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신비로운 블럭버스터 판화의 세계 ~ 나무, 그림이 되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 소식은 진즉 들었으나 차일피일하다 늦어버렸다.

 

 

 

개인적으로 편치 않은 일도 있었지만, 강남이라는 장소성이 내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토요일엔 아산의 김선우씨가 화재 피해보상에 따른 자료 구하러 녹번동에 찾아와 정영신씨 집에서 함께 밤을 지냈다.

 

 

 

그 이틀 날 아산 내려가는 김선우씨 차편으로  예술의 전당까지 전시 보러 간 것이다. 사전에 자료들을 보아 전시내용이나 규모는 짐작했으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림이 된 나무’들이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아우르고 있었다. 

 

 

 

입구에는 판화체험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작품의 양적인 면에서 서예박물관 2-3층의 넓은 전시공간조차 대작들을 소화하기 버거워 보였고, 전시된 작품의 아우라가 만만치 않았다. 나무판각이 이토록 섬세하고 에너지가 넘칠 줄 몰랐다.

 

 

 

한국 현대 목판화 대표 작가 18인의 작품 7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는데, 전달하는 메시지나 제작기법의 다양함이 판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 주는 기획전이었다.

 

 

 

알찬 기획과 웅장한 스케일도 놀랍지만 작가마다의 개성과 작품을 돋보이게 한 디스프레이에 이르기까지, 전시감독을 맡은 '나무아트' 김진하씨의 역량을 재확인 할 수 있는 전시였다.

 

 

 

전시는 국토, 사람, 생명으로 섹션을 나누었는데, 1부 ‘국토’에선 우리 삶의 터전을 담아낸 산수들로 시작해 2부 ‘사람’에서는 다양한 인물상의 서사들을 엮어내고, 마지막 3부 ‘생명’에선 자연과 사람 사이 다양한 사유를 형상화한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1부 ‘국토’에서는 우리의 산하를 다양한 양식과 어법으로 담아낸 김준권,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정비파, 홍선웅씨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장 외부 벽면에는 이태호의 ‘기차놀이’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린이 뒤로 폭력을 상징하는 탱크가 버티고 있어, 이번 전시의 다양한 메시지를 감지하게 만들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서명한 장소에 걸려 화제가 된바 있는, 백두대간을 형상화한 김준권씨의 ‘산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산 저 산’은 겹겹이 늘어선 능선이 파도처럼 너울지게 만들어 놓았다. 농도를 달리한 음영들이 영락없는 수묵화였다.

 

 

 

국토 작가인 김억의 ‘남도풍색’은 해남에서 보길도까지의 남도 풍광을 9.6m에 이르는 화폭에 담아냈다. 고기 잡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담아낸 세부 그림도 돋보였다. 한반도 허리 아래와 북쪽 요동까지 답사하며 풍경과 민중의 역사성을 국토 문예학적 입장에서 담아낸 김억의 작품은 구한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방불케 했다.

 

 

 

류연복의 작업은 강인한 민중적 생명력을 전유했다. 그 바탕에 서정적이고도 아련한 서민의 한의 정서가 깔려 있었다. 질기고도 강인함, 유연하고도 고즈넉한 정서가 어울어져 류연복만의 서정성과 서사성을 풀어내고 있었다.

 

 

 

정비파의 6m짜리 대작 ‘백두대간’은 칼칼한 선으로 첩첩한 산줄기를 담아냈다. 이 땅의 초상으로 실사풍경과 관념산수의 조형법을 한 화면에 버무린 국토풍경이었다. 정비파의 대작목판화는 우리 역사를 장엄한 풍경으로 환유한 작품이다.

 

 

 

손기환은 풍경의 개념보다 전통 관념적 미의식의 산수를 차용하였다. 서구적 풍경화에 대한 역설로 강박산수라는 심리적 개념성의 작업이었다. 분단 상황을 은유한 수동적 풍경의 액티브한 칼 맛이 동감을 드러냈다.

 

 

 

홍선웅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과 현장을 현실적 삶과 기억에 보태어 사람과 현장풍경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가시적인 풍경에 인식적으로 접근하여 전통적 목판화의 간단명료한 기법의 칼질과 형태감을 수용한 것이다.

 

 

 

2부 ‘사람’에서는 다양한 인물상의 역사적 서사와 현실적인 생태를 다룬 강경구, 유근택, 이동환, 이윤엽, 이태호, 정원철씨 작품이 전시되었다.

 

 

 

부조로 판각한 목판의 거친 육질감을 드러낸 강경구의 대형 초상 판각이 압권이었다. 자화상을 비롯하여 공재 윤두서, 표암 강세황, ·소정 변관식 초상을 담은 대형 판각은 찍어낸 판화가 아니라 조각도로 칼질 한 나무판이었다. 인물의 정신성을 부각시켜 회화적 표현성을 확장했는데, 동양화 전신사조의 초상미학을 목판에 적용시킨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유근택은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우리 사이에 강이 있어”에 삽화 255점을 판각하여 연재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 내 놓은 인물목판화 63점은 처음 공개한 실험작이었다. 다양한 표현적 시도의 미적 긴장도가 팽팽했다.

 

 

 

이동환은 독립운동가인 장준하와 이회영 일대기를 이야기체 판각으로 형상화한 출판미술을 선보였다. 작가 특유의 물리적 힘에 기반한 칼의 거칠고도 깊은 구사와 대하 서사적 서술성으로 선각자들의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정신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이윤엽 이웃을 등장시킨 소탈한 목판화를 시위현장의 투쟁적 무기로 활용했다. 각종 재개발현장, 용산참사현장, 구럼비 저항현장, 밀양송전탑 반대운동현장, 김진숙의 고공농성현장 등 박해받고 소외받는 투쟁현장을 찾아 다니며 목판화작업으로 함께 싸웠다. 목판화를 통한 동지애와 전투성은 우리이웃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을 구현하는 예술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정원철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정교한 칼 맛의 리놀륨판화로 구현했다. 그리고 이를 대형 설치작업과 여타의 질료로 번안하며 할머니들에 대한 위로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권성을 비판적으로 부각시켰다. 우리 근대사에 대한 반성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성찰을 되새기게 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태호는 선명한 이미지의 목판화 기법으로 김수영, 전태일 등을 찍어 길거리에 붙여 온 스트리트 아트다. 이태호의 독자적인 거리미술 행위는 목판화의 영역을 확대하는 실천적 작업이었다.

 

 

 

이 전시의 핵심은 '사람'에서 나온다. 사람이 소재여서라기 보다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세밀하게  새겨 낸 작가의 깊은 마음에 있다. 노인의 굴곡진 주름이나 심오한 표정을 새긴 붓질 아닌 칼질에는 오랜 기간 세기고 다듬은 작가의 마음이 녹아 있었다.

 

 

 

3부 ‘생명’에서는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발현하는 기운과 생명성을 관조적으로 형상화한 강행복, 김상구, 배남경, 안정민, 유대수, 윤여걸의 작품을 내 걸었다.

 

 

 

강행복의 대형 설치작품은 반복된 패턴이지만 같은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리듬감 있는 선의 조형을 드러낸 한지 목판화 약 600여장을 평면과 입체로 연결해 영성적 분위기로 이끌었다. 어떤 서사적 소재나 서술도 없이 오로지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반복으로 깨달음에 대한 화두를 화엄의 그릇에 담은 것이다.

 

 

 

김상구의 소탈한 판화 문법도 충만한 비움의 세계로 안내한다. 경건한 생명성과 담백한 조형성으로 통일시킨 나무는 대상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자연의 기호였다. 리듬, 운동, 생성의 기표이기도 했다. 꾸미지 않는 자연미학에 가까운 담백한 결과물이다.

 

 

 

사실적 묘사가 매력적인 배남경의 ‘도시산책’이나 ‘기도하는 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새, 옷, 춤, 빛”이라는 문자도 형식의 간결한 한글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보여주었다. 

 

 

 

안정민은 목판에 실리콘 캐스팅을 해 판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현상학적이고도 근원적인 자기 확인이자 실리콘이라는 새로운 재료와 판화문법을 통한 자기 수행법이기도 하다. 

 

 

 

유대수의 생명은 자연과 자아와의 관계성을 수행적 태도로 형상화한 심상풍경이다. 일종의 선적인 요소가 가미된 생명에의 경건한 희구와 깨달음의 과정을 목판화 작업과정으로 상징화했다.

 

 

 

윤여걸사람과 여타 원시적 생명체들이 자연과 뒤엉키며 공존한다. 현실적인 억압이나 제약에 투쟁 할 때 더 빛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존재, 즉 살아남은 생명의 의지에 대한 오마쥬다. 사람, 동물, 여타의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평화로운 어울림에 대한 희구이기도 했다.

 

 

 

‘나무, 그림이 되다’전은 목판화에 대한 통념을 뒤집은 전시였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대형판화들이 즐비하고 제작기법이 다양할 뿐 아니라 목판화의 성격과 기능도 모두 살렸다. 

 

 

 

한국 판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중미술 계열에서 부터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판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였다. 주최 측에서 ‘신비로운 블록버스터 판화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목판은 신라시대 불경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은 역사를 가졌는데, 변방에 밀려나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좋은 전시를 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유치할 생각을 못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마침 ‘예술의 전당’에서 유진규 마임 인생 50년을 결산하는 헌정공연이 열려 함께 일정을 잡았는데, 생각 외로 볼 것이 많아 예정했던 한 시간으로는 부족했다. 김선우, 정영신씨와 마임을 보기로 한 서정란씨를 만나 점심식사부터 했다.

 

 

 

‘나무, 그림이 되다’전은 목판화의 한국적 장르개념과 미감을 확보한 리얼한 민중사였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다. 안보면 후회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수요일, 만봉 스님 전승 불화전이 열리는 ‘아라아트’에서 이인섭선생과 안영희,

전인경, 김용문, 이수영, 강기숙, 안정민, 편근희, 정순겸씨 등 여러 지인들을 만났다.

이수영씨와 함께 찾은 ‘유목민’에서는 풍기에서 소설 쓰는 배평모씨도 만났다.
곤충 찍는 이수영씨는 몇 해 전 가족들과 헤어져, 지금은 남양주에서 혼자 살고 있다.
오랜만에 술 한 잔하는 자리에서 신세타령을 해댔다.

“아! 미치겠어요. 처음엔 잔소리도 안 듣고, 집이 넓어 좋았는데, 
날이 갈수록 집이고 마음이고 황폐해, 도무지 살맛이 안 나요.
인사동에 나와 ”유목민“에 가 봐도 아는 사람은 없고, 활철이는 장사하느라 바빠,
혼자 마셔야하니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냐고 물었더니, 인근에 오천 원짜리 뷔페가 있는데,
거기서 대충 영양보충하고, 자기 전에 막걸리 한 잔 하는 게 전부란다.
이해되었다. 구닥다리들의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업에만 꼽혀 살면 된다고들 하나, 사람 사는 게 그렇지 않다.
누굴 위해 사는데?  명예, 국가, 인류,  웃기는 소리하지마라.
죽으면 끝장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꼴리는 대로,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틈틈이 사람들을 만나 정신적 에너지도 충전시키고, 회포도 풀자.
이 더러운 세상, 술김에 욕이라도 해대니 삼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더라.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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