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씨 죽음으로 눈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형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고향인 창녕 영산에서 장례를 치루지 않고, 마산 '신세계 요양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룬 다기에

부랴부랴 창원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 신용희씨

큰 형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3남매를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하셨다.

이제 자식들이 출가해 손자까지 장성했는데, 좀 살만하니 돌아가신 것이다.

인자하셨던 큰형이 돌아가신 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연탄까스가 새어 나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생전의 형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들 고향을 등졌지만, 장남인 조봉래가 형수님을 모시고 고향을 지켜왔다.

영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암골 산소를 돌보며 고생스럽게 살았는데,

생전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팔순은 넘겼지만, 너무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회생하기 어렵다는 의사 말이 들렸는지, 눈가에 눈물이 베어나왔다고 한다.

 

지난 14일 오후4시 무렵에야 창원역에 도착했는데, 눈물인양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례식장에는 상주인 조봉래, 노정숙내외, 조영래, 조봉숙과 하희성 내외,

손자인 조한슬. 조한길, 하현종, 하민종 등 오랜만에 보는 친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인천에서 내려운 형님 조정호씨와 조카 조웅래도 와 있었다.

 

그 날 뜻밖에 반가운 분도 만났다.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조차 아리송했지만,

부산 에덴공원 시절 가깝게 지낸 하재을씨가 옛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만들었다.

요즘에는 하단에서 토얼당이라는 골동품상을 운영한다고 했다.

 

내일 일정에 발인도 지켜보지 못한 채 돌아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시신은 화장하여 '함안 하늘공원'에 모신다고 했다.

 

부디, 그리웠던 형님 만나 편안이 영면하시길 바랍니다.

 

사진,/조문호

 

 




오랜만에 정영신씨와 함께 34일의 장터 여행길에 나섰다.

동자동에 들어 간 후로 숙박을 동반한 여행은 처음이니, 일 년도 더 된 여행이다.

정영신씨는 그동안 대중교통으로 가는 당일치기로 다녔다.

서로 바삐 살아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지만, 솔직히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에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해 침낭 사라며 주셨는데,

필요 없는 침낭보다 여행경비가 더 절실했다.

한편으론 송구스럽지만 염려하신 것처럼 몸도 마음도 춥지 않으니 염려마시길 바라고,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여행이 필요했으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니, 10여년이 넘도록 장터를 엄청 쫓아 다녔다.

한 번 떠나면 34일이나 45일 일정으로 떠났으니, 필요경비도 만만찮았다.

하루 밥 한 끼와 군것질로 때우고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며 장돌뱅이 노릇을 했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기름 값과 통행료였다.

한 참 다닐 때만 해도 경유 값은 또 얼마나 뛰는지, 기름 싼 집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벌이도 없는 둘이서 길에 돈을 뿌리고 다녔으니, 신용불량자 딱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장터는 많이 기록해 두었으니, 후회는 없다.


 

둘이서 주구장천 떠 돌아다녔으나, 신기하게도 의견마찰이나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이 같고 목적이 같으니, 감정의 불씨 같은 건 끼일 틈이 없었다.

그때 다진 동료애가 부부로서의 애정보다 더한 신뢰감을 갖게 된 동기일 것이다.

그토록 금실이 돈독했으나, 난데없는 이혼 소동을 벌여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에겐 법적인 부부관계 보다 일이 더 중요했으나, 다들 용납하지 않았다.

합의 이혼에 도장 찍을 때만해도 서로 동의했으나,

주위의 입방아에 정영신씨 마음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해를 지나며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함께 생활할 때 보다 궁핍함도 좀 덜었지만, 동자동 작업까지 진척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차피 한 사람은 장터에서 죽고, 한 사람은 쪽방에서 죽을 팔자지만,

살아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니, 부부연이나 서로의 일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장터여행 이야기도 산더미 같은데, 사적인 이바구가 너무 길어버렸다.


 

지난 4일 출발한 장터여행의 첫 목적지는 함안 군북장이었다.

그 많은 장에서 하필이면 군북장을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몇 년 전 남았던 아쉬움도 있지만,

그날 저녁 마산에서 환경사진가 조성제씨의 전시개막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장에는 오후 세시 쯤 도착했는데, 이미 파장이 되어 있었다.


 

장돌뱅이 세 사람만 남아 짐을 싸는  흔한 풍경이지만, 여기도 파리만 날린 장인 것 같다.

보따리 보따리에 싼 짐이 몇 십개나 되지만,내일을 기약하는 듯 했다.

옷 파는 박씨에게 얼마나 팔았냐고 물었더니, 다섯 사람 받아 사만원 어치 팔았단다.

사만원 모두 남아도 두 내외 점심값에 기름 값 제하면 아무 것도 없겠지만, 안달하지 않았다.

실속 없는 행상이지만, 행여 단골손님들 헛걸음시킬까 걱정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으론 부초처럼 떠도는 장돌뱅이 삶 자체에 대한 애착인 듯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것이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현실인 것을 어쩌랴!



 

차를 몰아 조성제씨 전시가 열리는 마산 경남은행 본점의 갤러리로 옮겼더니,

축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시장에는 한경호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에서부터

교육감 등 내노라 하는 명사들과 기업인들로 가득했는데, 좀 의외였다.

전시 축하하러 누군들 못 오겠냐마는, 마치 세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숙소에서 만난 조성제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경남은행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조성제씨 초대전을 추진할 때,

은행의 높은 분들께서 어찌 사진을 초대전으로 하느냐며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사진을 우습게 보는데 따른 홧김에, 아는 분들을 대거 초대하였고,

최상의 사진 퀄리티를 만들기 위해 돈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진해 마천장을 돌아, 내 고향인 창녕 영산장을 찾아갔다.

볼 품 없는 작은 장이지만 어릴 적 추억 따라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예전 장 모습과는 딴판이었지만,

어린시절의 장터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애들은 가라~ 일단 한 번 자셔보세요. 소변 보면 변기 나프타린이 튕겨나옵니다

너스레를 떨어대던 약장사 자리도 가보았고,

아버지 심부름에 개장국 사러 다닌 장국밥집이 있던 곳도 가보았다.

국밥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국 쏟을까 조심스레 걷던 골목길의 정취는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을 선명하게 한 것은 넓은 싸전 입구에 선 종대로 불리는 철탑이었다.

한 때 싸이렌을 울리기도 했던 종대의 녹슨 형상만이 옛날 장의 상징인 냥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에 인식된 장터의 규모보다 훨씬 작게 느껴지는 것은

장터에 빼곡하게 늘어 선 자동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들린 고향인지라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도 가보았다,

제실이 무너져 사라지고 없었는데, 무덤에 계신 아버지의 노여움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성묘하는 불효막심에 큰 절 올리며 사죄했다.


 

그 다음에 찾은 장은 합천 초계장이었다.

이 장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몇 년 전 병든 남편을 리어커로 모셔 와 장사한 할머니가 궁금해서다.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장에서 병 수발들며 장사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돌아가셨는지 걱정되어 인근의 장꾼에게 물었더니, 요즘은 병이 깊어 모셔오지 못하고,

할머니 혼자 나와 한 두 시간만 장사하고 일찍 가셨다고 했다.

장꾼들만 모여 잡담을 날리는 쓸쓸한 장바닥을 돌아보며 자리를 옮겨야 했다.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전라도 해남이었다.

이장은 큰 읍장이지만, 새벽에 서는 고도리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해남에 도착하니 어두워져 식당부터 들려야 했는데,

정영신씨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천일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떡갈비로 유명한 집이라지만,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인당 28,000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몇 일 후에 있을 자신의 생일을 앞당기자는 말에 퍼져 않았다.


 

복에 없는 과분한 식사를 한 덕에 잠은 싸구려 여관에서 자야했다.

두 노인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청소한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방바닥은 머리카락 투성이고,

또 여름용 홑이불은 얼마나 지저분한지 얼굴에 닿을까 염려되었다.


 

그 이튿날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고도리장으로 나갔으나

추운 겨울이라 좀 늦게 선다기에, 해남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마당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장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꾼들의 모습에,

전쟁터인지 장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자리다툼에 욕지걸이를 퍼 부어며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도대체 그 놈의 돈이 무슨 요물인지, 억장이 무너졌.

돈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이게 과연 사람 사는 것인가?


 

바닷가에 있는 장흥 회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해변은 조그만 항구로 변해있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둔 듯한 공연장과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손님이라고는 동네사람들 뿐이었다.



그런데 정영신씨가 팔다 남은 병어와 조기새끼를 엄청 싸게 사는 횡재를 했다.

직접 잡은 큰 생선은 경매에 넘기고 잔챙이만 팔았는데, 삼 만원에 한 광주리였다.

동네 사람이 사러왔으나, 자네는 다음에 줄 테니 서울손님부터 드리자며 아이스박스에 담아주었다.

새끼지만 병어고 조기가 아니던가 한 달 반찬거리는 해결할 듯싶었다.


 

그 이튿날은 장흥 용산장에 들렸다.

말이 장이지 장꾼 두 사람만 나온 썰렁한 장터로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의 이야기나 듣기 위해 장터식당에 들렸다.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김장하느라 양념을 잔뜩 해두었고,

옆자리는 동네 노인 세분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 연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신옥성씨란 분의 나이가 여든 하나란다. 얼굴은 나보다 젊게 보였지만, 열 살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이란 아무 소용없다며 이웃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6세 된 할머니는 멀쩡한데. 치매 걸려 누워있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총알처럼 빠르다며, 인생은 뜬구름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백반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상은 온통 김치잔치였다.

백김치, 물김치, 갓김치 등 김치만 네 가지가 나왔는데,

금방 버무린 김장김치도 맛있지만, 갓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식당주인인 백외자씨는 김치가 맛있다는 칭찬에

엄마가 자식에게 싸 주듯 김장김치와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 주었다.

이걸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입맛이 없어 후암시장에 반찬 사러 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갓김치를 버무려 팔고 있었다.

맛이나 보게 삼천원치만 달라고 했더니, 오천원 어치도 팔 수 없다며 퇴박 주던 야멸찬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 김치에 비하면 오만원어치는 족히 될 만한 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끝날 일이지만, 야박한 현실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김치가 연이 되어 정영신씨와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인근에 있는 장흥 장평장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곳도 장터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폐가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이곳에 곧 토목공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장터에 뭘 만든다고 될리 있겠는가?

괜히 나라 돈 축내어 공무원이나 업자들 잇속 챙기는 일만 만들고 있다.

사라져가는 장터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촬영여행을 끝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땅끝 마을에 가 보자는 정영신씨의 제안에 또 다른 여행길에 올랐다.

땅끝 마을에 닫기 전에 미황사부터 들렸다.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서족에 자리한 이 절은

20여 년 전 전국의 절 찍을 때 들린 적이 있으나, 그 때보다 요사채가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절의 창건설화도 재미있다.

돌로 된 배가 포구에 왔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조가 목욕재계하고 맞으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는데,

배에 올라보니 큰 상자 안에 경전과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나한, 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이라고 했다.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다며,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 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금의인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했단다.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인 후, 땅끝 마을로 향했다.

몇 년 전 땅끝 마을에 있는 송지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았던 기억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땅끝 마을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라

기 좀 받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마지막 여행지라 정영신씨와 호젓하게 바닷가를 거니는 데이트코스로 정했으나

추위가 분위기를 앞질러 서둘러 끝내야 했다.

서울 돌아 갈 일이 아찔하였으나, 차안에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땅끝 마을에서 기를 받았는지, 추위 속의 강행군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한 여행에 어디 피곤 따위가 감히 넘 볼수 있겠는가?

아무튼, 행복한 장터 여행을 만들어 주신 황규태선생께 감사드린다.

나흘간의 지루한 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게도 감사드리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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