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종로 삼일대로 일대에 2개동(지상 17층과 12층)을 짓는 공평 15-16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안이 통과되어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서피맛골과 대로 사이의 금강제화 종로점, 클락스 종로점 등 노포 일부는 보존하고, 새 건물 2개동 중 12층은 누구나 이용 가능한 옥상정원으로 조성한다. 준공예정일은 2024년 3월이다.

 

개발지역 조감도

지난 16일 들린 서피맛골 현장에는 건축물을 철거한 후, 유적을 발굴하는 탐사작업이 시작되고있었다. 발굴된 유적은 아직 모르지만, 한국전쟁의 잔재인 대형포탄이 나오기도 했단다. 이제 서피맛골의 아름다운 추억도 아득한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통을 지나는 왕이나 고관대작들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 ’에서 유래되었다. 사극에서나 볼 수 있듯이 "어이 물럿거라. 좆 대감 나가신다!" 라며 앞에서 소리 소리 지르면, 이 거덜 행렬과 맞닥치는 아랫 것들은 말에서 내려 바짝 엎드려야 했다. 백성들도 양반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개같이 엎어져 숨 죽여야 했다. 그러다보니 출근하는 하급관리들은 매번 늦어지기 일쑤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큰길 뒤편에 양반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만든 것이다

이 길이 피맛길로, 요즘으로 치면 '하이패스'나 마찬가지다.

 

서민들이 오가는 이러한 뒷길에 어찌 술집이 빠질 수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음식 파는 밥집이나 대폿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피맛골에서 파는 빈대떡과 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근 관청들이 철거되면서 피맛골에 더 많은 선술집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 중반에 이미 200개 이상의 선술집이 들어섰다는 조선총독부 기록도 남았다는데, 해방 이후에도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정겨운 골목이었다.

 

자료사진

세월에 장사 없다.  이곳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은 2008년부터다.

당시 서울시에서 피맛골이 포함된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대한 정비계획안을 마련하며부터 피맛골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600년간 쌓여온 피맛골의 역사는 급격한 재개발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르메이에르 건물로 대체된 피맛골은 쇼핑몰의 푸드코트처럼 정갈한 상점으로 변신해 특유의 체취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 문화거리와 연결된 '서피맛골'은 살아남았으나, 그나마 재개발 열기에 대부분 문을 닫거나 간신히 연명한 상태였다. 막상 가보면 셔터가 내려졌거나, 전기사용을 해지한다는 고지서들이 나붙어 있었다. 이미 그 때부터 죽은 골목이 된 셈이다.

 

자료사진 / 고갈비 파는 이름없는 집

골목어귀에 을씨년스럽게 나붙은 '서피맛골 주점촌'이란 팻말만 흔적을 남겼다.

120년 전, 3·1 운동을 모의했던 ‘승동교회’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름 없는 주막'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저 '고갈비 파는 집'이라 불리지만, 오랫동안 정든 술집이었다.

처음 갈 때가 40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집은 반세기의 풍상을 겪은 주막이다.

 

그리고 시인 박종수씨에서 수필가 한귀남씨로 이어진 ‘시인통신’에서부터 '열차집‘, '전봇대집' 등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빈대떡과 고갈비를 안주로 밤을 지세고, 아침 일찍 청진동 해장국에서 속 풀던 추억의 장소가 바로 피맛골이다. 뒤늦게 생겼지만, 마지막으로 들렸던 곳이 김완기씨가 운영하던 ’불타는 소금구이‘였다. 그 뿐인가 지금의 '남인사마당' 옆예는 '예총' 건물도 있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려 '사진협회'나 '문인협회'는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다. 그뒤 건물이 철거되어 순라꾼들 아지트가 되었지만, 예술가들의 사연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이제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정들었던 서피맛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인사동에 오래된 것과 정든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으니,  기억하는 늙은이가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사람 마주하기도 무서워하는 유령의 도시를 살아야 할 사람들이 가엽다.

돈과 물질에 눈 먼 자업자득 인 걸 어쩌랴!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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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 낭독한 태화관 부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역사적 발자취 많아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독립운동’이 퍼져 나갔다. 학생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줄기찬 외침은 민족 독립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97년이 흘렀다. 서울 도심 거리에는 이미 태극기가 펄럭이고, 3.1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 준비도 한창이다.

특히 서울 종로구는 3.1운동의 시작 지점으로 근현대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달 26일, 필자는 3.1운동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안국역 6번 출구를 거쳐 서울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에 다녀왔다



인사동 전통 문화의 거리 상점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 태화관


인사동에 들어서자 골동품 상점, 화랑,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전통문화의 거리를 지나 필자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인사동 5길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태화관’.

태화관은 3.1 독립운동 당시 요리점 명월관의 별관으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한 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태화빌딩 입구의 모습.


현재 태화관 자리에는 12층 높이의 태화빌딩이 위치해있다. 빌딩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3.1운동 독립선언식 거행 장소임을 나타낸다. 건물 1층 로비로 들어서면 작은 카페가 있는데, 한쪽 벽면에는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이곳은 현재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는 휴식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태화 빌딩 안의 카페에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학생 대표들이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 승동교회


태화관에서 다시 탑골공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승동교회’가 위치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30호로 지정된 승동교회는 학생대표들이 모여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이며, 교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났던 장소다. 이곳은 탑골공원과 근거리에 있어 3.1운동의 본거지로 적합했다. 


승동교회 모습.


1904년 인사동 한옥을 사들여 이사를 한 후, 예배당을 새로 짓기 시작해 1912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승동교회 골목길 입구에는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사진과 글들이 보였고, 건물 앞에는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1운동 최초 발상지, 탑골공원

승동교회를 둘러보고, ‘탑골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동 거리 끝에 자리 잡은 ‘남인사 안내소’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탑골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당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92년 5월에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했다.   


탑골공원 내의 3.1운동 기념 동상.


탑골공원 내에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을 기록한 부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한용운 시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해시계인 앙부일구 받침돌 등의 문화재도 남아있다. 이날은 탑골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현재 탑골공원은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보성사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 보성사 터였다. 보성사는 1910년 세워진 인쇄소다. 보성사의 가장 큰 업적은 2만 장 가까이 되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것이다.  


조계사 후문에 조성되어 있는 독립운동 기념비.


보성사는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독립운동을 알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큰 역할을 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필자는 마지막으로 안국역 5번 출구 인근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까지 둘러보며 탐방을 마쳤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 독립운동을 이끄는 거점이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주도 아래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곳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모습.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완공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직접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날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는 평일임에도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3.1운동 유적지들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조금 썰렁하기도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3.1절이다.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인사동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과거와 오늘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    

 

정책기자 이상국(프리랜서) leesang30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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