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발표 작을 담은 ‘공(空)은 열려 있다’ 사진집은 신청한 분에 따른 한정본으로 발행된다.
전시가 끝나는 12월 14일까지 신청 받는다고 한다.
아래는 선생께서 남긴 글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 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사진가 이재갑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온 정통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강제징용 ‘잔혹사’를 기록한 ‘일본 속 한국풍경’,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의 진실을 기록한 ‘잃어버린 기억’, 베트남전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현장을 찾아다닌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등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골 깊은 역사를 파헤쳐 왔다.
이번에 선보인 '어느 특별한 동행'전은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배타적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 온 혼혈인들과 함께한 전시다.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우리 이웃의 또 다른 초상이다.
주명덕 선생께서 기록한 혼혈아, ‘섞여진 이름’이 발표된 지가 1965년이었니, 어느듯 반세기가 지났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되돌아보지 않았던 삶을 이재갑씨가 조명한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5시 무렵, 모처럼 전시장을 찾아 나섰다.
여태 전시 보는 것 자체를 피해 온 것은 전시리뷰나 이런 저런 글을 쓰기 싫어서다. 글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는데, '씹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개인적인 감상문에 불과한 글을 느낀 대로 쓸 수 없다면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분이 쓴 전시리뷰나 서문으로 소개를 대신 하기는 했으나, 평론가의 고충을 알만했다.
작품만 보고 전시리뷰는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싫은 소리는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속에 넣어두고 배겨나지 못하는 성질머리를 어쩌겠는가?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속 편했다. 그런 일로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미운 오리 새끼’신세가 되었는데, 심지어 가까웠던 친구나 가족까지 등 돌렸다. 잘 못 쓴 글이 아니라면 절대 내리거나 수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재갑씨의 ‘동행’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전시였다. 전시가 열리는 ‘KP갤러리’가 동자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기도 하지만, 기대했던 전시라 통풍이 도져 아픈 다리를 끌고 찾아간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의 허접한 사진들이 판치는 세상에, 이재갑씨 만한 사진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사진도 기록한다고 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니다. 아무런 작가의식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넝마주이 사진이라 한다. 작년에는 원로 사진가 두 분이 찍은 60년대 중반 무렵의 사회기록사진들이 서랍 속에 잠들다 반세기만에 빛을 본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학창시절에 찍은 사진이었고, 그 이후부터 상업사진이나 문화재사진으로 전향한 형태도 비슷했다.
그 당시는 임응식선생이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거리의 스냅사진이 성행할 무렵이었는데, 세월의 무게에 실려 작가의식과 상관없이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된 것이다. 요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처럼 아름다운 풍경만 쫓아다니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작가라면 뚜렷한 주관을 갖고 찍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주명덕선생의 ‘혼혈아’나 최민식선생의 ‘인간’, 그리고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처럼 사람 속으로 파고 든 작업과는 차원이 다른 기록이다.
또 한 가지 사진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한 분은 표준렌즈로 찍었고, 한 분은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많다는 점이다. 망원렌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나, 동작을 포착하는 스포츠사진에나 활용되는 렌즈라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적절치 않은 렌즈다.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람 속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몰래 찍는 도둑 사진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초상권 침해에 걸려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어 그런지, 거리스냅 하는 사진인도 사라져버렸다.
가끔 사진가들의 프로필 사진에 대포 같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목에 건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난 사진가가 아니라 사냥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요즘 렌즈들은 광각에서 망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줌렌즈가 장착되어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카메라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재갑의 "어느 특별한 동행"이 열리는 전시장을 찾아 갔더니, 전시 작가 이재갑씨와 전시기획자 이일우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시된 작품은 작가가 혼혈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내걸린 초상사진과 단체기념사진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사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작가와 당사자와의 끈끈한 교감이 느껴졌다.
‘동행’이란 전시제목처럼, 그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지난 시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흔적이 역역했다. 전시장에 찍힌 당사자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재갑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사진에 앞서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을 찍는 다는 것은 그 사람과 얼마나 소통하며,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으니, 그냥 찍은 사진과는 격이 달랐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인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게, 함께 걷기 -
‘한 배를 타다(be in the same boat)’라는 표현은 한국어와 영어에서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같은 운명이나 처지에 놓이다. 모든 이의 운명이 완전히 똑같이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의지하며 위안을 얻는다. 사진가 이재갑은 혼혈인들의 일상 속에 시선을 멈추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한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생일을 축하하며, 함께 야유회를 떠난다. 사진 속에 담긴 일상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주 약간의, 외모적인 차이가 언뜻 엿보일 뿐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다.
미군정기(美軍政期)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외국인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혼혈인이 생기고 그 수가 늘어났지만, 한국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주도로 단일민족(Monoethnicity)이라는 신화를 기조로 삼아 민족의 우수성을 공교육에서 강조하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통합하는 동안, 외모가 다르거나 혈통이 다른 이들은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국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돌아야 했다.
한국사회가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규정하는 동안, 혼혈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교류하고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혈인들은 다른 혼혈인 가족과 기꺼이 시간을 나누고 가족끼리 교류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카메라는 이들의 일상과 행사에 드러난 얼굴을 기록한다. 타자로 규정된 얼굴들이 따로 또 같이 기념사진을 위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동질감을 강조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일지 모른다. 나와 같은 존재만 수용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일에는 많은 생각의 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같고, 어느 정도는 다르다. 제각기 다른 뿌리와 직업, 사고방식, 환경을 가지고 있는 혼혈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느슨한 연대를 만듦과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한국사회에 기꺼이 ‘동일자(the same)’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와 선을 스스로의 존재로 지우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타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말한다. 내 테두리 밖의 ‘타자’는 익숙하지 않기에 낯선 자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고 내 옆에 있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이웃’이기 때문이다. 환대. 이웃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 이런 측면에서 이미 혼혈인들은 각자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거대하고 불친절한 이웃을 환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세계로 또 다른 타자를 초대한다. 낯선 카메라에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들의 일상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얼굴들’은 바로 우리 이웃의 초상이다.
이재갑의 사진전 “어느 특별한 동행”은 한국이라는 배타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혼혈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에 담긴 이들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함께 걸어갈 것(동행)’을 제안한다. ‘아주 약간의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탄 배에 동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같고, 조금씩은 모두 다르다.
글 / 레 나(LENA)
KP 갤러리가 2023년 새해 첫 전시로 선정한 “어느 특별한 동행(同行)” 이재갑 사진전은 3월 4일까지 열린다.
한국 사진예술의 발전과 정체된 국내 사진문화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설립된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이하 K.P 갤러리)가 2020년 6월 16일 신진작가 정예진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전시를 시작으로 오픈합니다. 서울사진축제 예술감독, 대구사진비엔날레 큐레이터 등 전시기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일우 기획자가 설립한 K.P 갤러리는 동시대 사진예술의 역할과 방향에 대해 고민을 바탕으로 사진인들을 위한 창작지원 사업, 국제교류사업, 학술행사개최, 예술가 매니지먼트 등 사진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1_155×100cm_2020
정예진 작가의 『Masquerade ;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전시가 2020년 6월 16일부터 7월 7일까지 K.P 갤러리에서 개최됩니다. Masquerade 는 '가면무도회', '진실, 또는 진심을 숨기고 가면을 쓰다' 의미로 이번 전시에서 정예진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정체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은 22점의 초상사진을 소개합니다.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3, #02, #04_155×100cm×3_2020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18, #08, #05_155×100cm×3_2020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개인의 의지와 달리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매 순간 다양한 정체성의 마스크를 바꾸어 쓰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과 그 속에 감춰진 개인들의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K.P 갤러리 개관 전시이자 첫 번째 신진작가 지원사업으로 정예진 작가를 초청하여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사진 속 인물들의 숨은 이야기와 그들이 지닌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욕망을 소개하고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 K.P 갤러리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14, #10, #12_155×100cm×3_2020
정예진_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07, #06, #16_155×100cm×3_2020
'나는 내가 없어서 남의 그림자를 훔쳐 입었다.' ● 심한 우울증을 겪던 18살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아 둔 수면제를 모두 삼켰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변하지 않았고 결국 난 도망치듯 고향과 부모님을 떠났다. 새로운 곳의 삶은 한 순간 내게 심리적 안정을 주기도 했지만 내게 감쳐진 나의 내적 불안감은 시간이 지나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현실에서의 삶은 내가 원하는 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와 다른, 원하는 않는 다른 내 모습으로서의 삶을 강요하였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이것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내 속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우연히 구입한 사진기로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의 생각과 감정, 그들을 바라보는 내 욕망을 투영하였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 현실의 삶은 여전히 나의 생각과 괴리가 있고 아직도 여전히 아프지만 사진은 내게 위안을 준다. 사진을 통해 나를 찾고 싶다. ■ 정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