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이명희씨의 부친 이길훈(하상 바오로)께서 지난22일 이 땅의 삶을 끝내시고 천주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뵙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아쉽고 슬픈 일이지만, 천주님계신 천국으로 가신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합니다.






87년의 이승 삶을 마감하는 동안 천주님을 영접한 신앙생활은 너무나 갚을 길 없는 큰 은혜였습니다.

다만 백수를 훌쩍 넘긴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난 게 마음 아플 뿐입니다.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 11호실에는 상주인 아들 이관규, 김면수, 이인규, 이남규, 이명희, 이정규, 이선중, 이후중씨를

비롯한 자부, 사위, 손자 등 많은 가족들이 지킨 가운데, 조문객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지난 24일 오전 8시에 발인하여, 유해는 용인 천주교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명희씨는 여동생이 수녀인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습니다.
형제자매도 많아 다복한 집안이었는데, 이명희씨만 고달픈 연극배우의 길을 들어섰나 봅니다.
문상객들도 대부분 연극배우이거나 성직자들이 많았습니다.






장례식장에는 국호씨를 비롯하여 눈에 익은 배우들이 많았습니다.
인사동 사람으로서는 오치우, 조준영시인이 먼저 다녀갔고, 이성 구로구청장과 정영신, 정영철씨를 장례식장에서 만났습니다.
문상을 가지 못한 분들은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길흉사가 겹쳤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 성 구로구청장으로부터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이 성씨의 둘째아들 영일이가 오는 11월17일 오후5시40분 신도림테크노마트 11층에서 화촉을 올린답니다.

기억해 두셨다가 많이들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선군 귤암리는 인심좋은 산골마을로 장수마을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동강할미꽃마을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산 좋고 물 좋은 천혜의 비경에 파묻혀 있다.
그런 자연환경과 더불어 순박하게 살았으니 모두들 장수할 수밖에...

지난 25일, 아랫만지골의 최연규씨 모친 유명철(94)씨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27일 만지산으로 오른 상여 행렬은 전통적인 장례문화를 지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선소리꾼의 어허넘차 소리, 그리고 땅 다질 때 부르는 달구소리 등 전통장례문화 전반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귤암리는 산과 강에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라 상여 나가는 주변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리고 모든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잔치 한마당이었다.
구성진 선소리꾼의 달구소리 한 구절이 잠시 인생무상을 깨우쳤다.

오허어 달구요~ 오허 달구여~


인간백세 산다 해도, 오허 달구여~
잠든 날과 병든 날과, 오허 달구여~
걱정 근심 하는 날과, 오허 달구여~
종사지액 다 제하면, 오허 달구여~
인간 사십 살길 없네. 오허 달구여~

사진,글 / 조문호

 

 

 

 

 

 

 

 

 

 

 

장수마을 정선 귤암리의 전통장례문화 복원을 제안 한다.

 

 

장수마을로 지정된 정선 귤암리는 산과 강에 둘러싸인 청정마을이라 상여 나가는 주변 풍경들이 너무 아름답다.

 

규격화된 장례식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화장하는 것이 대세인 요즘,

상을 당한 정선 귤암리의 최정규, 최연규씨 댁 전통 장례식은 각박한 삶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제 그러한 상여길은 민속축제장이나 가야 볼 수 있다.

 

전통문화는 박제화된 형식을 잇는 것보다 실생활에 활용될 때 더 가치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특정지역을 지정해 전통문화를 생활에 이어가는 곳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선 귤암리를 전국 유일의 전통장례문화 보존지역으로 정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7-8년전 귤암리 '동강할미꽃 축제'에서 상여놀이를 재현한 적 있으나 아쉽게 단발행사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젠 축제의 부대 행사로서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이어가자는 것이다.

귤암리에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신청 받아 그 분이 돌아가시면

예전의 풍습대로 마을에서 장례를 치러 주자는 것이다.

 

상두계도 조직하고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집도 마련해 귤암리만의 전통장례문화를 복원하자는 것이다.

사실 옛날 시골의 초상집은 잔치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망자의 명복을 빌며 어울리고 단합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각양각색의 중복된 축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축제 홍수 속에 산다.

불필요한 예산낭비라는 지탄으로 축제를 없애는 지역은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도 생겨났다.

그래서 이젠 귤암리의 최씨상가처럼 실질적인 축제성 전통민속들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더 논의되어야겠지만, 일단 신청자가 사망하면 부고를 '정선군청' 홍보실로 보낸다.

행정관서에서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배포해 전통장례문화를 홍보하자는 것이다.

일반인은 물론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또는 사진작가들이 찾아와 기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는데,

장례비용의 증가에 따른 일정부분을 군에서 지원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 예산은 지역 홍보에 기여하는데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일단 귤암리 마을 원로회의에서 먼저 협의돼야 할 사안이지만, 정선군의 긍정적인 검토를 제안한다.

 

 

 

 

 

 

 

 

 

 

 

 

 

 

 

 

 

 

 

 

 

 

 

 

 

 

 

 

 

 

 

 

 

 

 

 

 

 

 

 

 


 

신학철화백의 부인 김태순여사가 지난 18일 오후3시 30분, 소천하셨다.
파킨슨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려 13년 동안 고생하시다 운명하신 것이다.

장경호씨로부터 전해들은 비보에 가슴이 아팠지만,
고통스러운 삶의 끈을 놓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셔서 이승에서 못다 한 행복을 오래 오래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했다.

왕십리에 있는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나섰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듯, 이틀 동안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병원 주변에 핀 철쭉이 눈부셨다.
비에 젖은 처연한 자태에서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본다.

장례장을 들어서다 양평에서 온 민정기화백 내외를 만났고, 

서양화가 장경호, 조신호, 이인철, 박홍순씨를 만나는 등 반가움의 연속이었다.

접객실에는 딸 신목원, 신세원, 신전원, 신윤원씨가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영안실에는 사위 김우원, 최정열, 배정암, 윤호석씨가 예를 올리고 있었다.

항상 그랬지만, 문상객을 맞는 신학철화백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저 얼굴의 그늘을 언제 거두어 드릴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

사진,글 / 조문호

 

 

 

 

 

 

 

 

 

 

 

 

 

 

 

 

 

 

 

 

 

 

 

 

 

 

 

 

 

 

 

 

 

 

 

 

 

 

 

 




 

 

 

신학철선생 부인 김태순여사의 장례를 기록하러 왕십리로 나왔다.
19일 정오무렵 집을 나와서는, 발인 할 때까지 견디려고 술도 아껴 마셨다.
그러나 그 것도 잠깐일 뿐, 술이 술을 마시게 했다. 

술이 취해 실수할까봐 틈틈이 휴게실에 앉아 졸기도 했다.
잠결에 문영태씨를 만났으나, 갑작스런 박재동화백의 전화에

사진 찍는 걸 잊어버렸다. 이제 잊어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문상객 중 장례식장을 가장 오래 지킨 분은 주재환선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마시고도 견디시는 걸 보니, 아직 청춘이셨다.
후배가 모셔드린다고는 했으나, 일산까지 잘 가셨는지 모르겠다.

자정이 넘어서는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정환, 김태서, 조경숙, 심광현, 김한영, 황호창, 김용철씨와 함께 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김태서씨의 춤만 기억난다,

너무 취해 장례식장으로 돌아 와, 상주 틈에 비집고 누워 버렸다,
인기척에 눈을 떠니, 어제 갑자기 사라졌던 장경호씨였다.
벌써 발인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까워지니 좀 전에 같이 마셨던 김정환, 김한영, 황호창, 조경숙,
김용철씨가 복귀했고, 이상호씨는 조간신문의 부고를 보고 급히 달려왔다고 했다.
시락국으로 속을 달랜 후, 카메라 건전지와 CF카드를 점검했다.

그러나 김천 장지까지 따라 가려던 촬영계획이 갑자기 무산되었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마지막 례를 올리겠다는 가족회의가 있었단다.
딸들의 파워를 시기한 김정환씨는 버스에 올라 버티기도 했으나, 이상호씨가 데려왔다.

가랑비 속으로 사라지는 상여차를 바라보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