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같은 쪽방 열기에 화들작 놀라, 세미나 참석차 경주에 간 정영신을 찾아 나섰다.

빌빌거리는 똥차 끌고 약속한 경주 건천장으로 갔더니, 그 멋진 장옥이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건천장 뿐 아니라 성주장은 물론, 전라도에 있는 나산장까지도 장옥이 없어졌다.
제대로 보존된 장옥들이, 몇 년 사이에 문화관광형시장 바람에 전멸 상태다.
역사를 우습게 아는 인간들이, 도대체 무얼 제대로 하겠는가?





철마 송정장으로 이동하니, 얼마 나오지 않은 장꾼들이 파리만 날렸다.

옛 호시절은 오 간데 없고, 한숨 소리만 유령처럼 장터를 떠돈다.

개천 옆에는 이 장터의 역사를 지켜 본, 2-3백년 된 보호수들이 한가롭고,

새로 생긴 흥법사의 웅장한 불상은 돈 자랑 하듯 넘겨보네.






부산 국제시장 가는 길에 오랜만에 남포동을 들려 보았다.

부영극장과 부산극장 사이 골목에 자리했던 '한마당'의 추억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일렬로 들어 선 적산가옥은 사라졌으나, 형태는 그대로였다.

'한마당'자리가 '오춘자비어'로 변신했고, 이층 '학고방'자리는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사람도 건물도 바뀌며, 모두들 하나 둘 사라지는 구나.





가까이 있는 국제시장에도 갔으나 오래된 정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작 눈에 들어오는 것이 미제 담배나 양주 파는 점방 뿐이더라.
그렇지만 국제시장옆의 '원조밀면' 집에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맛있는지 앞에 앉은 정영신씨도 안 보였는데, 가격까지 착한 오천원이었다.






밤 늦도록 깡통 야시장을 기웃거리며 촬영을 하였으나, 역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자갈치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꼼장어 안주에다 소주만 축내었다.

내일 울산 호계장 가는 길에 기와장 오세필씨나 만나련다.

쪽방에 앉아 수행하는 것 보다, 장돌뱅이 신세가 훨씬 상 팔자로구나.


사진, 글 / 조문호
























1953년 추운 겨울,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린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쟁 중의 영세 상인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로 인기를 끈 국제시장은 해방되어 귀국한 동포들의 노점으로 시작되었는데,

본래는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 1948년 '자유시장'이란 이름으로 단층목조건물 열 두동을 지었는데,

전쟁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성시를 이루자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꾼 것이다.

그 당시는 속칭 양키시장으로 원조물자나 군용품은 물론 외제밀수품들이 판 쳤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예술가들도 국제시장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잖은데,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며 온갖 정보의 원천이었다.


이 사진은 김한용선생께서 찍었으며,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진과 리얼리즘’에서 옮겼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뜨면서 한 때 국제시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세트장도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의 실제 모습은 이랬다.

나 역시 그 당시엔 가보지 못했으나 70년대 부산 남포동 살 때, 자주 다녔다.
잘하는 보신탕집이나 잡화상이 쭉 들어선 시장 길이 생각나지만,

방향감각의 착오인지 영화에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피난시절에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을 보니 실감난 것이다.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보았고,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아래사진은 그 무렵의 자갈치시장인데, 참 정겹고 그리운 풍경이다.
1951년 6월에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이경모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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