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방 an open room

권인경/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2023_1027 2023_1225

권인경 _ 열린 창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 아크릴채색 _135X197cm_2023

 

권인경 홈페이지_www.inkyungkwon.com

페이스북_www.facebook.com/inkyung.kwon.5

인스타그램_@artist_inkyung

 

초대일시 / 2023_1027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엠보이드 5,6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열린 방 이번 전시에서 권인경은 방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 방은 개인의 연장, 또는 확장으로 간주된다.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말했을 때, 그곳은 자폐적인 공간이기보다는 세계로 열린 일종의 플랫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예술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다는 것은 그 전에 닫힘을 전제한다. 자기가 없다면 그저 세계에 흡수될 것이고, 자기만 있다면 세계는 그저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두 극단은 모두 문제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세포막의 차원에서부터 닫힘과 열림이 유동적이다. 그래야 그가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개인의 방'은 심리적인 차원이 강조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 대해 '각 인간들의 최소 안식 공간인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심리적 상황, 떠오르는 상념들, 수집하는 대상들'을 다룬다고 밝힌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있는 지인에서 출발했지만, 이러한 난관은 정도의 차이일 뿐 현대인이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이다, 같은 외부 풍경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개인이 있으며, 작품에서는 그런 개인의 공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개인의 관점이 평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원근법적 세계는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력한 지배적 관점이 고정되는 것이 문제다. 장기적으로 고정된 체계는 궁극적으로는 변화하지만, 개인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다. 권인경의 작품이 다소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시점을 운용하는 것은 지배적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다. 장면 또는 풍경은 건축적 구조를 따라 펼쳐지지만, 그 구조들이 실제 건축처럼 합리적이지는 않다. 공간 사이에 언제든 새로운 공간이 끼어들 수 있고 또 사라질 수 있다. 한 화면에 많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촘촘하게 구획된 구조다. 합리적 공간의 선형적 이동에 따른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가 다성(多聲)적으로 들려온다. 현대인에게 분리된 독립 공간은 누구나 원하는 물리적, 심리적 자원이다.

 

권인경_너의 마음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136X176cm_2023
권인경_홀로 앉은 기억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136X176cm_2023
권인경_서로 다른 기억들1_한지에 수묵,아크릴채색_194X130cm_2023
권인경_떠오른 기억들4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72X140cm_2023
권인경_떠오른 기억들1_옻칠지에 수묵,꼴라쥬,아크릴채색_53X73cm_2023
권인경 _ 떠오른 기억들2_ 한지에 고서 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47.5X79cm_2023
권인경 _ 떠오른 기억들3_ 옻칠지에 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47X90cm_2023

방 안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외부적 사회관계로부터 탈주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 선택이지 강제가 아니다.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의 풍경들은 사람의 흔적을 보여준다. 심리적 공간이라고 해서 '단순한 흔적'이어선 안되고 '기록으로 서로 다른 그곳들을' 남기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이 스며있는 현대적인 사물 뿐 아니라, 고서를 꼴라주하는 형식에서 나타난다. 기억은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을 넘나든다. 작품 속 가구나 건축적 구조 등에 주로 꼴라주된 고서는 '말이 내뱉어진 순간'을 고착하는 것이며, '언어가 삶에 묻어'있음을 강조한다. 고서에 적힌 언어라서 고풍스럽지만, 그 또한 지금의 상용어처럼 한 시대의 지배적 언어였을 것이며, 주체를 구성했을 것이다. 인류학이나 언어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 사회의 지배적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기호, 기표/기의가 분리되는 언어 자체의 분열적 조건에 당면한다. '환자'는 이 조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 일 따름이다. 속해야 하지만, 완전히 속하기 싫은 애증에 찬 구조이다. 정신분석학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구조적 이론에 저항하는 저자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카오스모제]에 의하면, 상징적 질서는 결정론적인 납 망토처럼 죽음의 운명처럼 무형적 세계를 짓누른다. 그에 의하면 말(발화)은 법의 차원, 즉 사실, 동작, 감정의 통제 차원에 고정된 문자적인 기호학의 지배 아래 통용될 때 공허해진다.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을 염두에 둔다. 마단 사럽이 해석하는 라깡의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상징계를 통해 주체가 구성되므로, 주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담론에 의해 그에게 할당되는 장소가 있다. 상징계가 자율적인 구조가 될 때 인간의 자리는 과연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결정론으로부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이라는 구조적 공간을 개인과 비유하면서 종횡무진 연결망을 구축하는 것은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넘어서려는 방식이다.

 

권인경_그때의 기억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53.5X107.5cm_2023
권인경 _ 서로 다른 기억들 2_ 옻칠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 아크릴채색 _142X;73cm_2023
권인경 _ 너와 나의 이야기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197X135cm_2023
권인경 _ 붉은 기억 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176X136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2_ 한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 아크릴채색 _72X;50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35.5X55.6cm_2023

권인경은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형식주의는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에 대한 서사는 인간이 등장해야 자연스럽지만, 작품에는 정작 인간이 없고, 간혹 뜬금없이 등장하는 의자는 인간의, 요컨대 부재함으로서 현존하는 자리를 상징한다. 인간관계로부터 출발하는 현대적 병이 있지만, 작가이기에 자기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방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가까운 이가 어릴 적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앓았고, 이후 오지랖 넓은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 폭력을 겪으면서 외부와 단절된 상황과 관련된다. 타인과의 언어적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그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지만, 문을 조금은 열어 놓는다고 한다. 세상과의 조그만 통로의 확보이다. 하지만 정상/이상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보통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우호적인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본능이 개인으로 하여금 점점 오래 방에 머물게 한다. '스마트'한 세상이 열리면서 나가지 않는(않아도 되는) 경향은 강화된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대면' 관계는 상대화된다. 대면은 이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된 것이다. 세계로 열리는 문이나 창이라는 비유는 물리적인 만큼이나 가상적이다. 하지만 정보혁명의 시대에는 현실을 대신하는 코드들의 세계에 갇혀 있기 십상이다. 방의 역할을 강화되고 있다. 개인공간이 아닌 상업시설에도 'OO'이 많지 않은가. 대부분 일탈적인 'OO'''이라는 공간 특유의 비가시성에 대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권인경의 방들은 자족적이지 않고 계속되는 연결망이 특징적이다. 내부와 외부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고 이러한 변화무쌍한 공간관은 이와 연동되는 시간관과 연결된다.

 

권인경 _ 그날의 기억3_ 한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4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 5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6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 4_ 고서에 수묵 _15.5X24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5_ 고서에 수묵 _15.5X24cm_2023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명사적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강조했다. 저자에 의하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선험적 공간이 아닌 찾아내야 하는 자리는 시간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시간은 무엇보다도 서사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기억 시리즈에서 '기억'이라는 키워드는 시간과 관련된 범주이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공간들은 관객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속에 많이 쟁여져 있는 시공간만큼이나 빠른 보폭을 요구한다. 국면의 빠른 전환은 대도시를 통과할 때의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도시에서 촘촘하게 자리하는 방들은 철저히 계층적이다. 가난한 1인 가구의 허름한 주거지가 된 고시원부터 시작해서, 보다 보편적으로는 아파트의 방들이나 오피스텔이 그렇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펜트하우스까지 공간은 가장 값비싼 물적 자원이다. 방은 초라하든 화려하든 개인의 심리적 연장이자 보호 역할을 맡는다. 우리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킨다. 인간은 생산/소비적 체계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구조가 내면화 되어 개인은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 한다.  이선영

 

 

땅을 보고 걷는 사람 A Ground Watcher

이경하展 / LEEKYOUNGHA / 李京夏 / painting\

2023_0111 ▶ 2023_0212

이경하_초록 다음의 색들2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2

 

초대일시 / 2023_0111_수요일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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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자연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았다. 네팔의 얼음 덮인 높은 산은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먼 곳이었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온갖 잡다한 일상들, 아스팔트 바닥과 콘크리트, 플라스틱들 뿐 이었다. 마음의 고민들이 실현되기 어려울 때 마다 얼음 덮인 먼 곳의 산이 마치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처럼 떠올랐고, 이러한 먼 산을 나와 가까이 있는 것들과 함께 놓고 그리면서 내 삶의 심정적 위치를 그림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 자연은 영원히 회귀되는 순환 속에서 변치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 거대한 자연 위에 사람들은 티끌처럼 스쳐지나가는 미약한 존재라는 마음으로 거대한 자연을 색을 다 뺀 상태로 (목탄으로) 표현하고 사람은 작게 그려 넣었던 것이 그러한 이유였다.

 

이경하_땅, 잎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22
이경하_초록 다음의 색들1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22

시간이 한참 흐르고, 매일 현실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해치워 나가야 하는 잡다한 일상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보내면서, 에베레스트산처럼 먼 곳을 보던 시선은 바로 내 발밑의 잡풀들, 돌멩이들, 낙엽들, 새싹들로 옮겨졌다. '순환'이라는 단어로 압축하였던 자연의 변화는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도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나의 일상을 좌지우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던 먼 시선이 내 발밑으로 좁아졌다. 나는 매일 매일 숲과 호숫가를 걸으면서, 도시의 아스팔트길, 보도블럭을 걸으면서 발밑의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땅바닥을 들여다보는 습관은 점점 더 해져, 보도블럭 사이로 삐죽이 솟아난 잡풀들과 깊은 숲 속 자갈과 풀틈 사이의 작은 모래알 한 톨까지 살펴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봄에는 묵은 낙엽들 사이로 새로 돋아나는 온갖 새싹과 이파리들,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꽃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가을에는 온 산이 한꺼번에 떨어내는 잎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려고 숲 속을 누비고 다녔다.

 

이경하_공터드로잉9_종이에 목탄_40×40cm_2021
이경하_공터드로잉3_종이에 목탄_40×40cm_2021
이경하_공터드로잉4_종이에 목탄_76×76cm_2021

갖가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다양한 색채와 다양한 형태의 잎, 열매, 가지들은 땅 바닥 위에서 제멋대로 어우러지면서 미학적으로 완전한 아름다운 구성을 이룬다. 둥글거나, 뾰족뾰족하거나, 길거나, 납작하거나 한 잎들이 제각각 색을 가지고 자기 형태의 존재를 뽐내고, 긴 가지들, 짧은 가지들, 구부러진 가지들과 작은 열매들은 어느 한 뼘의 땅 위에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위해 심혈을 다하여 떨어져 내려온다. 어느 구석을 바라보아도 자연이 만들어내는 구성은 다 새롭고 아름답다. 테이블 위에 유한한 대상들을 올려 그렸던,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었던 네덜란드 정물화가 생각났다. 화가의 감각이나 관습에 의한 배치가 아니라 중력과 바람으로 우연히 놓여진 낙엽과 열매들, 돌맹이와 가지들의 색과 배치의 완벽성과 그 짧은 생명력은 네덜란드 정물화가 주는 의미보다 몇 배는 더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잘 다룰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이경하_땅, 잎3_캔버스에 유채_19×24cm_2022

큰 산을 오르거나, 내려오는 사람들을 그리다가 어느새 내가 그 산 속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다. 산은 멀고 시커멓고 거대한 대상이 아니라, 내가 숨 쉬는 공기와 내 몸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땅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채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2023년 1월) ■ 이경하

 

Vol.20230111b | 이경하展 / LEEKYOUNGHA / 李京夏 / painting

펜슬리즘 Pencilism

김범중_정헌조_박미현_김혜숙_이지영_문기전展 

 

2022_0330 ▶ 2022_042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협찬 / 서울아트가이드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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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슬로 작업한 회화 전시에 붙여진 『펜슬리즘(Pencilism)』이라는 조어는 미술 재료로서는 기초적인 것에 속하는 펜슬을 사조의 단계로 고양시키려 한다. 이 전시의 여섯 작가는 오랫동안 펜슬로 작업을 해왔지만, 이러한 선택을 개인적 취향이나 형식을 넘어서 보편화하려는 것이다. 본격적인 작품에 앞서 확정되지 않은 이런저런 구상을 기록해왔던 펜슬이 단독의 매체로 설 수 있을까. '--이즘'이라는 용어가 다소간 거창하기에 출발은 더욱 미미해 보인다. 하지만 기원과 목적 사이의 격차는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예술은 신화적 기원도 과학적 목적도 아니다. 예술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중간에 있다. 모든 것을 아련한 기원으로 소급하는 경향과 현실적 결과만 중시하는 경향은 예술의 가능성을 협소하게 한다. 전자의 형이상학적 태도는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애매하고, 후자의 생산성 만능주의는 보이는 현실만 전부로 간주한다.

 

김범중_Dreary Shift_장지에 펜슬_20×100cm_2022_부분

이 전시의 작품들은 단지 물성의 잘 표현한다는 형식적 단계를 넘어서, 펜슬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펼친다. 펜슬을 끼고 살았던 그들은 펜슬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늠한다. 작품들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듯이, 캔버스에 발리는 물감 자국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펜슬만으로...'라는 선택은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리자는 모더니즘적 기획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출발하는 것이지 펜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그들은 펜슬로 자신을 포함한 세상과 대화한다. 그 대화에 너무 많은 단계의 매개가 필요하면 대화는 불가능하거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이미 실현되고 있는 코드화되는 세상에서의 소통은 어떠한가. 양이 아닌 소통의 질적 차원을 생각하면 극히 회의적이다. 펜슬은 여러 필기구 중에 어릴 때부터 가장 쉽게 접하는 매체로 내용에 집중하기에 편리한, 나름대로 투명한 매체다.

 

정헌조_the hinge of the Way_종이에 펜슬_162×130.3cm_2011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투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펜슬은 물성부터 세계를 보는 창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전시된 작품들은 정곡을 찌르는 침같은 지점부터 무엇이 나올지 무엇으로 변모될지 모를 미지의 영역까지, 관조로부터 행동까지 다층의 진폭을 가진다. 모든 매체가 몸의 연장이지만 펜슬은 특히 지진계처럼 섬세하게 몸과 마음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 펜슬은 심신의 미세한 굴곡 면을 읽어 조형적으로 번역한다. 펜슬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가 가장 짧은 순발력 있는 매체다. 미술에서 가장 일반적인 재료인 물감은 붓이라는 물컹한 매개를 거친다. 때로 더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붓 대신 화가의 손이 직접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바늘 끝 같은, 또는 거미줄 같은 팽팽한 표현은 힘들다. 이 전시의 한 작가는 '가는 연필 선의 아주 연약하고 섬세한 특성과 그것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광물성 단단함이 내게는 참 매력적'(이지영)이라고 말한다. ● 복제와 속도라는 면에서 탁월한 전자 미디어의 경우 기하학적 표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기계적 코드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컴퓨터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일 것이다. 코드는 손가락만을 원한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적인 모습은 눈에 대한 손의 극대의 종속을 표시한다고 말한다. 손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회화의 야생적 바탕을 지지하면서, 손가락적인 것에 대비되는 손적인 것을 부각시킨다. 연필을 쥔 손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과는 다른 것이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는 미디어는 이를 뒤쫒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아마추어에 머물게 한다. 물론 기술과 기계는 구별이 돼야 할 것이다. 기계로서의 미디어는 기술자가 가장 잘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또 다른 문제다.

 

박미현_1-1_종이에 샤프 연필_38×38cm_2022

최신 기계가 등장하는 작품일수록 어설픈 장난감 같은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장난감'은 의미는커녕 재미조차도 지속시키기 힘들다. 예술은 기계로 대변되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과 대응해왔다. 내용과 형식, 즉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는 이원 항을 단축하는 것이 펜슬리즘의 목표 중 하나다. 이 전시의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펜슬의 달인들이라 할 만하다. 물론 작가가 달인과 다른 점은 소재와 기술이 표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형식주의다. '펜슬리즘'도 이러한 염려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지시대상에 얽매이는 재현주의를 벗어난 근대미술이 캔버스에 물감을 잘 반죽해서 바르는 식의 '달인'으로 귀결된 예가 있지 않은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 작품은 정적이거나 동적이지만 모두 펜슬로 그어진 가는 선의 긴장감을 활용한다. 마치 줄 위에 선 광대처럼 첨예한 상황과 게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대에게 추락 방지 그물망같은 안전장치는 없다. ●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이 전시의 작품들 대다수가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펜슬리즘은 밑을 위로 올린다. 하지만 그 아래는 없다. 가느다란 선 아래는 바로 심연이나 우주공간이다. 선 또한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조형적 언어로 작동하는 한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져 존재 또는 운동한다. 선들은 이 중성적인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지지하면서 형태를 만들고 변형을 거듭할 따름이다. 진한 바탕 또한 수없는 선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각적 공간을 넘어선 촉각적 공간이다. 촉각은 가장 근본적인 감각이며, 시각처럼 기계에 의해 거의 식민화 되지 않았다. 어린이가 제일 먼저 쥐는 필기구는 연필이다. 중학생이 돼서야 만년필이나 볼펜을 썼던 기억이 있다. 쉽게 지울 수 있는 연필은 결정되지 않은 것들을 부담 없이 실험하게 해준다. 의도와 결과 사이에 최단 거리를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현대사회에서 연필의 위상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때부터 키보드에 더 능숙해지는 시대가 와서 연필은 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연필 재료인 광산업의 현장이 관광지 등으로 변신하듯 말이다.

 

김혜숙_NO ADDRESS 3_장지에 펜슬, 먹_110.5×160cm_2017

당시에 주어진 기능을 다한 오래된 사물은 예술로 되돌아 오곤 한다. 단기적 효율만을 중시하여 여러 모색이 없을수록 연필은 물론 그림조차도 유물이 된다. 연필심은 흑연에 강도(경도)를 더하기 위해 진흙을 섞고 구워 만들어진 것이다. 용도에 따라 흑연의 비율을 달라진다. 흑연은 검정이지만 화학성분은 보석과 같다. 양자는 탄소로 이루어진 광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검은 흑연과 빛나는 보석은 단지 강밀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높은 압력에 의한 변성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광물은 땅속 깊은 곳에서 채굴해야 하는 노고를 상징한다. 간편하게 손에 쥘 수 있는 연필의 주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은 엄청난 저항이 따르는 노동과 기술의 결과이다. 연필의 시원적 형태는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같은 형태는 화학자이자 화가였던 콩테(Nicola Jacques Conté)가 18세기 말에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필 또한 산업혁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파헤쳐졌던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고, 자연을 도구화 대상화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주체의 자의식을 기록하던 매체인 셈이다. ● 연필심이 닳는 만큼 작품은 자라나는 과정은 그것이 깊은 곳에 자리했던 것 만큼이나 인내와 도약 그 모두를 필요로 한다. 작업은 무의식의 광산에서 채굴한 검은 물질을 동질이상의 존재인 보석으로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연필이 드로잉같은 밑 작업에 쓰였던 것은 쉽게 지울 수 있고, 손에 닿는 가장 친숙한 필기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 표면을 달리는 연필 한 자루처럼 하나의 차원으로 출렁이면서 처음과 끝을 잇는다. 구상만 하기보다 일단 시작해서 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면 좋은데, 연필이라는 만만해 보이는 도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종이와 연필은 미술의 어느 매체보다도 간편하게 시작할 수 있다. 표현할 것이 많을수록 수단은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연필은 이상적이다. 연필로 시작을 빨리 하거나 때로는 시작을 먼저 하거나 할 수 있다. 연필은 생각 이후가 아니라 생각과 더불어 간다. 때로는 생각보다 더 빨리 간다. 연필의 문턱은 낮다. 하지만 그 끝은 없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개념적인 경향이 있지만, 개념은 출발점일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념이란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이라고 말했다.

 

이지영_Black See_장지에 펜슬_162×130.3cm_2020

개념미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 전시의 작가들은 무엇인가를 잡다하게 말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미학적 형상들은(그리고 그것을 창조하는 스타일은) 수사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생성가능케 해주는 감지 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펜슬리즘은 개념보다는 지각이나 정서와 관련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예술 속에 보존되는 것은 지각이나 정서이다. 만약에 그것이 개념적이라면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대개 작품은 가면서 생각하고 작품에는 경로를 바꾼 흔적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같은 여정을 간다해도 완전한 반복은 없다. ● 하나의 선은 매번의 호흡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펜슬은 그 미세한 결을 살려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가능한 세계가 어디까지일지를 두루 보여준다. 연필로 대변되지만, 샤프펜슬이나 색연필, 먹, 석묵(graphite) 등 종이라는 바탕과 잘 어우러져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료도 함께 쓰였다. 직선을 포함한 여러 굴곡을 가진 선이 주된 형식이지만, 종이 위에 가해진 연필심의 압력은 가루를 만들어 내며, 이 또한 회화적 효과를 낳는다. 재료 때문인지 작품들은 거의 모노 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세상의 화려함보다는 흑백사진같은 깊이와 질감을 강조한다. 작가가 본 세상은 잘 찍힌 흑백 사진처럼 흑백의 계조로 조율되어 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작품들은 매체가 한정 됨으로서 차이의 계열은 더 섬세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재현적 형상이 부재한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은 묵상의 공간을. 자연이나 인간, 도시와 구조 등이 나타나는 2층의 작품들은 사건의 시간을 표현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존재론적이고 후자는 인식론적이다.

 

문기전_관계풍경_Q-L-R 7_종이에 펜슬_90×160cm_2021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원초적인 용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정헌조, 자신이 만든 어휘집을 통해서 세상을 구축/해체하는 박미현, 수많은 선으로 축적된 시공간의 리듬이 있는 김범중의 작품은 관조적이다. 공간과 시간이 연결되어 있듯이 정지에는 움직임이, 움직임에도 정지가 내재한다. 전자의 그룹은 정적이고 후자는 동적이지만, 정중동의 원칙은 공히 적용된다. 추상적인 어법에서 선의 내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며 그 진폭을 주변과 공유한다. 자신이 맞딱뜨린 낯선 공간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가시화하는 김혜숙, 연필을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문기전, 인간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이지영의 작품은 역동적이다. 거기에는 행위가 있고 극적인 연결망 사이에 내재된 운동이 있다. 후자의 경우 움직임을 포함한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회화라는 매체의 한계성에 의해 정적인 방식으로 동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복합, 비슷한 외모의 많은 인간이 출현하는 지점은 이동과 움직임을 나타낸다.

 

김범중_Coherence_장지에 펜슬_100×100cm_2021

묵상의 공간-김범중, 정헌조, 박미현 ● 5개로 나뉘어진 면 그 한가운데서 떠오르는 밝은 사각형은 빛과 어둠 사이의 드라마를 절도 있는 어법으로 표현한다. 곧 화면의 명암 관계가 바뀔 수 있는 어떤 시작이다. 음악적 감각이 느껴지는 김범중의 작품에서 명암의 차이는 리듬의 강약이나 음향의 차이와 연결된다. 빛과 어둠은 광학적 현상이지만, 하도 그어서 바탕이 일어나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촉각적이다. 얼룩덜룩한 표면은 얼마나 강도 있게 작업했는지 알려준다. 빛의 배경인 칠흙같은 어둠은 암중모색 중의 선들이 집적된 결과다. 정사각형으로 응집된 작품 「Coherence」(2022)는 가로줄과 세로줄이 집적되어 일정한 짜임을 이루는 작품들은 텍스트와 비교될 수 있다. 정해진 크기가 있지만 가로로든 세로로든 확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무한을 지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이,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일이 예술의 고유함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무한을 구원하고자 한다. 과학은 지시 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한다. 하지만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 눌러 그은 선들에서 두께는 짙은 어둠과 아지랑이 같은 보풀이다. 작가는 텍스트를 짜면서 무늬를 집어넣는다. 시각적 관습에서 수평선 지점에 기가 막히게 잘 짜깁기된 섬유같기도 하다. 완벽한 봉합은 텍스트를 짜는 사람의 몫이다. 책부터 우주까지 모든 세계를 텍스트로 간주하는 현대적 관점이 있다. 장지에 펜슬로 작업한 「Dreary Shift」(2022)는 나무로 된 현악기와 현을 떠올린다. 리듬감 있는 하이라이트의 상이한 배치가 음악적 비유를 가능하게 한다. 선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선적 인과관계와 거리가 멀다. 선들은 순차적이기 보다는 공명한다. 작가는 길쭉하게 생긴 아담한 크기의 작품을 현악기와 비유한 바 있다. 파동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통해 소리는 시각의 언어로 번역된다. 현악기처럼 섬세한 선율과 비교되는 그의 작품은 서로 다른 음고를 나란히 배치하여 차이의 조화를 꾀한다. 작품 「Duration」(2022)는 가로 방향의 확장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지속은 수평으로 흐르는 강물같은 시간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간격은 제각각이다. 질감을 가지는 텍스트는 작업을 하는 순간의 맥박과 호흡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 미세한 섬유질 선들의 집적체이다.

 

정헌조_edge_종이에 펜슬_116.8×91cm_2012

정헌조의 작품은 미세한 명암이 있는 추상적 형태를 선만으로 완성한다. 작업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동렬에 있다. 정밀한 형태 안팎의 명암은 오직 선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수술하는 의사같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형상을 위한 완벽주의자의 선택이다. 화면에는 그려진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엠보싱(요철凹凸)으로 만들어진 형상이 있다. 그려진 형태가 만드는 음영 뿐 아니라 이 요철 또한 음영을 드리우는데, 두 음영 중 무엇이 진정한 환영인가. 작가는 '마치 꼭 맞는 틀에 경첩이 끼워졌을 때 서로에게 끊임없이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것과 저것이 더이상 서로의 반대편을 찾지 않는 분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 안에 모든 것을 갖춘 자족적인 체계에 대한 은유다. 자족적 체계라고 해서 닫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화면 밖으로 퍼지고 있다. 작품 「드로잉. the hinge of the Way」(2011)는 두 개의 원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또는 제자리에서 수축과 팽창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생각하면 하나는 밀고 나오고 다른 하나는 밀려 들어갈 수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또는 블랙홀이나 화이트홀처럼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해 연결될 것 같다. ● 두 가지 다른 방식은 보이지 않는 차원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명도의 차이가 확연한 이 두 가지 대조항은 빛과 그림자, 또는 낮과 밤 같은 오래된 상징체계로 엮여 있다. 조화를 이루는 상보적 우주에 대한 상징체계다. 하지만 두 대조항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는 않는다. 두 형태는 대조적이지만 음/양, 플러스/마이너스 같은 강한 대조가 아니다. 또한 각각의 형태가 하나의 경계만으로 구획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각각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환영이 있다. 형태는 내적으로도 진동하고 외적으로도 운동한다. 평면적인 원이 아니라, 구처럼 탄력 있다. 또 다른 「the hinge of the Way」(2011)는 무엇인가 끼웠을 때 물 샐 틈 없이 고정시킬 수 있을 만큼 섬세한 형태의 중첩이 있다. 이어폰이나 텀블러같이 밀폐력이 있으면서도 열려야 하는 물건에 장착되면 좋을 듯한 형태다. 같은 인형이 크기만 다르게 겹쳐지는 러시아 인형처럼 형태 속의 형태들이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파장이 퍼져 나가는 동심원 형태는 그 울림을 내부에 충분히 머물게 한다. 풍부한 볼륨감을 가진 이 형상은 볼록하면서도 오목한 역할을 한다.

 

박미현_1-7_종이에 샤프펜슬_38×38cm_2022

박미현의 작품은 같은 크기의 원들과 그것을 잇는 선이 만든 면, 그리고 새까맣게 칠해졌거나 하얗게 비워든 형태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소우주다. 흑과 백은 차이에 대한 극적인 기호이다. 작가는 본질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말한다. 같은 크기의 작품들이라 잠재적인 동감이 느껴진다. 기하학적 애니매이션이라 할 만하다. 가령 어떤 순서로 보는가에 따라 검은 방은 창살문으로, 또는 말없음표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이 반전될 때도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 지점이다. 장기판이나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종이 위에 펼쳐지는 조합은 하얀 테두리를 한 검은 사각형, 하얀 창살 내부가 어두컴컴한 방, 질서 있게 쌓아놓은 모습, 검은 바탕에 하얀 구멍들로 나타난다. 작가는 자신의 어휘를 정하고 그것의 공간적 배열을 통해 일련의 문장을 만든다. 각 작품이 말하는 바는 다른 작품과의 차이로만 결정된다는 점에서 언어학의 가정을 공유한다. 물론 자신만의 조형적 어법이다. '예술은 자체의 법칙을 스스로 설정하는 자'(쉴러)이듯이 말이다. 자신의 규칙이 완벽하게 관철되는 세계의 물리적 규모는 결코 크지 않다. 자신의 작품이 전부일 수 있도록 작은 화면에 모든 것을 접어 넣는다. ● 칠해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어둠은 밝은 형태의 바탕이 된다. 점과 선, 면의 차이는 마치 미지의 문자처럼 무엇인가 말한다. 그것은 세계의 수많은 언어의 형태를 만드는 원리다. 언어는 흑과 백, 그리고 간격, 구부러짐 등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은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연속적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분절화된 언어를 만들었다. 세계의 수많은 언어는 각기 달리 들리지만 분절화라는 방식은 같다. 조형적 언어는 구조적 측면이 있기에 선적 메시지로 번역되려면 우회로가 필요할 것이다. 박미현의 작품은 산문이 아니라 시와 같다. 오늘날 정보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좀 더 단순한 기호로의 환원이자 그 조합이며, 그것은 좀 더 많은 영역의 코드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는 지시대상과 규칙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규칙은 자의적이지만 한번 정해지면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것이 언어, 놀이, 예술의 공통점이다. 작품의 구성 요소는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언어적 메시지인 한 보충을 필요로 하는 불안정성을 띈다. 현대 언어학이 말하듯,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연속해서 다른 기호들을 산출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김혜숙_장미동 9_장지에 샤프펜슬_60.5×145cm_2015

사건의 시간-김혜숙, 이지영, 문기전 ● 한국의 도시는 급격하게 재개발된 부분과 구도심이 대조된 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구도심 또한 어느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것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이제 시간은 더욱 가속도를 붙이기 때문에 신/구 사이의 단절감은 크다. 한국사회는 비단 건축물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단층이 두드러진다. 작가의 눈에 띈 군산같은 곳은 시간의 층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히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만하다. 한 건물에도 여러 시기가 덧대어 있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지만, 작가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고 여러 이질적 요소들을 더 조밀하게 또는 더 늘려서 배치한다. 샤프펜슬은 거의 건축가가 그린 도면같은 화면을 그리는데 유용한 도구다. 작품 「NO ADDRESS 3」(2017)은 손의 힘이 직접 닫는 펜슬의 속성이 극대화된 기하학적 형태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먹과 어우러진 모노톤의 화면은 낯설게 다가오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분석과 이해를 보여준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건축가처럼 공간의 주체로 서 본다. 현실 속에서 젊은 작가는 가난한 공간 소비자에 불과하다. 김혜숙의 작품에서 건축적 구조는 졉혀지거나 펼쳐지면서 공간을 다채롭게 횡단한다. ● 작품 「NO ADDRESS 5」(2017)은 건축물의 일부처럼 보이는 구조를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구성한다. 건축적 형태는 접혀지고 펼쳐지고 관통하고 꺽인다. 여백같은 공백은 현실적 맥락을 삭제하며 작가가 제시한 분석적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조가 잘리거나 이어지며 화면 밖으로도 확장세다. 실제로는 만들 수는 없는 불가사의한 구조다. 흑백 사진이 세계를 자신만의 명암으로 재탄생시키듯이, 펜슬과 먹은 형태와 명암의 정도를 자유롭게 실험하는 장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것은 지시대상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16년에 제작된 「장미동」 시리즈는 근대건축처럼 반듯반듯하지만, 구조와 외피는 동떨어져 있다. 겉모습으로 안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의 투명성은 사라진다. 근대적 어법을 활용했지만, 정반대의 의미를 담는다. 가느다란 지지대 위의 건축물은 기우뚱한 것이 위태롭다. 시스템은 토대와 상부구조를 갖춘 건축과 비교되곤 했는데, 작가가 파악하는 시스템은 부분적으로만 강고할 뿐 그 근거가 취약하다. 건축을 이루는 여러 패턴을 재구성한 평면은 실내외의 건축적 요소들이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조형적으로 재배열된다. 작가는 불합리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표현한다.

 

이지영_Forest Stage-역할극_장지에 펜슬_130.3×161.5cm_2020

이지영은 자신의 작품을 '인물원'이라고 말한다. 야생의 동물처럼 인간들 또한 지배적 시스템에 따라 여기저기 배치되어 관찰대상이 된다. 자연이라는 타자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도 일어난다.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인 인간의 범위는 극히 협소하다. 동물원에도 가짜 자연이 배경을 이루듯 인물원에도 검은 산수같은 인공구조물이 자리한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인물은 한사람처럼 똑같으며 집단 군무라도 하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개인의 세계는 과도할 만큼 강조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천편일률적이다. 드로잉은 꽉 짜인 계획을 실행하는 듯하지만, 작가는 별도의 스케치 없이 진행한다. 인물원은 동물원처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공간적으로 편집된다. 이전 작품 「5 story house」(2021)처럼, 여러 층으로 나뉘어진 건물같은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가 어떤 행위를 하는 식이다. 이지영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여러 명이지만 동작의 연속성과 관련된 다수의 인물일 수도 있다. 다수의 인물들은 일상의 동작을 마치 집단 안무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칸막이 처진 공간에서 각기 다른 우주를 연출한다. 작가는 그 전체를 투명하게 볼 수 있으며 새로운 배경과 인물을 지정할 수도 있다. ●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Forest Stage- 역할극」(2020)에서도 작가는 작품 안의 이모저모를 동시에 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인물은 여성이 확실하지만ㅡ 그 분신처럼 보이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들은 닮아있다. 이전 작품 「그녀의 역사」(2017)에서 나오는 인물들처럼, '그녀'에게는 남성적 측면도 있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반대가 아니라 모든 모호한 성을 대변한다. 이상적인 남성적 주체처럼 여성은 단일하지 않다. 작품 「선택」(2017)은 위험과 유희가 함께하는 서커스같은 풍경이다. 한 화면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지영의 작품에서 검은 풍선들은 가벼운 인간 존재들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여기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작품 「Black See」(2020)에서 하늘과 바다로 가득한 화면 가장자리에서 노는 사람들은 우주와 인간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연필이라는 매체는 그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아낼 수 있다. 무엇이든 나오고 무엇이든 가라앉을 수 있는 생과 사를 연결짓는 거대한 우주는 연필심의 색과 같을 것이다. 연필은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연결망은 자유롭다.

 

문기전_인체산수 Q-L-A 32_종이에 펜슬_90×160cm_2021

여러 부분들이 연결된 문기전의 작품은 세상의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경로와 관련된다. 원자부터 뇌까지에 이르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복잡한 여정들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빛의 잔상은 몽환적이지만, 여기에서도 서로 다른 차원들이 연결되는 방식이 강조된다. 입자이며 파동인 빛은 어느 한 측면으로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상보적 원리를 내포한다. 인간의 마음부터 우주적 풍경까지 담는 유연한 연필은 종이 표면에 닿는 압력에 의해서 미세한 가루를 남기는데, 이는 파동과 입자로 이루어진 우주와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인체라는 보다 직관적인 형태를 통해 과학의 법칙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연필은 정보와 무의식의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 인체가 산수인 작품은 소우주와 대우주의 원리를 형상적으로 결합한다. 작품 「관계풍경 7」(2021)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과 환경, 즉 자연이나 도시의 일부들이 연결되어 있다. 크기의 차원은 무시되었고 작가의 상상과 조형적 요구에 의해 조율되었다. 몸을 만지는 손의 자세는 관계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에 호소한다. 연필은 불연속적인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연결과 단절이 거듭되는 가운데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미지들이 운무와도 같이 퍼져있다. ● 도시적 풍경이 주를 이루는 작품 「인체산수 32」(2021)는 보이는 광경의 외적 묘사가 아니라 그곳을 다녔을 몸의 체험이 녹아있는 풍경이다. 오르막도 있고 잘 관리된 조경이 나타나는가하면 가로등도 줄지어 있다. 어떤 광경은 한 장의 사진처럼 사각형 안에 배치된다. 카메라처럼 눈으로 찍었던 광경이 기억에 남아 작품에 호출된 것이다. 최근에 제작된 문기전의 인체 산수 시리즈는 다른 구조물이 없이 인체로만 구성된 산수로, 그의 작품은 인체가 다양한 주름이 잡혀있음을 알려준다. 모체 속 배아가 독립된 성체가 되고 궁극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모든 과정이 주름이 접혀지고 펼쳐지는 운동/사건의 연속이다. 풍경을 이루는 산이나 계곡, 물 또한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전의 「자아풍경」(2019) 시리즈처럼 인간의 심리 또한 그렇다. 수면 아래의 풍경과 위의 풍경이 사뭇 다르다. 여러 광경을 조합하는 펜슬의 역할은 단순히 복사해서 붙이기와는 다르다. 컴퓨터에서의 그러한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반면 붙여야 할 장면들을 손수 그리는 것은 보다 많은 시간성이 개입되는 것이고, 그 사이에서 생성-소멸되는 것이 있다. 이때의 반복은 더 많은 차이를 낳는 것이다. ■ 이선영

 

 

Vol.20220330b | 펜슬리즘 Pencilism展

타자의 초상

 

김준기展 / KIMJUNKI / 金埈基 / installation

2020_1118 ▶ 2020_1129

 

김준기_平安民國圖_RGB LED 라이트박스에 아크릴 거울,혼합재료_90×540cm_

2020김준기_平安民國_한지 캐스팅_400×600cm, 가변설치_2020

 

 

김준기 블로그_blog.naver.com/forevertrac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2,3,4전시장

Tel. +82.(0)2.733.8873

www.gallerymeme.com

 

 

『타자의 초상』은 2015년 발표된 『타자의 풍경』 개인전 이후 5년이 지나 준비하는 제 10회 김준기 개인전이다. ● 7회(2013년), 8회(2014년), 9회(2015년)를 거쳐 발표된 「타자의 초상」과 「타자의 풍경」작업은 아버지의 초상을 통해 바라본 나의 모습과 생성하고 소멸하는 풍경의 편린들을 거울에 새긴 작업들이다. 거울의 뒷면을 긁어내어 벗겨진 흔적사이로 투과된 수십만 개의 작은 빛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나의 작업은 타자의 존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로 재현이라는 끊임없는 그리기(새기기, 긁어내기)의 행위와 그리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시간적 사고, 거울과 빛이라는 낯선 재료가 만나 파생되는 여러 층위의 결합에 의해 서술되어 진다. 내가 보기와 생각하기, 새기기의 과정에서 던지는 지속적인 질문은 존재와 삶에 관한 것으로 어떤 시간과 공간속에서 가벼워지고 사라지는, 어쩌면 소멸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불안하고 공허한 심리와 과잉으로 치닫는 욕망의 덧없음, 그 찰나적인 감정과 기억을 '빛 그림'이라는 나름의 방법으로 그려낸 것이다. ● 이번 전시 역시 개인적인 서사와 가족의 사건, 심리적 풍경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이전의 작업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개인적 서사의 발현을 통해 표현된 최근의 작품들은 형상 그 자체의 힘으로 개인의 자아성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시대에 만연되어있는 불안과 불평등 등 현시대의 구조적인 문제로도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왜냐하면 기존의 작업이 아버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아들(작가)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버지와 같은 듯 다른 자아의 위치를 확인하는 내밀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번 작업은 불혹(不惑)에 결혼하여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아들(작가)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과 데쟈뷰 되듯 피 말리는 힘겨운 노동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대면한 날것의 '나(자신)'를 통해서 타자의 존재와 삶에 대한 대상화와 물화를 경험하고, 이렇게 대상화(對象化)되고 물화(物化)된 '나'를 통해서 '나'에 대한 '너' 뿐만 아니라 '그'나 '그것'으로까지 사고를 확장 시킨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일자(一者)의 내밀한 서사는 표피적인 형상(形象) 너머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시대적인 서사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준기_타자의 초상-반장님_RGB LED 라이트박스에 PC 거울,

혼합재료_150×100cm, 120×90cm, 122×94cm, 가변설치_2020

 

 

복층구조로 이루어진 3, 4전시장에 전시될 「타자의 초상-반장님」시리즈는 거대한 건설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다른 이름과 쓰임으로 소모되는 막노동을 통해서 대상화되고, 물화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찾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토대로 제작된 자화상 작품들이다. 피가 마르는 힘겨운 노동의 현장에서 시작된 반복된 자아 찾기의 편린이 모인 반장님 시리즈는 '타자화'된 '나'로 진입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날것의 '나'를 가감 없이 표현한 것으로 작품을 관람하는 감상자의 '타자'와 대상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준기_타자의 초상-반장님_RGB LED 라이트박스에PC 거울, 혼합재료,

디밍 연출_122×94cm, 00:00:30_2020

 

김준기_타자의 초상-일당_RGB LED 라이트박스에PC 거울,

혼합재료_48.5×109cm_2020

 

 

4전시장에 설치될 「평안민국」과 「평안민국도」는 두 작품이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작품으로 「평안민국」은 쓰임을 다한 폐건축자재의 상흔(傷痕)과 한지로 캐스팅한 안전모, 빛을 이용한 가변 설치한 작품이다. 「평안민국도」는 540×90cm 크기의 작품으로 계단으로 올라오는 긴 벽면에 설치될 예정으로 조선시대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작품을 좌·우에 배치하고 중간에 서울의 야경을 끼워 넣은 LED 라이트박스 형태의 작업이다. 두 작품은 욕망의 과잉 속에서 과시적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현대인들이 위험천만한 노동의 현장에서 생각하는 안빈낙도라는 나름의 의미와 현대 사회에 만연된 불안과 불평등, 평안의 문제를 제기하고, '안빈낙도', '안분지족'이 상징하는 삶이 현시대의 삶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작업이다.

 

김준기_平安民國_한지 캐스팅_400×600cm, 가변설치_2020_부분

 

김준기_平安民國圖_RGB LED 라이트박스에 아크릴거울,혼합재료_90×540cm_2020_부분

 

 

2전시장에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대상화되고 물화된 나를 발견하는 「타자의 풍경」 시리즈 작업으로 찰나적이면서 지속적인 현시대를 살아가는 타자들의 삶에 대한 욕망의 이기(利器)를 반추하고, 자연스러운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과정을 풍경의 한 장면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성찰하도록 하는 작업이다.

 

김준기_타자의 풍경-숨_RGB LED 라이트박스에PC 거울, 혼합재료, 디밍 연출_108×150cm_2020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동안 고민해왔던 타자의 존재와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현시대의 불안과 불평등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계기 될 것을 기대하며 거울에 새기고, 벗겨져 투과된 빛으로 그려지는 '빛 그림'이라는 작가만의 조형어법이 초상, 설치, 풍경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확장되고, 폐건축자재 등 다른 물성의 재료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해석되는 장이 마련되길 희망한다. (2020. 10.) ■ 김준기

 

 

Vol.20201111a | 김준기展 / KIMJUNKI / 金埈基 / installation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드로잉 오디세이-펜슬리즘展

2020_0701 ▶︎ 2020_07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 김범중_문기전_박미현_표영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제1전시관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펜슬리즘-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 갤러리 밈이 기획하고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展은 각 작가의 드로잉을 오디세이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작가 별로 다른 역에 도착한 것 같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던 길 멈추고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밀도감이 공통적이다. 인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선의 여행과 함께하는 동반자는 연필 한 자루다. 유목민의 지혜가 알려주듯, 떠나는 자의 짐 꾸러미는 가벼워야 한다. 삶의 편리를 보장해 준다고 믿어지는 점점 늘어나는 짐 꾸러미 때문에 떠나기 힘든 시대는 여행을 원점으로 회귀할 따름인 아늑하고 안전한 소비 품목으로 변화시켰다. 예술은 제자리에서도 가능한 여행이다. 가상현실 기술도 그와 유사한 체험의 제공을 약속하지만, 게임 참여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아닌 손의 감각'(들뢰즈)을 되살리기 위해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플라스틱 펜도 있지만, 그 둔탁한 감도는 펜슬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 선과 함께 떠나는 또 다른 시공의 여행에는 다양한 서사가 깔려 있다. 자크 아탈리의 미로나 유목에 대한 단상에 나오듯, 미로를 유목하는 사람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온다. 이 전시에서 서사의 범위는 소소한 일상의 단상부터 장대한 우주적 풍경에 이른다. 그들의 주재료인 펜슬은 'The Pencilism'이라는 낯선 용어로 묶여졌는데, 그것은 소박한 필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 매체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한다. 연필 한 자루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선은 마치 인생처럼 나아간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여기까지 어찌 왔나 싶을 예술가의 길이 쭉 뻗은 고속도로는 아니다.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이 있는가 하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선도 있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에 시간 낭비인 방황은 금기시 된다. 하지만 목적지가 각기 다른 이들에게 시점과 종점 간의 최단 거리는 허구적이다. 모두를 위한 속도는 정체를 낳는다.

 

김범중_Oscillo 외_장지에 펜슬_100×20cm×5_2019

 

모두가 다 같이 바라는,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은 속도를 위한 속도에 치이는 삶을 낳았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은 이제 타자에 대한 경계를 극도로 강화해야 하는 진정한 재난과 마주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매우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이제 미술은 대규모 관중을 모으는 시각적 흥행물이 아니라, 찬찬히 자기 길을 걸어왔던 작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작품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전시에서 선의 여행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주름의 배치, 그리고 그 안팎에 퍼진 입자들의 분포는 현대의 전형적인 시각 이미지와 다르다. 현대의 스펙터클은 타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자본과 노동의 산물로서의 스펙터클은 이윤과 연관된 관심끌기가 중요하다. 점점 무뎌가는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강도도 커진다. 주의 깊지 않은 시선으로도 단번에 파악되는 얄팍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 전시의 작가들은 밀도로 승부한다. ● 그 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종이와 펜슬은 현대적 가치를 반성하는 근본적 과제수행에 적합해 보인다. 펜슬 드로잉만으로 꾸려진 이 전시는 기본과 실험을 연결시킨다. 연필 또는 샤프펜슬은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이 있는, 즉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손에 잡아봤던 것이다.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생산수단의 감축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오랜 연마에 의해서 손의 연장처럼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필력은 감춰진 에너지나 무의식의 발현(김범중, 표영실)부터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모델(문기전, 박미현)까지 이른다. 각 작품들은 아득한 시공에서 발생한 파동의 리드미컬한 반향(김범중)부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형식(박미현)까지, 경계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의 게임(표영실) 부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적 도해(문기전)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 나무와 식물성 잔해로 이루어진 연필은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를 부른다. 나무라는 원재료가 그렇듯이 가지처럼 끝없이 갈라지는 길에서의 선택이다. 그 선택들의 쌓임은 매체와 형식에도 내재한다. 내용과 형식이 보다 긴밀해질수록 작은 변화의 파장도 크다. 드로잉, 특히 펜슬 드로잉은 모국어 같은 위상을 가진다. 모국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지를 많이 사용하고, 필기구가 모노톤이다 보니 동양화 같은 분위기도 있다는 점 외에는 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펜슬 드로잉은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상용어나 산문을 넘어서 꿈도 시도 가능하게 하는 몸/무의식과 일체화된다. 그것은 모국어의 습득처럼 타자의 소리로부터 와서 스며들 듯이 체화된 것이다. 연필은 아이가 사회 속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처음 손에 쥐었던 도구였다. 삐뚤빼뚤 글쓰기와 그리기는 잊혀져 있지만 문명권의 구성원들에게는 공통된 체험이다.

 

박미현_04_보드지에 펜슬_40×50cm_2014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질로 대체된 잊혀진 감각이다.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에서 대상의 윤곽선과 그림자(음영)를 위해 죽죽 긋는 무심한 사선의 감각으로, 완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밑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도 뭔가 자신과 관련된 소중한 것을 쓰기 위해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작가에게 펜슬은 이제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고양된다. 무엇인가 쓰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차 쓰기 그 자체를 위해 쓰게 되고, 결국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쓸 수 있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누보로망의 작가들의 주장처럼,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알기 위해 쓰게 된다. 의미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야 온다. 심지어는 대상도 그렇다. 펜슬로 그리기는 잠재적인 쓰기이다. 쓰기/그리기는 모두가 다소간은 맹목적인 시작, 그리고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유에서 무의 창조라기보다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에서 계산과 전략은 결정적이지 않다. ● 작업, 특히 드로잉은 머리 뿐 아니라 몸과 손을 통과해야 하는 원초적이고도 치열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로잉은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성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듯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것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에 마지막이, 마지막에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한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의 유희는 무한하다. 거듭해서 떠남은 예술의 조건이다. 완성된 작품이 하나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다. 선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또한 포함하는, 샛길과 우회로 가득한 미로 속에서 나아감은 역행이나 회귀이다. 우주같이 막막한 시공간에도 웜홀이나 블랙홀, 화이트홀 같이 도약과 비약, 가속과 감속을 허용하는 특별한 길이 있다.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모두에게 강제함으로서 권력의 효과를 생산하는 하나의 길에 대한 탈주로를 만든다. 자기 방식대로 가기와 탈주(누군가에게는 탈선)를 연결시킴으로서 다른 길도 있음을 제시한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예술가를 포함한 모두에게 강요되는 폐쇄회로를 빠져나가는 일이다. 효과적인 권력의 작동에서 하나의 지배적 언어를 강요하는 것은 필수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보편적인 문법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럽고 분란과 전쟁까지도 낳는 보편적 문법은 지배적 권력 지형도의 산물이다. 뻔한 것이 보편으로 행세하는 시대, 이해하기 힘든 세상보다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더 괴로울 정도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보편의 존재는 이질적인 지층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표상의 세계는 사회의 세력 관계에 의해 항상 위조되어 있다.

 

문기전_Quantum_판화지에 펜슬_100×100cm_2019

 

『기계적 무의식』은 한 어린이가 자신의 언어를 배울 때, 혹은 그 어린이가 자신의 말 행위를 결정하는 특정한 코드를 배울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이 끼어 들어간 사회구조의 요구들을 배운다'(베른슈타인)고 인용한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개인에게는 법칙에 대한 완전 복종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 식으로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꿈꾸는 것까지 따라오게 한다. 그러나 사랑처럼 언어도 독점을 요구한다. 몇 가지 언어를 통달해도 어느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수 십 년 전 떠난 고향이 그립다고 눈물 지으면서도 정작 한국어는 잊어버린 교포들을 종종 본다. 선제하는 상징의 산물인 주체는 자유롭지 않다. 『기계적 무의식』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는 근대의 이상인 자율과 자유의 인간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체계적인 격리차별, 전면화 된 수용소'(가타리) 등을 낳았다. ● 자유를 원하는 예술가는 그 누구라도 구조의 우연한 결정체에 불과한 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이질성(몸, 무의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이와 펜슬은 해부대와 칼을 연상시키는 분석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작업은 (재)발견의 장이기도 하며,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가 하면 우주적 질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를 비추고 공명한다. 종이와 펜슬은 그림에 한정되기 보다는 그림을 포함한 언어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던 시기의 매체로 주목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걸음마 훈련이 있다면, 손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이 지배적 구조로의 환원보다는 탈피와 변형을 강조하듯이, 현대 예술 또한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험적 장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언어의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 물론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의식화된 자연이며, 더 적절한 비유로는 언어이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모국어이다. 모국어가 우연찮게 세계 보편 언어가 된 국가의 국민은 근대를 선점한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했다. 종이와 연필은 한국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국어와의 비교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 언어의 통일성조차 항상 어떤 권력구성체와 분리할 수 없다'(펠릭스 가타리)고 본다.

 

표영실_경계의 사람들_종이에 펜슬_28×35cm_2020

 

면접을 보기 위해 사투리를 교정하거나 한국어에 대한 제 3세계에서의 학습 열기를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영어 학습 열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결국 힘의 논리는 무엇이 지배적인 언어인가에 대한 인정의 체계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재현된다. 보편성의 탈을 쓴 지배적 언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은 기술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애쓴다.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 권력은 끊임없이 세세하게 각 기표적 관계를 재검토 한다'고 하면서, 표상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어디엔가 우연히 태어나는 개인에게 시간과 자원의 가능성은 무한하지 않다. 선택과 집중에는 정치경제학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기계까지 더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연필보다는 전자기기에 먼저 친숙해지지만, 연필과 종이가 그때그때 업그레이드 시켜줘야 하는 기기/상품과 다른 점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과의 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필을 쥔 작가의 모습에는 경전을 필사하는 수도승처럼 절대적 타자와의 고독한 대화가 있을 뿐이다. ● 이 전시의 작가들이 선호하는 펜슬은 내향적인 매체이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주장하듯, 읽고 쓰기에 의해 자의식을 형성했던 내향적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읽고 쓰기보다 정보검색과 소통이 중시되는 시대에 내향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받는 외향성의 내용을 내향성이 만들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사 및 인쇄문화의 시대에 내향성은 논리정연한 지식인을 낳기도 했지만, 점차 희귀해지고 금기시 된다. 금기 위반의 충동을 강조했던 바타유라면 내밀성이라고 표현했을 이질적 지향은 누군가는 범죄로, 누군가는 예술로 부를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선명하다. 보다 지배적 언어는 고속도로 같은 비유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각자의 언어와 문법으로 말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작가에게는 최대한 이물감 없는 매체가 필수적이다. 자기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요구되는—체계는 쓸데없는 진입장벽을 높이 세우곤 한다--훈련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대학에 가기/다니기 위해 배운 것을 애써 잊어야만 하는 씁쓸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끼어드는 것(기구, 제도 등)이 많을수록 본질은 희미해진다. 현대의 관료주의는 본질을 잊고 형식을 본질화 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분업이 촉구하는 분과과학은 형식주의로 흐른다. 언어를 과학의 단계까지 정련했다는 현대철학의 한 사조는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당한 배제는 본질을 문제 삼는 예술을 유령화 한다. 그러나 유령은 편재한다. 체계를 지시할 뿐인 체계의 공허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인 어떤 소박하거나 야심찬 활동을 꿈꾸는데, 이때 예술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재발견될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와 펜슬은 여러 미술도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각 작품들은 펜슬이 본질의 탐구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객과의 거리도 단축시켜준다. 관객도 종이와 펜슬이 주는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범중_Phrase_장지에 펜슬_50×10cm×4_2020

 

김범중; 일파만파(一波萬波)하는 내재적 리듬 ● 얇은 띠 형태가 길쭉한 화면에 담겨 다양한 파동으로 굽이치는 작품 「Phrase」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한다. 파동은 입체감 있는 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표면과 이면이 수시로 바뀌는 민감한 표면은 마치 대지 깊숙한 곳에서 발생한 요동을 파동으로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자신이 속한 환경을 민감하게 반영할 것이다. 현악기 같은 비율을 가진 화면은 악기의 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구음을 연상시킨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배열된 화면은 그자체가 분절화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설치방식으로 확장 될 수 있다. 그러나 화면 안의 형태는 어느 지점에서 잘려도 자연스러운 나풀거림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이 유연하다. 여러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작품 군은 각기 진행 중인 상태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것 같은 확장성을 가진다. 단편으로 전체를 암시하는 방식이다. 동심원으로 파가 퍼져 나가는 형태 좌우로 두께와 명암이 다른 기둥 모양으로 배열된다. 거기에는 악기를 모델로 한 작품 특유의 시각적 울림, 즉 공(共)감각이 있다. 마치 지문처럼 섬세하게 새겨진 선들은 마주치는 면에 짙은 협곡을 만든다. ● 소리/형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협곡은 또 다른 선을 이룬다. 그것은 점과 점이 만나는 기하학적 선의 정의를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넷 또는 다섯이 시리즈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n개의 패널로 증식될 수 있다. 그림처럼 나란히 거는 것은 여러 배치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무한한 시간의 축을 따라 다르게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은 실재의 다양성에 대한 은유이다. 같은 모양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선의 간격과 배치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것이 음악이라면 차이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가 될 것이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모든 텍스트에 내재한 차연의 세계 또한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같은 리듬과 박자를 강요하곤 한다. 그래야 생산/소비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섬세함은 묻혀 버리기 일쑤이다. 동일성의 논리로부터 탈주하려는 현대철학자들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들뢰즈와 가타리)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물리학자들 또한 변화의 순간에서 원자 운동에 내재한 작은 변이 또는 요동을 강조한다. ● 펜슬로만 이루어진 형태는 분자들의 배열 상태만 달리 함으로서 존재들 사이의 변환을 보여준다. 선의 밀도와 강도, 방향의 차이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고체 액체 기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우주의 창조성으로 보면서, 이러한 현상을 사회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필립 볼)는 우주에 편재하는 질서의 표현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전이의 질서는 형태와 소리로 번역된다. 일찍이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파동)와 음의 연결로 천체의 조화를 말했다. 근대과학은 고대의 질적 우주를 수량화했지만, 정교한 시계와 비교된 근대적 우주에서 소리는 여전히 우주적 조화에 대한 상상 속에 울려 퍼진다.

 

문기전_Q-piece 40_판화지에 펜슬_20×63cm_2019

 

문기전; 인식의 불확정성, 또는 자유 ● 문기전은 '최소 에너지 단위이자, 저장 공간으로 형상화시킨 Quantum 이미지'를 비롯해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며, 기억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에겐 왜 이렇게 보여 지고, 생각 되는가'와 관련된 가설적 구조는 사각형 안의 사각형, 원, 먼지처럼 흩어지거나 뭉치는 입자 등으로 나타나며, 때로 눈 코 입 같은 해부학적 기관의 일부들과 연결망을 이룬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는 문기전의 작품에서 작품과 작품 간의 배치 또한 중요하다.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것들은 시리즈처럼 보이고 때로 다른 종류와 조합되어 작동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일련의 단위 구조가 되어 조합되면서 세상이 인지되고 의미화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판화지 위에 펜슬로 그려진 형태들은 분석적이며, 과학적 도해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은 해부학도 생리학도 로봇의 설계도면도 아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이해방식과 관련된 일종의 은유적 다이어그램이다. 빛의 잔상 시리즈는 명암과 비율의 차이로 계열화된 직사각형들을 보여준다. ● 사각형 안의 사각형이 기본 형식인데, 흑연의 입자가 퍼져 나가는 식이므로 경계선을 정확하게 확정지을 수 없다. 가운데가 어두운 경우와 바깥이 어두운 경우로 나뉜다. 시각적 관습 상 가운데는 형태, 바깥은 배경으로 간주된다. 중심의 짙은 사각형이 커지면 밝은 배경은 줄어들고, 중심의 밝은 사각형이 줄어들면 어두운 배경의 비중은 커진다. 명/암, 중심/주변 등 구별되는 항은 연동된다. 사각 구조와 달리 먼지 형태의 분포로 빛의 잔상을 표현한기도 한다. 하얀 종이 배경 안에 점이 번져 만들어진 얼룩들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먼지입자가 뭉쳐지거나 흩어져서 별이 생성 소멸되는 우주의 풍경부터 거듭하여 확대된 미시세계의 흐릿한 모습까지 다양한 형태가 연상된다. 원이나 사각형처럼 비교적 분명한 도상 또한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입자로 되어 있기에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적이라고 해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도 아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불(不)-'로 시작되는 불완전성(괴델), 불확정성(하이젠베르크) 등의 개념은 엄밀한 인과론 보다는 확률과 통계에 의지한다. ●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을 미술과 비유하자면 반(反) 형식주의에 가깝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사고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결정론보다는 확률론이 좀 더 위로를 주고, 전통/근대를 넘어선 현대와도 조응한다. 단독으로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으로도 나타나는 작품 「Quantum」은 100x100cm 크기의 정방형의 판화지 위에 원이라는 응집력 있는 형태가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경계는 흐릿한데, 여기에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전이의 지대로 오차와 우연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작품 「청각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은 귀라는 감각기관과 연결된 망으로, 최종적으로 검은 「Quantum」과 연결 된다 시각, 후각, 미각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의미 또는 해석으로 전환될 자극의 주요 통로들은 「오감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으로 배치된다. 그의 작품에서 펜슬은 분석과 종합의 과정의 표현에 딱 맞는 듯하다.

 

박미현_07_보드지에 펜슬_40×50cm_2014

 

박미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이상적 관념 ● 보드지에 샤프펜슬로 그린 같은 크기의 작품들은 그 정교함에 있어 펜슬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러한 경지가 가능할지 싶다. 흑백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너무 엄격하고 세밀해서 기하학적 도형이나 도면같은 면모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보기 위한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에 그어진 선 또는 수없이 그어진 흑연에 의한 반사면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지만, 그것들이 풍경처럼도 보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을 이어주는 수평의 선과 사선에 중력감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하얀 원두 개는 일월도(日月圖)처럼 안정감 있게 이 우주를 비춰준다. 그런 비유라면 허공의 도형 또한 중력과 무관치 않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와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양 말단에 같은 모양의 도형이 있는 세 개의 밝은 기둥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시작도 끝도 같은, 변치 않는 규칙적 여정을 연상시킨다. ● 한 화면 내에서, 또는 다른 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박미현의 작품에는 흑백 반전의 관계가 자주 나타난다. 흑/백, 네거티브/포지티브 스페이스, 상하좌우, 수직과 수평선은 기하학이 토지 측량술에서 나왔듯이, 풍경이나 중력감이 배어 있다. 검은 바탕에 하얀 창문이 연상되는 도형이 있는 작품에서,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배치된 원들은 정지 가운데 움직임이 잠재한다. 흑백 반전 버전의 작품에서 반사광 때문에 제자리에서 팽글팽글 도는 느낌을 주는 교차 면의 원들은 사각형의 각도를 유연하게 해줄 것이다. 대칭적 형태는 만다라처럼 평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다소간 디자인적 요소가 있는 박미현의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기능의 먼 흔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기능주의 미학을 낳기도 했지만, 기능은 모더니즘이 선전한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상에 단단히 서있기 위한 공학적 방법은 그 합리성에 있어서 예술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 틀과 표면의 물리적 관계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서 그림의 형식적 조건을 실험하려던 유파는 미술사의 한 장을 이룬다. 박미현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보다 정신적 연원을 가진다. 작가는 플라톤이 '우주의 생성을 요소론으로 설명하려 한 내용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고 밝힌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에 의하면, 플라톤에게 물리학은 기하학이 된다. 플라톤은 원소들이 특정한 공간적 구조들을 지닌다고 여겼다. 가령 플라톤은 정이십면체의 공간적 구조를 물에게 부여했고, 정팔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공기에게, 정사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불에게, 정육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흙에게 주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흙은 정육면체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네 원소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밑면들을 지닌다.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념을 상징한다. 이데아가 실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이데아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의성에 좌우되지 않는 어떤 든든한 근원에 대한 욕망은 과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준다.

 

표영실_상실의 무게_종이에 펜슬_38×28cm_2019

 

표영실;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같은 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표영실의 작품에서 언어적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와 함께 발표되곤 하는 단상들이 위의 전시 부제처럼 문장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복되는 마찰로 생긴 주름',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접힌 채 기울어지고,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바퀴벌레 등짝 같은 얼굴들'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한 미완성의 문장, 또는 단상에는 시각적 상상력이 풍부해서 작품 제목으로 붙인다면 이미지와 단어의 밀착도는 매우 높을 것이다. 물론 '부드러운 바람에 상처가 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기는, 슬픔'같이 추상적인 차원도 있다. 단어 또는 문장의 긴 목록을 훑어보자면, 표영실은 평소에 그리기만큼이나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말과 사물의 관계가 그렇듯,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로 충분하다면 열심히 그릴수록 (예술적 난관까지는 아니더라도)삶의 난관에 부딪히는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 만약 그림으로 충분하다면 작품을 깍아 먹을 수도 있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말보다 더 완벽하고 충만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펜슬이라는 매체는 상보성을 가지는 말과 이미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언어는 선형적이다. 단어들이 한 줄로 배열되기 때문에 아무리 함축적이어도 이미지에 비해서 단정적이다. 가령 '얼굴에 붙은 가면'이라는 단상은 정말 가면처럼 보일정도로 단순하고 얇은 표영실의 인물상을 설명해 해준다. 얼굴 방향과 눈구멍 방향이 다른 가면을 쓴 듯한 얼굴도 보인다. '뜨고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또는 눈동자 없이 퀭한 눈구멍은 가면과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의 소외된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본질/가상의 이분법이 무화되면, 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남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만한 가짜들의 세상이다.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는 펜슬은 이러한 가변적 존재들과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어떤 형태를 확정짓는 경향이 있다. ● 외곽선을 모호하게 하는 흑연 입자의 흩어짐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누런 액체의 표현 등은 인물/인체의 표현에 강렬한 감정을 싣는다. 인체 모양이 액체로 변하는 작품 「상실의 무게」를 비롯하여 사지가 다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은 손목에 체액이 흐르는 작품 등이 그렇다. 감정은 대개 넘치거나 터져 나온다. '아무렇게나 뭉개진 물렁물렁한', '찐득하고 더러운 눈물'은 주체도 대상도 아닌 경계위의 것이다. 이 분류 불가능한 것은 인류학, 심리학, 문학 등에서 '비천'(abject)하다고 명명된다. 작품들의 면면은 상처, 우울, 공허, 고독, 자학,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이다. 작가의 실제 성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펜슬을 쥐었을 때의 자의식과 관련될 것이다.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이라도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써 있는 문장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호한 감정/상태마저도 깔끔하게 마무리한 작품들은 작업이 작가에게 미쳤을 긍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완벽하게 표현된 것, 즉 조리 있게 정리된 것은 사태의 잠정적 해결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200702a | DRAWING ODYSSEY-The Pencilism展

D u r a t i o n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
2019_0814 ▶︎ 2019_0915



김범중_Basso_장지에 연필_120×16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616a | 김범중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갤러리밈 엠큐브 프로젝트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김범중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지속(Duration)』이다. 지속성과 절대성보다 일시성과 상대성에 편중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위와 같은 주제가 달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 전시들이 변화와 다양성에 조금 더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어떤 상태의 유지나, 그것에 전제되는 시간성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지속성이 변화와 생명력이 없는 건조한 상태는 아니다. 김범중이 말하는 지속성은 마치 음향학에서 소리가 "발생(attack)-쇠퇴(decay)-완화(release)"로 구조화되는 것처럼, 그의 지속성 또한 생성과 소멸의 변주를 포괄하는 상태의 지속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시각화하였을까? 우선 김범중의 회화 형식은 우리의 체내 깊숙이 흡수된 관습과 획일화된 공식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고 선정적인 전위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 작품을 마주할 때의 인상과 작품 제목에 내재 된 의미 사이의 거리감은 순간순간 익숙함과의 단절을 야기한다. 색도 사용하지 않으며, 현란한 기법이나 독특한 형태가 강조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작품을 파악하려는 섣부른 시도들은 예상치 못한 낯선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보니 일견 낯익은 조형 언어가 이러한 경험을 더 깊게 하는 어떤 의도적인 장치는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이것은 그러나 부지불식 사이에 화석화된 조형언어의 편협과 안일함을 지적하고, 관습적인 공식들을 어긋나게 하여 은폐된 위계들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작가의 탐구열과 몰입의 에너지에 주목한다. 일종의 매니아(mania)적이거나 지속의 산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김범중의 회화가 단지 모노톤이고, 종이와 연필이라는 친숙한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단순히 서정적이거나, 명상적, 또는 수행적 추상이라고 판단하였다면 작품 읽기가 자칫 과장에 빠지기 쉬워진다.


김범중_Duration展_갤러리밈_2019


이러한 관점에서 김범중의 작품은 추상도 재현도 아닌 기록에 접근한다.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발생(occurrence)'의 기록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숭고'를 위해 리오타르가 끌어온 '발생' 개념은 '그 자체'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발생은 재현될 수 없음, 즉 재현 불가를 가리킨다. 반면 발생은 재현 불가능인 점에서 왜곡 불가능이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대상에 대한 경외마저 느끼게 하는데, 김범중의 작품을 단적인 발생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이렇듯 재현 불가능을 인정하는 신중함이 보인다. 작가가 소리에 유별난 관심을 가졌기도 하거니와, 작품의 주된 소재이기도 한 소리의 예를 들어보자. 북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할 때, 한국어 사용자들은 대개 '둥둥'으로 표기한다. 영어권에서라면 북소리는 'parum pum' 등으로 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리를 음의 높낮이 정도를 나타내는 헤르츠(Hz)나 소리의 크기에 관련된 데시벨(Db) 등과 같은 형식을 따랐다면 어떨까? 대상의 '그 자체'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분명 후자에 부과된 메타 의미는 '둥둥'이나 'parum pum'과 같은 재현 형식보다 그 무게가 덜하다. 이와 같이 발생은 재현의 왜곡을 피하고 대상에 보다 예민하게 반응함으로써 대상이 재현도 추상도 아닌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일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피상적 시각에서는 알 수도 없는 대상에 깊이 매료된 매니아적 관점과 고도화된 사고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 실제로 음원이 매질을 통해 수용체로 전달되는 소리 발생의 매커니즘이나, 주파수와 같은 측정 체계에 대한 김범중의 관심은 헤르츠나 데시벨의 예와 유사하게, 김범중만의 재현 방식을 통해서 모노톤의 회화로 가시화된다. 때문에 익숙한 조형 언어인 듯 보이나, 김범중의 회화는 소리뿐 아니라 소리가 동반하는 시간과 물질 등에 관한 탐구자적인 기록물에 가깝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그의 모노톤 회화는 형이상학적이리라는 예상과 달리 상당히 경험적 의미를 전달한다. 단지 모노크롬 회화와 닮았고, 수행적 반복을 보인다는 이유에서 그의 작품에 선(禪) 사상이나, 도가, 또는 현상학적 의미를 덧입히기에 김범중의 회화는 촉각적이고, 경험적이며, 탈(脫)사변적인 동시에 실제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또한 재료 선택에서나, 선 긋기의 경험뿐 아니라, 그의 사고 체계에도 녹아 있다. 민족주의가 아닌 체질을 고려함으로써 장지를 선택하고, 붓이나 펜의 임의적 유동성보다는 물리적 강도를 있는 그대로 출력하는 흑연의 정직성을 선호한다는 김범중의 재료적 취향은 그의 화면을 금욕적으로 보이게까지 한다.



김범중_Mezzo_장지에 연필_120×320cm_2019


그러나 사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금욕적 화면 역시 목적이 아닌 결과로서 도출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김범중의 회화에 나타나는 금욕이나 절제란 작업의 최종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발생에 관한 탐구 과정 가운데 형성된 결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작가의 실제 관심 역시 현실에서 괴리된 관념이나 금욕, 또는 수행은 아니다. 소리나 주파수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발생'에도 주목한다는 작가는 분명 물리적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동시에 그는 어떤 비가시적 존재나 미시적인 대상과 기꺼이 씨름하는 다분히 매니아적이고 고도화된 줄다리기를 작업한다. 이 작업은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사고를 동반하며, 결코 그것을 정복하듯 재현하지 않는다. 저음의 물리적 특성이나, 음색의 차이들, 주파수, 파장 등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실재하는 대상 또는 발생에 대한 무수한 경험과 탐구가 장지와 흑연의 물리적 실험을 통해 화면 위에서 또 다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된다. 마이크로적일 정도로 섬세하다 못해 치밀한 김범중의 시각은 충분히 미시적이며, 다른 한편 표면의 변화를 야기하는 장지의 섬유질에서, 셀 수 없이 중첩되고 축적된 흑연 가루에서, 그리고 고도로 절제된 형식으로 반복되는 선 긋기의 행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며 지속된다. ■ 이상윤

갤러리밈의 '엠큐브프로젝트' (M'Cube Project) 는 동시대 미술의 가치를 통찰과 깊이로 다져가는 중진작가를 지원하는 전시 프로그램입니다.



Vol.20190816c |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




몬드리안의 정원


이혜숙展 / LEEHYESOOK / 李惠淑 / photography.collage
2019_0417 ▶︎ 2019_0422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70×70cm_201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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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정원」 혹은 격자 속의 헤테로토피아 『Mondrian's Garden』 or Heterotopias in Grid ●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 1904–1996)는 추상화 역시 연속체continuum로서의 공간의 일부만을 절취하는 구상화의 속성에 온전히 부응한다면서 그 예로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을 인용했다. "더 이상 대상들을 재현하지 않는 몬드리안은 상이한 두께의 수평선, 수직선들로 격자grid를 구축했다. 그러나 몇몇 격자들은 액자틀에 의해 잘려나간 드가Degas의 형상처럼, 가장자리에서 불완전한 사각형으로 끊겨버린다. 이 규칙적인 형태들은 비례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는 무한하게 펼쳐진 어떤 공간 구조의 작은 일부분만 바라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파편적 표본, 이 기이한 연결부분은 이중성을 지니는바 뚜렷한 균형성과 일관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서는 그 나머지가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추측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구성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이상적 질서와 정교함뿐만 아니라 현대 사상의 한 전형적 양상을 보게 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단순한 기본요소들의 관계는 법칙에 묶여져 있지만, 개방적이고 불확정적이며 무한한 전체를 구축한다."1) 샤피로에게 있어서 몬드리안의 검은 격자 속의 삼원색의 규칙적/불규칙적 배열은 현대적 공간 개념의 회화적 구성이다. 격자를 구성하는 삼원색과 배경인지 형태인지 구분할 수 없는 흰색 그리고 직선인지 가느다란 사각형인지 단언할 수 없는 검정색은 분명히 현실의 공간이 아니지만 어떤 공간의 지형을 추상적으로 암시한다. 이 격자의 반복은 우리 시선의 기억 속에 공간구성의 도식처럼 인각되어 실제 공간 속에 이월된다. 그리하여 현실 세계의 지형을 '이 파편적 표본'을 통해 새롭게 구축하게 만든다. 이혜숙의 「몬드리안의 정원」은 "상이한 두께의 수평선, 수직선들로 격자를 구축한"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지형 속에 사진으로 재현한 현실 공간인 식물원, 세계 도처의 식물들이 자라는 정원을 이월시킨 작업이다.


A 04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18


정원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특정한 실제 현실과는 다른 비현실적 장소다. 즉 현실 속에서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실제 장소지만 특정 장소의 식물상flora과는 배치되는 공간이다. 특정 지역의 고유 식물 곁에는 열대 우림의 수목이 자라고, 또 그 곁에서 사막의 선인장이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 밖의 다양한 식물계를 아우르는 정원은 그러니까 세계의 다양한 식물들을 한 장소에서 관람할 수 있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유토피아2)인 셈이다. 양립할 수 없는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한 공간에 병존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를 창안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정원-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순된 장소들로 이뤄진 형식으로 아마도 가장 오래된 헤테로포피아의 예는 정원일 것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놀라운 창조물인 정원은 동방에서 아주 심오하고 중첩된 의미를 지녔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페르시아의 전통 정원은 세계의 사방을 대표하는 네 부분을 사각형 속에 모았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신성한 장소는 그 중심에 있는 세계의 배꼽이었다. 거기에는 수반(水盤)과 분수가 있었다. 그리고 정원의 모든 식물은 이곳에 나뉘어 일종의 소우주를 구성했다. (...) 정원은 세계의 아주 작은 조각이지만 세계의 총체성이다. 정원은 고대 초기부터 일종의 행복한 보편적 헤테로토피아이며, 여기에서 근대의 동물원이 비롯된다."3)



A 05 : 이혜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18


이혜숙의 「몬드리안의 정원」은 한 마디로 말하면 헤테로토피아의 충만, 헤테로토피아의 과잉이다. 우선 작가는 정원의 세부를 사진으로 찍었고, 이것을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과 결합시켰다. 이혜숙은 현실대상과 반사광을 매개로 물리적 접촉physical contact에 의해 생겨나는 기호인 인덱스index로서의 사진과 상상력의 소산인 몬드리안 회화의 색과 격자를 중첩, 병치시킨 장소를 창조했다. 정원의 세부를 찍은 사진을 몬드리안의 회화로 인지되는 곳에 자리를 잡게 했다. 두 개의 상이한 매체가 공존하는 혹은 대립하는 헤테로토피아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 헤테로토피아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과 몬드리안의 트레이드마크를 베낀 모방의 공존으로 저작권과 그 위반의 병치를 의미한다. 이혜숙 자신의 사진과 몬드리안 회화의 공존/대립은 매체의 이종교배hybridization인 동시에 창작과 차용appropriation의 병존인 셈이다.



B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80×80cm_2018


게다가 사진 속 식물들의 구체적 형상은 개별적으로는 일종의 규칙성을 띠지만, 몬드리안 회화의 '뚜렷한 균형성과 일관성'을 띤 기하학적 도상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식물 세부의 비정형성이 사진의 구체적 양상으로 드러나는 이혜숙의 정원은 몬드리안의 규칙적이고 정형화된 형상과 대비되는 공간, 즉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한다. 「몬드리안의 정원」의 헤테로토피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몬드리안의 그림이 '상이한 두께의 수평, 수직선들로 이뤄진 격자들'로 구성된다면, 「몬드리안의 정원」은 '상이한 두께'의 삼각형, 사각형 조각들이 일종의 부조relief를 형성한다. 몬드리안의 검은 격자선의 두께는 2차원의 평면성에 머물지만, 이혜숙의 삼원색 삼각형과 사각형은 표면에 음영을 주면서 평면성을 거부한다. 삼원색 부조를 통해 「몬드리안의 정원」은 2차원의 평면과 3차원의 공간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하고야 만다. 결국 「몬드리안의 정원」은 구상적 사진과 추상적 회화가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 비정형성과 엄격한 정형성이 상충하는 헤테로토피아, 평면과 부조가 경쟁하는 헤테로토피아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이질적 공간들은 「몬드리안의 정원」 속에서 서로를 배려한다. 「몬드리안의 정원」이 보여주는 시각적 안정감, 상쾌함은 바로 이러한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다.



D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60×60cm_2018


정원의 기원에 대해 미셀 푸코는 이 신성한 헤테로토피아는 전 세계를 요약하는 '소우주'였으며, 거기에는 '세계의 중심, 배꼽'이 자리했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중심의 자리는 세계를 창조한 신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혜숙의 정원에는 페르시아 정원의 '신성한 배꼽'도, 더 나아가 '세속적 중심'도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은 세계의 사방에서 온 식물들의 몇몇 세부뿐이다. "무한하게 펼쳐진 어떤 공간 구조의 작은 일부분만" 지시하는 몬드리안 회화의 격자들처럼, 작가는 정원이라는 '소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 '파편적 표본'만을 보여줄 뿐이다. 중심이 부재하는 혹은 중심이 흐트러진 정원을 식물들의 세부 사진을 통해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는 낯익어 이국종이라 여겨지지도 않는 식물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다른 한편으로는 토착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은연중에 인식케 한다. 이혜숙의 정원에는 사방의 세계를 구성하는 표본들이 중심을 잃은 채 여기저기 병치되어 있다. 세계의 사방에서 온 전자제품, 식재료. 의류들이 탈 중심의 지금, 이곳의 삶을 부분적으로 유지시키고, 세계 사방의 가치관과 믿음이 현대성을 파편적으로 구성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계는 몬드리안의 격자 속에 갇혀 있는 저 무국적/다국적 식물의 세부와 구조적 상동homology인 셈이다. 우리의 삶은 저 「몬드리안의 정원」을 닮은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개방적이고 불확정적이며 무한한 전체를 구축하는 저 단순한 기본요소들' 속에서, 저 정원의 식물들처럼 중심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 최봉림


* 각주1) Meyer Schapiro,「On Some Problems in the Semiotics of Visual Art: Field and Vehicle in Image-Signs」in Theory and Philosophy of Art: Style, Artist, and Society, George Braziller, Inc., 1994, p. 32.2)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utopia의 문자적 의미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3) Michel Foucault,「Des espaces autres, Hétérotopies」in Architecture, Mouvemet, Continuité, No.5, 0ctobre 1984, p. 48.



D 03-2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60×60cm_2018


소란스런 객석이 잦아들고 어둠속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무희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선들이 만들어지고, 그 선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 무대를 떠다니는 환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중학교 입학식 때 본 한국무용 공연 이야기이다. 당시 느꼈던 선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강렬했고 지금까지도 아름다움을 논할 때 그것이 미의 기준이 되곤 했다. ● 사진으로 만나는 세상은 선 그 자체였다. 널려져 있는 외계현실이 사진에 찍히는 순간 내가 본 현실과 사진 속 재현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선들은 서로 다른 관계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직선의 조합. 반듯반듯한 직선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말 할 수 없는 안정감과 꽉 찬 만족감을 주었다. 사진에 박제된 선들이 내가 사는 현실이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내게 있어 직선은 일상이고 곡선은 일탈이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끊임없이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든다.



E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80×80cm_2018


식물원에서 내 이목을 끈 건 아름다운 꽃도 싱그러운 식물도 아닌 온실 유리를 감싸고 있는 철제 프레임이었다. 프레임 안에 제멋대로 자리 잡은 식물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과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되 뇌였다. 그래, 이건 몬드리안의 정원이야 ! 철제 프레임의 수직 수평선 안에 식물을 배치하여 몬드리안의 그림과 유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상상한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프레임을 찾는 건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한두 번 만날법한 우연 정도였고, 그 우연마저도 슬며시 내 옆을 비켜가기 일쑤였다. 막연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해가 갈수록 온실 유리엔 때가 앉고, 식물들은 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건 안되는거구나, 이제 그만하자고 포기할 즈음 신의 계시와도 같았던 세 글자. 꼴.라.주



E 02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80×80cm_2018


이번 작업은 몬드리안 오마주이다.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는데, 하나는 몬드리안의 수직, 수평선과 원색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다음은 임의로 선을 구성해 무채색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각각의 사진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식물을 프레임 속 프레임 안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려 하늘과 땅을, 정신과 물질을, 창조와 보존을 그리고 보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몬드리안의 이상을 그리고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평형상태로 구현하고자 했던 몬드리안의 정신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이라 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 10년만이다. 첫 개인전을 한지 10년 만에 두 번째 전시를 갖는다. 식물원을 찍은지도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 한 구석에 짐으로 있던 나의 식물원에, 미운 마음이 들 정도로 사랑했던 몬드리안의 정원에 이제 작별을 고한다. 안녕 나의 식물원... Goodbye my Mondrian' Garden... ■ 이혜숙



Vol.20190415b | 이혜숙展 / LEEHYESOOK / 李惠淑 / photography.co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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