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알린 바와 같이 정선 작업실이 전소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화가 박 건씨가 알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공개적인 구걸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른 조그만 보답이라도 될까 싶어 부족하나마 저의 사진 한 점씩 보내드리려고 견본 사진 5점을 제시하며 사진번호와 보낼 주소를 보내달라고 전화번호를 알려드렸습니다.

아쉽게도 알린지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나 주소와 사진번호를 보내 주신 분은 네 분밖에 없네요.

혹시 그 안내를 보지 못했거나 뒷수습으로 경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천천히 연락하려 보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더러는 알리기가 편치 않거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사진 보내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어 한꺼번에 작업하기 위해 기다리다 주소를 알려 주신 분까지 보내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네 분 사진만 먼저 프린트해 보내드렸습니다.

 

나머지는 오는 10일까지 기다렸다 일괄 프린트(규격 42cmx 29,7cm)하여 액자에 넣어 보내 드릴 작정이오니, 사진번호와 주소를 정영신씨 핸드폰(010-2955-8926)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견본사진 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가능하오니 알려주십시오.

만약 10일까지 연락 없는 분들은 그 뜻을 존중하여 개인전을 소개하거나 행사사진을 촬영 해 드리는 등 다른 방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번 온정의 손길은 두고두고 보답하겠습니다.

정선에 예술창고를 만들어 함께 공유하려는 계획도 아직까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시일이 지체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험사로부터 제대로 보상받아 기대에 부응하는 공유공간을 만들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밝혀 일일이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행여 온정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성함 중 한자를 생략하였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후원해 주신 분 명단과 전해드릴 사진 견본이오니 참고하셔서 연락 주세요.

-후원금 보내 주신 분 명단- (밑줄 친 분은 사진을 발송하였습니다)

화가 : 이*엽 5만원, 이*민 10만원, 나*희 20만원, 정*엽 10만원, 김*홍 10만원, 류*복 10만원, 강*구 100만원, 두*영 5만원, 정*수 10만원, 안*홍 100만원, 박*동 20만원, 김*구 10만원, 박*태 10만원, 이*구 5만원, 이*정 3만원, 천*석 5만원, 김*열 10만원, 한*진 10만원, 김*하 20만원, 이*열 10만원, 조*옥 10만원, 박*원10만원, 이*철 20만원, 주* 20만원, 최*영 50만원, 사진가 : 최*균 30만원, 박*호 20만원, 노*향20만원, 전*훈50만원, 이*수 10만원, 변*철 10만원, 박*만 200만원, 박*환 5만원, 양*영 20만원, 홍*원 10만원, 최*석 20만원, 김*호 10만원, 김*진 10만원, 마*욱 10만원, 최*화 10만원, 이*갑 10만원, 김*길 10만원, 김*섭 50만원 문학인 : 조*영 30만원, 서*란 20만원, 장*숙 5만원, 김*지 20만원, 이*흠 10만원, 김*성 10만원, 조*인 10만 음악인 : 김*현 10만원, 전*철 10만원 마임, 무예가 : 유*규 10만원, 하*웅 10만원, 사회 활동가 : 박*윤 10만원, 김*부 5만원, 홍*길 10만원 ‘공유공간 마인’ : 김*우 10만원, 김*온 10만원, 양*살 10만원, *민화 5만원, 천*명 10만원, 정선 귤암리 : 노인회 20만원, 해선스님 20만원, 잘 모르는 분 : *범현 10만원, 윤*숙 10만원, *미경 10만원, 힘내세요 3만원, 김강* 5만원,

합계 1291만원

사진1번 만지산1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요약해 정리해 본다

이번 화재로 40여년 동안 일해 온 자료는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을 얻었다.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씨는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었다. 정선 화재현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트럭으로 실고 가 물증 찾는 일에 혼신을 쏟아왔고,  그와 함께 서울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 와 자문해 주며 사회의 모순된 구조 개선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 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 오랜 시간동안 사건에 대한 전모를 들으며 무료로 자문해 주신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님, 일면식도 없는 분에서부터 지인에 이르기까지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신 60여명의 후원자를 비롯하여 걱정해 주신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후의 따스한 햇살처럼 큰 위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도움 준분들에게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하는 지자체에서는 나몰라라 했다. 도처에 토목공사 때 사용하는 컨테이너박스가 널렸는데, 갑자기 집을 잃은 군민이 거처할 임시숙소 하나 빌려주지 못하는가? 고작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 온 담요와 비상식량 뿐이었다. 이런 놈의 동내를 위해 몇십 년 동안 마음을 쏟아 부은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 다시는 주민 복지라는 말만 꺼내면 똥바가지를 덮어 쒸울 것이다.

그리고 화재현장인 정선 집에 대한 앞으로의 대처 방안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 불이 붙었던 옆집도 분명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같이 살고 싶은 이웃이 아니란 것은 오래전 알았다.

그 집은 미국에서 온 노성수씨가 구입해 살았는데, 2015년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술이 취해 방문의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갑작스런 변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을 낸 윤씨다.

 

사진2번 만지산2

이사 온 뒤로 윤씨의 남편처럼 행세한 한 남자는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 마당에 빨간 막대를 꽂아두는 등 처음부터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 두고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 편이 쉬려 정선에 갔으나, 이젠 만나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이상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가까이 하지 말라는 동네 사람들의 충고도 뒤따랐다, 그녀가 이사 온지 2년쯤 후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의 양서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옆집의 그녀가 찾아와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사이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드기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야 가끔 가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집을 더나들던  사내들의 뒷소문도 무성했다. 언젠가부터 정선 북실리에 사는 년하의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의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한씨는 토목공사 하는 분이라 전기에서부터 레미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수엄마 이야기에 의하면 한 때는 본처가 경찰을 데리고 현장에 찾아와 한씨가 도망쳐 올라와 숨겨 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3번 만지산3

모두 남의 사생활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주변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여러 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었고, 그물망으로 방목하는 수많은 닭들의 소음도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친환경을 내세워 수시로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 한 장을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도로 포장하는 사람 오면 움푹 파진 도로 입구 좀 때워 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다는데, 온 마당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마당을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니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어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주었는데, 아마 인부들이 공사장에서 빼돌려 싼 값으로 깔아준 것 같았다. 자연환경이 좋아 사는 나로서는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처럼 눈에 거슬리는 흉물에 불과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한 때 이웃 최종대씨와 지하수 분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하수로 갑 질하는 최종대씨의 잘 못이라 공개적으로 최씨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으나 긴 세월 이어 온 정이라 윤씨보다 최씨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 때부터 서울만 왔다 가면 전기 차단기가 내려져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다 상해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 일이 반복되어 아예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최씨와의 왕래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의 짓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사진4번 두메산골 사람들

그 날 불난 날도 서울에서 손님이 네 사람 찾아와 마당에서 불을 피워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주민들 말과는 달리 누전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듣기로는 얼마 전 윤씨가 불 난 집 터 옆의 조씨네 밭을 사서 농막까지 옮겨 두었는데, 그 위에 있는 밭을 공동 투자하여 사들이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보험 든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해 화재현장의 물증확보에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 왔는데, 뒤늦게 보험 든 게 있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미 보름이나 지나 다시 찾아갔을 때는 모든 게 파헤쳐지고 치워버려 물증확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놓아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었다.

또 하나 윤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처음에는 방안의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어 모두 탔다고 말한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을 찾았다고도 했으나, 두 번째 들렸을 때는 돈은 타지 않았다며 말을 뒤집었다.

 

사진5 서울역지하도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도록 원인을 제공한 그녀를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램이다. 그녀만 보면 울화가 치미니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 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 무덤도 무덤이지만, 동자동 일이 끝나면 이제 어디 가서 쉬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좋아 하도록 판 깔아 주기는 더 더욱 싫었다.

그래서 윤씨와 합의하기 위한 제안으로 지금의 집터를 양보하고 새로 구입해 둔 위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거절했다. 

지난 1일 정오 무렵 서초동에 있는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를 찾아갔다. 아들 햇님이 안내로 정영신씨를 동반해 갔는데, 그곳에는 아산에서 이 일을 돕고 있는 김선우씨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도 참석하여 그동안의 일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준비할 앞으로의 대책도 세웠다. 일단은 손해사정사의 보상 금액이 결정되는 것을 보며 소송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도움주신 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예술창고를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나이가 들어 갈수록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고향 영산의 연지 못에서 썰매 타다 얼음이 깨져 허우적거릴 때나,

잘 못 던진 돌에 친구 머리가 맞았던 사고 등 끔찍한 일부터 생각난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추억도 떠오른다.

 

이웃 소녀에게 첫 연정을 느꼈을 때다.

우연히 데이트 할 기회가 생겨 밤길을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어두운 밤길에 손이라도 잡아주면 좋으련만, 부끄러워 손도 못 내민 쑥맥이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잡은 그 두근거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런 아련한 추억이야 머리에만 남았을 뿐, 증명할 아무것도 없다.

당시는 카메라가 귀해 학교에서 찍은 졸업사진 정도가 고작이라 있을 리 만무하다.

사진첩에 남아있던 오래된 사진이라고는 67년 무렵 구입한 ‘페추리’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대개 친구들과 어울려 찍은 사진관에서 뽑은 사진이었다.

그 때부터 찍은 사진들이 모아져 나의 가족사가 담긴 사진첩을 이룬 것이다.

 

가끔은 사진첩을 꺼내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고 말았다.

앞뒤가 보이지 않던 이혼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만 것이다.

상대가 미우면 같이 있는 사진만 태울 것이지, 왜 씨를 말렸는지 모르겠다.

내 가족사는 그 난리 통에 연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본 책갈피 속에서 오래된 사진 두 장을 발견했다.

한 장은 60년대 후반 첫 직장 들어갈 때 찍은 조그만 증명사진이고,

또 한 장은 훈련병시절 39사에서 찍은 기념사진인데, 너무 반가웠다.

전형적인 어리숙한 촌놈 모습과 폐잔병 꼴로 폼 잡은 기념사진인데,

그 두 장 사진만이 오랜 추억을 불러들이는 유일한 유적같았다.

 

사진을 찍는 찍사의 가족사가 이리 초라해서야 쓰겠는가?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요즘은 사진이 너무 흔해 온갖 모습들이 인터넷에 떠돌지만,

아무리 많아도 오래된 사진 한 장에 비기겠는가?

 

지금 60대가 넘은 사람들은 다들 기억 날 것이다.

안방 천정 밑이나 마루 문턱 위에 빼곡이 사진을 끼어 걸어 놓았던 사진틀 말이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시작하여 결혼사진, 졸업사진, 백일사진 등

가족의 역사적 자취가 수놓은 사진틀은 그 집의 족보처럼 자랑스럽게 걸렸었다.

아무리 훌륭한 그림이 좋다지만, 가족으로서는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 사진첩은 가족의 역사이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의 저장고가 아니던가?

 

오래된 가족 사진틀이 새삼 그리워진다.

90년대 찍은 최종대씨 내외 사진에는 안방 벽에 가족 사진틀이 전시장처럼 걸려있었다.

아직까지 장가도 못간 아들 창수는 자랑스럽게 사각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최씨 집안의 족보나 다름없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당신의 가족사는 안녕하신가요?

무고하다면 책장 깊숙이 숨겨둘 것이 아니라

추억될만한 오래된 사진들을 골라 작품하나 만들어 거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도록, 아주 촌스럽게 말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정선 만지산 골짜기에 사는 이선녀씨의 인생은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이다.
이제 나이 육십에 불과하지만 한 세기 전에 살았던 것처럼 살아 온 이야기가 전설 같다. 옛날 영화에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도 있었지만, 마치 이선녀씨를 일컫는 말 같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겠으나, 요즘 세상은 ‘남자의 일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그녀가 귤암리 윗만지산 골짜기까지 시집오게 된 사연만 풀어도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나무꾼과 선녀’로만 요약해야겠다. 삼대를 만지산에서 살아 온 최종대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만평 가까이 되는 산비탈 농지를 두 내외가 다 일군다. 힘쓰는 일이야 남편이 하겠지만 왠만한 일은 모두 이선녀씨 몫이다. 날만 새면 밭에 나가 살았으니, 지금 성장한 자식 셋 모두가 밭에서 일하다 낳았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치맛자락에 아이를 받아 툇 줄도 자르지 못한 채, 방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산후조리란 말은 사치에 불과하고, 애기를 낳아서도 광주리에 담아 밭에서 키웠다.


한 번은 둘째아들 용순이가 심하게 아파 13킬로미터가 넘는 정선 읍내까지 약을 사러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갈 때와 달리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해 돌아 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모정은 약을 비닐로 머리에 동여매고 노도처럼 밀리는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6킬로미터의 험난한 물길을 헤칠 땐 주변사람들이 하나같이 살아날 수 없다고 발을 굴렀지만, 귤암리 근처에 도달하여 나무뿌리를 잡고 기어 나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정말 ‘지성이면 감천’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이 넘도록 외지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으나, 아직까지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어 버린 것이다. 갈퀴손과 주름진 얼굴이 그의 한 많은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그 힘든 삶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술의 힘이었다. 시아버지로부터 배운 술은 고달픔을 잊게 하는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소주를 한 홉들이 잔으로 들이키는 그의 주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몸 빠르게 일하는 것처럼 노는 신바람도 보통이 아니다. 10여 년 전 이선녀씨의 여동생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신명이 넘쳤던지, 천정에 구멍이 뻥뻥 뚫려나갔다. 무슨 놈의 춤이 손가락으로 천정을 찌르는 요상한 춤을 추었는데,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천정을 뚫어댔다.


밤늦게 이웃 동네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다 정신을 잃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말이 이웃동네이지 산을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인데, 한 번은 어두운 산길을 걷다 구덩이에 빠져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했다는데, 잠결에 손님 이제 문 닫아야 하니 일어나 가시야지요란 말이 들렸다고 한다. 눈을 떠보니 새벽녘이고 자기가 빠진 곳은 장례를 치루기 위해 파 놓은 무덤이었다고 했다.

 

놀 때는 화끈하게 놀고, 일 할 때는 몸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그의 사려 깊은 인정 또한 따를 자가 없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언가를 못 먹여 안달이고 못주어 안달이다. 이웃에 경조사가 생겨도 손 걷어 부치는 성미라 일이 일사천리다.

 

작년에는 이웃에 살던 노성수씨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한 밤중에 두 내외가 술이 취해 집으로 들어갔는데, 방문이 열리지 않아 유리창을 깨어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문고리를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손을 빼다 그만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른 방으로 들어간 아내를 아무리 불렀지만, 술 취해 잠든 아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새벽 무렵에서야 현장을 목격한 아내가 이선녀씨에게 다급하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한다. 겉옷 입을 틈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갔으나 이미 피를 모두 쏟은 상태라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인을 다독이며 모든 뒷바라지를 이선녀씨가 다 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부었던지, 천정에서부터 온 방은 피로 굳어 있었다. 그 응고된 피가 비료 포대에 몇 자루나 나왔다고 한다. 피로 얼룩진 방을 다 닦아내는 청소에서부터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처럼 만지산 선녀로 통한다.

한번은 농기구 빌리려 그녀 집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만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곳은 외 딴 산이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기도 하고 더우면 찬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는데, 무더운 날씨라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얼핏 본 모습은 한 마리 백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갑자기 비상하는 바로 그런 자태였다.

 

, 이선녀씨를 생각할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이란 설화가 먼저 떠오른다,

목욕하러 지상에 내려 온 이선녀를 나무꾼 최종대씨가 옷을 숨겨 사는 것은 아닐까?

 

사진, / 조문호








 

농심마니의 2009년 가을 산행이 지난 31일부터 11월1일 까지 정선, 만지산에서 실시되었다.
이날 산행에는 본 회의 김명성, 박인식, 조문호, 이 성, 전인경, 김정남, 강기숙씨를 비롯한 농심마니 회원 30여명이 참여하였다
정선읍 귤암리에 여장을 풀고 전야제를 치룬 농심마니 회원들은 모두들 굳은 날씨를 걱정하였으나
다행이 이튿날에는 비가 먿고 날씨가 풀려, 모두들 낙엽에 싼 산삼을 들고 산속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강원지회 "한국사진굿당"이 소재한 만지산의 당집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4년생 산삼 200그루와 씨앗들을 심었다.

산삼을 심고난 뒤에는, 구름이 연기처럼 만지산을 휘감는 장면이 연출되어 산의 정기를 눈으로 보는듯 신비로웠다.
그 이튿 날에는 첫눈까지 내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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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최종대씨 모친 장례식에서..|

 

지난 9월26일 최종대씨 모친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습니다.
서둘러 서울을 떠났으나 이미 장례행열은 끝나고 봉분을 다지는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선소리꾼의 매김소리에 상두꾼들의 '어 허 달구나'라는 뒷소리와 그들의 발질만 분주했습니다.

최종대씨 모친은 만지산에서 태어나 만지산에 뭍힌, 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오랫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셨기에 대개들 호상이라고 하나 이 또한 모순입니다.
강원도 산골의 밭들은 비탈져 대개 남정네보다  여인네들이 농사의 주체가 됩니다.
평생을 비탈진 밭에서 일하며 팔 남매를 낳아 키웠으나 부양의 부담 때문에 모두들 힘들었나봅니다. 
요즈음은 집안의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급속히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을 뵙기위해 가족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에나 겨우 만나는 실정입니다.
그것도 기독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으면 더욱 어렵지요.

장례가 끝난 후, 고생한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 저녀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사진굿당'에서는 백설기 떡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맏 상주인 최종대씨는 장례식에서 손님치느라 고생한 부인 이선녀씨에게 하루동안 금주령을 해제해 주었습니다.
신바람난 이선녀씨의 노래소리가 오랫만에 만지산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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