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이자 빈민운동가인 최인기의 ‘청계천 사람들’ 사진전이 지난 11일부터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전시된 사진들은 청계천 투쟁의 역사고 최인기의 삶 자체였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노동운동에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다.
최인기 역시 카메라를 도구로 가난한 청계천 사람들을 지키려 온몸을 던지고 있었다.




사진들을 돌아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청계천 빈민들 피를 빨아 대통령 자리까지 꿰 찬 도둑놈 이명박의 반들거리는 대갈통을 도끼로 갈기고 싶었고, 오세훈은 밟아 버리고 싶었다.
한 놈은 청계천을 뒤집어 가난한 노점상과 철거민을 내 몰았고, 한 놈은 시민들의 추억과 삶의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설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
그 긴 시간의 긴박한 순간순간을 최인기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본령이 무엇이던가?
약자의 편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데 기여해야 하지 않는가.
그는 카메라를 저항의 도구로 활용했다.
핍박받는 노점상을 대변하며,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찍은 모든 것은 사람이 우선이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삼 년 가까이 지켜보았는데, 최인기씨 처럼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돌 콩처럼 착해 빠진 양반이 악바리로 맞서는지 모르겠다.




청계천은 최인기씨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청계천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신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삼일아파트의 옥상과 복도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도시를 돈으로 보는 돈 벌레들이 빈민들의 삶은 물론 최인기씨의 유년기 추억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권력에 눈깔이 뒤집혀 청계천을 완전히 갈아엎은 것이다.
그에 맞선 최인기는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위한 사회’를 부르짖으며 '기록하는 빈민운동가'로 나선 것이다




원로사진가들이 찍은 오래된 청계천 판자촌 사진들이 지나치며 눈으로 찍은 사진이라면,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을 이어받은 그의 사진은 빈민들 속에 들어가 온 몸으로 찍었다.
그 사진들은 청계천이 바뀌는 과정부터 핍박받는 모습까지 하나의 일지처럼 담아 낸 청계천 저항의 역사다.




사진치유자 임종진씨는 최인기의 ‘청계천 사람들’사진집 서문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청계천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상들은 아마도 치열한 빈민운동가이자

단호한 어조로 인간의 존엄성을 전하고자하는 최인기의 존재적 의미의 기호이자 발원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예술이라는 미학적 표현의지를 타고 넘어 너나 할 것 없는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소소한 이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최인기의 시선은 늘 사람이 우선이고 가장 최선이다.

그럼으로 최인기의 사진은 정녕 사람이요 삶이다.“




최인기씨는 “저는 이 사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을 통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고 말한다.




난, 사진가 보다 빈민운동가로서의 최인기를 더 좋아한다.
난, 사진보다 최인기의 따뜻한 마음을 더 좋아한다.

사진으로 사회를 바꾸려고 싸우는 그 투지를 좋아한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20일까지 이어진다.




청계천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최인기 사진집

펴낸 곳 : 리슨투더시티
270페이지, 가격 35,000원



전시가 개막된 11일 오후6시에 들린 전시장에는 사진인보다 그와 함께 한 분이 더 많았다.
노점상을 비롯하여 ‘민주노련’ 사람들이라 성함을 잘 모른다.



아는 분이라고는 73년부터 76년까지 청계천 사람들을 기록하여 ‘노무라 리포트’를 펴낸 노무라 모토유키,
노점상대표 우종숙씨, ‘빈곤사회연대’ 윤애숙씨, ‘동자동사랑방’ 전도영씨 뿐이고,
사진가로는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하는 공감아이’ 임종진대표,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안해룡, 김영호, 이세연, 곽명우, 김 헌, 안미경, 이광숙씨가 고작이다.




노무라 모토유키선생과 임종진, 우종숙씨 등 내빈의 축사와 최인기씨의 인사말을 들은 후

뒤풀이 장소인 ‘충무해물탕’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가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뒤풀이 비용을 모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풀이 장소에서 최인기씨를 말하는 이규상씨의 열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역시 이규상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야 투사적 기질이 나오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빈민운동 사진가 최인기씨, 6월 25일 종자동에서]



지난 25일, 빈민운동가이자, 사진가인 최인기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청계천 사진집이 나왔다며, 책을 한 권 가져 온 것이다.
어렵게 만든 사진집이라 사고 싶었으나, 기어이 주겠다는 것이다.

그를 알게 된지는 동자동에 들어 온 이후였으니, 한 이년 가까이 되었다.
노점상 집회나 근로자 집회에 가면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차를 대접하거나 밥을 샀다.
보나마나 돈 안 되는 사진 찍으며 빈민 운동하느라 어려울 것은 뻔한데, 
신세지는 것이 결코 편치는 않았다.
아마 어려운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하는 그의 천성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에 펴낸 청계천 사진집은 사진이기 전에 최인기의 삶 자체였다.
그는 사진을 예술의 사진보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알리며
저항하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핍박받는 노점상을 대변하며,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든 것에는 사람이 우선하고 있었다.

원로사진가들이 찍은 오래된 청계천 판자촌 사진들이 지나치며 찍은 사진이라면,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기록을 이은 그의 사진은 주민의 한사람으로 온 몸으로 찍었다.
그 책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청계천이 바뀌는 과정 과정에서,
빈민들을 핍박한 내용이 일지처럼 적혀 있었다.
잘못된 도시정책에 저항해온 이들의 사진 역사책이었다.

이명박은 청계천복원공사를 강행하며 가난한 노점상과 철거민을 내 몰았다.
오세훈은 시민들의 추억과 삶의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설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 밀고 당기는 긴박한 순간순간을 최인기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난, 최인기를 사진가로서 보다 빈민운동가로서 더 좋아한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빈민들의 열악하고 핍박받는 현실을 기록하며
주민들과 함께 싸워 온 지칠 줄 모르는 그 투지를 좋아한다.

청계천은 최인기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청계천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신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삼일아파트의 옥상과 복도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도시를 돈으로만 보는 인간들은 빈민들의 삶은 물론
최인기의 유년기 추억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가난한 이들의 삶이 짓밟히며 공동체가 파괴되는 악순환을 지켜본 것이다,

도시 공간의 공공성은 권력 있는 한 두 사람에 의해 구성 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함께 논의되었을 때 성립할 수 있다.
이제 낡은 청계천과 을지로의 골목도 우리 문화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도시가 되어야한다. 화려하고 새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정책입안자들도 가진 자보다 없는 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최인기는 “저는 이 사진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을 통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고
작업노트에 적고 있다.


사진집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속적인 빈민 기록을 위해 한 권 구입 합시다.



“청계천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펴낸 곳 : 리슨투더시티
270페이지, 가격 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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