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11일은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일찍부터 술독에 빠졌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님은 먼 곳에’를 청성 맞게 따라 부르는데,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술 마시기 좋은 꿀꿀한 날씨라 인사동에 나왔다는 것이다.
가겠다고 말은 했으나, 술이 취해 걱정이었다.
사진 찍는 건 일상이나, 몸 가누기가 불편했다.






인사동에서 ‘툇마루’ 가는 골목을 접어돌다,
그만 난간에 걸터앉은 노인의 발을 밟아 버렸다.
“어이쿠! 미안합니다‘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전각가 최규일 선생이셨다.

야! 너무 반가웠다. 한 때는 인사동을 주름잡은 어르신인데,
원주로 옮기고부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사모님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아쉽게 헤어지고 ‘툇마루’로 올라갔더니, 반가운 사람이 너무 많았다.
구석에는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최명철, 김이하시인이 자리 잡았고,
한쪽에는 카페 ‘아리랑’을 운영하는 민요가수 최은진씨 일행이,
입구에는 김발렌티노 일행이 포진하고 있었다.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돌아다니며 사진부터 찍었다.
난, 사진 찍는 걸 인사처럼 여기지만,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게 볼 거다.
그 뿐 아니라, 술 취해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노래까지 불렀으니,
밥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김이하촬영



지랄발광을 떨었더니, 그때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비빔밥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는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더 있으면 영업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명절에 놓친 선물 값 4만원을 동사무소에서 받았는데,
그 걸 내놓고 줄행랑쳤다.
가는 길에 ‘유목민’들려 전활철, 노광래씨 얼굴만 보고 돌아왔다,






쪽방에 들어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이 깨야 자는 습관인데다,
술 취하면 인터넷도 손대지 않기로 했으니, 할 일이 없었다.

쉽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단 한 가지 있으나, 상대가 없다.
같이 놀아 줄 사람 없는 독거의 설움이 절절한 밤이었다.


사진,글 / 조문호
















김이하촬영
























27일부터 '금강경' 작품전 여는 전각작가 최규일

 

 

한 칼에 한 획. 일도일각(一刀一刻)이다. 한 번 칼이 지나간 자리에 한 획이 솟아난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옥돌이지만 그는 힘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눕힌다. 무쇠 칼이 돌의 결을 따라 달리며 그를 드러내준다.

 현노(玄老) 최규일(74)씨는 전각(篆刻)을 “돌과 하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사방 한 치 넓이 방촌(方寸), 손톱만한 돌에 파는 문자의 세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만큼 좁쌀만 하지만 때로 우주를 품는 심장의 박동이 담긴 너른 대지다.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 한 건 나와 대적할 자가 없을 거요. 평범한 자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의 500배쯤 노력하는 게 나요.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목숨 부지할 정도로 먹고 쉬는 외엔 오로지 도장 파는 놈으로 살았소. 우리나라가 ‘도장의 나라’로 유명한데 아마 역대 도장을 다 모아도 내가 판 도장의 양을 못 따라갈 거요.”

 현노는 “내가 방촌을 깨뜨려버렸소”라고 말했다. 소위 각(刻) 좀 한다는 이들이 모두 방촌에 갇혀 옴짝달싹 못할 때 그 사각의 틀을 깨고 칼 놀이를 예술의 경지로 자유롭게 춤추게 했다. 『도덕경』 『지장경』을 거쳐 올해는 『금강경』이 그의 무쇠 칼 밑에서 놀았다. 27일부터 12월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노 최규일 금강경’ 작품전은 전각에 대한 기존 시각을 뛰어넘어 돌연(突然)과 아연(啞然)이 교차하는 격을 보여준다.

최규일씨의 `금강경` 전각.

 

 

 “우리 예술계는 전통과 보수에 절어서 새것을 받아들일 줄 몰라. 겉만 번지르르하게 발라 그걸 돈으로만 평가하니 진품은 어디 가고 명품은 또 어디 있느냐 말이요. 나라가 발전하려면 눈이 바로 박혀야 하는데…. ”

 그는 “한때 중국과 일본의 전각이 한국보다 300년 앞섰다 했지만 이젠 우리가 100년쯤 앞지른 수준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유럽이 먼저 우리 전각의 예술성을 알아보고 초대전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비단이 오백년 가고, 종이가 천 년 간다 하지만 돌에 새긴 전각은 우주가 끝날 때까지 갈 겁니다. 내 딴 건 몰라도 한다는 놈들 ‘양으로 기 죽이기’ 분야에선 일등일겁니다. 경전 판 돌 도장 5000개가 내 두둑한 자산이자 양심이오. 나라가 내가 흘린 땀과 피를 좀 알아서 기념관을 지어준다면 좋겠지만….”

 “작업할수록 날카로워지는 나의 칼 맛을 알아줄 이 어디 계신가.”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최규일=1939년 생. 호는 현노(玄老).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사진작업을 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전각의 세계에 입문해 독학으로 한 경지를 이룬 뒤 일본·독일·프랑스 현지 전시로 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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