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

Beyond_The Centennial Exhibition of Guei-Hong WON

원계홍展 / WONGUEIHONG / 元桂泓 / painting.archive 

2023_0316 ▶ 2023_0521 / 월요일 휴관

 

원계홍_수색역_캔버스에 유채_45.5×53.2cm_1979

첼로 연주회 / 2023_0316_목요일_05:00pm

윤해원 「바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주최 / 성곡미술관_원계홍기념사업회

주관,기획 / 성곡미술관

관람료 / 5,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1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sungkokartmuseum

 

성곡미술관은 원계홍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원계홍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그의 업적들을 다시 복원하여 알리기 위한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초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간 원계홍은 경제학보다는 미술이 좋아 사설 미술아카데미에서 회화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홀로 파묻혀 그림을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배운 세잔, 클레, 칸딘스키 같은 작가들의 미술이론 등 서양의 현대미술론을 스스로 파고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일구기 위한 고독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원계홍은 마침내 1978년 12월 공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어서 화가로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간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1980년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작품을 출품했다. 이후 원계홍은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원계홍의 나이 고작 57세 되던 해이다. 그의 안타까운 타계 이후 1984년 6월 서울의 공창화랑에서 원계홍 유작전이, 198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계홍 회고전이, 1990년 12월 공간 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으며, 이어서 오늘 성곡미술관에서 그의 전작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연다.

 

원계홍_골목(까치집)_캔버스에 유채_45×53cm_1979

원계홍 화백의 작품은 주로 1970년대에 작업한 10호 내외의 유화이다. 골목풍경과 정물화가 주를 이루며, 나머지는 인물화와 추상화, 그리고 드로잉 등이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 말 작업한 '골목 풍경 연작'은 한국의 경제개발 이전 서울 변두리의 뒷골목을 단순하고 명쾌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때 텅 빈 골목길은 사실 묘사에 충실하기보다는 원계홍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잔의 풍경화처럼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과 명료하고 순도 높은 색채로 담아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다가서 보면, 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회색조와 머뭇거리는 듯한 붓 자국들은 아직 무엇인가 더 그려야 할지 아니면 그만 멈추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완성인 양 캔버스 전체를 배회한다. 이러한 원계홍의 의도적 배회가 세잔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바로 원계홍 회화의 고유성일 것이리라.

 

원계홍_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_캔버스에 유채_46×53cm_1979

그것은 순수하고 우직하게 창작에만 몰두했던 한국의 초기 서양화가들처럼 원계홍 역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에만 매진했던 데서 오는 예술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그 태동기에 새로운 문물인 서양화를 만나며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지만, 놀랍게도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은 작가의 예술적 역량과 열정을 일깨우는 것으로 끝나고, 결국 어떤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자신들의 고유성을 창조해냈다.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0도, 즉 "글쓰기의 0도(롤랑 바르트)", 혹은 탈 신화화한 미술 덕분에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 혹은 잃어버린 예술의 본질이 원계홍의 캔버스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우리가 원계홍의 회화를 대면하며 어떤 특정 사조나 시대와 정치, 혹은 선전이나 상업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진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현대미술의 사라짐의 위기에서 그의 예술은 결코 그러한 잡다한 시대적 상황들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원계홍_장충동 1가 뒷골목_캔버스에 유채_65×80.6cm_1980

원계홍 화백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준 공로는 역시 일찌감치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은 공감력을 가졌던 두 분의 소장가 김태섭과 윤영주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예술 애호가였던 두 분은 탁월한 안목으로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수집하고 소장함으로써, 이름 없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가와 작품을 보호했다. 어떤 작품을 가치 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데는 작가의 수준 높은 창작 활동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 인정함으로써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소장가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심도 없던 미술계의 기인이자 외골수였던 원계홍은 두 예술 애호가의 관심 덕분에 다시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못다 핀 작가의 작품을 보듬은 소장가의 마음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길 바라며, 두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이수균

 

원계홍_북한산_캔버스에 유채_33×45.5cm_연도 미상

원계홍의 말 ● "예술이란 항상 일종의 긍정의 작업이어서 말하자면 경이와 향수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 기본적 형태, 색채, 선 등은 충분히 조직되어 명확히 한정된 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속시킬 것이라고 요망하지만, 그 심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만 무엇이든 심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구성적인 심상이 아니면 안 된다. 구성적인 심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부에 생명을 강화시킬 힘이나 원망을 환기시켜 생존할 권리를 주장시켜 그것보다 이상의발전을 조성시키는 심상을 말한다." ● "회화는 일종의 구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지만, 참다운 회화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유일한 자유이며 구제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구제라고 하는 것이 예술에 관한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영원한 환희인 객관적인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감상은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이 염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일생을. 인간의 숙명이 가지는 의의를 단호히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없었더라면. 있는 것은 다만 허무주의, 다양한 형식의 자기기만뿐일 것이다. 모조품일 뿐이다." ● "예술은 일종의 구애와 같은 것이라고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구하고 있는 동안에 소비되어 가는 것일 것이다. 연소하여 다만 검은 재만이 남겨졌다." ● "예술가의 세계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와 불성실 등이 소용돌이치는 절망적인 곳이며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선인에 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겸허하고 탈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의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 "균형이 잡혀 있고 색채가 조화되어 있으면 작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주제 같은 것은 필수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주제이매 아름다운 것에 영원한 기쁨이었다." (원계홍, 「작가노트」 발췌)

 

원계홍_회색 지붕_캔버스에 유채_33.3×45.3cm_연도 미상

원계홍에 대하여 ● "필자가 원 화백을 만난 것은 60년대 후반으로 소급된다. 지금은 없어진 안국동 로터리에 면한 송현동 입구(풍문여고 맞은편)에 있었던 박고석 화실에서였다. 인상은 과묵한 편이었는데 예술에 대한 논지는 분명하고 예리했다. 두 사람이 펼치는 예술론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그의 작품을 대한 것은 78년 공간화랑에서였다. 이 전시가 그의 데뷔전인 셈이었다. 그의 나이가 55세였으니까 당시 정서로서는 만년에 자신을 알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전은 그와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관람자들에게 기이한 감흥을 안겨준 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본 지인의 경우도 대개 몇 점의 작품에국한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이 지닌 화격이 전연 예기치 않은 신선한 것이었음에 기인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듬해 같은 공간에서 두 번째의 전시가 열리었다. 이어서 80년에 열린 『중앙미술대전』(중앙일보주최)에도 초대되면서(당시 『중앙미술대전』은 신인공모전이나 특별히 몇몇 개성적인 중견작가들을 초대한 바 있다) 당당한 한 사람의 화가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80년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새롭게 자신을 펼칠 무렵 심장마비로 급서하였으니 화가로서의 전체의 삶은 극히 짧은 한 시기로 끝나고 만 것이 되었다. 그가 화가로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광수(미술평론가), 「원계홍의 세계_심상(心象)과 본질」 (2023) 中)

 

원계홍_장미_캔버스에 유채_34.5×26.5cm_1977

"원계홍의 도시 풍경화는 크게 두 타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화가가 살았던 성북동과 부암동 같은 산동네 주거지 풍경이다. 높은 구릉지에 들어선 1층 혹은 미니 2층 주택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리드미컬하게 병렬되는 방식인데, 유사한 형태의 지붕과 벽면체로 유닛(unit)을 이루면서도 높낮이를 달리하고 필요에 의해 2층을 올리고 방 하나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증식하는, 생명체로서의 골목정서를 표현했다. 다른 하나는 서울 도심의 '철거-개발-이주' 정책에 의해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된 후 신축된 홍은동 유진상가, 양동, 북창동 빌딩의 뒷골목 풍경이다. 높이 솟은 빌딩의 수직성과 위압적 크기, 벽돌 건물의 강렬한 적색, 거칠고 날카롭게 건물과 대치하는 넓은 도로, 사람도 간판도 없는 뒷골목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는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대한 암울한 비전이 표현되었다." (김현숙(한국현대미술사학자))

 

원계홍_정물_캔버스에 유채_31.3×40.5cm_1975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생활이 굳건한 신조와 비탄에서 이루어졌듯이 그의 작품 속에는 시대나 인간을 날카롭게 통찰하며 순간에 빠지지 않고 영원과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씨가 엿보인다. 나는 그의 집에서 그가 그려놓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 화가는 늘 인간에게 절망하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그의 그림은 정신이 병들지 않고 기술이 숙련에 때묻지 않고 소박하며 원시적인 건강함에 빛나고 있었다. ... 특히 원계홍과 같이 천성적으로 반역아이고 천재인 사람인 경우에는 여간해서는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야생아라고 했지만 이 유형의 예술가에게는 속인과의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화가 원계홍을 대했을 적에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한참 기고만장했던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유럽의 전통과 정면으로 대립해서 인상파라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시킨 그들의 높은 기개가 바로 화가 원계홍의 모습에서도 살필 수가 있었다." (故이경성(전국립현대미술관관장)) ■  

 

원계홍_꽃(글라디올러스)_캔버스에 유채_58.3×44cm_1974

Celebrating the centenary of the birth of artist Guei-Hong WON, Sungkok Art Museum presents "Beyond_The Centennial Exhibition of Guei-Hong WON". This exhibition aims to shed new light on WON's oeuvre in the context of Korean contemporary art, while restoring and publicizing his achievements that remain unfamiliar to us or are fading into obscurity. In the early 1940s, WON traveled to Japan and began studying in the Department of Economics at Chuo University in Tokyo. Preferring art to economics, however, he started to learn painting at a private art academy. Later returning to Seoul at the end of World War II, WON buried himself in his atelier to draw pictures and delve into Western contemporary art theory that he had studied in Japan, such as those of Cézanne, Klee, and Kandinsky, focusing on his lonesome endeavors to expand upon his own oeuvre. As a result, WON finally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at Gallery SPACE in December 1978 at the age of 55. Subsequently gaining confidence as an independent artist, he held his second solo exhibition at Gallery SPACE the following year in 1979, and in 1980, he submitted his work as an invitational artist to the 3rd JoongAng Fine Arts Prize. Later, WON moved to the United States in 1980 and unexpectedly passed away from a heart attack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He was only 57 years old. Aer his lamentable death, he was commemorated with a posthumous exhibition at Gongchang Gallery in June 1984, a retrospective exhibition at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July 1989 and another posthumous exhibition at Gallery SPACE in December 1990. Succeeding these exhibitions, Sungkok Art Museum is now proud to present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WON's entire body of work. ● Generally sized around 45×53cm, WON's works are largely comprised of oil paintings drawn in the 1970s. These majorly include landscape paintings of alleys and still-life paintings, while the rest are portraits, drawings, and abstract paintings. Among them, the "Landscape of Alleys" series, which were mainly created in the late 1970s, capture scenes from Seoul before Korea's economic development, using simple and clear brushstrokes. Rather than remaining faithful to representational depictions, WON depicted empty alleyways in Seoul with simple yet lucid geometric compositions and high degree of color purity like Cézanne's landscape paintings. Upon closer examination, however, viewers will sense a world that is completely dierent from that of Cézanne and most Impressionist painters, as WON's paintings exude a subtle ambience in hazy gray tones as if they are still unfinished. This is the source of relief that viewers feel upon encountering his work and stems from the profundity of WON's artistic soul that delved into art for the sake of art, with a pure and honest devotion to artistic creation. Although WON surprisingly developed a tremendous sense of curiosity and interest in painting upon encountering Western painting during the early days of Korean modernism, he was simply influenced by Western modernism to awaken his artistic competence and passion, without allowing himself to be swept away by any particular trend. Thanks to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Roland Barthes)" and demythologization, viewers are able to vividly witness the surviving essence of art that theyhad known before or lost. This is the reason why WON's paintings allow viewers to savor genuine purity that has not been tainted with any specific trend, time, and politics, or tinged with propaganda, instigation, and commercialism. Amid today's crisis in which modern art even faces the possibility of extinction, his works speak volumes that art is never subject to such miscellaneous circumstances of the times. ● The credit for allowing the public to rediscover WON's works should be given to the two art collectors, Kim tae sup and Yoon Young Ju, who had the deepest sympathy for the artist's oeuvre. Based on their superb discernment as connoisseurs of art, the two collectors highly valued WON as an artist from an early era. By collecting and housing his works, they protected the artist and his works from vanishing like dust in the wind. Elevating a painting into a valuable work of art above all requires the artist's sophisticated creative touch, but the role of collectors is no less important as they prevent artwork from disappearing helplessly and preserve it by evaluating and acknowledging the artistry behind it. Thanks to the attention of the two collectors, new light will be shed on the work of WON, a loner and eccentric in the art circle who had little interest in worldly success. We at the museum would like to express our deepest gratitude to the two collectors in the hope that their wishes in embracing an artist's unfinished oeuvre based on a pure love for art will resonate in our own hearts as we view his work today. ■ Soukyoun LEE

 

□ 첼로 연주회- 곡명: 『바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연주자: 윤해원

일시: 2023년 3월 16일(목) 오후 5시         

2023년 4월 15일(토) 오후 2시         

2023년 5월 13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 전시 연계 특별 강연 1

주제: 『잊혀진 화가, 원계홍의 발견』

강연자: 김현숙 박사

일시: 2023년 4월 8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내

 

□ 전시 연계 특별 강연 2

주제: 『한국 근대 컬렉터와 컬렉션의 문화사』

강연자: 김상엽 특임연구관(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시: 2023년 4월 22일(토) 오후 2시

장소: 성곡미술관 내

 

Vol.20230316f | 원계Vol.20230316f | 원계홍展 / WONGUEIHONG / 元桂泓 / painting.archiveGUEIHONG / 元桂泓 / painting.archiv

 

사유공간 Speculation Space

원문자展 / WONMOONJA / 元文子 / painting 

2023_0223 ▶ 2023_0305 / 월요일 휴관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21

주최 /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동창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2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실험의 역정과 환원의 논리-원문자의 세계 ● 원문자는 한국(동양) 화가들 가운데서도 유독 실험성이 돋보이는 경우다. 그의 실험의 경지는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나아간다. 흔히 한국(동양)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작품을 한국화가 아닌 회화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화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보편으로서의 회화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의 내면에는 일반적인 장르로서의 관념화된 한국화라는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욕구가 내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같은 주장의 내면에는 그간 한국화가 직면해온 상황의 질곡이 유독 깊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야만 이해가 된다. 전통적인 회화- 우리 고유한 회화 양식이면서 그것을 애써 기피하려는 태도는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신의 뿌리를 외면하는 일이다. 한국화에 가해졌던 그 모든 모순을 대담하게 직면하면서 한국화의 존재를 다시금 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94cm_2020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원문자의 실험을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도 이와 결부된다. 말하자면 그의 실험은 한국화를 기피하는 데서가 아니라 한국화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나아가는 정당성이다. 이는 한국화라는 특정한 관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만, 또한 한국화란 어떤 것인가란 원형과 정신에 대한 물음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험의 출발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왜 그리느냐는 실존의 입장에서란 사실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세계에 들어간 만큼 그의 실험은 치열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94cm_2019

그의 실험의 편력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한지의 발견과 원용을 먼저 지적할 수 있다. 한지의 발견과 원용이란 어떻게 보면 한국화 고유의 질료의 발견이자 원용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한국화 고유의 질료를 다시금 발견하고 원용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 않는가란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자신 속에 있던 것을 자신이 다시금 발견한다는 것이 되니까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발견한다는 것은 밖에서의 발견보다도 더욱 내밀하고도 놀라운 것이지 않을 수 없다. 들라크루아가 자신은 밖에서 영향을 받기보다는 자기 내면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화 고유의 질료에 대한 발견은 또 다른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담보한 것이어서 발견의 의미는 더욱 두드러진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62cm_2017

한국화의 매체는 지, 필, 묵이라 말해진다. 이는 서양화와 같은 단순한 바탕과 붓과 안료의 의미를 벗어나 그 자체가 일체화된 문화적 현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만큼 신체화된 존재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지의 발견이란 단순한 지지체로서의 바탕인 화선지의 영역에 갇힌 것이 아닌 한국에서 생산된 재래적 방법의 종이 일체를 말한다. 한지의 발견과 원용이란 따라서 한지가 지닌 질료 즉 물성으로서의 존재의 발견이 된다. 원문자의 한지의 실험도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한지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조형화의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몇몇 서양화가들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그런데도 원문자의 실험이 한결 돋보인 것은 한국화 영역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자기를 발견했다는 차원에서 그의 시도가 더욱 의미를 더해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의 한지의 실험은 일종의 원형 탐구라 할 만큼 종이의 제작과정을 되돌아간 것이기도 하였다. 한지의 질감을 더욱 푸근한 정감의 세계로 진전시키는가 하면 종이의 원료인 닥을 다시 물에 해체하여 그것을 부조의 형식으로 떠내는 요철의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반입체적인 부조의 형성은 평면이자 동시에 입체성을 띤 것으로 회화이자 동시에 조각이라 할 수 있는 혼융의 조형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실험은 종이를 애초의 질료로 환원하면서 종이의 물성이 지지체로서의 존재를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지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한지일 뿐이라는 실존으로서의 차원을 현전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19

그의 실험의 전개는 근래에 오면서 또 하나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새로운 매체로서의 사진 방법의 원용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각의 사유 공간」으로 명명된 이 실험은 일종의 디지털 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방법 자체를 강조해 「포토 아트」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실험은 지금까지의 실험의 양상과는 또 다른 탐구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수묵 위주나 종이의 물성의 탐구영역과는 그 맥락을 달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화사한 색채의 구현과 기계적인 방법이란 새로운 감각의 탐구가 현저하면서도 한편으론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감성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송희경은 이를 두고 「사진을 뛰어넘은 회화」「작가의 손을 거친 창조된 원문자의 고유의 회화」로 규정하기도 한다. 기계적인 방법의 원용이면서 전혀 그런 생소한 기술적 면모를 드러내지 않은 작가 고유의 감성이 무르익어감을 발견하면서 한편으론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화사한 색채의 세계가 되살아나고 있지 않나 보인다. 이 역시 자신 속에서 발견된 조형의 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20

그의 근작은 새로운 실험의 영역을 보인다기보다는 어쩌면 그의 지금까지의 조형의 역정을 종합적으로 가다듬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만큼 대범하면서도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고 하겠다. 때로는 날카로운 선획과 이에 대비되는 물결치는 곡면의 형성은 화면 자체를 더욱 탄력적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화면의 스케일이 더욱 넓어진 면모를 확인한다. 빛과 어둠,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기하학적인 형태와 생명적인 형태의 공존이 자아내는 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더없이 푸근한 정감을 주는 것도 허심한 화면의 확대에서 연유된다고 본다. 부분보다 전체가 앞서는 것은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달관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까. ● 부단한 실험을 통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의 치열성에도 불구하고 화면엔 한없이 가라앉는 깊이의 여운이 지배되는 것은 그 모든 실험에서 일어나는 독소를 극복하고 언제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는 증거로서 말이다.

 

원문자의 세계를 일별해보는 과정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것은 그의 조형의 바탕이 대단히 균형 잡힌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평면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평면이면서 동시에 구조인 세계, 또는 평면적이면서 언제나 구조를 지향하려는 충동과 구조적이면서 언제나 평면을 지향하려는 욕구가 교차하고 있어 변화와 지속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억제된 표현의 환원 의식과 자기를 대담하게 벗어나려는 일탈의 자각과도 일치되는 점이다. 어쩌면 이 같은 균형감각이야말로 그의 사유 공간을 더욱 깊은 내면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 오광수

 

Vol.20230223c | 원문자展 / WONMOONJA / 元文子 / painting

 

水墨, 쓰고 그리다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 

2021_1119 ▶ 2022_0206 / 월요일 휴관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 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5,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쓰고 그리다. - 강미선의 추성부(秋聲賦) ● 이번 금호미술관의 초대전은 강미선의 31번째 개인전이다. 1985년 첫 개인전 이후 그는 한국과 중국을 무대로 꾸준히 작업을 발표해 왔다.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강미선이라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알고 있는 관람객도 모두 3층의 「금강경-지혜의 숲」(2021)을 시작으로 전시를 감상하길 바란다.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부분 / 금호미술관 3층

쓰다. ● 3층에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하는 글씨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오랜 중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한국의 서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강미선이 본 중국의 서법은 표현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한국서예에서 벗어난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 그의 '쓰기' 작업의 대표작은 『금강경』이다. 그의 글씨는 누구의 서체도 흉내 내지 않고, 멋도 부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정성스럽게 닥종이를 두드리고 겹겹이 붙여서 종이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글씨를 썼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지우기도 하고 덧입히기도 하며 각 글자마다 배경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강암 바위에 오래전 새겨진 글씨처럼 보이는 각각의 담담함을 지닌 5149개의 글자다. ● 한 글자를 쓰기 위한 수고로움은 마치 일보일배(一步一拜)에 정진하는 수행자나, 사경(寫經)에 임하는 승려의 극진한 공력과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금은니(金銀泥)로 장식한 고려시대의 화려한 사경과는 다르다. 담담하게 씌어진 5149자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는 보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가는 대중의 묵묵한 행보 앞에 숙연해지는 것과 같다. ● 금강경에 대해 "평범함 속의 진실이며, 평범함 속의 초월"이라고 표현한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의 말을 강미선은 이 작품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서예의 제법으로부터 벗어나 종이 바탕과 먹의 물성에 자신을 맡기고 잘 쓰고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행위는 일체의 생각과 법에 머물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금강경을 필사하는데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대하는 이러한 자세는 이어지는 다른 작업들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강미선_대미필담(우)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대미필담(좌)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그리다. ● 2층에는 일상의 삶을 통해 마음에 담긴 사물들을 들여다보며 작품으로 풀어낸 「觀心」시리즈가 펼쳐진다. 그의 작업은 종이 바탕을 만드는 것보다 더 먼저, 하나의 사물이 작가의 마음에 자리 잡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 가을이 되어가며 그의 작업실 마당 한구석의 백 년 된 감나무에서 덜 익은 감들이 거센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감사하게도 감물을 많이 만들 수 있어 「무언가(無言歌)」의 재료로 썼다. 끝내 가지에 붙어서 버틴 감들은 가을과 함께 익어가며 붉은 감이 되어 「관심(觀心)-감」 시리즈의 소재가 되었다. ● 마당의 파초도 남편의 지극 정성으로 겨울마다 실내로 옮기는 수고를 감내하고 고이고이 모셨더니 옆에 어린 파초 하나가 땅을 뚫고 솟아 올라왔다. 파초와의 시간들로 쌓인 마음을 들여다보며 「관심(觀心)-파초」를 제작했다. ● 이렇게 경복궁에서 만난 은행나무도, 부석사의 안양루도, 그의 정원을 쓸던 싸리 빗자루도 모두 그의 마음을 거쳐 투박한 종이 바탕 위에 얹힌다. 한동안 흙판 위에 그리고 구워내는 작업을 하였지만, 그때도 소재는 일상에서 만난 사물들이었다. 1층에는 소품의 작업들을 모아 조선시대 책가도처럼 펼쳐놓은 「서가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걸어놓고 보니, 소재가 된 사물들이 조선 책가도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등장했던 기물들처럼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되어 흥미롭다. ● 강미선 작가는 1980년대, 20대의 시기에 수묵화 운동을 이끌었던 스승과 선배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고, 2000년대에는 민화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수묵화 운동을 통해서는 수묵과 종이라는 재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함께 재료와 표현의 실험에 치중하게 될 때 만나는 한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민화 수업을 통해서는 삶과 함께하며 길상의 의미를 담아 감상자와 소통했던 전통 회화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하나의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 정성껏 만든 바탕 화면을 완성된 작품으로 여기지 않고 위에 그의 마음에 고요히 담겨있는 이미지들을 얹는다.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석류나 연(蓮), 매화와 같은 이미지들은 전통 회화에서 길상의 이미지로도 많이 다루었던 소재다.

 

강미선_관심(觀心)-세심(洗心)_한지에 수묵_139×191cm_2021 / 금호미술관 2층

긋다. ● 이번 전시를 통해 강미선의 작업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은 '획(劃)'의 등장 때문이다. 관람객이 전시장 로비의 입구에서 만나는 한옥 시리즈의 대담한 선들은, 그동안 한옥을 다룰 때 기와지붕의 면을 실루엣처럼 표현했던 그의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한다. 강미선은 선으로 분출하고 싶은 욕구를 한옥의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의 선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였던 그의 운필은 주로 점을 찍거나, 갈필의 무수한 붓질로 바탕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수한 반복이 쌓이며, 획은 드러나지 않았다. 간혹 나뭇가지 표현이나 백묘로 그려진 기물에서 드러나기는 했으나 선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점들의 나열은 머뭇거림이다. 점이 연결되는 것은 방향과 의지를 갖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점의 나열과는 비교되지 않는, 선이라는 형태는 그래서 힘을 갖는다. '긋다'라는 행위가 내용을 갖게 되어 '쓰다'가 되며, 그것들의 시각적 결과물이 '선(線)'이다. 검은 먹선이 화면을 힘차게 가로지르며 기하학적으로 분할하고 있는 이번 한옥 시리즈는 그동안의 머뭇거림에 대한 마침표다. ● 이 한옥 시리즈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지하 1층은 '획'을 다룬다는 것과 '명상'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전시장 3면에 걸친 거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시작인 3층과 연결된다. 3층에 전시되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신석(神釋)」의 구절도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한옥 시리즈를 지나 전시의 마지막 공간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無言歌)」는 감물로 그려진 총 1430명의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앞 기둥에 걸린 '관(觀)', '심(心)' 두 글자와 함께 공간 전체를 명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종이바탕을 마련하고, 감물작업과 옻칠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제작된 이 작품은 「금강경-지혜의 숲」과는 또 다른 울림을 느끼게 한다.

 

강미선_서가도(書架圖)_ 한지에 수묵, 수묵채색_248×1376cm_2021 / 금호미술관 1층

추성부(秋聲賦) ● 강미선의 전시를 감상하며 '가을'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시장까지 오는 길에서 만난 만추의 풍경과 그의 작품 속 감물의 갈색빛과 국화꽃과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붉은 감의 이미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시대적 도전에 반응하여 여러 실험과 표현 모색에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깊이 있는 발색과 숙연해지는 이미지와 경구들을 얻은 그의 작품 여정에서의 가을을 들여다 본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 천 년 전, 추성부(秋聲賦)를 지었던 구양수(歐陽修, 1007~1072)에게 가을은 탄식의 계절이었지만, 천 년 후, 강미선에게 가을은 이번 전시에서 두 번 언급되는 도연명의 시구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처럼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타고 꾸준히 자신의 지경을 넓혀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일희일비로 천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담담하고 충만한 시간인 것이다. ■ 왕신연

 

강미선_水墨, 쓰고 그리다_2021 / 금호미술관 B1

수묵의 정서와 한지의 조형 - 강미선의 근작에 대해 ● 80년대를 통하여 전개되었던 수묵화 운동은 전시대에 일어났던 일련의 동양화의 혁신 운동과는 그 유형을 달리한다. 이전의 운동이 전통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대적 회화로서의 형식을 회복하는데 경주되었다면 수묵화 운동은 동양화의 정신 회복을 주창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려는데 그 중심을 두었다는 점에서이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려는 동양적 관념의 세계 즉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수묵이란 질료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데서 앞선 어떤 혁신적 운동과도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 변혁이란 문맥에서 본다면 수묵화 운동 역시 앞선 혁신적 운동과 일정한 영향 관계를 가늠해볼 수도 있으나 동양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열정에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 80년대란 한 시대를 통해 이처럼 뜨거운 전개 양상을 보여준 운동은 일찍이 없었다. 이 운동은 특정한 그룹에 의한 통상적인 발표의 형식을 벗어나 무집단성을 띠면서 동시에 집중적인 게릴라 형식의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데서도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갔다. 그러나 그 여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에 관계되었던 작가들이 개별단위로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에 의한 방법이 개별로 분산되면서 이 운동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계승해갔다. 강미선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장에 있어 수묵화 운동과 관계되고 있음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화 운동에서 두드러진 조형적 특징은 필의(筆意)에 의한 자각과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천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필의가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한지와의 관계는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수묵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작가들을 대별해보면 대체로 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 두 유형을 적절히 융화해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 강미선의 작품상의 특징을 어느 한 카테고리에 가둔다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된다. 필의에 대한 방법적 추고도 간과할 수 없으며 수묵과 한지와의 관계 역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초기에서 최근에 이른 그의 역정에서 보았을 때 필의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성에서 보다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형식적 실험이 앞서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과 바탕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조형적 실험은 비단 수묵화 운동에서만 엿보이는 것이 아니다. 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단색화의 경향에서도 발견된다. 수묵화 운동과 단색화의 경향이 흥미롭게도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이는 일종의 시대적인 정신의 견인 현상이 아닌가 보인다. 결코 이 두 경향은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시대 정신의 공유가 불러일으킨 독특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단색화 작가들 가운데 한지를 바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동양화의 형식을 닮으려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한지가 지닌 정서의 내면을 발견했다는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대기에 활동했던 작가이자 미술사가인 윤희순은 "아마 세계에서 우리들만큼 종이와 친숙한 인종은 없을 것이다"라고 그의 「조선미술사 연구」에서 피력하고 있다. 우선 극동(한국, 중국, 일본) 3국만 하더라도 생활공간에 차지하는 종이의 비율만을 보면 단연 한국이 앞서고 있다. 지금은 생활공간의 변화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전통공간에서의 종이의 사용처는 벽지, 창호지, 장판지 등 생활 공간 전체가 종이로 뒤덮여 있는 형국이다. 한국인은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종이에 에워싸여진 공간에서 살다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종이-한지는 단순한 물질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정서의 현전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이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한지에 감물, 옻칠_260×3298cm_2021 / 금호미술관 B1

강미선의 작업은 지지체에 가해지는 일반적인 그리기의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수제 한지이면서 작가는 이를 자신의 공정(工程)으로 또 하나의 작업을 진척시킨다. 공장(工匠)이 기술적으로 만든 한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으로서 평면을 표면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평면을 표면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쓰임새로서의 평면이 아닌 독특한 표면의 창조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회화 일반의 차원에 못지않은 중요성이 확인되는 일이자 조형적 실현이란 과정에 상응되는 것이다. ● 여러 겹을 발라올린 한지의 표면은 일반적인 종이로서의 수용성의 기능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태어난다. 미세한 융기로 덮이는 표면은 일종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위에 이루어질 어떤 행위를 수용할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상의 체계가 아닌 수묵과 한지의 만남이란 구조화는 단순한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일정한 행위의 관계라기보다 하나의 실존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그 독자의 조형 전개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이는 일반적 회화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 완결되지 않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명체이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만듦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으로서 말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풍경이나 정물이 일반적인 보는 행위로서 설명을 넘어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가 내세운 《水墨, 쓰고 그리다》란 표제는 단순한 서화동원(書畵同源)의 형식의 환원을 기도한 것이 아니다. 바탕(지지체)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단순한 표상의 체계가 아니다.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행위와 물성의 만남이란 극적인 과정을 거처 그 고유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명을 앞질러 오는 존재감이다.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경향성이라 말할 수 있다. ● 화면은 더없이 내밀하다. 담묵에 의해 시술되는 표면은 부드럽고 아늑한 공간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안으로 가라앉으면서 한편으론 은밀히 밖으로 솟아오르는 경향으로 인해 더욱 구조적인 차원을 만든다. 담묵과 더불어 감물이나 옻물로 이루어지는 표면은 일종의 포화상태를 만들면서 표면에 풍부한 표정을 일구어낸다. 이 같은 복합적인 화면조성은 깊이로서의 구조에 상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잠식된다는 것은 화면의 구조적인 일체화를 높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속된 것을 가라앉히는 정신의 순화와도 대응된다. ● 또한 화면을 수묵으로 다독이는 작업은 화면의 숙성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 숙성의 독특한 방법은 화면에서의 작업이란 한계를 벗어나 정신의 순화 과정에도 비유된다. 동양인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그림과 글씨를 통해 부단히 정신의 경지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의도가 없다면 그것은 한갓 속된 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점이야말로 동양의 예술이 갖는 독특한 내면이다. 강미선의 작업은 이를 애초에 의식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추구한 방법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근원에 가 닿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부분 / 금호미술관 B1

그가 다루는 소재는 비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생활 주변에 산재하는 대상들 예컨대 생활기물로서 접시, 대접, 잔, 병 등의 식기류와 과일, 전통적인 가옥의 구조, 기와지붕, 돌담, 그리고 화초 등 하나같이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외에 문인화의 소재나 산수화는 동양화의 기본적인 화제들이다. 다소 특이하다면 최근에 다루기 시작한 불상과 불경(佛經) 등이다. 이 같은 소재의 범주만 본다면 대단히 평범한 것들로 오늘날 일반적인 회화의 소재로서는 결코 선호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특별한 소재, 기이한 소재의 발굴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풍토에서 본다면 시대 감각이 뒤처진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통해 등장하는 이들 소재는 익히 알려진 것임에도 전혀 다른 존재로서 다가온다. 평범한 것들이 평범하지 않고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작가의 소재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한편 그 특유의 구조적인 화면형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독특한 구조의 형성에 투입됨으로써 대상들은 일상적인 관념이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 사물들은 조심스럽게 아니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서서히 걷히는 운무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과 같이 기다림을 내장하고 있다. 아니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그의 화면을 보면서 문득 청대(靑代)의 화가 대희(戴熙)의 화론에 언급된 "수정월잠(水定月湛)을 떠올린다. 물이 고요하면 달이 잠긴다는 것인데 그가 그리는 대상들이 한결같이 고요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화면 전체로 침투된 담묵의 포화상태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현상이라고나 할까.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상은 현실의 소재이면서 현실을 부단히 초극하고 있다. 통상적인 시각의 차원을 벗어나 또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 동양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물속에 잠겨있는 달을 더 탐닉한다. 고답적인 심미안이라고나 할까. 하늘에 뜬 달은 현실이지만 물속에 잠긴 달은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심경을 반영해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뜬 달보다 더욱 고요함을 지닌 물속의 달을 닮으려는 염원으로서 말이다. ● 또 하나 그의 화면이 지니는 특이한 구조는 전체이면서 하나인 세계, 하나이면서 전체인 세계를 지향하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은 그의 화면형성이 보여주는 구조적인 특성에 상응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작은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수없이 이어지면서 일종의 천불상을 연상시키는데 작은 단위의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반복되면서 거대한 화면을 만든다. 불상은 각기 하나하나 독립적이지만 수없이 반복되면서 전체가 된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수많은 것일 수도 있다. 불교의 세계에서 말하는 존재의 현전, 즉 하나는 수많은 전체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하나로 환원되는 세계로서 말이다. ● 산수의 소재나 화훼의 그림들도 개별로 이루어지면서 병풍 형식이나 책가도와 같은 연결구조로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연작개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하나하나 떼어내어도 무방하고 연결되어 거대한 화폭으로 구성되어도 어색함이 없다. 이 같은 구조는 연작을 한 화면으로 구조화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역시 그가 지향하는 조형의 차원이 개별로서의 완성보다 전체를 향한 경향성의 한 단면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전체 속에서 개별이 의미가 있고 개별을 통한 전체에 이르려는 염원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세계 그가 꿈꾸는 세계의 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본다는 일반적인 시방식이 아닌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된다. ■ 오광수

 

Vol.20211123f |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

오광수 미술칼럼

장리석, 그늘의 노인, 1958, 캔버스에 유채, 158×11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장리석, 백수의 화필’전(3.4 - 5.11)이 열렸다. 백수란 99세를 가리킨다.(100세 이상을 상수라 한다). 놀라운 일이다. 백세에 이르기 까지 화필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의 경우에 머물지 않고 미술계의 경사라 하겠다. 이번 전시가 회고전으로서의 성격을 띠는만큼 그의 생애에 걸친 화력이 펼쳐지고 있다. 1951년 피난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이 넘는 세월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동란 중 그린 적지 않은 스케치들이다. 신산하고 처연했던 한 시대의 정황이 생생하게 기록된 이들 현장 스케치는 새삼스러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난민들이 화물차의 지붕에까지 빽빽하게 실려있는 모습은 그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하다. 엄청난 역사적 사건임에도 의외로 이를 기록한 그림은 적은 편이다. 너무 끔찍해서 멀리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럴 정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종군화가 단원들에 의한 단편적인 스케치들이 남아있을 뿐 이를 한편의 역사적 드라마로 구현한 작품은 없다. 그런 점에서 장리석 화백의 현장 스케치는 대단히 귀중한 기록화가 아닐 수 없다.

장리석 화백은 스스로 강조하고 있듯이 서민의 애환을 그리는데 집중한다고 했는데 그러한 관심이 이번 회고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958년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그늘의 노인>을 비롯해 <복덕방 노인>, <조롱과 노인> 등 일련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다룬 작품들은 한 시대의 정감을 리얼하게 표상해주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시대의 물결에 하릴없이 휩쓸려가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애잔한 연민의 가정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서민의 애환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그의 시선은 제주라는 특정한 지역의 풍물에 쏠리면서 더욱 무르익어가는 정감을 품어낸다. 제주의 풍물은 제주 출신 화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가 하면 제주를 찾아들었던 외지인들에 의해 다루어진 두 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변시지를 중심으로 김택화, 권영우, 강요배 등이 전자를 대표한다고 하면, 이중섭, 장리석, 이왈종 등은 후자를 대표한다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전자의 경우, 이 지역이 갖는 인고의 세월이 주는 회한이 적지 않게 반영되는데 반해 후자는 건강한 풍토와 남국적 정서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장리석의 제주풍물

동란 중 제주로 피난 온 미술가들 가운데는 이중섭, 최영림, 홍종명, 장리석 등 이 있다. 이들 가운데 장리석은 4년 가깝게 여기 머물렀을 뿐 아니라 서울로 이주한 이후에도 수시로 찾아왔다. 그의 작품 가운데 단연 제주의 풍물이 많은 양을 차지하는 요인도 이 같은 인연에 기인함이다. 그는 제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많은 작품을 제주에 기증하였다. 제주도립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담을 특별실을 마련했으며 이번 회고전도 이런 사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주의 자연과 인간의 생활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현장에서 걷잡은 해녀들의 모습이다. 해녀들의 생활상은 제주의 독특한 풍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모습에서 건강한 원시적 아름다움, 순후한 정서를 기록하고 있다는데 의미를 더해 준다. 근대화를 통해 피폐해져가는 도시의 삶을 떠나 멀리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의 정황과 비길 만하다. 해녀라는 모티브 상의 특이함보다 해녀를 통해 제주만이 지닌 건강한 삶의 모습, 때묻지 않은 원생의 풋풋한 정감을 다루려는 데서 그의 작화의 내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모델로서의 누드가 아닌 생에 대한 애착이 터질 것 같은 육체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다루려는 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녀들의 모습이 단순한 호기심의 모델이 아니라 독특한 실존의 화신으로 다가오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이번 시즌에 주목할 전시로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2013.10.29-3.3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박수근전’(1.17-3.16, 가나인사아트센터),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2.5-3.9,갤러리현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부터 열린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현재(2월 12일 자)로 23만명이란 관중을 동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열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박수근전’,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에도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반세기 전에 창작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획전들로 어떤 점으로 보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은 20년대에서 70년에 걸친 반세기에 창작된 회화며 ‘박수근전’도 50년대, 6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30년을 상회하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세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두고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의 근, 현대란 시간의 개념이 보편적 기준에서 다소 벗어난 압축된 것이고 보면 더욱 현대의 고전이란 에피세트가 결코 과장은 아니리라 본다.


고전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전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전범은 하나의 모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야 할 준거틀, 가치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근, 현대미술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느냐는 역사적 맥락을 추구할 수 있으며 종내에는 우리미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미학적 탐구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이들 전시에 많은 관중이 밀려온다는 것은 단순한 흥미 본위의 차원을 떠나 우리 것에 대한 목마름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통해서 외국의 고전이나 명화들을 대할 기회는 많아졌으며 흥행 위주의 해외명작전들이 수없이 많이 열린 반면 막상 우리미술에 대한 보다 집중된 전시가 없었다는 데 대한 반사작용이라고나 할까. 외국 것에 대해 식상할 즈음에 나타난 우리 것에 대한 보상심리의 단면이라고나 할까. 국립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에서 가끔 열린 우리 고전에 대한 기획전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점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 Oil on canvas, 65×53cm



우리의 아름다움 다시 찾기

우리 것이 좋다,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국수적 발상이 아니라 우리 것이 결코 외국 것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각현상, 우리 독특한 아름다움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야 말로 감상적, 편파적 국수풍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우리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 남 것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보인다는 데서 진정한 미술감상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우리의 근, 현대미술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획이다. 시대별 경향의 추이, 방법의 다양한 모색, 그 속에서 가꾸어진 개별성을 점검해볼 수 있으려면 이만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모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박수근전’은 박수근의 전체 유화작품이 대개 300점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추론되고 있는데 이 전시에 유화작품이 100점이 나왔다는 것은 그의 전체 작품의 약 3분의 1이 출품되었다는 계산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각기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이 한자리에 대량으로 진열되었을 때는 또 다른 감동의 열기로 다가온다. 개별에서 못 느끼는 무게라고나 할까. 파워라고나 할까. 우렁찬 합창을 듣는 기분이다. 그래서 한자리에 대량의 작품들이 진열되는 회고전이 유달리 감동을 자아내는 이유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5월에 열리게 될 박수근 탄생 100주기 기념전(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인간적인 면모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하게 한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은 종이란 매체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만을 모았다는 데서 또 다른 기획의 묘미를 발견한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 종이는 각별한 데가 있다. 종이로 에워싸인 공간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에게 종이란 매체는 단순한 지지체에서 벗어난 정서로서의 그 엇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인과 육화된 어떤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조형의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데서 이 전시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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