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인사문화마당'에서 찍은 포도대장과 순라꾼들

인사동은 추억을 먹고 산지 오래다,

40여 년 전 예총회관이 있던 인사문화마당 자리는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순라꾼들이 인사동 거리를 돌며 조선시대 풍정을 연출했으나,

재개발로 파헤쳐지며 지하에 묻힌 유물만 쏟아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은 문화마당만 바뀐게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인심까지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아무런 대책도 관심도 없다

왜, 나만 못잊어 한물 간 인사동 노래를 줄창 부르고 있을까?

아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추억의 창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전 결산이 안 된다는 노광래씨 연락을 받아서다.

홍수표씨가 사진 값을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는 것이다.

사진 전해 준 사람에게 주거나 계좌이체하면 될 텐데...

 

해가 바뀌었으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인지 인사동 거리는 한산했다.

홍수표씨를 만나러 인사동14길 골목을 들어서서 ‘신궁장 모텔’ 앞에 섰는데,

 ‘지리산’ 건물이 사라진 골목이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쪽 면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새 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된 자리에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나, 변하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SK허브빌딩 쉼터인 ‘개천정’위로 솟은 앙상한 가지들이 스산한 겨울풍경을 연출했다.

‘개천산업’ 회장실에 들어가니 홍수표씨 혼자 있었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 한번 보자는 심사였다.

 

홍회장은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고등학교 제자였고, 나와는 동갑내기다.

젊은 시절 법원 서기로 일했으나 월급 많이 주는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단다.

행원 공채에 응시해 인사동 태화관 자리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홍회장 사무실은 흡연이 가능한 보기 드문 장소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연신 줄담배를 피운 것은 흡연자의 설움에서다.

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담배 피우는 사람만 만나면 동지애를 느낄 정도인가?

 

그곳을 나와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나,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대감집’으로 바뀐지 오래된 옛 실비집 주변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실비집에서 만났던, 먼저 떠났거나 소식 끊긴 사람이 그리워서다.

 

적음 시집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천재시인이라며 웃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민폐를 가장 많이 끼친 땡초 적음이었다.

‘월간 빠’란 이야기로 온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했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잡지지만, 자기가 주간이고 날 더러 조대표라며 수시로 깔깔거렸다.

서울만 오면 실비집에 죽치며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실비집에서 술 마시다 잠든 적음스님

그런 그가 갑자기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한 번 웃자며 ’일소암‘이라 이름붙인 그의 방을 들여다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오래 전 찍어 준 초상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고,

숨진 지 며칠이 지났는지, 바닥에 시신 썩은 자욱이 선명했다.

벽에 목을 기대어 기도가 막혀 숨진 것 같았으나,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의 시 처럼 너무 그리워서 이승을 떠났을까?

 

적음스님이 열반한 자리

저녁에 / 최영해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사진기자 김종구, 소리꾼 김민경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상을 하직한 인사동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마는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낄낄거리며 인사동 술꾼들 물주 노릇 톡톡히 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인사동 밤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이청운과 강용대

별을 그리다 별나라로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긴 이근우씨와 실비대학 총장님

 

이근우와 벼평모씨가 어울려 '레떼'에서 춤을 추고있다.

인사동이 그리워 ‘서울로 서울로’ 노래 부른 미국계신 최정자시인,

 

최정자시인 좌우로 김정혜씨와 이점숙씨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만 / 최정자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눈오는 인사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다 바뀐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시인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규일, 최정자, 박이엽, 채현국선생)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간밤에, 죽은 사진기자 김종구씨를 만났다.

 

인사동거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대뜸 “조 선배! 강촌에는 언제 올 거요?”라고

물었다. “응 시간 맞춰, 근일 간에 한 번 갈게”라며 헤어졌으나, 꿈이었다.

“왜, 갑자기 죽은 종구씨가 꿈에 나타났을까?” 옛 생각에 잠시 빠졌다.

강촌은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곳이지만 한 번도 못 가봐,

늘 마음의 빚이 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김종구씨는 인사동에서 청춘, 아니 인생을 불사른 사진기자다.

인사동과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일찍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류탄 가루에 범벅이 된 몸으로 ‘귀천’에 앉아 진토닉 한 잔으로 울분을 삼킨 그다.

인사동 좋아하고 친구 좋아 해, 틈만 나면 인사동에 나와 마셔댔다.

하기야! 그 암울한 시대에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살기도 힘들었다.

 

술에 절은 까만 얼굴에 큰 입으로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근무하는 중학동의 ‘한국일보’사가 인사동 지척에 있었으니,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인사동 거지 예술가들에게 김종구씨는 영원한 호구며 구세주였다.

대개 ‘실비집’에서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죽은 적음시인은 늘 목을 매고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마셔대더니, 결국 둘 다 술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술 만 얻어먹은 것이 아니라 필름도 얻어 썼다.

사진기자들은 필름에 구애받지 않아, 사진하는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꼬불쳐 둔 필름을 한 두통씩 건네주곤 했는데, 너무 고마웠다.

특히 시위현장에서 필름이 떨어지면, 그를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87년도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 수정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진들을 수정하다 종구씨의 취재장면이 담긴 모습을 만난 것이다.

명동성당 입구에서 박종철 추모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취재진 속에 섞여있었다.

육교 위의 나에게 카메라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이 사진을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나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개의 사진기자들이 별도의 카메라로 자기가 필요한 대상도 찍지만, 그는 고지식했다.

그 사진하기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한 눈 팔지 않았고, 남는 시간은 술 마시는데 소진했다.

‘한국일보’ 사진부 소속으로 ‘주간한국‘의 오지 촬영을 했을땐, 별도의 작업도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후 아까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필름이 늘 궁금했다.

몇 년 전 두번째 부인으로 부터 '유카리화랑'의 노광래씨에게 전달되었다기에,

마침 천상병선생 20주기를 맞아 사진집 출판을 준비하던 즈음이라 찾아 나섰다.

특히 인상적인 그의 사진은 ‘귀천’에서 천상병선생 옆에 앉아 목여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었다.

그 필름을 비롯한 천상병선생 관련 자료들은 찾아 몇 장 빌려 쓸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인터뷰 때 찍은 포트레이트사진들이 어수선하게 화일에 꽂혀 있었다.

 

사진기자로서 한국일보사에 남긴 기록적 사진자료들은 많겠지만,

사진으로 20여년을 살아 온 한 사진가의 자료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래, 죽으면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데 남겨봤자 뭐하겠느냐“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간 밤에 꿈에서 한 그의 말이 영 찜찜했다.

“강촌에 언제 올거냐?”가 아니라 “저승에 언제 올거냐?”란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이! 술 귀신아~ 그거는 저승사자인 니가 더 잘 알지, 살아있는 놈이 우째 아노“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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