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강원도 살면서도 박병문씨를 잘 몰랐다.
장터 작업에 메 달린 십년 가까이 사진판과 담을 싸고 지냈기 때문이다.
올 해 페이스 북에 들어 와서야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하며 여러 페친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병문씨 전시를 알게되어, 그의 이력이나 작품을 살펴보게 되었다.

지난 번 전시제목이었던 ‘아버지는 광부였다’와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아버지는 없다’라는 카피를 보며,
확실한 주제를 잡은 작가로 생각했다. 주제 자체로 언론의 관심을 모울 수밖에 없었고,
자기 가족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진인 들이 가까운 주변보다 먼 곳에서 소재를 많이 찾는다. 
박병문씨의 후속 작업은 뭘까 염려되었으나, 작품들을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검은 분진에 휩싸인 탄광촌의 흔적을 찾아 지난날의 기억을 돌이키고 있었다.
검은 산 아래 버티고 선 수갱과 광차, 웅크려 앉은 저탄장과 그 뼈대를 앙상하게 드러낸 골재들이

마치 지옥의 한 풍경을 연상시켰다. 그 음산한 분위기가 주는 위압감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현장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물 줄이나 다름없었던 탄광의 기억들이

빛바랜 묵시록처럼 사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박병문씨의 ‘검은 땅- 우금에 서다’사진전 개막식은 지난 23일 오후6시 30분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박병문씨 내외를 비롯하여 ‘브레송’ 김남진관장, ‘한겨레신문’ 곽윤섭, 노형석기자,

‘사진방송’ 김가중, 정태만씨 ‘오늘의 한국’ 임윤식씨, 사진가 은효진, 신동필, 정영신, 방종모,

유경석, 이학영, 곽명우, 남 준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 했다.

이날 뒤풀이는 충무로 ‘종로빈대떡’에서 시작하여 ‘첼로호프’로 옮겨가며 마셨다.
기분이 좋아, 자정이 가깝도록 술을 퍼마신 것은 좋았는데, 그만 필름이 끊겨 버린 것이다.
낑낑대다 이틀이 지나서야 사진을 꺼내보니 별의 별 것들이 다 찍혀 있었다.
하나하나 실타래가 풀려 나가니 얼굴이 화끈 거렸다.
술 취해 돌아오며 적었는지, 팜프렛 뒤에는 이런 낙서도 있었다.

“여자가 너무 예뻐 명함 꺼낸다는 게, 주민증을 꺼냈다.
그 아가씨 주민증을 들여다보고 하는 말,
'우리 아빠하고 동갑이네요'
갑자기 예쁜 여자가 예쁜 딸로 보였다“

사진, 글 / 조문호























































 

박병문씨와 그의 아버지.


‘아버지는 광부’ 사진전 연 박병문씨
태백 광부 부친 일상 다큐사진으로
탄광기록 15년… 작년 최민식상 수상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와 작업도
“그분들 순수한 삶 현장을 담고싶어”


박병문의 사진전 <아버지는 광부였다>가 23일부터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에 맞춰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냈다. 개막식에서 박병문(55·사진 왼쪽)씨를 만났다. 그는 광부 연작으로 지난해 ‘최민식 사진상’ 특별부문 대상을 받았는데, 이번 사진전에는 당시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이 대거 포함되어 완성도가 한결 높아졌다. 사진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박 작가의 부친 박원식(85)씨는 1960년대부터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일한 광부였고, 이날 곱게 한복을 입고 아들의 전시 개막을 지켜봤다. 박 작가는 개막식 인사에서 “다큐멘터리사진가로서 무거운 첫발을 가볍게 내디딘다. 저로서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탄광의 일상이었지만 탄광을 촬영하여 오늘 이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이번 사진들 덕분에 탄가루에 묻어 늘 까맣던 아빠의 힘든 얼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혀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또 그는 “이 사진전은 오늘도 탄광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광부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인사를 마무리했다. 박원식씨는 아들의 전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작년에는 광부들의 현장 사진으로 상을 받았다고 해서 기특하다고 생각했고 동네에 자랑도 하고 다녔다. 사진들을 보니 옛날이 기억나서 흐뭇하기 짝이 없고 ‘아드님’이 잘해줘서 내가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사진들은 탄광에서 고생했던 사람,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탄광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더니 박 작가는 “아버지가 광부였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늘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표출하고 싶은 이미지였다. 아버지는 광부들이 캐낸 탄을 실어 나르는 작업을 하고 그러셨는데 사고 난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지금의 젊은층은 탄광을 아예 모른다. 그래서 알리고 싶었다. 예전에 은행 근무를 했는데 첫 발령지가 태백이었다. 탄광을 기록한 지는 15년쯤 되었고 낙동강 사진을 찍다가 만난 이석필 선생에게 지금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작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석탄공사 관계자 및 광부들의 협조 문제가 난관이었다. 여러 번 설득해서 윗분들의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탄광에 들어가선 현지에서 일하는 분들과 친해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 (광부들이) 회식할 땐 같이 추렴도 하고 해서 어울렸다. 광부 얼굴의 클로즈업 사진의 경우 리얼리즘적으로 찍었다. 당사자가 ‘내 모습이 나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자식들이 보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대화를 많이 나눠서 풀었고 이번 전시에도 포함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탄광 외에 다른 작업도 한다.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지난해 7월부터 찾아가고 있다. 얘기도 하고 동영상도 직접 찍는다. 역시 할머니들과 친해지는 게 급선무였다. 처음 계기는 나눔의 집 카페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길 들었다. 한참 이슈가 될 때였고 매스컴에서 거론될 무렵이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기에 현장을 찾아갔더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달랐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70%는 기자들인 것 같고 나머지는 유가족들, 정치권 쪽 인사들이더라. 마을 사람이나 시 관계자들은 안 보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성을 많이 띤 것 같아서 싫었다. 5년 지나고 나면 몇 분이나 살아 계실까 싶기도 하고 해서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삶의 현장을 휴먼다큐로 담아두고 싶다”고 말했다.

한겨레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