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요즘, 사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예술사진이란 이름을 달고 별의 별 사진들이 전시장을 메우지만,
작가의 의도만 전달되면 다 통용되는 세상이다.

어떤 이들은 무차별 남의 사진을 웹에서 퍼 날라 쓰기도 하고,
어떤 사진가는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변형시키기를 밥먹듯이 한다.
사진의 사실성보다 사진가의 표현이 더 중요한 시대에 산다.






요즘 육명심 선생의 ‘이산가족’ 사진집출판에 대하여 사진계에서 말들이 많다.
육명심 선생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진가로 존경해 온 사진가가 아니던가.
‘백민’, ‘장승’ 같은 일련의 사진들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보여 준 훌륭한 작업이었다.
그러한 분이 왈가불가 사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사진집에 실린 사진이 본인이 찍은 사진은 일부이고,

다수의 사진이 티브이 화면에 방영된 장면을 촬영했다는데 있다.
문제의 그 사진집을 보지는 못했지만, 곽윤섭기자 글에 의하면 노욕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이 일은 육명심선생께서도 충분히 논란을 예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논쟁에 대한 관심은 효과적인 책 판매로 이어질 것이고,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원로사진가로서 기존 사진 관념을 파괴하는 젊은 사진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 삼는 사진가들도 무차별한 지탄을 자제하고, 선생의 의도도 한 번 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아무쪼록 선생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사진집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난, 작품사진을 찍는 작가가 아니고, 세상을 기록하는 사진가다.
좋은 사진이란 사진 자체가 갖고 있는 내용이지, 카메라 앵글이나 기술적인 문제는 둘째로 친다.
그래서 찍은 사진을 사진 일기처럼 모조리 블로그에 올려 왔다.
어떤 이들은 좋은 사진만 올리라는 충고도 하지만, 좋은 사진을 도대체 누가 구분 한단 말인가?
그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일 뿐이고, 난 그냥 기록으로 남길 뿐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록사진이다.
대부분 해방 직후나 한국전쟁 때 찍은 사진으로, 외국선교사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찍힌 사진들이다.
찍은 이의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귀한 사진을 만나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역사로 남은 글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감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우연히 문경의 ‘옛길 박물관’을 구경 간 적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벽에 붙어 있는 오래된 장터사진 몇 장 이었다.
여지 것 오래된 장터사진이라고는 30여 년 전에 찍은 정영신씨의 사진이 고작이었지만,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일세기에 가까운 오래된 장터사진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옛길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들은 모두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소등에다 장작을 가득 쌓은 사진이나 소달구지 행렬에서, 그 시절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그런 건 둘째 문제였다.
이 보다 더 소중한 장터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위의 사진은 '옛길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이고, 마지막 사진은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 실린 사진으로, 1925년 무렵의 마포나루 풍경이다.

인천으로부터 각종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오던 한강의 옛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사진은 세월에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


글 / 조문호





















지난 식목일을 맞아 모처럼 정선 만지산에 들렸다.
어머니의 헤진 무덤에 잔디도 메워야 하고 텃밭의 땅도 파 뒤집어야 했다.

마침 '정선군청' 직원과 약속이 있었던 정영신씨도 동행했다.


몇 개월 만에 들린 정선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주소를 동자동으로 옮겼으니 우편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집 기둥을 떠받히는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작년 가을 추수 때는 얼마나 급히 도망쳤던지, 밭 때기에 고추 대와 옥수수 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붉은 진달래나 몽우리 진 목련 꽃이 반갑게 맞아주며, 변치 않는 자연의 이치를 자랑했다.

7일 있는 동자동 주민자치회의로 정선에 오래 머물 형편이 못되어 서둘러야 했다.
비가 내려 질퍽한 땅을 파 뒤집었더니, 죽을 맛이었다. 건강이 나빠졌는지 몇 차례의 괭이질에도 숨이 헐떡거렸다.

오래 비워 둔 집이라 정영신씨는 몇 시간동안 군불을 지피고 청소를 해야 했다.


매번 그랬지만, 저녁시간은 즐겁다. 만지산 꼭대기 사는 최종대씨 집에 올라가 술 한 잔한 것이다.

신바람 난 이선녀씨의 기막힌 춤에다 맞불을 질러댔다.






이틀 날은 ‘정선군청’ 문화관광과 전상현씨 만나러 읍내로 나갔다.
오찬 장소에 갔더니, 지역경제과에 근무하는 유홍균 팀장과 정선아리랑시장 사업단장 허승영씨를 소개해 주었다.

오는 6월22일부터 25일까지 정선에서 열릴 ‘전국 오일장 박람회’에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전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유홍균씨는 별도의 전시 부스를 만들어 준다지만,

전시장보다는 외곽을 전통시장사진으로 장식하는 대형 현수막전이 더 효과적이라는 제안도 했다.


박람회가 열리기 전에 구체적인 협의가 되어야겠지만, 담당자의 전통시장에 관한 관심이 보통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당장의 실익보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제 시장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다 되었지만, 승진이 예상되는 내년부터 타 부서로 이동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한 자리에서 승진해 하던 일을 이어가야 하는데,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하는 현 공무원 직제 체계의 모순을 바로잡는 일도 시급했다.






이틀간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으나 뒤가 개운치 않았다.

옥수수 밭은 손도 대지 못했고, 호박 심을 구덩이를 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동차가 없어 올 해는 자주 올 수 없으니, 손이 많이 가는 야채보다 저 혼자 잘 자라는 작물로 바꿀까보다.

한 달 후에, 고구마를 심을까? 유실수를 심을까? 아니면 내 마음 담을 꽃씨나 뿌릴까?


사진, 글 / 조문호















골목 둘러보기, 국밥 먹어보기 등 30년간 시골장터를 기록한 정영신씨가 말하는 장터에서 할 일

“이 물건 안 사가면 후회해유. 많이 줄게 들어가유.”(충남 예산장)
“맵고 달삭한 맛이 없고 너무 싱겁데이. 고치를 덜 말린나. 좀 꼬꼬부리하네.”(경남 합천장)

“아따 성님, 내가 언제 속입디여. 조까 믿으씨요.”(전남 함평장)

“물이 좋쑤과. 1킬로에 얼마우꽈.”(제주 모슬포장)

정영신(58·사진 오른쪽)씨는 30년간 시골장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소설가다. 전국 522개 장터를 빠짐없이 훑고 다녔던 그는 지난 1월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를 펴냈다. 사진집 <한국의 장터>(2012)의 후속편인 이 책에서 장씨는 장터를 중계하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책 출판에 맞춰 남편 조문호(69·사진 왼쪽)씨와 함께 사진전 ‘장에 가자’를 연 정씨를 2월9일 서울 중구 인사동 아리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두메산골 주민을 찍던 남편은 9년 전부터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정씨와 함께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다.

장보따리는 가방으로, 유모차로 바뀌고

장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7년. 1년간 장터에서 “할매들과 놀다”가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릴 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함평장이 열렸다. 엄마 따라 오일장에 가곤 했는데 그 추억이 아련했다. 신춘문예에 자꾸 떨어져서 사람을 더 알아야겠다, 깊이 소통해야겠다 싶어 장터로 향했다.” 그렇게 1년간 장터를 훑다보니 ‘변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컬러텔레비전이 시골에까지 보급되면서 장꾼의 옷차림, 머리 모양이 바뀐 것이다. 그 모습을 정씨는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인사동 암실(지금의 스튜디오) ‘꽃나라’와 동아리 ‘진우회’를 오가며 사진을 배운 터였다.


변화상은 30년간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이고 다니다 점차 가방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유모차에 싣고 다닌다. 장옥도 달라졌다. 난장이 줄어들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장꾼은 반기질 않는다. “공무원들이 새 장옥으로 몰아넣어도 할머니들이 (시멘트가) 썰렁해 들어가질 않는다.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몸을 녹여야 하는데…. 오히려 역효과다.” 조씨가 말했다. 정씨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장에 나오는 물건이 이 장이나 저 장이나 비슷해진 것을 아쉬워했다. 또 힘의 논리를 절감할 때는 엉엉 울기도 했단다. “20년간 장터의 명당 자리를 지키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바구니와 빗자루 등을 만들었는데 햇볕 잘 드는 곳이라 이웃 장꾼들이 어우러져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 날 가보니 낯선 트럭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 힘있는 자들이 할아버지를 내쫓아버린 거였다.”

안 돼요, 툭툭 건드리며 ‘이거 중국산이죠?’

그래도 전통과 인정을 맛볼 수 있는 장터가 아직은 남아 있다. 충남 예산장, 경남 합천장, 경북 경주 건천장, 전남 함평장, 전남 구례 산동장, 제주 모슬포장 등이 그렇다(상자 기사 참조). 장씨는 몇 곳은 10번도 더 가봤다고 했다. “석류를 맛있게 먹던 모습을 기억하고 할머니가 석류를 챙겨놓고 기다린다. 그 따뜻한 정이 그리워 발길이 자꾸 간다.”


가볼 만한 시골장터
주변 모든 좋은 것이 모여드는 곳

926년 개설된 충남 예산장 쌍송백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에 펼쳐진다. 평소엔 주차장으로 쓰다가 장날이면 할머니들이 보따리를 풀어 난장을 꾸민다. 보따리에선 가을에 수확한 콩과 말린 나물이 쏟아진다. 파라솔도 계절마다 설치가 달라진다. 겨울에는 파라솔이 누워 바람막이로 쓰였다가 여름에는 일어나 햇살을 가린다.

 

경남 합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보리, 콩, 참깨, 들깨 등의 곡식을 비롯해 무, 배추, 고추, 양파, 마늘, 수박, 우엉, 토란, 감자에서 백작약, 구기자, 질경이, 당귀 같은 약재까지. 이 모든 것이 인근 마을에서 재배돼 장터로 흘러 들어온다. 예전엔 인근 늪지대에 사는 여인네들이 모두 가물치, 메기, 뱀장어 등 민물고기를 이고 와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수가 줄어들어 몇몇 할머니들만 눈에 띈다.

경북 경주 건천장 전통의 멋과 맛이 그대로 묻어난다. 장옥을 덮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 미닫이문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일부러 만들어놓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장꾼들이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고단한 사람살이를 부려놓는, 끈끈한 정도 변함없다.

 

전남 함평장은 100년이 넘었다. ‘두루 평평한 땅’이라는 이름 그대로 산지보다 평야가 많아 지역 특산물과 농산물이 넘쳐난다. 함평만에서 잡아온 수산물과 축산물도 거래된다. 함평장 뒤에는 육회비빔밥집이 즐비하다. 그날그날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만을 이용한단다.


1956년 7월에 개설된 전남 구례 산동장 2일과 7일에 열린다. 구례장의 한 귀퉁이밖에 안 되는 조그만 장이지만 산수유를 수매하는 12월 초부터 1월까지는 성시를 이룬다. 산동면 58개 마을이 새벽부터 갖고 나온 산수유 때문이다. 산동은 전국 최대의 산수유 군락지로, 1천 년 된 산수유 나무도 있고 생산량도 전국의 74%를 차지한다. 장에 나온 사람들은 “어째, 산수유 많이 땄는가?”로 시작해 “많이 따이소”로 인사를 끝낸다. 산동장은 오전 10시가 넘으면 서서히 파하기에 ‘파싹장’이라고도 불린다.

 

제주 모슬포장 공식 이름은 대정오일장이지만 모슬포장으로 더 유명하다. 제주답게 귤이 종류별로 나와 있고 자두며 복숭아, 참외, 수박 등 색색의 과일들이 화려하다. 어물전에선 갈치가 은빛을 뽐낸다. 장터 머리에선 바다가 보인다. “어디 감수꽈?”(어디 가십니까?)로 표현되는 구수한 제주도 사투리에서 토속적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장터에서 꼭 해야 할 것을 물었다. 장씨는 첫째, 할머니들과 눈을 맞추며 얘기하라고 권했다. “봄 장터에 가면 할머니가 캔 봄나물이 나와 있다. 3천원어치 쑥을 사면서 ‘참 예쁘게 다듬었어요’라고 칭찬해보라. 덤은 물론이고 첫사랑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둘째, 골목을 둘러보라. 장터에 가면 흔히 큰길만 훑어보는데 고유한 특색은 뒷골목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골목을 둘러보며 그들만의 일상을 엿보는 것과 비슷하다. 셋째, 국밥 먹기.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식재료로 장터에서는 국밥과 밑반찬을 만들어 값싸게 내놓는다. 국밥집은 보통 장날과 장이 열리기 전날만 연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날이 되면 장꾼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막걸리 잔을 부딪친다. 놓칠 수 없는 장터 현장이다.

장씨는 장터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설명했다. “툭툭 건드리면서 ‘이거 중국산이죠?’라고 묻지 마라.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자긍심이 강한 장꾼들이 크게 화낸다. 그들은 갖고 나온 물건이 얼굴이고, 장터가 살아온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이끌려 장씨는 30년간 장터를 들락거렸다. “장터는 사람과 물건이 만나는 곳이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세월과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느끼는 끈끈한 감정은 그대로다.”

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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