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임태종씨가 '인사동 이야기' 사진과 ‘어머니의 땅’ 사진을 여러 점 사 주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한 점도 아니고 네 점이나 사겠다기에, 고마움에 앞서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해준 사진을 프린트하여 액자까지 만들어두었으나 전할 방법이 마땅찮아,

구정연휴가 시작되는 1월30일 강남 사무실에 갖다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날이 노는 날이지만 사무실 나갈 일이 있어 같이 차 한잔 하자고 했다.

 

그동안 임태종씨 사무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선릉 옆의 그 길은 오래전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 자주 들렸던 눈 익은 곳이었다.

마중 나온 임태종씨 따라 간 사무실은 쾌적하고 아늑했다.

흡연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무실엔 넓직한 테라스가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능이 한 눈에 쏙 들어왔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책장 위에 돈통을 들고있는 목각인형도 눈길을 끌었다.

한때는 이곳에 친구들 불러 모아 바베큐 파티도 종종 열었으나, 일이 지긋지긋해 그만두었단다.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찮지만 이튿날 청소하는 직원들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사실, 초대받는 입장에서야 좋을지 모르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정선 만지산에서 서낭당 축제를 열어보아 그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안다.

돌이켜 생각하니, 없는 주머니 털어가며 누굴 위해 그토록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르겠다.

국 쏟고 뭐 데인다는 말처럼, 돈잃고 고생만 한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축제의 의도와 상관없이, 왜 돈들여가며 쓸데없는 짓을 벌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그리고 정선 집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린 옆집에서는 땅을 다시 측량했다며

남의 집터에 걸쳐 자기네 집만 지어 올렸다.

보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니 어무래도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다.

이젠 이웃에 대한 정이 완전히 사라져, 법적 소송을 해서라도 기어히 손해배상을 받아 낼 것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으나, 임태종씨 덕에 선능 사무실 구경한 번 잘 했다.

전해 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어디에 걸릴지는 모르지만,

영감을 일깨우는 작품적 기능에 앞서 복 짓는 부적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것으로 믿는다.

부디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작가의 철칙은 장터에서 절대 카메라를 안 꺼내고, 항상 반나절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사귀는 데 공들인다는 것이다. 사투리를 써서 외지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그 비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 배우러 온 아랫사람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가니 할머니들은 하나만 물어봐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고 했다.

 

 

오일장 600곳 농촌여성의 삶 사진에 담다

어르신 우울증·치매 예방하는 장터의 순기능

고령사회, 귀농귀촌인과 농촌공동체 되살려야

 

정영신

농촌 할머니 희로애락 카메라에 담다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영신 작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많은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토속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600여 개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카메라가방에 사탕과 담배만 넣어 다녔어요. 사탕과 담배만 있으면 장터 사람 모두와 친구가 됐죠. 장터에서 무슨 물건 팔고, 어디 구역 사람이 담배를 좋아하는지 사탕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정영신씨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말을 걸고, 점심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농장과 집에 놀러가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요. 대화해보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식자랑, 동네자랑을 해주시죠.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말속에는 할머니들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장터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나중에서야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니 정영신씨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자연스럽다. 지난 9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의 기록을 모아 ‘어머니의 땅’ 사진전을 개최하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그러면서 정영신씨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여보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문학을 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와 대화해본 결과, 책보다 더 많은 것을 할머니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도 자신을 아는 척 하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다가와 관심 가져주면 참 좋아하더라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장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

1980년대 장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구경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장 중에 장인 난장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루 팔아서 재밌을 양 만큼만,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보따리에 갖고 온답니다. 욕심 없이 장에 오니까 한 번에 많이 파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그리워 장에 나왔는데 좌판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앉아 있냐고 그래요. 뭐라도 펴놔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당신도 사람 구경하지 않겠냐 하십니다.”

할머니들은 집에만 있으면 다른 생각 들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면 병나겠어서 적은 돈을 벌어도 장터에서 물건 파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장터는 농촌여성들이 왕이에요. 남자들은 차 안에만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집에만 있으면 남편 군소리만 듣는데, 장터에 나오면 내 세상이 되니까요.”

'어머니의 땅'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농촌여성 이름 알려 성평등 의식 높여야

할머니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 마인드도 남성에 비해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손님들에게는 남성보다는 아직 여성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여성이고,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여성인데 어째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공평하지 않은지 정영신씨는 의문을 품었다.

농촌 현실이 바뀌려면 정영신씨는 농사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여성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신 있게 판매할 때 구매하는 손님도 즐겁다고 했다.

“장터에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판매하는 자매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져오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나더라고요. 도토리묵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었다 말하고 끝이었어요. 맛이 좋으니까 인기리에 팔리는 건데, 두 사람의 이름 붙여서 도토리묵으로 팔면 손님들도 호칭 생겨서 더 애정을 가질 거라고 말했어요. 농사에 가치를 높이려면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농산물 팔 때도 지역명, 농장이름 붙이지 말고, 꼭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더 즐겁게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방법을 소개했다.

귀농귀촌인과 소통해 농촌 고령화 극복해야

정영신씨는 앞으로는 과학이 농업에 접목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최고인 세상이 될 거라고 봤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더 여유 있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촌으로 옵니다. 귀농인들은 농사지으면서도 사람들 불러서 팜파티 열고 세미나 갖고 시낭송을 해요. 기존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바깥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농촌의 변화를 버거워 해요. 여러 이유가 갈등이 돼 귀농귀촌인을 배척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농산물을 가꾸는 농업인들이 왜 행복하다는 말 대신 농사가 힘들고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농업인은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농업인의 목소리가 장터에서 자주 들려온다고 했다.

“옛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농장에 가서 일손 보태며 두레로, 품앗이로 농사지으면서 시름을 잊었죠. 요즘은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짓고 혼자 논다고 말하세요. 농촌이 단절돼 갈수록 남편만 찾고, 자녀들에게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 환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영신씨는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전통시장이 위기라고 했다. 읍면에서 열리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우리 죽으면 장도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대형마트 확산에 전통시장 지키려면…

농촌의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계속 이어져야한다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만 이용해서 장터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마트가 생겨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못한다고 하소연하세요.”

1만 원 어치만 사도 배송을 해주는데 할머니들은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되나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를 장터는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0원짜리 머리빗을 사도 장터에 단골집만 찾는 손님을 맞이할 때, 하나를 사더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장을 안 나오겠냐며 말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여도 장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정이 흐르는 장소로, 물건만 바뀔 뿐 장터를 이용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농촌여성신문 / 민동주기자

 

'코리안 타임스' '어머니의 땅' 인터뷰 기사

[출처] 인터뷰 – 정영신 사진작가 “장터는 사람과 정이 흐르는 삶의 현장”|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2021.10.5

보름 동안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연이은 술 폭탄에도 살아남은 걸 보니 목숨이 질기긴 질기다.

전시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영신씨 전시에 빌붙어 나팔 분 일이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언제 그분들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겠는가?

반가운 분들과 지난날을 돌이켜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몸이 마음 같지 않았다.

술에 절어 뵙지 못한 분도 많았고, 매일 올리던 일기도 쓰지 못했다.

카메라에 남은 이미지를 살피며 며칠간의 기억을 더듬었는데,

어떤 분은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블로그를 뒤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취중의 실수가 생각나 쩔쩔매기도 했다.

모든 실수를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31일은 좀 늦게 나갔더니,

태국에서 온 고영준씨가 다녀가며 축의금을 맡겨 두었더라.

전화번호를 몰라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무슨 급한 일이 있었을까?

그날은 노인자, 이대훈씨 내외를 비롯하여 추대희, 김지영, 송춘애, 손민광,

송주원, 이동환, 김미란, 이경지, 유근오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지만,

술자리에 퍼져 앉아 사진을 못 남긴 분이 많았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노숙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불량한 사람으로 구제할 수 없다는 편견 말이다.

물론, 일하는 것보다 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러 나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질고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 지병이 있어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다.

엄밀히 말해 알콜 중독자도 환자에 다름아니다.

병원에 강제수용하더라도 병부터 고쳐주고 일을 하게 하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기초생활수급 혜택도 주어야 한다.

 

그들은 돈이 좌우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다.

부도덕한 몇몇 노숙인 때문에 선한 사람들까지 함께 몰 수는 없는 것이다.

악한 것으로 친다면 권력 가진 정치인이나 재벌에 비길 수 있겠나?

 

그다음 날인 10월 2일은 일찍부터 함평 출신의 사진가들이 모였다.

정영신, 이 민, 김기수, 박상문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있으니 관악주민 사진반을 지도하는 양시영씨와 김진옥 반이정, 전영순씨가 오셨다.

몇 가지 사진에 관한 질문에 답 했는데, 흡족한 답을 하지 못한것 같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팀장 전영주씨와 오셨더라.

돈의문에서 정영신씨 ‘한국의 장터’ 전시를 제안해 와 다음 달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뒤이어 박흥순씨가 산에서 주웠다는 밤을 삶아 와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정복수, 나떠구, 박영선, 류국헌, 박종규, 최유진, 김혜련씨도 오셨다.

 

오후에는 20여 년 만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삼성카메라클럽’이라는 조직에서 일할 때 함께 했던 신상덕씨였다.

최근 페친으로 연결되어 찾아왔는데, 처음엔 마스크를 쓰고 있어 몰라보았다.

지난 이야기에 모처럼 웃음꽃을 피웠다.

 

밤늦게는 정복수, 박건씨와 술을 마시다 우이동 박건씨 집으로 쳐들어갔다.

 

덕분에 혼자 살아가는 공산품 예술공장도 볼 수 있었고.

사랑한 어머니를 비롯한 살아 온 지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지난 개천절에는 인사동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정신 나간 놈도 있었다.

 

‘나무화랑’에는 정영신씨와 동향인 심재상, 김문수씨를 비롯하여

김준권, 이태호, 김곤선, 양정애, 오현주, 김순남,

김일하, 김밝은씨 등 많은 분이 찾아주셨다.

 

‘유목민’에는 지리산에 들어간 임헌갑씨가 찾아왔다.

 

전시 기획자인 김곤선씨가 첫 술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나, 카메라가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사진을 찍지 못해 안절부절했으나, 차 안에 두고 찾은 것이다.

김곤선씨로 부터 정암사 전시프로젝트에 관한 근황을 들었다.

 

안해룡씨를 비롯하여 유병용, 박찬호, 임동은, 이휘경,

안지현, 김문기씨 등 반가운 손님이 줄줄이 찾아왔다.

 

페북에서만 보아 온 소녀 같은 임동은씨 부인의 실제 모습도 보았다.

보기드문 잉꼬부부였다.

 

어둠이 몰리기 시작하니 장경호, 노광래, 헨리윤, 배성일, 우문명,

최석태, 황경애, 현기영, 이미례, 신상철 씨 등 많은 분이 오셨으나,

너무 취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뒷자리에 누워 차에 실려 갔다.

 

전시를 철수하는 마지막 날은 술이 덜 깨 그런지 온종일 비실거렸다.

전시장은 조명숙, 김태인, 이만주씨가 다녀갔더라.

정영신씨 전시를 취재하러 오신 김문경, 운현선씨와

‘툇마루’에서 마신 해장술 몇 잔에 전날로 되 돌아간 것이다.

 

김문경씨와 마시던 술자리는 ‘유목민‘으로 이어졌는데,

지나가던 김발렌티노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초장부터 술이 취해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닌지라 그 뒤로는 찍은 사진조차 없었다.

아무리 취해도 카메라는 놓지 않는데, 맛이 가도 완전히 간 것 같았다.

 

아산에서 김선우, 양햇살, 김온 군이 찾아와 전시를 철수했으나,

전시장을 오르내리긴 했으나 사진 찍는 일조차 잊었다.

다들 끝내고 식사하러 갔지만, 차에 들어가 뻗어버렸다.

일이 끝나 긴장감이 풀리니 갑자기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아무튼 여러분의 격려와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전시도 잘 마쳤다.

찾아주신 모든 분에게 거듭 감사 인사 드린다.

항상 좋은 일 많으시고 편안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9

보름 동안의 전시를 언제 끝낼지 걱정했으나,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골목 담벼락에 내건 ‘노숙인, 길에서 살다’ 전시 현수막은

비와 ‘유목민’ 취객들이 흘린 막걸리로 노숙인 옷처럼 때가 묻고 얼룩져 버렸다.

 

'유목민' 골목 전시가 끝나면 당사자들도 볼 수 있는 서울역광장으로 옮겨 가야 할텐데,

세탁해도 탈색이 안 될지 모르겠다.

 

그대로 보관한다면 간접 고난의 잔재까지 남는 의미야 있겠지만,

그 현수막은 전시가 끝나면 당사자에게 돌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찍힌 분들에게 사진을 뽑아 주긴 했으나 대개 구겨져 버렸거나 잊어버렸단다.

사진 한 장 보관할 곳 없는 그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손수건처럼

주머니에 접어 넣을 수 있도록 현수막 사진을 잘라 주기로 한 것이다.

 

전시가 시작된 후 매일 같이 전시장 방문한 분들 모습을 기록했으나

술독에 빠져 사진을 정리해 올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페친 분들은 새로 만든 Naver의 ‘인사동 이야기‘ 블로그를 통해 그간의 소식을 알릴 수 있었으나,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가 Daum의 갑질로 정지된 걸 모르는 많은 분들은

오랫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아 신상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안부를 물어오는 분까지 있었다.

 

어쨌든 그간의 소식을 올리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쓰린 속을 부여안고

26일과 27일 이틀간의 사진이나마 정리해 올림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26일은 ‘만종’을 기록하는 사진가 노은향, 이석준, 지은숙, 민성진씨를 비롯하여

이완교, 이정환, 성유나, 심보겸, 김헌수, 권해진, 최치권, 한선영씨등 많은 사진가들이 다녀갔으나

인사동을 돌아다니느라 뵙지 못한 분도 여럿 있었다.

 

연출가 기국서씨와 배우 정재진, 이명희씨 등 연극인들은 일찍부터 ‘유목민’ 골목을 장악했고,

발렌티노김, 한상진, 이태호, 최석태, 정비파, 박상희, 김도수, 변성진, 김기수, 박찬종, 편근희,

장의균씨등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다. 그리고 가족으로는 조창호, 정주영, 김소현이 다녀갔다.

 

27일 문 닫기 직전에는 김태진씨와 아들 햇님이가 찾아왔다.

‘메밀란’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날은 손녀 주려고 처음으로 인사동에서 풍선 피리와 반지 사탕도 샀다.

장난감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손녀 하랑이 재롱에 누적된 피로가 눈녹듯 녹아버리네.

 

자리를 만들어 준 '진인진출판사'대표 김태진씨에게 그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7

사진 찍는 일보다 사진을 떠벌리는 일이 더 힘들다.

두 번 다시 전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어렵사리 책 만들어 준 출판사를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전시를 해야 책이라도 한 권 팔 것 아니겠는가?

 

며칠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이 열리는 인사동 ‘나무아트’와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 전을 하는 ‘유목민’ 담벼락을 오가느라 곤죽이 되었다.

허리 협착증이 도져 4층까지 오르내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 전시가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빌빌거려 걱정이 태산 같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술집 앞에 전을 펼쳐 놓았으니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못 본 척하겠는가?

전시가 시작된 첫날부터 고주망태가 되었으니 그다음 날은 보나 마나다.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쩌랴!

 

골목 전시장엔 퍼져 앉기만 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난, 알콜 중독자는 아니라고 큰소리치지만

남이 마시는 술을 못 본채하지 못하니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장은 좋아도 그다음 날은 더 죽어나지만 어짜겠는가?

 

지난 24일도 서둘러 나갔으나 손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 하신 신신자씨는 ‘나무 아트’에서 기다리고,

이강산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다들 멀리서 오신 분들인데,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은 이강산씨를 비롯하여 신신자, 권 홍, 김이하,

장우원, 이영숙, 박옥수, 한공주, 안현수, 정성진, 오진향,

음현정, 이현정, 정재원, 임춘희씨가 찾아 주셨다.

양쪽을 오가느라 길이 엇갈려 이민씨와 김창주씨는 보지도 못했다.

 

다들 마스크를 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은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은 적어 놓은 방명록을 보고 뒤늦게 결례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둘째 날은 첫 날 마신 후유증으로 아예 골목 전시장엔 앉지를 않았다.

김이하씨 일행은 일찍부터 ‘유목민’에 자리 잡은 걸 알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앉기만 하면 술잔에 손이 갈 것이고, 한 잔만 마셔도 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잘 참아냈으나, 다음 날은 온종일 마셔야 했다.

토요일은 ‘노숙인, 길에서 살다’ 사인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이숲’출판사 김문영대표와 이나무씨가 책을 가져오셨다.

 

그날은 양산에서 올라 온 공윤희씨를 비롯하여 박찬원, 강경구, 김남진, 김영호,

양재문, 노광래, 김명성, 이 성, 오현경, 이한복, 나매례, 이재민, 유순영, 온새미,

정세학, 김상배, 이오연, 홍현구, 박상문, 홍유경씨 등 많은 분이 찾아 주셨고,

부산에서 상경한 정남준씨를 비롯하여 손은영, 최인기, 김수길, 이봉희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전강호씨와 시작한 술자리는 사인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이어졌으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찝쩍거려 실수라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는 김상현씨 초대 파티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일곱 시 무렵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이태원 ‘뮤아트’로 찾아갔다.

재즈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힌 ‘뮤아트’에는 김상현, 임성익, 하양수씨가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어회와 전어회를 준비해 두었더라.

너무 과분한 접대에 미안했으나 어쩌겠는가?

 

취기에 고마운 마음도 감추고 축하 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초빙한 연주팀은 처음 본 젊은이었다.

보컬에 유혜린, 드럼에 김소희, 콘트라베이스에 김민욱, 피아노에 박종현씨로,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잘하더라.

 

잘 모르는 곡이지만, 유혜린씨의 음색에 깜짝 놀란 것이다.

앳된 소녀의 목에서 어쩌면 저렇게 농익은 소리가 나는지...

마치 수십 년 동안 알콜과 담배에 절은 베테랑 재즈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아무튼, 축하의 자리를 만들어 준 김상현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제발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라도 목숨을 보존하여 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2021.9,23

지난 23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도 ‘유목민’ 담벼락에 내 걸어, 옛말처럼 떡 본 김에 제사지낸 것이다.

현수막전은 서울역이나 동자동에서 해야하지만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전시였으나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부터 들렸는데,

환자들이 많은데다 물리치료까지 받느라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핸드폰을 두고 와 정영신씨와 연락을 할 수 없었는데, 끝나고 가니 떠나고 없었다.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아산 공유공간 ‘마인’ 김선우씨와 양햇살, 김온 군이 와 있었다.

사진가 전제훈씨는 일찍부터 왔으나 문이 잠겨 한 참을 기다렸단다.

마침 사진집을 가져온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와 계셨다.

 

아산 팀의 도움을 받아 ‘유목민‘ 담벼락에 현수막부터 설치했다.

아침 식사를 못해 전제훈씨와 '툇마루'에 갔다 오니, 그때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 보러 오신 분들이 현수막 전에도 들려 ‘유목민’ 골목은 일찍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즈음이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신용, 조해인, 김이하, 김명성, 김상현, 함창호, 조준영, 노광래

김문호, 장경호, 김수길, 김발렌티노, 최인기, 김종준, 윤 관, 이택근, 강기식, 조경석, 이두엽, 한상진,

김 구, 나종희, 노영미, 이상근, 이광군, 임경일, 최명철, 김효성, 서인형, 김성은, 김재홍,

이인섭, 김진하, 이창수, 이한복, 김영진, 곽명우씨 등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다.

 

난처하게도 ‘뮤아트’ 김상현, 김병수씨 일행은 악기를 가져 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영신씨 전시를 축하 한다지만 옆에 노숙인 사진이 걸려 있는데...

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내세워 잔치 벌이는 꼴이 된 셈이다.

흥겨운 음악이 아니라 애잔한 슬픔이 깔린 음율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신경이 곤두서 그런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끝난 후 나온 술 값이 한 달 생활비가 넘었다.

허구한 날 얻어먹기만 했으니 이참에 술 한 잔 대접한 것이다.

그나저나 술집 앞에서 열리는 전시라 끝나는 날까지 살아 남을지 모르겠다.

 

멀리서 와 주신 전제훈, 함창호씨를 비롯해 온 종일 일을 도와 준 아산 '마인'팀,

그리고 전시를 축하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선우촬영

 

 

 

2021,9,22

지난 18일 오후는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전시 디피하는 날이었다.

 

사진 액자는 진즉 ‘나무아트’ 전시장에 올려놓은 터라 인사동 거리부터 돌아보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따라 거리공연에 나선 뮤지션이 세 명이나 되었다.

다양한 음악으로 거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유독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러시아 소녀를 경찰관이 제지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주변에 있는 가게 주인이 신고를 했단다.

 

"에라이~ 돈밖에 모르는 썩을 놈의 인간들..."

바이얼린 연주가 무슨 영업 방해가 되며,

비록 방해가 된다 해도 어떻게 자식 같은 외국 소녀에게 상처를 주는가?

 

연주하던 소녀가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걸 보고서야 ‘나무아트’에 올라가니,

이미 김진하관장이 액자를 배치하고 있었다.

전문가가 하는 일에 나설 수 없어 포장 해체하는 정도만 도왔다.

 

마침 거리미술가로 알려진 이태호 교수가 오셨다.

고 김수영시인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판화 두 점을 출품하기로 했는데,

어디서 주최하는 행사인지 궁금해 했다.

 

정영신씨가 기획자 소개도 할 겸, 그 일을 추진하는 김발렌티노를 불렀는데,

김수영시인의 대형 시비도 만들어 둔 게 있다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그런데, 김진하관장께서 토론토 Tai Kim씨가 보내왔다는 예쁜 엽서를 전해 주었다.

페친으로서 정선에 불난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행운의 크로바까지 붙여 보내 와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김진하관장의 전시 디피 솜씨는 일사불란했다.

그 많은 액자를 짜임새 있게 배치했는데,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한 후 이태호 선생과 함께 ‘툇마루’로 식사하러 갔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을 설치할 ‘유목민’ 골목에도 잠시 들렸다.

골목 테이블에는 이인섭, 유근오, 노현덕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유목민’ 안 쪽에는 김수길씨도 있었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나 술 한 잔 나누지 못하니 무슨 재미랴.

전시 기간 내내 짐 때문에 차를 끌고 다녀야 할 텐데,

참아야 할 술 고문은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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