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하면 외국 연수 도중 가이드를 폭행해 말썽을 일으킨 박종철 군의원부터 생각난다.

정치판 똥물 튄 촌놈이 실수한 것을 언론이 스타로 만들었는데. 점잖은 반촌 동네를 개망신 시켰다.




지난 2일 이른 새벽 예천장으로 떠났는데, 예천장도 다른 장터처럼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인도 변을 따라 300m에 걸쳐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어물, 채소, 과일을 비롯해서 곡물, 약초, 의류, 잡화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전형적인 오일장이었다.





특히 봄철에는 봄 냄새 풍기는 냉이, 달래, , 돌나물과

산에서 직접 따온 각종 버섯으로 시골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장터였다.

그러나 5년 전에 본 장터와는 달라져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상설시장이 되었지만, 오일장날도 문이 잠긴 가게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다.

전국의 장터를 기록해 온 정영신씨의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시골 농민의 삶을 추적해 장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곧 바로 실행하겠단다.

그 날도 예천장 사진 찍는 일은 뒷전이고, 사과 팔러 나온 할머니 붙들고 사는 이야기 듣느라 시간을 보냈고,

시장에서 월남국수 가게 차린 여인네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후에는 예천군에 있는 유적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년기념물 '석송령'부터 찾았는데,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었다.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별났다.

1927년,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씨가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라 이름 지은 후,

자기 땅 5,259를 상속 등기해 주어, 수목으로서는 유일하게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라고 한다.



 



두 번째 들린 선몽대 일원은 약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이었다.

선몽대 주변의 소나무 숲과 그 앞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펼쳐진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경승지 중 하나였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선몽대의 제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큰 바위 위에 걸쳐 지은 건축물 구조가 독특했는데, 계단도 돌을 깎아 만들었고,

방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도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선몽대의 방문을 도둑들이 뜯어 가,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래의 현판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사본을 붙여 놓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현판도 잃을 뻔 했다.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어떻게 유적지 방문까지 뜯어갈 수 있을까?

하기야! 무덤까지 파가는 도굴꾼이 인사동 주위에도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세 번째는 양반촌의 상징인 용문면 금당실 마을을 찾았다.

우리나라 최고 명당으로 손 꼽히는 마을 뒤쪽에는 오미봉을 비롯한 산들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금곡천이 휘감고 흘러, 옛 부터 십 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지켜온 반가(班家)로도 유명한데,

감천문씨 문호검이 15세기 초에 금당실 일대를 개척한 이래 함양박씨, 원주변씨 등이 500년을 이어왔다.





마을 안에는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을 올리는 추원재와 사당,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 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를 지낸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오래된 가옥 12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흙 돌담길과 800m의 소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지막으로 회룡포를 들려 삼강주막으로 갔는데, 5년 전에 본 삼강주막은 아니었다.

지난 2006유옥연 주모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된 집을

200715천만 원의 예산으로 복원하여 새로운 주모를 선정해 다시 손님을 맞았는데,

이젠 삼강문화마을로 바뀌어져 있었다.





2015년부터 총공사비 942억을 들여 삼강문화마을을 조성했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삼강주막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관광객들이 쉬어 갈수 있는 주막과 객사만 있으면 될 텐데,

자기 돈 아니라고 마음대로 쏟아 부었더라. 일단 판을 크게 벌여야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니까...





사람이라고는 한 두 사람뿐인 관광안내소와 문화해설사집도 따로 지어 놓았는데, 마치 놀부 집 같았다.

한 채라도, 자동차 운전하며 온 관광객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묶을 수 있는 객사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으로,

3개의 강인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이 500년이나 된 거대한 회화나무가 서 있어서 옛 정취를 더해준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를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의 숙식처로 이용된 집이다.

1900년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특징을 보여주어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한 부엌 벽에 그려져 있는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도 인상적이다.

생전에 글을 알지 못했던 할머니께서 만든 빗금 외상장부인데,

술 한 잔은 짧은 금, 한 주전자는 긴 금, 세로 줄은 '외상값을 갚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장부를 지우지 않은 금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돈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았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은 삼강문화마을 조성에는 박종철 군의원이 개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사진, / 조문호
















































 


 


 

 

태백산 황지에서부터 시작해 부산을숙도까지 1300리를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이었던 ‘삼강주막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곳은 안동 하희마을을 돌아 나온 낙동강과

봉화에서 시작해 희룡포를 휘감고 뻗어 온 내성천,

그리고 문경 죽월산에서 흘러 내려 온 금천,

렇게 세 줄기의 강이 만나기에 삼강(三江)이라 불린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장날이면 하루에 30번 이상 나룻배가 오가며

사람들이 드나들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보부상들과 사공들이 사용했던 숙소들은 1934년 대홍수 때 모두 떠내려갔다고 한다.
삼강주막은 오랫동안 삼강나루를 더나드는 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되기도 한 집인데,

지금은 그 것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옛 시절을 회상하며 흥청대고 있다.

옛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삼강주막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실제 주모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2005년에 돌아가신 유옥연 할머니는 여든아홉살까지 주막을 지켜 왔는데,

글씨를 몰랐던 주모가 손님들의 외상거래를 자신만 알 수 있도록 부엌 벽에다 표기해 두어

삼강주막을 찿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위치한 이 주막의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으로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주모가 부얶 벽에다 자신만 알 수 있도록 표시한 외상장부

 

 

 

주막 앞에 있는 이 '들돌'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이 장성하여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많은 물류의 이동에 따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책정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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