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환 추진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갑진년 미술대동잔치가 지난 16일부터 115일까지 인사동 관훈미술관에서 열린다.

열림굿-1985년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개막식 굿 오마주_광대패 모두골의 공연

 

주최는 서울미술공동체이고 주관은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추진위원회’(추진위원장: 손기환, 추진위원: 박진화 류연복 이인철)로 지난 16일 열린 개막식에는 광대패 모두골이 열림굿을 열었다.

열림굿-1985년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개막식 굿 오마주_광대패 모두골의 공연

 

참여작가는 손기환씨를 비롯하여 김준권, 김방죽, 김억, 김기현, 류연복, 문영태, 박기복, 박건, 박불똥, 박영률, 박진화, 유은종, 이기정, 이인철, 장명규, 주완수, 홍황기, 황세준씨 등 19명이다.

참여작가 김방죽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 특별전

 

서울미술공동체(이하 서미공)198310월 창립 관련 논의를 시작하여 19849월 정식회의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 서미공의 첫 번째 활동은 시와 판화달력(우리마당 발간, 1984.10) 제작이었다. 1985을축년 미술대동잔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냈고, '취지문' 또한 이 시기에 발표했다. 1985~19862년 동안 한국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1987년에 이르러 활동량이 줄어들다가 자연적으로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미공의 주요 인물들이 기획 개최한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전1980년대 예술 검열과 민중미술 탄압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건설의 계기를 마련한 전시로서 미술사적 의의를 가진다. 관훈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갑진년 미술대동잔치는 서미공 창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2023년 초 구성된 서미공 연구팀은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행사를 개최하여 서미공 창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대 주무 최민화, 손기환, 류연복, 박진화뿐만 아니라, 김방죽, 김억, 박성조 등 서미공 활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구술채록을 추진했다. 또 류연복, 손기환 등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1980년대 자료 등을 조사 발굴했다.

왼쪽부터 유연복 이인철 김방죽 손기환 박진화

 

관훈갤러리 1층은 서미공 관련 사료와 전시 포스터 등을 정리한 아카이브 전시로 구성되었다. 2023년 진행된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또한 영상으로 관람 가능하도록 했다. 2층과 3층은 서미공 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1980년대 작품뿐만 아니라 최근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1980년대 서미공은 민중미술인들의 협의체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미 소집단에 소속이 있는 작가들도 중복으로 서미공 활동을 겸하곤 했다. 당대에는 참여 작가가 170여명에 이를 정도로 아주 큰 규모의 공동체였다. 하지만 올해 전시의 취지를 알리며 초대 공문을 발송했을 때 연락이 닿는 작가, 출품이 가능한 작가는 최종 19명으로 추려졌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 미술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활동으로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사례다. 하지만 현재 이와 관련한 조사와 연구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1980년대 한국미술사의 생동감과 풍부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시는 1016일 광대패 모두골의 열림굿 공연으로 개막하여 115일까지 진행된다. / 서울미술공동체 연구팀

 

서울미술공동체에 대하여

 

1983101일부터 3일까지 경기도 가평의 대성리에서 '사흘 낮밤 토론회'가 있었다. 옥봉환의 주선으로 김봉준, 문영태, 장진영, 최민화, 최열, 홍선웅, 홍성담이 한자리에 모여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미술운동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대하면서 대중적 미술운동을 펼쳐나가기로 결의하고, 민중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지역별 '미술공동체'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최민화는 그달에 곧바로 류연복, 박진화와 함께 '미술공동체' 창립을 논의하고 각 매체별 담당을 지정했다. 만화 파트에 최민화, 벽화 파트에 류연복, 판화 파트에 이기정을 지정한 것이다. 19841월부터 상반기 동안은 건강한 미술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를 계속했다. 토론회 자료를 묶어 현대미술연구소 이름으로 현대미술2백 권을 펴냈다. 그해 6월 회원들은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에 참여하고, 9월에는 '미술공동체' 발족을 위한 정식회의를 개최하여 제1대 주무(기획실장)로 최민화를 선출하였다. 10월에는 판화 달력 시와 판화(우리마당 발간)를 펴냈다. 그리고 19852월에 '서울미술공동체 (서미공)'가 공식적으로 발족한다. 서미공에 참여한 소집단은 '그림동인 실천', '횡단', '목판모임 나무', '에스파', '시대정신', '벽화기획 십장생', '억새' 등이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취지문을 살피면 "시각예술이 갖고 있는 풍부한 형식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발하", "자유로운 표현행위를 제약하는 어떠한 요소와도 투쟁"하며, "예술품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방안을 모색"한다고 적고 있다. 서미공은 발족과 동시에 대중을 위한 미술장터인 을축년 미술대동잔치(2)를 기획했다. 잔치는 대성공을 거뒀고, 연이어강남판매장개관전(3)을 열었다. 4월에는 서미공 기관지 미술공동체를 펴냈고, 5월엔 '5.3인천노동자대회'에 걸개그림을 제작하여 게시했다. 6월엔 제1차 총회를 거쳐 제2대 주무로 손기환을 선출했다. 7월엔 손기환, 박진화, 박불똥의 기획으로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 열렸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작가들이 연행되고 작품은 압류되었다. 그에 따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8월엔 민족미술대토론회에 참석하고, 9월에는 서강대학교 신문사 연계 판화전, 외국어대학교와 문중문화협의회에서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슬라이드 강연을 열었다. 12월에는 미술공동체3호를 펴냈는데, 1986년까지 총 다섯 권을 펴냈다. 19862월에 병인년 미술대동잔치를 아랍미술관에서 개최했다. 3월에 제2차 총회에서 류연복을 제3대 주무로 선출했고, 1987년 제3차 총회에서는 박진화가 제4대 주무로 선출되었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1986617일 신촌역 앞 건물에 '통일의 기쁨'이라는 벽화를 제작하고, 726일에는 류영복 자택 담장에 '상생도' 벽화를 제작했는데, 두 벽화는 공권력에 의해 훼손된 바 있다. 또한 정릉벽화를 그린 작가들은 불구속 기소 되었다. 8월에는 풍자와 해학을 기획하여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하였고, 198711월에는 전환기의 위대한 미술1 정치와 미술을 기획하였다. 1987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민족미술협의회는 내부 노선 투쟁이 격화되었고, 그에 따라 소집단들의 경향성과 활동 방향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81,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서미공은 발전적 해체를 논의한 뒤 해산하였다. 서미공에 참여한 작가들은 최민화,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박기복, 최정현, 유은종, 김낙일, 임승택, 홍황기, 박성조, 김기현, 이기정, 김억, 장명규, 김방죽, 곽대원, 박영률, 김준권, 조인수, 황세준, 주완수, 전승보 등이다. / 김종길 (기획 및 감독)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파르티잔 미술가들의 게릴라전, 홍범도 장군 초상

지난 1일부터 13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미술행동이 오늘의 행동으로 이어진 홍범도 장군의 초상전에는

35명의 민중미술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누구인가?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에 온 몸을 바친 분을 두 번 죽이려 한다.

 

윤석렬 친일 정권에서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흉상을 철거하는 암담한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어 분연히 들고 일어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의 초상화가 제작되어

항일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장군에 대한 사진이나 이미지가 귀한 현실에서 재조명하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 전시는 참여작가만의 전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전시다.

홍범도 장군을 추앙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역사 왜곡을 막을 수 있다.

 

전시를 관람한 후 방명록에 적는 것만으로도 함께 할 수 있다.

방명록에는 홍범도 부대 입단 지원 명단이라고 적혔다.

 

참여작가 명단 

강경구, 김구, 김억, 김인규, 김재홍, 김주호, 김준권, 김진열, 김진하, 류연복, 류준화, 문승영.

박건, 박건웅, 박순철, 박영균, 손기환, 송창, 유기호, 유대수, 이동환, 이명복, 이상호, 이원석,

이윤엽, 이인철, 이재민, 이태호, 이현숙, 장경호, 정기현, 정원철, 최경선, 최윤정

 

이번 게릴라전은 한때 광화문 미술행동을 추진했던 김진하씨가 기획했다.

 

아래는 전시 취지문이다.

 

1. 최근 윤석열 정권이 친일과 반공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어 국민을 상대로 이념 전쟁을 선전포고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획책이 바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를 비롯,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친 분이셨습니다.

 

2. 그런 홍범도 장군을 의도적으로 욕보임으로써 반공=친일이란 그릇된 프레임을 일반화시키려는 작태를 현 정권이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소련공산당 입당, 빨치산 활동, 자유시 참변 등의 이유로 홍범도 장군의 활동 폄하와 함께 무장 독립운동사를 우리 역사에서 숙청하고, 궁극적으로는 친일 극우 세력의 영구적 정치 기반을 만드려는 획책이기도 합니다. 역사학계와 양심적 지식인들은 이 정권의 황당한 양두구육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한 고독한 70대 독거노인이 소련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답니다. 소련이 미국과 연합해서 대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면 본인도 전장터에 나설 거라면서요. 일본에게 부인과 아들 둘 가족 모두를 잃은 봉오동 영웅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였지만, 파란만장했던 삶의 마지막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려 했던 내면의 도저한 치열함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임종하기 직전까지 30년의 저항, 그 고단했던 대일항쟁 편력이 아마도 그의 마지막 얼굴에 생생하게 스며있었을 것입니다. 그 절절했을 절대 고독, 그게 홍범도 장군의 실존적이고도 수명적인 '장군의 길'이었던 모양입니다.

 

4. 이런 과거-현재 얘기가 설왕설래하는 와중, 저희 나무아트에서는 깨어있는 작가들과 함께 게릴라형태로 홍범도-장군의 초상전을 기획했습니다. 현재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적 사진이나 이미지는 상당히 희박한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미술인들이 홍범도 장군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의 초상화를 제작-전시함으로, 우리 근대사의 항일 독립 정신이 시민에게 널리 향유되면 좋겠습니다. 또한 작가마다의 고유한 개성과 상상력으로 이 초상화들이 진지한 역전의 역사화로 연결되면 더 좋겠습니다. [김진하]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지난 1011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57th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들이 나서고 예술하라‘, ’네오룩이 후원한 이 전시는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김진하씨에게 드리는 상이자 짐이다.

 

30여 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바라는 전시다.

 

  사실나무아트'그림마당 민'을 이은 인사동의 자존심이었다.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아트'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현장성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작가가 동참한 것이다.

 

  원로급에 속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화백을 비롯하여 김보중, 김상구, 김억, 김재홍,

 김주호, 김준권, 김진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송창, 안창홍, 윤여걸,

이동환, 이인철, 이태호,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최경선, 최병민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민중미술가 24명이 작품을 내 놓았다.

 

  늦장 부리다 지난 14일에서야 정동지 만나 전시장에 들리게 되었는데,

주말을 맞은 인사동과 연결된 송현동 주변에는 가을 소풍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원조를 만난 듯 눈에 익은 작품이 늘렸다.

 

  송현동 꽃밭 가는 길은 북새통이라 사람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옆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에 사람이 없어니, 기분 더럽더라.

이건 모르는 국민들 잘못이 아니라 이끌고 알려야 하는 정치와 행정의 잘못이다.

 

  전시장은 홍성미씨가 지켰고, 옆 베란다에서 손기환, 김진하씨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는데, 몸이 불편해 끌고 나온 차가 발목을 잡았다.

딱 한 잔만 얻어 마셨는데, 그 맛에 끌려 인사동 벽치기 골목을 배회했다.

 

  사실은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이태호씨가 새긴 홍범도장군 벽화가 보고 싶었다.

마치 유목민상표처럼 유목민앞을 버티고 섰는데, 골목 분위기가 꽉 잡혔다.

이놈들! 어디 나타나기만 하라” 는듯 골목을 지켜주니, 어느 잡귀가 얼씬거리겠나?

 

  ’57th갤러리에서 열리는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오늘이 마지막이라 보실 분은 서둘러야 한다.

일단 좋은 작품이 많다.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함께하는 의미는 더 크다.

 

사진, / 조문호

 

'plan B'를 위하여

나무아트 기금마련

2023_1011 2023_10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보중_김상구_김억_김재홍_김정헌_김주호

김준권_김진열_류연복_박진화_손기환_송창

신학철_안창홍_윤여걸_이동환_이인철_이태호

이흥덕_장경호_정복수_주재환_최경선_최병민

 

후원 / 예술하라_네오룩

 

관람시간 / 12:00pm~06:00pm

 

57th 갤러리

57th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17

(송현동 57번지) 2

Tel. +82.(0)2.733.2657

www.57gallery.co.kr

@57gallery_official

 

나무아트... 1. 지난 35여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이념대립 너머 개별 미술가들의 실존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

 

김보중_나무에 오르다_종이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0
김억 _ 제주용연 _ 한지에 목판 _99×31cm_2023
김재홍_거인의 잠-202105-1_아크릴채색_130.3×97cm_2021
김정헌_풀,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21
김준권_자작나무숲의 가을2_유성목판_32×50cm_2018
류연복 _ 겨울삼선암 _ 소멸다색판화 _60×30cm
박진화 _ 초상 _ 연작
손기환 _Wow !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50×50cm_2023

2. 현존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포괄적 공공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나무아트.

 

신학철 _ Ⅰ -4  한국현대사 _2013
이동환 _ 뒷다리에 힘 팍주고 … _ 유성목판 _25×20cm_2023
이인철 _ 사과 - 탄
이흥덕 _ 소녀 _ 캔버스에 유채 _33.5×33.5cm_2023
장경호 _ 묵시 - 순천
최경선 _ 비오톱의 저녁 _ 캔버스에 유채 _60.5×72.7cm_2017
송창 _ 섬강풍경 _ 캔버스에 유채 _31×41cm_2004

3. 공간의 역사와 성격을 스스로 아카이빙 하며 한국 동시대 미술사의 뿌리이자 줄기가 되고 있는 공간. 그 미술 공간의 디렉터, 비평가, 미술사가로 현장에서의 노동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고투에 찬 미술지식 노동자 김진하. 노역의 퀄리티를 갖춘 채 동요하지 않는 정신. 해방 이후 이런 전시공간과 전문가는 일찌기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나무아트'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더욱 더 한국 당대 미술에 기여할 수 있기 바라며, 이 행사에 저도 마음을 보탭니다. 강성원

 


좌로부터 이광군, 김준권, 류연복, 이윤엽씨



광화문광장에 가림 막을 친 경찰 차벽을 그림판으로 만든 두 번째 프로젝트 ‘촛불이 국민의 명령이다’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며, 오는 7일에 열릴 세 번째 프로젝트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가 추진되고 있다.



여태명씨의 서예 퍼포먼스 [스크랩 / 김진하씨 사진]



지난 연말 열린, 두 번 째 프로젝트에서는 국민들의 새해 소망이 담긴 갖가지 구호들이 차벽을 메웠다.

서예가 여태명씨와 김성장씨가 ‘촛불이 세월호를 인양하리라’, ‘촛불이 차벽을 불태우리라’.는 등 큼직한 메시지를 남기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달려들어 ‘희망 저버리는 나라 말고 꿈 꿀 수 있는 세상아 와라’, ‘행복하고 싶어요’,

‘박근혜를 구속하라’등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갖가지 염원들을 풀어놓았다.

오후4시경, 미 대사관 앞 경찰차벽에 이어 붙인, 그림판의 전체 길이가 60미터에 가까웠으니, 가히 장관이었다.















행동대원으로 나선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류연복, 김진하, 여태명, 김 억, 정고암, 김남선씨가 달라붙어

일사불란하게 차벽 미술판을 만들어 갔는데, 류연복, 여태명씨는 사다리 위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렸다.

그 외에도 김윤수, 이윤엽, 장경호, 이인철, 이광군, 이도윤, 이태호, 정영철, 성효숙씨 등 많은 작가들이 현장을 지켰다

















그런데, 경찰이 병력을 끌고 와 설치를 저지하려 했다.
스티커 범벅이 될 경찰차 보호막 노릇을 하게 될 천막을 왜 걷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김준권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경찰들은 물러났으나, 한편으론 조마 조마했다.

늙은 투사의 부드러운 설득에 꼬리 내렸지만, 이젠 단순 물리적인 제압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대왕상 뒤편에는 판화가 이철수씨와 김준권씨의 작품을 세긴, 길이가 7미터나 되는 인증 샷 배경 현수막이 설치되었다.

다큐 사진가들이 직접 찍어 주는 초상사진 인증 샷 '그 날, 나도 여기에 있었다‘를 진행했다.

 

나를 비롯하여 엄상빈, 정영신, 남 준, 곽명우씨가 촬영을 전담했으나, 양시영, 하형우, 이민씨도 현장에 왔었다.

다들 한 시간씩 나누어 찍기로 했으나, 남 준씨와 곽명우씨가 전 시간을 종횡 무진하는 바람에 늙은이는 끼어 들 틈도 없었다.

초상사진 기록은 물론 참가 시민들의 휴대폰 사진까지 찍어 주며, 최선을 다한 열혈 용사였다.











블로거 ‘다음’의 ‘인사동 사람들’과 ‘네이브’의 ‘한국의 장터’에 올려 본인 사진은 퍼 갈 수 있도록 했으나,

여러 사진가들이 찍은 많은 사진들을 정리해 모우려니,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이 또한 요령이 생기면 해결되겠지만, 그보다 꾸준히 이어가려면 더 많은 사진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사진가들의 목소리도 절실한 시점이다. 사진가들이 만나, 즐겨 봉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연대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어둑어둑해 질 무렵, 촬영을 끝내고 사진 팀끼리 식사하러 갔다.

점심도 못 먹은 분이 있어 정영신씨에게  부탁했으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곽명우씨가 내겠다고 가로막았는데, 난데없이 사진가 김문호씨가 나타나 계산해 버렸다.

다른 좌석에서 우리를 본 것 같은데, 그 역시 가난한 사진가라 얻어먹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좌우지간 고맙게 얻어먹고 캠프로 돌아오니, 김준권씨가 사진 팀에 사용하라며 20만원을 내 놓았다.

진작에 있었다면 김문호씨에게 짐 지우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시민들의 후원으로 모은 돈을 밥값으로 사용할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진행하다보면 돈도 필요하겠기에, 정영신씨에게 총무를 맡겨 넘길 작정이다.







오후7시 무렵, 차벽에 설치한 그림 벽이 궁금해 밖으로 나갔더니, 광화문광장 일대는 인산인해였다.

200미터 남짓한 미 대사관 앞까지, 사람들을 비집고 가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차벽 그림판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위에다 스티커를 얼마나 붙였는지, 본래의 그림이나 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개인이 붙인 사이 사이의 스티커야  괜찮으나, 정치색 짙은 스티커로 전체를 도배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그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많은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역사적 산물을 잃어버리다니... 

우리가 지켜내야 할 또 한 가지 과제를 남겼다.




오는 7일에 열릴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세 번째 차벽 공략 작전도 착착 준비되고 있다.

그 날은 오후2시부터 5시까지 작업하여 오후10시에 철수하게 되는데,

작가 정고암, 여태명, 박방영 세사람의 켈리그래피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정고암, 김천일작가와 함께하는 시민작가들의 그림과 글쓰기도 진행된다.





그리고 오윤(칼 노래), 홍선웅(역사의 노래), 이철수(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이상호(무제), 정찬민 (세월호 미수습 이웃9인),

류연복 (따로 또 같이) 이윤엽(현장판화 복합) 등 판화가 7인이 참가하는 ‘메인차벽 작품 판화로 여는 세상“도 펼쳐진다.








세종대왕 동상 뒤에 설치된 '그 날, 나도 여기에 있었다‘ 포토존에서 사진가들의 초상사진 인증샷 촬영도 계속된다.

사진인들이 많이 들려주어야겠지만,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멋진 사진 한 장 남겨두자.

가능하면 이름까지 밝혀둬야 하는 것은, 후에 사진집에 활용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 다시 광화문광장을 예술의 난장으로 만들 ‘광화문 미술행동’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 억은 그동안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담아왔다.


▲남도풍색, 부분도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도면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남도풍색‘을 비롯하여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남도풍색, 부분도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해 온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해남 땅끝마을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5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덕룡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5cm


김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만덕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cm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작가 김억은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에 전념해 왔다. 우리 국토를 발로 따라가며 마음에 담아온 뒤 나무판을 촘촘히 깎고 그림을 찍어낸다.


▲월출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7cm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여름,가을,겨울,봄’이란 한국화전을 시작으로 수원화성, 한강 등 열여덟 차례의 개인 국토전을 가졌고,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남도풍색' 부분도

'남도풍색' 부분도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열 여덟번째 개인전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

김 억은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새겨왔다.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조감도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한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 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김 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지난 28일 조준영시인과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강민 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정오 무렵, ‘포도나무집’에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이행자, 조준영, 김상현씨가 나와 있었다.

뒤늦게 장경호씨도 나왔으나, 주문한 음식들이 형편없었다.
주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인사동에 갈 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다.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충 허기를 메우고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민선생의 순례 코스이기도 하지만, 그 곳은 땅콩이 무제한 제공되는데다, 한적해서 좋다.

좀 있으니, 신경림 선생도 오셨으나, 자리가 편하지 않았던지 슬그머니 나가셨다.
강민 선생도 몸이 편치 않아,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셨다.







그 때부터 김상현씨의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신곡이 많았으나, 그의 음색에 잘 맞는 곡이었다.









그 무렵, '경기도미술관장' 지낸 최효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라 근황이 궁금했는데,
어디 갔다 오는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좋은 술이 있다며 배낭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주었는데, 감로주였다.

알콜 도수가 40도나 되어 그 자리에서 비우기는 좀 그랬다.
맥주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나누었으나,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옮겼더니,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준영씨는 신학철선생 계신 서울대병원으로 떠나고,
장경호씨는 전시 중인 ‘인디프레스’로 떠나며, 나중에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마침, 다음 달 12일까지 연장 전시된 김억의 목판화전이 생각났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과 정복수화백이 있었다.
좋은 작품에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니, 어찌 술병이 고개를 쳐들지 않겠는가?
감노주를 꺼내 마셨는데, 전주가 있어 그런지 금방 올랐다.
전시장에서 내려왔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가 없었다.













저녁 약속으로 다시 나와야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야했다.
몸도 피곤하지만, 아침일찍 일터에 나가던 아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다.
집에 들어와 숨도 고르기도 전에, 빨리 나오라는 전화가 이어졌다.






‘유목민’으로 나갔더니, 일터에서 곧장 온 아내도 와 있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편집국장과 임동현기자도 와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서 올라 온 변형주씨와 조준영, 장경호, 공윤희씨 등 여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은영씨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이라며 신문을 보여 주었다.

술 취한 분들이 신문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 같으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돈 안 되는 문화예술계 소식만 다루는 유일한 신문이 아니던가?

잘 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해야지,

신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만든 신문에 시비를 건단 말인가?

난, 어렵게 운영되는 신문을 아끼는 마음에서 원고료도 없이 글을 보내주고 있다.











옆 자리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장성한 아들을 데려 왔는데, 음악을 공부한다더라.
기타를 연주하였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위키리의 ‘눈물을 감추고’란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얼마 전, 부친 상을 당한 이은영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던 노래라며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우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