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권이 방석 밑에 깔고 앉은 미군위안부 문제가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격동한국50년’ 사진집의

기지촌 사진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나 역시 양공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늘 앞섰으나, 그 사진들을 보며 뒤늦게 깨우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게 된 것이다.

2개월 전 “종군위안부, 양공주 잔혹사”란 글과 사진을 블로그와 페북에 올렸는데, 그 접속률이 엄청났다.

어떤 분은 잘못된 고증을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그 걸 계기로 미군위안부 문제가 서서히 들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신매매 당해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는 기지촌여성 김정자씨의 증언이 “한겨레신문” 커버스토리로

실리는 등, 온 세상이 그 문제로 시끄럽다.

이제 딱 걸린 것이다.
“갱제를 위해서라마, 지 처자식부터 위안부로 보내야 할 것 아이가?
그 놈의 돈 때문에 인간들 망가지는 걸 보지도 않았나?“
그래서 돈 보다 사람이 먼저 서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서서 국정화 문제로 그렇게 지랄을 떤 것도 이제야 이해 할 것 같았다.
쪽바리 한데 배웠는지 모르지만, 이제 진실을 감출 수는 없는 세상이다.

이런 사진부터 국정교과서에 올려야 한다.

“등신아! 잘 못한 건 까놓고 비는 게 상책이지,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깔아 뭉갤라 카노.”
넌 자격 없다 내려 온나. 더 이상 국민들 쪽팔리게 하지 말고...



-지난 9월의 사진과 글을 다시 올립니다-


" 종군위안부, 양공주 잔혹사"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치욕의 역사다.

그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새삼 미군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동안 양공주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 한 참 잘 못되어서다.

그들을 비하하는 양갈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시절에는 허영에 들떠 양놈이나 찾아 나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이나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같은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한국격동50사진전에 나온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며,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지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게 되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양공주는 그래도 점잖은 말이고, 양갈보,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쥬스 걸 등 별의 별 호칭이 다 있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유곽이었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도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단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

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사진 : 1965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격동한국50사진집에서 옮겼다.

: 조문호



    























    

























































정선 온지 나흘 만에 그 동안 지킨 맹세, 개 맹세가 되어버렸다.

정선에서는 아날로그로 산다며 컴퓨터까지 버렸으나, 인터넷에 접선하러 읍내에 나간 것이다.

끝물의 옥수수 맛있을 때 보내자는 구실을 댓지만, 우체국 인터넷을 사용할 생각이 앞섰다.

 

내가 운영해 온  인사동사람들블로그부터 접속했다.

매일 일기 쓰듯 자질구레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올려 온 터라, 안달이 난 것이다.

블로그를 확인해 보았더니 사흘간의 접속 율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진원지는 폐북에 링크시켜 놓은 또 다른 종군위안부, 양공주에 대하여...”란 미군위안부 이야기였다.

그 이전에 올린 부역자 학살사진도 접속률은 높았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21일 하루동안 5,000여명이 접속하고 사흘 만에 85명 공유에 9,000명 넘게 본 것이다.

 

어떤 분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격이 다르다는 댓글도 나왔다.

물론 강제로 끌고 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할 수 없으나, 전쟁이 낳은 비극이라 차례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어떤 분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고증도 주셨다.

아마 미군위안부 문제가 너무 가려져,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우체국 들리기 전에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전시하는 김정숙씨 그림전에도 들렸다.

정선의 아름다운 비경들이 다양한 형식을 빌어 화폭에 담겨있었다.

내가 사는 귤암리 작가라 애착을 가졌으나, 전시장엔 작가도 관객도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전시문화에 대한 지역적 한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선문화원'과 작가들이 머리를 맞대 묘안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일전에는 터미널 입구 도로변에 전시 내용을 알릴 수 있는 세로형 광고 앵글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으나, 아직 감감소식이다모두들 적극적인 대처가 없어 아쉽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 한가롭게 여가를 즐길 때는 아닌 것 같다.

이틀 동안 대목장도 보고 사진도 찍을 겸, 아내와 촬영 길에 나서기로 했다.

어느 시골장터에 가도 대목장은 사람들이 붐벼 활기차기 때문이다.

 

 

사진,글 / 조문호


아내가 달밤에 체조한다.


빨리 창수네 집에 가야는데, 아내는 메시지 보내느라 정신이 빠져 있다.


최종대, 이선녀 내외와 저녁상에 둘러 앉았으나 술병이 보이지 않는다. [정영신사진]


정선 사거리에서 상 파는 장돌뱅이다, 하루에 다섯개 팔면 많이 판다는데, 마진은 얼마나 될까?


정선, 귤암리 화가 김정숙씨가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초대전을 하고있다


전시되는 김정숙씨의 작품 중에서...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치욕의 역사다.

그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새삼 미군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은, 그동안 양공주에 대한 개인적 인식이 한 참 잘 못되어서다.

그들을 비하하는 양갈보라는 말을 들은 어린 시절에는 허영에 들떠 양놈이나 찾아 나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이나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같은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한국격동50사진전에 나온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며,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지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게 되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양공주는 그래도 점잖은 말이고, 양갈보,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쥬스 걸 등 별의 별 호칭이 다 있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유곽이었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도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단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사진 : 1965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격동한국50사진집에서 옮겼다.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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