촉 속에서, 풍경과의 만남 속에서, 타자를 향한 노출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노정 속에서,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풍경 속의 풍경이 되어간다. ● 시선의 불가능성, 그것은 언어가 의미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것처럼 존재의 지평에서 의미로 포획될 수 없는 나머지와 포옹한다. 화면 위에 포치되는 흔적들의 틈, 피어나는 잔여는 지시적인 공간의 억압으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확장되는 울림을 이야기한다. ● 개와 늑대의 시간, 낮과 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미명계(微明界), 무경계(無境界) 연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불가능한 말하기를 반복해야하는 존재의 숙명을 드러낸다. 의미로부터 벗어난 버려진 사물, 그늘진 자리, 흐리고 시린 날에 바라본 이름 없는 풍경들에 대한 애착(affection)은 편리함이나 속도,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생산성과 경쟁 속에서 천천히 흐르고 변화해가는 풍경 속에 풍경을 말하려는 것은 빠르게 달려가지만 정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무미함과 무위의 글쓰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 한상진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9.7cm_2022
한상진_무경계無境界 No Boundary-Dark, Red 연작_2022~3
한상진_버려진 사물과 함께하기_부유목-고성, 속초, 양양에서_가변설치_2022

A Landscape in the Landscape ● A landscape that appears and disappears. Here, the landscape is not a landscape painting in a way that divides the world and creates order, but the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becomes a part and meets another possibility. In this sense, my work is done outside of synthetic form or consciousness. Here, the outside is a place where the inside and the outside meet and a space where the inner part of the indicative language opens. ● My drawing happens the moment I calmly put it down. It is an empty gaze and unjudgmental attitude of looking at the sky casually while walking about freely, a boundary that disappears in the time when you and I realize that there is nothing different from each other, and a process of meeting the infinite that cannot be grasped in the finiteness of life. ● Painting is an expanded realm of drawing and a space of abyss. Therefore, drawing and painting substitute and supplement each other. It is realized even in plane spaces and daily life and is an ex-post result of making voices through actions and processes. ● Materials and traces unfolding in meaningless silence are other faces of existence. The support that passes through the realm of the spirit becomes static and dynamic within the tactile moment of contact, and the moment that cannot be held in hand opens the clarity of time. Also, the breathing that lives and breathes in the air becomes an amplitude of emotions and shakes in the body of the landscape. ● 'Drawing a stroke on the canvas' is the moment of encountering another world and the journey of recording moments that cannot be recorded. One stroke transcending the time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ecomes a landscape within the landscape in contact with a plane, in an encounter with the landscape, in exposure to others, in unpredictable journeys, in an aimless life. ● The impossibility of gaze, as if it were a metaphor that cannot be expressed in language, embraces the rest that cannot be captured in meaning in the horizon of existence. The cracks of the traces widely spread on the screen, that is, the afterimages that bloom, refer to the resonance that extends from the oppression of the indicative space to the world of existence. ● The series 「Twilight」 and 「No Boundary」, in which the boundaries between dog and wolf time, day and night, and sky and earth disappear, to say the unspeakable and reveal the fate of a being who has to repeat the impossible. The affection for abandoned objects devoid of meaning, shady seats, and nameless landscapes viewed on a cloudy and cold day is far from convenience, speed, or efficiency. My work is to speak of the landscape in the landscape that flows slowly and changes amid good productivity and competition. Also, my work is to suggest idle and free writing to the anxious daily life of modern people who run fast but cannot get out of a standstill. ■ Sang Jin Han

영문번역_정수은

 

Vol.20230302b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지긋지긋한 더위가 한풀 꺾여, 이제야 한 숨 돌릴 것 같다.

쪽방에서의 여름나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수행자처럼 버텨내지만, 허리 협착증까지 도져 죽는 게 편하겠더라.

 

일기처럼 쓰던 주변 잡기에서부터 전시리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을 중단했다.

주제넘은 이야기로 욕 먹는 일도 지겨웠지만, 죽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

사진 정리가 되지 않아 사진 한 장 찾으려면 온종일을 허덕여야 한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한정식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원본 찾느라 몇시간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늦게 사진을 정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여름 내내 전시장 방문은 물론, 사람 만나는 일까지 피해 가며

컴퓨터와 씨름하였으나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선 집 불났을 때, 남은 짐까지 모두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 사진들은 한 달 전에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7월 27일, 양산의 공윤희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아 모처럼 정동지를 만나 인사동에 나갔다. 

쌈지 담벼락에는 궁녀가 임금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의 꽃, 능소화가 피었더라.

 

약속했던 ‘풍류사랑 낭만에는 공윤희씨 외에 김수길씨도 왔더라.

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는 민어에다 홍어, 돼지 수육까지, 그득하게 상을 차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만나 이야기 나누기 보다 음식 먹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귀가 어두워 소통이 안 되니 술이 약인 것이다.

 

인사동 지킴이로 알려진 공윤희씨는 퇴역한지가 수십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공대위로 불린다.

몇십 년동안 인사동에서 일 하며 살았으나, 장가는 못 간게 아니고 안 갔다.

요즘은 먹고살기 위해 양산에서 학교 일을 돕는다는데, 여름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휴가를 받았으면 바다나 산으로 갈 것이지, 인사동에는 무슨 미련이 남아 왔는가?

 

이차로 유목민’에 갔더니, 골목에는 장경호씨와 한상진씨가 있었고,

안쪽에는 전활철, 안원규, 유 준, 발렌티노김 등 아는 분이 많았다.

 

만나 반가운 시간은 잠깐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술만 빨다 정량 차면 일어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파장 인생의 설움이다.

 

사진, / 조문호

 

 

 

미명 微明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1_0227 ▶ 2021_0310

 

한상진_무경계無境界-미명微明_2017-1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0208c | 한상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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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작가는 2000년 초반에 「문명의 침실」 연작을 시작으로 2010년 전후 「응시와 명상」 연작을 제작 발표했으며 최근까지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물의 지시성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 2021년 3월, 갤러리 담에서 발표하는 한상진 개인전-미명 微明 은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정 속에서 바라본 풍경 속의 풍경이며 낮과 밤의 경계를 그린 것이다. 소멸과 생성의 시간,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새벽놀이 스미는 강원도의 붉은 숲 그리고 해질녘 지리산의 봉우리에 호흡하는 미명의 순간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의 표정이자 고정된 지시성으로부터 벗어난 사물의 은유이다. 산은 멀어지면서 가까워지고, 침묵을 통해 말하며 자신을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바깥에서 이뤄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밖이란, 보이는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장소이며 지시적인 언어의 내부가 열리는 자리임을 이야기한다. ● 이번 전시에는 전남 순천에서 작업한 painting & drawing으로 된 풍경 신작이 주로 등장할 예정이다. ■ 갤러리 담

 

 

한상진_무경계無境界-소멸消滅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7

 

 

본인은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풍경을 사유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을 만나고 구체화시키려는 여정은 예술이 규정된 양식이나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변화하는 삶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며 조우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풍경을 통해서 내가 나로부터 달라지는 지점을 통해 새로운 예술과 만나려 한다. 백두대간의 원시림과 산경(山經)은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에게 흥미로운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한상진_무경계無境界-소멸消滅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3×72.7cm_2017

 

 

풍경은 잉여의 공간이다. 의미화 할 수 없는 빈 공간인 풍경(존재)은 부재로도 현전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의미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존재는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며 언어를 초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의미가 아니며 보편성으로도 특수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빈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빈 공간은 의미에 달라붙어 있는 잉여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다. 잉여 혹은 나머지로서의 빈 공간은 닫혀있는 집합을 완결되지 못하도록 여는 힘이며 보이지 않는 이 힘은 재현이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의미로의 재현 혹은 환원 불가능성은 라캉(Jacques Lacan)에게 있어서 귀환하는 실재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친밀하고도 낯선 외상적인 실재와의 만남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상징화, 단순화 혹은 판타지를 통해 불가해한 빈 공간을 길들이며 적응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풍경화가 아니며 풍경과 내가 만남으로써 나를 여는 것이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5×194.5cm_2017

 

한상진_무경계無境界-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8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재현 불가능한 순간들처럼 불가해한 삶의 비밀들과 연계된다.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작동하는 희열의 공간인 쥬이상스(jouissance)는 파괴적이며 알 수 없는 죽음충동을 동반한다. 일상 속에 사물과 풍경을 뒤틀어 놓는 죽음 충동은 아름다움 이면의 그림자, 잃어버린 조화에 대한 애도를 상기하게 한다. 불가능한 애도의 멜랑콜리(melancholy)한 흔적은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출현한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텅 빈 풍경에서, 봄날의 재난 속에서, 친근한 것과의 만남 속에서, 불면의 밤 속에서, 다시 보는 책의 한 페이지에서 친밀하면서도 낯선 이와 같은 경험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현실의 이중성 속에서만 이야기 될 수 있다. 의미로 종결되지 않는 죽음은 죽음이후에도 살아남아 유령처럼 출몰한다.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는 현실이 현실 이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진이 사진을 넘어서는 지점을 이야기 한다. 본인에게 사진은 불가능한 기억과 회화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미지가 이미지 이상이 될 수 있으며 순간의 재현을 담은 재현적 원본의 지표(Index)를 넘어서는 잉여(punctum)를 몸의 회화를 통해서 만나는 것이다. 파여진 결들이 몸으로 스며들어 몸이 열리는 확장, 본인에게 풍경과 사물은 풍경의 결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적요한 침묵의 틈으로 몸이 열리는 확장이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의미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사물, 의미로부터 벗어난 몸은, 시야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 속의 풍경들에 매료되곤 한다. 흐릿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서, 어른어른하게 굴곡진 비닐 너머의 자리에서, 눈 내리는 겨울 풍경 속에서, 흐린 날에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미명의 그늘진 풍경 속에서, 목마른 바스락거림 속에서, 눈물 나는 날의 걷기 속에서... 과거의 희미한 기억과 감각을 소환하는 설명할 수 없는 흔적 혹은 얼룩은 풍경 속에 파고 들어와 풍경을 낯설게 한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자(풍경), 타자에게 열리는 나의 몸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는 안이자 바깥이며 바깥이자 안이 된다. 몸은 여러 개의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타자를 향해 열릴 때 유한한 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삶속에서 안과 밖의 경계는 사라지며 풍경이라는 타자를 환대하는 나는 풍경 속에서 살아있는 나일 수 있다.

 

 

한상진_미명微明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21

 

 

본인은 무경계(NO-BOUNDARY), 소요(逍遙)-흐르는 풍경이라는 무위(無爲)의 행위(行爲)를 통해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소요는 목적 없이 천천히 걷는 시간이며, 흔적이라는 타자를 환대하는 행위이자 주체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소요(逍遙)를 무위(無爲)를 향한 열림과 고정된 이념(지시성)으로부터 떠남, 타자를 향한 노출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소요는 한가로이 노니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치나 의미화로 환원 가능한 일과 분리된 또 다른 생산, 도래할 것으로서의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장의 핵심개념이기도 한 소요와 무위로서의 행위는 자연스러움 안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행위다. 따라서 본인의 작품은 소요를 통한 존재론적인 사유-서양의 사유와 동양의 사유가 만나는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소요는 본인의 작품이 생성되는 자리이며 오늘날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빈 공간이자 멈춤, 중지와 같은 개념들과 연관된다고 본다. 자본의 전체성, 즉 수치화를 통해 모든 존재를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자본의 힘은 폭력적이다. 그러나 의미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 자기로부터 달라지는 자기 차이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항해처럼 의미의 집으로 복귀하는 충만함의 원운동이 아니다. 전통적인 서양사유에 있어서 떠남은 경험을 통해 의미를 얻고 자아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확립하는 환원적인 내재성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소요는 최종적인 목적을 전제로 향해 나아가는 지양(止揚)이 아니며 무위(無爲)를 향한 길 떠남이다. 본인에게 소요, 응시와 명상은 치유(Healing)나 다듬어짐, 정화됨을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을 충족으로 보완하려는 의미론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로서의 떠남이며, 의미의 장소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 즉, 귀향의 불가능성을 포함하는 존재론적인 이끌림이다. ■ 한상진

 

 

Vol.20210227a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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