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판에서 인생을 불사른 최성환씨가 동자동에 들어온 지는 작년9월이다.
나이 일흔 다섯에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갔지만, 장가 안가길 천만다행이다 싶다.
혼자 살기도 어려운데,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그는 노가다 판에서도 아무 일이나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벌목장에서 목도를 하기 시작했으나,
그 후는 조경업체에서 나무 옮기는 일을 전담했는데,
일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단다.






동자동에 오기 전엔 뚝섬에서 살았는데, “뚝섬갈비”하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단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 빼면 할 이야기가 없듯이 여전히 군대 이야기로 침 튀긴다.
특수부대에 들어가 좆뺑이 친 것에서부터 김신조가 청와대 침투했던 때 이야기까지 신바람 났다.
힘들어도 군대생활이 그에게는 유일한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었다.






“왜, 일거리가 많지 않은 목도 일만 했냐?“고 물었더니, 그게 목도꾼의 가오란다.
목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벌떡 일어나 시범까지 보여준다.
다른 사람과 호흡이 맞아야 하기에 구령하는 자기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놈의 가오가 무엇인지, 일당 받아 술값으로 가오 잡다보니,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단다.






그런데, 퇴직금 없는 노가다의 노후보장은 누가 책임지나?
메달을 따지 못한 운동선수의 노후보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서울역 주변을 떠도는 노숙자들의 대부분이 노가다 출신이거나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걸 알기나 한가?



구계목도 시연장면 / '여성뉴스'사진 / 스크랩



목도 이야기를 들으니 ‘구계목도 보존회’장으로 있는 고향친구 김공조가 생각난다.
구계목도놀이는 영산면 구계리에서 벌목한 목재를 운반할 때 여러 명이 어깨에 메고
구령에 따라 보폭을 맞추어 나르던 노동을 재현한 것으로,
힘겨운 노동의 애환을 민속예술로 승화시킨 무형문화유산이다.
몇 년 전 경상남도 민속예술축제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옛날의 노동을 가끔씩 재현하는 일에는 이처럼 박수 받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천대받는 이 모순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가끔, 거리에 홀로앉아 한잔 술에 시름을 달래지만,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그림도 그린다.
손재주가 있기는 하나, 자동차바퀴의 위치가 뒤틀린 것으로 보아 아직 서툴렀다.
그러나 근사한 오픈카에 마후라 휘날리며 달리고 싶은 그의 꿈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오늘 잘 때, 근사한 오픈카에 멋진 여인 태워 천국을 무한 질주하는 꿈이나 꾸시게...
그런데, 자네 운전면허증이나 있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아! 이게 얼마 만인가?
산소에 조상님을 모셨지만, 고향을 등진지가 어언 십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한 때는 영산에서 열리는 삼일민속문화제를 기록하기 위해 해마다 다니기도 했으나,

카메라장비를 행사장에서 몽땅 도둑만나면서 그 작업은 중단되었고, 발길마저 멀어진 것이다.


 

 



늘 돈 안 되는 사진 찍느라 고향마저 잊고 살았는데, 지난 13일은 모처럼 기회가 생겼다.

영산초등학교 45회 친구들의 모임이 매년 8월15일마다 고향에서 열렸으나,

광복절행사와 겹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틀 앞 당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내장에 적힌 이승을 떠난 친구들의 이름 나열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죽기 전에 친구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 고물자동차까지 끌고 내려갔으니, 친구 만나는 대가도 수월찮게 든 셈이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지라 만년교 돌다리를 건너 남산부터 올라갔다.

‘고향 길은 밤에 가도 돌에 채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르는 산길이 편안하고 고즈넉했다.

마을 곳곳을 살펴보며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 올렸다

제일 오래된 기억으로는 한국전쟁통의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울 엄마 등에 업혀 남산 밑 미나리깡 뚝길을 가는데, 총 맞아 피 흘리던 군인이

물 좀 달라며 엄마치마를 부여잡았고, 옆에서는 그냥 가라고 총부리를 흔들었다.

등에 업은 나를 앞으로 돌려 업고, 내 뛰는 울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아직까지 벌떡거린다.

 

 

 


 

두 번째 기억은 50여 년 전, 제1회 영산삼일문화제의 기억이다.

올 해로 56회라니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그 때의 하이라이트도 역시 줄다리기였다.

동부 대장은 아버지가 맡았고, 서부 대장으로는 아버지의 친구인 하점원씨가 맡았다.

우리 집은 동부 팀의 거점이 되어 몇 날을 술과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 없었다.

줄다리기 행사를 지금처럼 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하점원씨는 아버지의 친구지만, 진영을 나누고 부터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다.

장수에게는 말이 제공되었는데, 말을 탄 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서부대장의 목검은 두 동강이가 났고, 아버지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포수가 쏜 신호탄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는데, 마른 논에서 이는 흙먼지와 함성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곁 줄이 끊어져 내동댕이치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계속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한 동안 진행되었다.

다들 논 턱에 힘을 실어 버텼으니 쉽게 끌려가지 않았는데, 그 긴박한 순간들은 정말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옛날에는 보름날 행사로 열린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가 독립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삼일문화제에 맞추어 열렸는데,

영산의 지식인이었던 조성국 선생이 계셨기에 올 곧은 전승이 가능했다.

중학생시절에는 국어교사로 계셨는데, 한 번은 “빨갱이라 붙들려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잘 아는 아버지에게 여쭈었더니, 별일 아니라 곧 석방될 것이라 하셨다.

문화의 힘으로 대동단결을 이루어내는 리더십이나 영산을 양파 주산지로 만드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다.

한 때는 '민예총'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 지역문화와 농업 발전의 양축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신 분이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줄다리기, 쇠머리대기의

중요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구계목도, 문오장 단오제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낙동강전투의 마지막 보루로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이라 남산위에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인간도 아니었던 전두환시절에는, 영산에서 유적을 발굴하다 이변이 생긴일도 있었다. 

전두환 조상 중 한 사람이 영산의 사또로 있다 떠날 때 만들어졌다는 공적비가 하나 출토된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덕에 남산의 전적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세 번째 기억은 남산 밑 냇가에서 물놀이하다, 수식이 형이었던 신쾌식씨로 부터 혼줄 난 일이다.

물웅덩이에 있는 나를 향해 넓은 판지를 던져 물밑에 깔았는데,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려야 했다,

자칫하면 익사로 연결될 번한 끔찍한 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기억으로는 연극도 한 몫 했다.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국군으로 분한 이순경선생의 절망스런 절규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남았다.

그리고 친구 조성호가 연지 못가에서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애간장을 다 녹였다.

얼마나 낭만적인 분위기에 동했는지, 그 때부터 트럼펫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하금순의 꾀꼬리 같은 노래 소리도 생각났다.

 

 

 



사회에 첫발을 디뎌 ‘농협’에서 일했던 일도 떠올랐다.

'부산농협'에서 '김해농협'을 거쳐 고향까지 흘러들었는데,

애인이 찾아 와 함박산 약수터 여관에서 하룻 밤 지낸 적이 있었다.

자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층 창문으로 날라 온 벚꽃 잎이 알몸 위에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녀는 잊었으나, 그 당시의 행복감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직장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 문 닫은 정미소에다 음악감상실을 차렸는데, 주로 시골 교사들이 단골이었다.

주말이면 부산에서 친구들이 몰려 와 날밤을 까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추억에 빠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결지로 정해진 도천면의 ‘한우마당’을 물어물어 찾아 갔더니, 이미 20여명의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구자훈, 김공조, 김이만, 김종석, 김종호, 문영태, 신규식, 신수식, 윤상고, 윤성관, 이상영, 이석중, 이세중,

이수만, 임성택, 조대권, 조성호, 황정철, 김순남, 하금순, 허영숙 등 하나같이 반가운 얼굴이었는데,

나만 늙은 줄 알았으나, 다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대권이가 “이빨이 와 그렇노?”라며 걱정스레 묻길래 “니 웃길라고 몇 개 빼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개구장이 같은 어린 시절은 오간데 없고, 다들 늙은이가 되어 점잔만 빼고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일을 보존하거나 전수하고 있는 신수식, 조대권, 김공조를 위시하여

문영태, 윤상고 등 고향을 지키는 고추 친구라고는 다섯 명 뿐이고,

서울, 부산, 마산은 물론, 인천, 구리, 성남, 충남 당진, 전남 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반가운 친구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겁도 없이 주는 대로 여기저기 술을 받아 마셨다가 일찍부터 맛이 가 버렸다.

성호와 금순이는 노래까지 불렀으나, 난 이가 빠진데다 목소리까지 쉬어 끼일 군번이 아니었다.

몸 생각하느라 다들 술을 아껴 먹었는지 모두 멀쩡했는데, 성호와 나만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다.

‘꽃은 반만 핀 것이 곱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해 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다들 술 마신 후 차를 끌고 가야하는데, 왜 난데없는 도천면에서 모였는지 모르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친구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고향을 찾았다면,

고향에서 즐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먼 길을 고기 먹으러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전에는 이차로 부곡온천에 방을 잡아 밤늦도록 놀며 못 다한 아쉬움을 풀었는데,

한 낮에 술자리가 파하니,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늙어가는 징표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어, 나 혼자 영산의 곳곳을 살피고 다녔다.

예전에 살았던 고향집도 찾아보고, 음악실 했던 정미소 자리도 가보고,

잡초가 무성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용서를 빌기도 했다.

결국은 부곡온천에 여장을 풀고 독수공방 지냈지만...

 

“친구야! 제발 오래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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