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동자동을 빨갱이가 점령했는지 건물마다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오래 전 영화 속에서나 본 듯한 살풍경인데, 마치 홍콩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그 깃발의 실체는 동자동 쪽방촌 재건축을 반대하는 건물주들의 저항 표식이란다.

 

“약자보호 명분 내세워 사유재산 탈취하는 정부를 규탄한다”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후암특계1구역 재개발을 추진해 온 재개발조합에서 주도한 반발이었다.

건물주들이 재개발조합을 결성하여 오래 전부터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쪽방촌 주민들의 이주대책에 막혀 흐지부지 된 사업이었다.

 

그들이 오래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이주대책까지 세워 재개발을 한다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쪽방촌 빈민들을 그냥 쫓아내야 하는데, 별도 주거지를 건설해 그들을 입주시킨 후 재개발한다니

재개발에 따른 건물주들의 이득이 줄어든다는 말일 게다.

결국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의 보상을 받기 위한 저항이었다.

 

대관절 돈이 무엇이기에, 돈 앞에서는 쪽 팔리는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반발한다고 이미 추진 중인 재개발이 중단될 리야 없겠지만,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욕심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쪽방 빈민들은 담담한데, 가진 자들만 더 갖기 위해 몸부림쳤다.

 

동자동이 처한 현실을 지켜보는 빈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한 가닥 희망을 품었으나 그 희망이 좌절될까 마음 편할 리야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는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정기총회 공지 안내가 붙어 있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치러지는 서면 총회인데, 임원으로 출마한 분들 사진도 나와 있었다.

3월26일까지 서면결의서를 사무실에 제출해야 된다고 적혀있으나,

낮선 회의 방식에 얼마나 많은 조합원들이 참여 할지 모르겠다.

 

'동자동 사랑방'에서는 쪽방주민을 상대로 서명을 받아 건물주들의 집단행동에 맞서고 있었다.

긴 세월동안 건물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시설보수는 방치하면서 비싼 임대료만 꼬박꼬박 챙기며

빈민들의 피를 빨아 온 악덕 건물주들과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동자동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난 유한수씨가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평소에는 웃거나 사진 찍어라며 폼을 잡았지만, 그 날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금방 이라도 불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라 말 걸기도 두려웠다.

설마 살벌한 동자동 분위기 때문은 아닐테지...

 

공원에 가보니 몇몇 사람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강재원씨는 열쇠 꾸러미를 치켜들며 사진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그 열쇠는 뭐냐고 물었더니, 곧 입주할 임대아파트 열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큼 주민들의 관심이 재개발에 쏠려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무쪼록 건물주와 쪽방 주민들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

빈민들이 오매불망 기대하는 임대아파트에 안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일요일의 동자동은 한산해서 좋지만, 밥 사먹기가 지랄 같다.
직장인이 없어 쪽방 사람들이 이용하는 광주식당까지 닫아 버린다.
하루 쯤 굶어도 죽지는 않으니, 발길을 공원으로 돌려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입구에는 여러 사람이 술로 다독이고 있었다.
트랜지스터에서는 ‘돌아가는 동자동’이 아니라 ‘돌아가는 삼각지’가 흘러나왔다.
김상구씨가 잔뜩 어깨에 힘을 실어 장단을 맞추고 있었는데,
직장인 없는 일요일의 동자동은 쪽방 사람들 세상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자리를 지키는 정재헌씨를 비롯하여
구멍가게 주인 강재원씨, 전설로 통하는 전찬우씨,
의리의 사나이 이준기씨, 이법사로 불러달라는 이원식씨,
그리고 김상구, 이태수, 박동구씨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술과 담배가 바닥나 물주를 기다리는 중이었던지,
소주 세병과 담배 한 갑을 사갔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늘 술자리를 지키며 빈병을 치워주는 황옥선 할매에게도
우유 한 팩 드렸더니, 기분 좋아 노래까지 하신다.
작년 추석 노래자랑에선 상까지 탔는데, 올해도 나간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구멍가게 주인인 강재원씨가 할 말이 있다며 날 좀 보잖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냐고 귀를 쫑긋 세웠더니, 나도 생각나지 않는 지난겨울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줄테니, 소주 한 병만 외상으로 달라 한 것을 거절한 게 아직까지 마음에 걸린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구멍가게에서 외상 주는 곳이 어딨냐고 그랬더니, 그 때는 사람을 잘 못 봤으나, 앞으론 잘 하겠단다.
그리고는 면전에서 내 칭찬을 해대는데, 얼굴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가게에서 십만원치 팔아야 만원도 남지 않는다며, 돈도 잘 빌려주지 않는 땡보 양반의 또 다른 순진한 모습에 놀랐다. 



 


이번엔 이홍렬씨에 이어, 화장을 지운 김은자씨가 나타났다.
난 이 여인을 ‘친절한 금자’씨로 바꾸어 부른다.

김은자씨는 왕년에 룸살롱 마담으로 전전하며, 사내께나 휘어잡은 여인이다.
세월에 밀려 쪽방 촌까지 들어 온, 그 한 많은 사연을 한 번 들어 볼 작정이다.






그 날은 화장을 하지 않아, 나도 사진 찍을 생각을 않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이준기씨는 같이 한 판 찍자며 졸라댔다.
“안 된다는데 왜 그래~”라는 날선 반응에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대머리라 모자 안 쓰면 찍기 싫은 거나 마찬가지다”고 했더니, 그때야 알아차렸다.






담장 모퉁이에 올려놓은 조그만 라디오에서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다'는 대목에서는 은자씨가 슬퍼하고,
현인의 ’체리핑크 맘보‘에서는 다들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이 것이 사람 사는 재미다.
하잘 것 없는 사연에 울고, 흥겨운 멜로디에 웃는 사람들...
배우고 가진 자들이 서민들의 순수한 이 맛을 알리 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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