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님, 베이징에 다녀오시죠”


1995년 봄 무렵일 것 같다. 정작 실무대표단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이승환 당시 한청협 부의장과 이은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간사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동행 취재했던 <통일뉴스> 기자도 오락가락한다. 아무튼 90년 베를린 남·북·해외 3자회담 이후 안팎의 여건이 만만치 않아 후속 회담을 열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해 봄 ‘광복 50돌 기념행사를 남·북·해외가 함께 내용과 규모 모두 의미 있게 치르자’는 남쪽 김영삼 정부의 역제안을 북쪽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다. 범민족대회 남쪽추진본부도 갑자기 바빠졌다.


그때 나는 앞서 94년 8월의 범민족대회 개최와 관련한 수배로 도피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행위원장 임무를 수행해야 할 형편이라 실무대표단 구성, 회담 장소 등등 일정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베이징에 있는 지인에게 회담 장소를 잡아주도록 부탁하는 한편 이승환·이은민, 두 사람을 실무회담 준비를 위해 조금 앞서 베이징으로 보냈다.

 
문제는 대표단으로 누가 가느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쪽과 회담이 낯설기도 하고 더욱이 다녀오면 구속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터에 선뜻 나서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함세웅 신부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숙고 끝에 실무대표단장을 수락해주었다. 곧바로 ‘용태 형’을 만나러 갔다. 알아보니 인사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 중이었다. 다짜고짜 말했다.


“형, 베이징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북쪽하고 실무회담 일정이 잡혔습니다.” “언제야?” “내일모레입니다.” “어떡해야 돼?” “형은 요주의 인물이니 베이징으로 바로 가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일단 홍콩으로 갔다가 베이징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노자를 마련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망 다니는 네 앞가림이나 잘해, 이놈아!”


그게 ‘용태 형’이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용태 형은 홍콩에서 비행기표를 새로 끊어 베이징으로 날아가 국제선으로 도착했는데, 먼저 현지에 가 있던 실무대표단 두 사람은 국내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서로 어긋났는데 신기하게도 영어,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용태 형이 내가 건네준 호텔(뉴그레이스) 이름과 전화번호만으로 회담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중에 들으니 실무진도 호텔 위치를 잘 모르는 운전기사들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용태 형이 혼자서 용케도 찾아온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다른 일정 때문에 회담 첫날에만 참석을 했고, 용태 형이 실질적인 남쪽 대표단장을 맡아 회의를 이끌었다. 남북 간의 이견과 난제들이 많아, 매우 어려운 회담이었으나 용태 형 특유의 뚝심으로 합의문까지 채택해냈다. 일반적으로 합의문을 채택하지 않으면, 국가보안법으로 걸어도 구속될 가능성은 낮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용태 형은 구속을 각오하고 끝내 성과물을 들고 돌아왔던 것이다.


■ ‘남·북·해외’ 묶어낸 용태 형의 한마디


2004년 11월23~25일 2박3일간 금강산에서 남북의 실무회담이 있었다. 2005년을 준비하는 회담이었다. 최교진 당시 민화협 집행위원장(현 세종시 교육감), 한충목 통일연대 집행위원장(현 진보연대 공동대표), 이승환 민화협 정책위원장(현 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공동대표), 정인성 원불교 사회문화부 차장, 김동만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현 한국노총 위원장),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김이경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등 남쪽 대표단 34명이 참석했다. 최근 인천아시안게임 북쪽 단장으로 내려왔던 이충복 당시 민족화해협의회 부회장을 비롯해 북쪽 대표단은 28명이었다. 거기에 이행우 6·15실천미주위원장, 리한수 일본 조국통일협회 부회장 등 국외 동포 대표 7명까지 대규모 회담이었다.


공동행사에 관해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공동행사 추진 상설기구 결성 시점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워낙 여러 부문이 함께한 자리여서 의견도 분분하고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회담 이틀째인 24일 저녁 만찬장 자리로 기억한다. 용태 형이 북쪽 이충복 단장과 한참 술잔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서 일갈했다. “야, 그냥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말들이 많냐.”


‘공동보도문 3항-남과 북, 해외의 각계각층 단체들은 앞으로의 통일운동과 민족공동의 통일행사들을 광범하게 협의하고 추진하고자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약칭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내년도에 적절한 시기에 결성하며 당면해서는 올해 안에 남과 북, 해외에서 각기 지역준비위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 조항은 전적으로 용태 형의 작품이었다. 그때 합의로 결성된 ‘남·북·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지금 ‘6·15공동선언실천 남·북·해외 공동위원회’로 이어져 있다.


■ 북에서도 ‘용태 형’으로 통한 사연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를 앞두고, 남쪽에서는 평양을 가네 못 가네 설왕설래가 벌어졌다. 결국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를 단장으로 남쪽 대표단이 방북했다. 용태 형과 나도 동행했다.


북에서 나름 공들여 준비한 만큼 기념행사는 웅장했고 화려했다. 이른바 ‘집체예술’의 진수를 실감했다. 특히 대규모 카드섹션이 인상적이었다. 어림잡아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펼쳐내는 그림 속에는 꽃들도 피었다 지고, 바람도 불고, 구름도 흐르고, 말도 힘차게 달리고, 사람 얼굴도 기가 막히게 형상화하고, 그야말로 감탄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한 모퉁이에서 잠깐의 실수가 있었다. 누군가 카드 색깔을 잘못 내민 듯했다.


“어, 저기 삐끗했네?” 화가 용태 형의 예리한 눈이 놓칠 리가 없었다. “어휴, 안심이 좀 되네.” “엉?” “야, 이놈아 좀 틀려야지!”


그날 저녁 식사 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2차로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로 옮겼다. 고려호텔의 젊은 여성 접대원(봉사원)들은 용태 형에게 다 ‘아가’였다. “아가, 저녁 묵었나?” “아가, 시집갔나?”


거나해진 북쪽 단장인 김영성 민화협 위원장과 죽이 맞은 용태 형은 다시 자리를 옮겨 물론 새벽까지 계속 마셨다. 김 위원장은 훗날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으로 남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때 흥이 도도해진 김영성 단장이 피아노 솜씨를 보여주겠노라며 다른 큰 방으로 옮겨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한참 놀았다. 그러다가 김 단장이 물었다.


“그런데 용태 선생은 올해 몇이시오? 나는 45년생이오만.”


그건 김 단장의 실수였다. 자기 나이를 먼저 밝히지 말았어야 했다. 답은 뻔했다.


“아, 그래요. 나도 해방둥이요.”


그때부터 둘은 동갑내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북에서 용태 형은 해방둥이로 통할지도 모른다. 참고로 용태 형의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출생연도는 48년생이다. 하긴 남쪽에서도 그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용태 형’이라 부른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 통일·평화 말하지 않고도 최일선에 섰던 그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됐던 나는 3년 가까이 복역한 뒤 추방당해 일본에 머문 적이 있었다. 86년 6월 용태 형과 김정헌·성완경·원동석 등 ‘현실과 발언’ 선배들이 도쿄에 왔다.


“너 왜놈 말 좀 늘었나?” “아직도 버버거리지 뭐.” “야 이놈아, 아직까지 뭐했냐? 아무튼 내일부터 가이드 좀 하고 통역도 해라!”


이럴 때 ‘토’를 달면 죽음이다. ‘일본·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중미술전’(JAALA전)을 쫓아다니면서 덕분에 작품 보는 눈도 뜨고 마음도 훈훈해졌지만 몸은 죽을 노릇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가던 저녁 무렵 용태 형이 느닷없이 물었다.


“너 총련 쪽하고 좀 트고 지내냐?” “내가 죽을 일 있어?” “내일 총련 서만술 의장하고 만나는데 같이 갈래?” “거긴 통역 필요 없잖아?” “허긴, 넌 빠져라.”


그렇게 맺어진 서만술 의장과 친분은 이후로도 돈독히 이어졌고 93년 10월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은 그때부터 준비된 셈이었다.


용태 형은 평소 통일이니 평화니 입에 올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통일운동이나 평화운동 하는 벗들은 끔찍이도 아꼈다. 참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88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평화대회’를 비롯해 범민족대회 10여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다.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노동운동, 민중운동, 통일운동, 평화운동의 최일선에 용태 형은 늘 있었다. 민화협 공동의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어눌하면서 날카로운 통찰력! 용태 형의 비사는 책으로 엮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 용태 형, 떠나보낸 지 반년도 안 되었지만 그립다. “용태 형! 몹시 그립습니다.”


민화협 상임의장·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스크랩/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987년 3월 민미협에서 기획한 <반(反)고문전> 때 출품한 박불똥 작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

하지만 주최 쪽의 자체 검열로 그림마당 민의 전시장 대신 사무실에 숨기듯 걸었다가 그해 연말 작가의 개인전 <졸작전>에서는 공개 전시됐다.

 

 

‘힘전’ 출품 작가 즉심 회부 탄압에
민중미술 전시장 대관 불가능
당국 ‘민중’만 들어가면 눈 부라려
김정헌 형과 용태 형이 불러
“전시관 보증금·월세 570만원 좀…”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수도약국 맞은편 ‘그림마당 민’ 탄생

 

 

■ 전시장 대관도 어려웠던 민중미술

 

 

모두가 “용태 형”이라고 부르는 김용태라는 인간은 죽어서도 ‘용태 형’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민중문화운동의 발자취를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만인이 용태 형을 좋아하고 사랑함은 그에게는 사사로울 ‘사’, 거짓된 ‘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 자가 없다는 말로 요약한다.

 

 

이념으로 뭉친 단체는 말이 많기 마련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이고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고 제도권에 도전하는 재야의 ‘운동’단체는 항시 당면 노선을 놓고 일대 혈전을 벌이기 일쑤다.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 노선이라는 것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눈앞의 현실은 당장 싸우느냐 참느냐, 이걸 하느냐 마느냐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민미협 역시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올바른 미술문화를 이룩하자는 재야단체였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모두 동의하면서 노선에서는 개인마다 그룹마다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민미협은 기본적으로 미술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술이라는 장르는 아틀리에의 작업이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객관화되고 사회화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발표될 공간을 갖지 못하면 먼 훗날 숨은 이야기와 함께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팽팽 돌아가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제도권에서는 화랑들이 작가 활동을 지원하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구실을 했지만 80년대 벽두부터 불붙듯이 일어나는 미술운동을 지원해주는 화랑은 없었다. 작가들이 주머닛돈을 모아 전시장을 빌려 자기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당사자밖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미술평론가로서 내가 잊을 수 없는 해는 1984년이다. 그해 6월에는 무려 105명의 작가가 서울의 전시장 3곳을 빌려 <삶의 미술전>을 열었다. 7월엔 서울 한강미술관에서 <거대한 뿌리전>, 8월에는 부산·마산·대구를 순회하는 <시대정신전>, 9월에는 <서울미술공동체전>, 11월에는 <푸른 깃발전>이 열렸다. 이미 80년대 초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 ‘임술년’, ‘실천그룹’, ‘두렁’, ‘광주시민미술학교’ 등의 연례 전시도 이어졌다.

 

 

젊은 작가들의 뜨거운 열기는 이듬해인 85년 7월 열린 <한국 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더욱 분출되었다. 그동안 사찰 당국이 미술은 그래도 순수하다고 관망하다가 급기야 이 전시회를 봉쇄하고 출품 작가를 연행해 즉심에 회부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그 활동이 결국 그해 11월, 민미협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전시장 대관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 “민씨 성의 대표를 찾아라!”

 

 

민미협이 결성되고 한달쯤 지난 12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인사동에 있는 선화랑에서 발행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었다. 용태 형과 김정헌 형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여 우리가 즐겨 가던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는데 둘 다 정작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용태 형은 화를 낼 때는 목소리가 뱃속에서 나오고 곤란할 때는 약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용태 형이 먼저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용태 형은 아쉬운 소리를 할 때면 나를 유 대감이라고 불렀다. “유 대감, 우리 전시장을 한번 마련해 볼까 하는데 어때? 수도약국 맞은편 지하에 35평이 나왔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70만원이래.” “괜찮네.”

 

 

그러자 하는 말이 좋기는 한데 문제는 그만한 돈도 없거니와 그곳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팔리는 그림을 전시할 뜻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회비와 대관료뿐인데 가난한 민중미술가들에게 회비 납부를 강요할 수도 없고, 대관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물 임대료도 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얘기만 듣고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정헌이 형이 답답하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유 대감, 당신이 보름 안에 돈을 융통해 올 수 있어?”

 

 

나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미협 활동가들의 작품 발표장을 갖는다는 것은 민족문학가들이 이를 지지하는 문학잡지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형들이 적극 나선다면 돈은 내가 마련해 볼게요.”

 

 

당시 내 월급이 30만원이었으니 쉽지 않은 목돈이었지만 잘 아는 선배에게 빌려 보증금 500만원과 선금으로 내는 첫달 임대료 70만원 합쳐 570만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계약을 하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시장 운영 문제를 논의했다. 이번엔 전시장에 누가 상근하느냐는 문제였다. 형들은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어차피 필요한 민미협 사무실과 같이 쓰고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이어서 우리는 전시장 이름을 지어보기로 했다. 갤러리니 미술관이니 전시회관이니 하는 말 대신 ‘그림마당’으로 하자는 내 제안에는 둘 다 동의했다. 그러나 그 앞뒤에 붙일 이름에 원칙론자인 용태 형은 어떤 식으로든 ‘민중’, ‘민족’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매사에 신중한 정헌이 형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노출하면 안 된다고 해서 끝내는 둘이 다투었다. 그렇게 언쟁 비슷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내가 그러면 ‘중’ 자는 빼고 ‘민’ 자만 뒤로 붙여서 ‘그림마당 민’으로 하자고 했다.

 

 

용태 형은 그것으로 좋다고 했는데 정헌이 형은 여전히 그렇게 직설적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중미술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때라 ‘민’ 자만 들어가도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헌이 형이 양보를 하고 나왔다. “좋아. ‘그림마당 민’이 좋은데 이건 한글로만 민이라 쓰고 대표를 민씨에게 맡기자.”

 

 

그리하여 민씨 성을 가진 우리 쪽 사람을 찾아보니 민정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용태 형과 정헌이 형은 ‘걔는 그림 그릴 줄밖에 모르는 애’라며 안 된단다. 정헌이 형 부인이 민씨이긴 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 탐색 끝에 우리는 민혜숙을 찾아냈다. 민혜숙은 나와 미학과 동창이고 내 친구 부인이기도 해서 아주 친한 사이였고 오윤, 정헌이 형, 용태 형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그가 흔쾌히 승낙해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는 것은 돈 되는 일은 없고 오직 노력 봉사일 뿐인데 모두들 거기에 온 열정을 쏟아 넣었으니 무엇에 씌어도 단단히 씐 것이었다. 그것은 ‘민’ 자라는 거대한 멍석이었다. 용태 형은 그 멍석자리를 까는 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마당쇠였다. 그는 친구 김선경에게 부탁해 거의 공짜로 실내장식 공사를 마무리해 아담한 공간을 연출해냈다.

 

 

그리하여 민혜숙 대표를 모신 ‘그림마당 민’이 세상에 탄생했고 86년 2월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초대전이면서 <40대 22인전>이라는 아주 ‘부드러운’ 제목으로 개관을 할 수 있었다. 민중미술가들의 기대와 축복 아래 개관전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림마당 민의 등장은 민중미술 운동과 민미협의 활동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앞으로 민중미술운동사 내지는 20세기 한국미술사를 서술함에 그림마당 민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운영난에 미술강좌 수강료 보태고
정체성과 다른 전시도 불가피
회원 항의 땐 용태형 “니 죽을래?”
그 진정성은 누구에게도 통해
가나화랑·학고재 대표 등은
눈밝은 민중미술 후원가였다

 

 

■ ‘그림마당 민’의 성공과 한계

 

 

그림마당 민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86년 6월 첫 초대전으로 기획된 오윤의 <칼노래>는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모두들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동했다. 그러나 오윤은 이 첫 개인전에 이은 부산 순회전을 마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가 이 전시회를 위해 마지막 1년 동안 제작한 70점의 목판화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림마당 민의 운영에 차질이 생기더니, 대관이 되지 않는 달은 적자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용태 형, 민 대표 그리고 나는 매달 건물 임대료 마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낡아서 비만 오면 전시장이 물바다가 되는 바람에 매번 그걸 닦고 치우는 게 일이었다. 홍선웅·곽대원·류연복·유은종·최석태 등이 정말로 고생들 많이 했다.

 

 

게다가 민미협 사무실이 따로 독립해 나가고부터는 인건비 부담이 생겼다. 대관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신촌 우리마당에서 하고 있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를 그림마당 민으로 옮겨와 수강료를 받아 임대료를 내기도 했다.

 

 

민중미술 전문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은 늘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사진은 1987년 3월 박종철군 추모 기념으로 기획된 <반고문전>을 원천봉쇄하고자 사복경찰들이

그림마당 민 입구를 막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와중에도 그림마당 민에선 정말로 많은 민중미술가의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기획전이 열렸다. 해마다 열린 <통일전> 같은 전시에서는 이애주의 춤과 김남수의 굿이 더해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전시장 운영을 위해 그림마당 민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전시회에도 대관하지 않을 수 없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면 민중미술의 노선을 따지던 회원, 노동미술을 지향하며 현장으로 나갔던 회원들의 항의가 거세게 들어왔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주장이었지만, 그 원칙에 맞추려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기금 마련 캠페인으로 그림마당 민에서 <민중미술 예쁜 그림전>을 기획하였을 때도 앞뒤 사정을 모르는 민미협 회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나는 나대로, 용태 형은 용태 형대로 곤혹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전시회였다고 받아들일 만도 하지만 그때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용태 형이 그럴 때면 잘 쓰는 말이 있다. “늬들, 정말 말 다했어. 늬들만 옳은 줄 알아. 죽을래!” 이 말은 용태 형의 전매특허 같은 대사였다. 그래도 그에게는 ‘사’ 자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통했다.

 

 

여담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기획한 <미술과 성(性)>은 그 주제 때문에 민중미술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특히 인사동에 배치되어 있는 전투경찰들이 많이 구경하고 갔다. 그러나 87년 박불똥의 <졸작전>에서는 전두환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끄)럽다’를 전시장에서 뗄 수밖에 없었고, 88년 박종철군 추모 <반(反)고문전>에서는 그림마당 폐쇄 위협까지 받는 등 탄압이 끊이지 않았다.

 

 

■ 민중미술과 그림마당 민을 살린 후원자들

 

그림마당 민의 운영비를 마련하고자 나는 민중미술을 홍보하며 작품 판매에 전념을 다했다. “민중미술은 훗날 미술사적으로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민중미술 작품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재평가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리한 화상, 안목 있는 소장가라면 지금이 민중미술가의 작품에 투자할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겠는가.” 이런 논리로 처음에는 친한 친구들에게 권해 보았는데 몇 명에게는 통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다음엔 미술 작품은 역시 미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사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분 있는 화상과 미술애호가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 왜 이런 정치성을 드러낸 그림을 그리는지 의아스럽다’는 선입견이 강했던 것이다.

 

그래도 눈 밝은 이들은 있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는 민중미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하고 초기부터 작품을 많이 사주었고, 마침 그때 새로 창간한 <가나아트>의 초대 주간으로 용태 형을 모셔갔다. 나중엔 임옥상을 전속작가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된 가나화랑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훗날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나중에는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대표가 적극 후원해줬다. 학고재를 열기 전부터 기꺼이 작품 강매를 당해준 그는 심지어 걸개그림을 사달라는 무리한 요구도 들어주곤 했다. ‘제1회 민족미술상’ 수상 작가인 신학철 초대전의 전시장을 제공해주었고, 강요배·이종구를 비롯한 여러 민중미술가들의 초대전을 열어주었다.

 

순수애호가도 여럿 만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청관재라는 호를 가진 고 조재진 사장과 그의 부인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인사동 화랑가 순례를 하는 미술애호가였던 부부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청관재의 민중미술 수집품들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임대료가 다급할 때면 코리아나 화장품의 유상옥 회장에게 달려가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한때는 재야단체의 ‘기금 마련전’이 유행처럼 열렸는데 그럴 때면 나와 용태 형의 강매에 마지못해서 사준 이도 적지 않았다. 이런 민중미술의 이해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마당 민은 그나마 10년간 장수(?)할 수 있었다.

 

그림마당 민은 나중엔 문영태 형이 나서서 운영을 맡으면서 조금 사정이 좋아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전 민미협 공동대표

[스크랩 / 한겨레신문]

1985년 7월20일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제지당하자 출품 작가 30여명이 서울 안국동 아랍미술관 전시장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경찰은 끝내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출품작을 강제로 철거해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미술인협회가 결성됐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84년 ‘삶의 미술전’ 끝나자
새로운 미술운동 논의 무르익어
‘해방 40년 역사’ 전국 순회전 열고
민중미술 논의 물꼬 ‘민미협’ 결성
‘민족미술’ 발행·토론회 정례화…
‘그림마당 민’ 운영 등 기틀 잡아

 

■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운과 민미협의 태동

 

‘용태 형’은 그가 즐겨 부르던 ‘청포도 사랑’처럼 부드러우면서 정감이 많았다.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 일에는 판단력이 신속하고 단호했지만 누구에게나 자상했다. 1984년 6월 <삶의 미술전>(관훈미술관·아랍미술관·제3미술관)을 기획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문영태, 강요배, 박세형과 함께 우리는 여러 차례 기획모임을 하면서 작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출품 작가를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성완경 선배와 용태 형에게 조언을 듣곤 했다.

 

‘삶의 미술전’은 “삶과 유리된 미적 가치관을 양성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총체적 삶의 맥락 속에서 미술을 정립해 나갈 것”을 주장한 전시였다. 군부독재정권 속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술에 매몰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의 가치관과 창작론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삶의 미술전’을 계기로 새로운 미술운동에 대한 논의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많은 미술인들이 인사동의 건국다방 앞에 있던 평론가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주재환, 손장섭, 김정헌 등 현발 동인들을 비롯해서 선화랑에서 발간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던 유홍준, 그리고 광주의 홍성담과 최열, 동인 ‘임술년’과 ‘두렁’의 회원들과도 가끔씩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84년 우리는 <해방 40년 역사전> 전국 순회전을 기획했는데, 또 지방 순회전시회 때마다 세미나도 열었다. ‘역사를 보는 작가의 시각’(황석영·광주), ‘작품에 있어서 형식의 제 문제’(홍선웅·광주), ‘역사와 예술’(염무웅·대구), ‘작가와 역사’(이철수·대구), ‘역사화의 주제의식’(성완경·부산), ‘작가와 시대정신’(문영태·부산), ‘작품에 있어서 주제 표현의 제 문제’(원동석·마산) 등의 주제로 지역 미술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전시회를 통해 민중미술에 대한 논의가 전국 단위로 활성화되었으며 훗날 ‘민미협’이라는 미술전문가 집단을 결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힘전 사건’과 젊은 미술인의 결집

 

사무국장 연임 마다한 용태형
뉴욕 가서 ‘민중판화전’ 기획
판매대금 민미협 활동비로 보내
유홍준과 콤비플레이 운영비 숨통

 

85년 7월 안국동에 있었던 아랍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20대 힘 전>이 열렸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서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해 버렸다. ‘힘 전’ 사건은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첫번째 민중미술 탄압 사례로 꼽히며, 이로 인해 미술인들의 조직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 달 뒤인 8월17일 우리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열고 민미협 창립의 필요성에 합의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덕분에 ‘힘 전’에 참여했던 20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민미협에 적극 가입하며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힘 전’ 며칠 전인 7월5일, 나는 이른바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유상덕(작고)·김진경(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고광헌(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등 30여명의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그러자 선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민미협 창립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겼다. 그리고 여러 대학신문에 미술운동론을 쓰고 있던 미술평론가 최열에게는 사업과 홍보를 책임지게 했고, 사무국장은 당연히 용태 형의 몫이었다. 서서히 사무국 체계가 갖춰지고 운영위원회와 대의원 조직이 편제되면서 그해 11월22일 120여명의 미술인들이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총회를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민미협이 출범하면서 용태 형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을 다져 나갔다.

 

1985년 7월20일 전시장에서 철거·압수당한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출품작들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쌓여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용태 형은 86년 1년 동안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그사이 많은 사업을 추진해 민미협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을 꼽자면, 민미협 기관지인 <민족미술>을 발행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 기관지를 통해 회원의 전시와 기획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집단 미술운동과 지역현장 운동을 소개했다. 또 30년대~80년대의 중국 신목판화운동사,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의 작품과 교류를 소개해 사회변혁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시각을 국제적으로 넓혀 나갔다.

 

둘째로는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정례화시켜 조직운동의 방향과 창작론, 미술의 대중화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지역 미술인들과 연대를 강화해 나간 점이다. 이 대토론회가 지금까지도 해마다 민미협의 정기 행사로 이어진 것은 이처럼 출범 때부터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아온 덕분이다.

 

셋째로는 민미협의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했다. 그림마당 민은 많은 운영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원 모두가 힘을 모았지만 이를 총지휘한 것은 당연히 사무국장인 용태 형과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유홍준 선배였다. 나는 지금도 이 두 선배의 콤비 플레이가 없었다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이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때 ‘민미협·그림마당 민의 1년 결산 대차대조표’(86년 12월15일)를 보면 총수입과 총지출이 각각 3352만원이었다.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억원에서 3억원은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은 회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그 출발 시점에 용태 형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 6월항쟁과 민예총 결성의 모색

 

87년 민미협 제2기에 들어서면서 용태 형은 나를 사무국장으로 추천했다. 돌이켜보면, 앞서 86년 수많은 일들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에서 벌어졌고 용태 형은 과로로 인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평론가 엄혁의 주선으로 캐나다 토론토의 에이 스페이스 화랑에서 ‘김용태·김봉준·박불똥 3인 초대전’(1987)이 이뤄졌고, 이어서 3월에는 뉴욕의 마이너 인저리 화랑에서 초대전이 잡혀 있었다. 용태 형은 3월 뉴욕 전시를 위해 출국했고 전시가 끝난 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국청년연합을 이끌고 있던 윤한봉(작고) 선배와 만나 <뉴욕 민중판화전>을 기획했고, 그 수익금을 민미협에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디를 가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용태 형의 성격이 잠깐 다니러 간 이국땅에서 민중판화전까지 주선한 것이다.

 

87년 3월 민미협이 고 박종철군 추모를 위한 <반고문전>을 열자, 경찰은 그림마당 민을 봉쇄하고 작품 30여점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4월 전두환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4·13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민미협은 즉각적으로 ‘우리 모두의 소망을 모아서 어둠을 밝히자’라며 ‘시국에 관한 237 미술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서 민미협을 포함한 문화 6단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조작 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후 6월항쟁까지 군부독재 타도를 향한 투쟁의 열기는 뜨거워만 갔다. 반고문전부터 6월 투쟁까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이때처럼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뉴욕에 가 있던 용태 형이었다.

 

이처럼 국내 사정이 급박하고 점점 치열해지자 용태 형은 뉴욕 전시를 마치자마자 귀국했다. 그리고 민미협과 문화 6단체의 투쟁에 힘을 보탰고 직접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이 야권분열에 의한 민주정권 교체의 실패로 막을 내렸고, 용태 형은 뭔가 모색을 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예술인들의 역량을 모아 민예총을 건설해야겠다는 것이다.

 

홍선웅 판화가·전 민예총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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