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립습니다.

정선 만지산에서 ‘하늘문 납골당으로 모신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군요.

적막한 산골짜기 보다야 아파트 같은 납골당이 좋겠지요?

끝까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자식놈을 용서하십시요.

 

만지산에 계실 땐, 메주알 고주알 세상 이야기를 전해드렸으나

이젠 기일이 아니면 어머니께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장을 결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지산 집에 불이 났습니다.

모든 걸 태워 몸 둘바를 몰랐으나,

정선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계시로 알고 만지산에 대한 미련은 접었습니다.

 

모든 게 무위로 끝나는 세상이치지만, 지난 세월의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네요. 

그동안 제일 무서운 돈병은 들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하던 일 마무리하고 따라 가겠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십팔번 ‘삐빠빠 룰라’가 유난히 듣고 싶습니다.

 

불효자식 문호가 기도 올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니 기일인 지난 12 정오무렵, 정동지와 함께 고양 하늘문납골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웅래, 박홍전 등 여러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가족도 이런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산다.

반가움에 지난 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안한 하루였다.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을 운영하는 조영희 누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어깨뼈를 다쳐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받았는데, 수술결과는 좋다고 한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양재동으로 40여 년 동안 청국장 끓이는 일에 매달렸으니,
쇠덩어리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맏딸 박홍전이가 시집도 가지 않고 장사를 이어 받았는데, 골병드는 일이 식당일이다.
돈은 좀 벌었겠지만, 건강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랴!




지난 년말,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와 조옥희, 매제 김종성씨와 함께 병문안 갔다.




누님께서는 “수술을 잘 끝내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반갑게 웃었는데,
팔 밑에 받침대를 댄 모습이 어릴 적 본 아이스케키 통 맨 사람 같았다.
‘아이스케키 좀 팔았냐?’는 농담도 했는데, 얼굴만 보아도 즐거운 것이 가족이다.




이제 팔순을 넘겼으니, 식당에서 은퇴할 나이가 넘었다.
여기 저기 놀러 다니면 좋으련만, 시집가서 식당일만 해서 노는 것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기껏 하는 일이 조계사에 기도하러 가는 것 뿐이다.




가족들이 다 수도권에 살지만,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일이 생기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
모처럼 만났으니,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할 말은 많았다.




아들 햇님이가 카톡으로 보낸 손녀 하랑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장가 간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손녀 하랑이 첫돌이란다.




매제 김종성씨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여, 딸 소원이가 운영하는 약국의 셔터맨으로 봉사한단다.

다들 생활전선에서 물러 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재미있게 사는 일만 남았다.




못 다한 이야기는 퇴원 후로 밀쳐두고 다들 물러났다.



"새해에는 오짜던둥 건강 잘 지켜 재미있게 삽시더.

조씨 집안이 노는대는 일가견이 있다 아이가"



옛날에는 꽃놀이 술판을 '회초'라 그랬는데, 사전에는 없어 어원을 모르겠네.





"날 풀리마 꽃놀이 술놀이나 한 판 벌립시더!

이빨 사이로 새는 '봄날은 간다'도 색다르게 쌕시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 밥 장사하는 조영희 누님께서 엊그제 팔순을 맞았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에 들 연세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고군분투하신다.
한 평생을 진주에서 여의도로, 양재동으로 옮겨가며 청국장만 끓여 왔다.
이제 딸 박홍전이에게 식당을 맡겨놓고, 주방에서 맛만 지키신다.
한편으론, 그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사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팔순을 맞아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게 옆 일식집으로 오란다.
‘진주청국장’은 손님이 많아 편하게 드시지도 못하지만, 외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전 가족이 모이는 팔순잔치가 아니라, 남매만 모이는 오붓한 자리였다.
형님 조정호와 동생 조창호, 조카 조아라, 동지 정영신씨 등 여섯 명이 함께 한 것이다.
작은 누님은 몇년 전 돌아가셨으나, 여동생 조옥희가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형님께서 나와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지난 년 말 퇴임 하셨단다.
팔순을 이년 남겨두고 일손을 놓았지만, 시원섭섭한 모양이시다.
재벌총수 댁 집사로서 남의 살림을 도맡아 살다보니, 식당 누님처럼 변변히 노는 날도 없었다.






누님과 형님께선 돈 걱정 안하고 살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불행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 한번 즐기지 못한 채, 평생 돈에 끌려 다닌 게 아니던가?
동생 창호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나,
이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족은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형님은 젊은 시절엔 한량이었다. 사교 춤과 당구 등 재주가 다양한 분이라 말씀드렸다.
“이젠 ‘완 투 쓰리 카바레”도 가시고, 당구장도 열심히 다니며 즐겁게 사시라”고...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돈은 없어도 내가 제일 잘 살았다.
나처럼 꼴리는 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아니던가?
가족을 고생시킨 무책임은 면할 수 없지만,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팔순을 축하하는 술잔을 들며 나눈 대화는 요즘 사는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듯이, 다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불바다가 되었던 고향, 영산 이야기도 나왔다.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방어지역인 영산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내 나이 세 살 때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이 또렷하다.
남산 밑의 미나리꽝을 지나가는데, 총 맞은 군인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물 달라 통사정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등에 업힌 나를 돌려 업고 도망치던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왜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가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가게 된 사연을 누님께서 들려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였는데,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집에 숨겨 둔 패물이 걱정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도정공장을 운영할 때인데, 쓰임세가 큰 아버지 몰래 자식들을 위해
패물을 사모아 두었다는데, 그게 걱정되어 가지러 가셨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 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나면 녹음기 챙겨 다시 와야겠다.
누님 돌아가시면,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는 영원히 파 뭍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젠 형님이 한가해졌으니, 정선 만지산에 계신 엄마 산소에서 봄놀이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가족과의 봄놀이도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술이 얼큰하여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 하러 ‘진주청국장’으로 몰려갔다‘
식당은 바쁜 시간이 끝나 한가했고, 조카 홍전이도 한 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조카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보니 불쌍했다.
술김에, 늙은 외삼촌과 결혼하자는 흰소리를 지껄이며 낄낄대기도 했다.






누님께선 틈만 나면 맥주 드시는 것이 낙인지라 식사에 소홀한 것 같았다.
우야튼, 밥 잘 챙겨 드시고, 백세까지 팔팔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가 아니라 “노세 노세 늙어 노세”로 노래도 바꾸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조카 박형준 아들 담온이의 돌찬치가 있어 명동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조카 형준이 가족과 영희 누님, 정호 형님, 동생 창호와 형수님, 제수씨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카 조웅래, 조 향, 조지향, 조영란, 박홍전, 박유전,

그리고 하나 뿐인 아들 햇님까지 오랫만에 모두 만나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다 볼 수 있는 자리가 몇 번이나 더 있겠습니까?
한 잔 마신김에 ‘봄날은 간다‘에서부터 ’앵두나무 우물가에 바람난 동내처녀 도망간 노래까지 다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형수님이 오시면 늘 조카 웅래와 함께 왔는데, 이제는 따로 살아서인지 따로 국밥입니다.

뒤늦게 웅래와 조카 며누리가 나타나니 형님께서 슬그머니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엔 돌아가신 엄마처럼 내 그릇에 열심히 음식을 챙겨 주시더니,

갑자기 나가시길래 딴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들내외 앉으라고 슬쩍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 한쪽 구석에 앉아 멀리서 자식과 손자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코 끝이 찡해졌습니다. 그 놈의 자식이란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든 건 내리 사랑이란 걸 다시 깨달았지요.

어저께는 가수 최백호씨의 ‘효교’에 대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요지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영혼이 제일 좋아하는 자식한테 옮겨가니 부모를 잘 모시라는 말인데,

그 '효교'의 당위성을 입증한 한 사례였습니다.

 

그 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엄청 많이 웃었습니다.
별 영양가 없는 너스레라도 떨며 가족들과 항상 웃고 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笑門萬福來'

 

 

사진: 조햇님,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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