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15일 오후6시, 인사동 ‘갤러리 라 메르’에서 김진두씨 개인전 열림식이 있었다,
'미협' 소속으론 몇 안 되게 친분있는 화가인데, 장경호씨 연락으로 찾아 나섰다.


전시장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주인공 김진두씨와 장경호씨 뿐이었다.
뒤늦게 전시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이경모씨와 유근오씨가 왔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더니, 그림을 많이 그렸더라.
적절한 색의 대비와 조화로 이루어진 나비형상이 마치 박제된 그림처럼
겹치거나 색을 달리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력 검사할 때 보았던 도판처럼, 환시현상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팜프렛에서 “프시케에 대한 사고”란 제목만 보았을 뿐,
이경모씨의 발문조차 깨알 같은 영문으로 쓰 놓아 알아볼 수 없었다.

작가의 인사말이나 내빈들의 인사조차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대단한 작품이라는 찬사는 있었으나, 어떤 면에서 대단한지는 이야기가 없었다.
단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를 내세웠으니, 환상과 연관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무 불친절한 전시였다.
네 눈높이에서 보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평자의 글까지 영문으로 표기한 건 이해되지 않았다.
전시장에 외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마치 외국 사람을 위한 전시 같았다.
한글로 적힌 것이라고는 작가의 약력이 유일했다.

뒤풀이가 있는 ‘원당 감자탕’집으로 서둘러 내려왔다.
장경호씨는 몸이 좋지 않은지, 그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다한 채 우유만 홀짝이고 있었다.
다들 술에 골병들어 몸을 생각해야 했다.


뒤늦게 작가와 마주 앉게 되어, “와 팜프렛에 영어만 쓰 났노?라고 물었더니,
‘한 번 더 써 물라고요.’란다.
술이 취했더라면 싸질렀겠지만, 술이 덜 취해 속으로 뇌까렸다.
“마이 써 무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0일 이른 시간,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술집에 마주 앉았다.

인사동 '툇마루'로 평론하는 최석태씨와 화가 김진두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차를 간다며 '백련'으로 옮겼더니 배성일씨와 헨리 윤까지 등장했다.

 

헨리 윤은 만난 지가 오래되어 무지 반가웠다. 아마 7-8년은 지난 것 같다.

한 때 인사동 '작은 뜨락'을 들락거리며 밤이슬에 젖은 적이 어저께 같은데...

펀드메니저가 '대한다인회'를 이끄더니 서양화와 사진에도 진출했었다.

이젠 시와 수필에도 등단했다니, 그의 예술에 대한 욕구는 끝이없어 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 술이 취해 깜빡 잠들었는데, 다른집으로 옮기자며 깨웠다.

삼차로 들린 '무다헌'에는 먼저 자리 잡은 주객들로 부산스러웠다.

소주에서 위스키로 격상된 것은 좋았으나, 더 마시기 싫었다.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실 형편은 아니지 않는가.

 

그 날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나 위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장경호씨의 '뒷동산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노래 소리 들어며 퇴각해야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 일산 사는 노인자, 이대훈씨 부부가 녹번동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두 내외분을 만나 ‘할머니 추어탕’에서 반주를 곁들인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따라 소주도 입에 짝짝 달라붙었지만, 대화마저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이라 사탕처럼 달콤했다.

바로 10여 년 전 노인자씨가 인사동 골목에 차렸던 술집, ‘작은 뜨락’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일 년 남짓에 문 닫고 말았지만, 그 곳은 인사동 풍류객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추억의 대폿집이었다.

‘실비집’을 비롯하여 ‘시인통신’, ‘하가’, ‘누님칼국수’, ‘레떼’, ‘평화만들기’, ‘귀천’, ‘수희제’ 등의

사라진 업소들이 인사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작은 뜨락’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만큼 이야기거리를 많이 만들어 낸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원래 건물 옆의 쓸모없는 골목에 천막으로 위를 가리고, 건물 벽에 좁은 선반 식 테이블을 붙여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서양식으로는 스탠드바이고 우리식으로는 그냥 포장마차다.

폭이 너무 좁아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만 놓았는데,

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려면 한껏 몸을 웅크리고 벽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낙서나 그림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볼거리를 더했다. 

 

기억자로 된 작은 목로주점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길게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내 가깝게 되어버리는,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술집이었다.

그 곳으로 고양이가 생선냄새 맡듯 인사동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툇마루’ 바깥주인이었던 박중식시인, 전설의 노동자시인 김신용씨, 관훈미술관장으로 일했던 서양화가 장경호씨,

‘작가폐업’이란 카페를 운영하다 풍기로 떠나버린 소설가 배평모씨, 서양화가 김진두씨와 그에게 그림 배웠던 헨리 윤,

인사동에 목맨 김명성시인,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설치미술가 김언경씨, 막사발 전도사 김용문씨,

천연염색 한다며 술에 염색된 이명선씨 등 인사동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인사동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대폿집을 차린 노인자씨는 술장사만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자체를 처음 해본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큰스님을 모신 포교사 노릇으로 세계 곳 곳을 돌아다녔다는데,

봉사활동으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굶주린 원주민들을 위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단다.

오히려 돈 버는 일보다 쓰는데 이력이 붙은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술장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손님이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술꾼들의 취향을 몰라 손님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리석 하게 장사를 하니 인사동 예술가들이 ‘작은 뜨락’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돈을 거두기도 했고,

원가가 적게 드는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려 ‘작은 뜨락’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토록 정들었던 ‘작은 뜨락’이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모두들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취객들의 주벽도 그리 심하지않아, 폐업한 동기가 늘 궁금했다.

아마 단골 중에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을 것 같다. 보기 싫어도 차마 말 못하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이 세상 어느 곳에 '작은 뜨락'처럼 정겨운 목로주점이 다시 생겨 날 수 있을까?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에, 조그만 바구니 하나가 손님 스스로 먹은 만큼만 내라고 기다려주는

이런 촌스러운 술집이 말이다.

예술을 알고 인사동 낭만을 체득한 사람들도, 사람보다는 돈을 더 반기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사동의 낭만과 멋도 그대로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처럼 넘실댄다면 그건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 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은 채 건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의 낭만과 인정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들어 부쩍 ‘작은 뜨락’이 그리워진다.

가끔은 술 취한 도공 김용문씨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도 듣고싶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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