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의 장날'사진전, 인사동 ‘아라아트' 24일~30일까지열려



▲정영신 '장날'사진집 표지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장을 쫓아다녔던 정영신의 ‘장날’사진전이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02-733-1981)에서 열린다.(오프닝 24일 오후6시)


정영신의 ‘장날’전은 80년대 찍은 사진들만 모았는데, 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솔직히, 아내나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로 치지만, 팔불출이 되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해내 준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정영신,1986담양장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재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아왔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정영신,1987구례장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정영신, 1988남원장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 사는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 1989순창장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에 의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 1988담양장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 1988순창장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는 등, 주변을 정리해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정영신, 1990무주장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의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 1989남원장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하이앵글, 즉 위에서 내려 보고 찍는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정영신, 1988청양장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 1989고창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다섯 차례의 장터개인전을 가졌고, 14년 전에 펴낸 정영신의 "시골장터 이야기"는 이미 13쇄에 이르도록 많이 팔렸다.


그 이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장터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도 재판이 나왔다. 눈빛 포토에세이 ’전국5일장 순례기‘에 이어 전시와 함께 출간되는 ’눈빛사진가선‘ ’장날‘사진집(12,000원)은 전시되는 작품이 모두 실려 있다.



정영신,  1990 순창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전시문의:아라아트(02-733-1981)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8월19일

▲ 조문호 기자/사진가


미술품거래가 꽁꽁 얼어붙은 현실 속에 한 가닥 신선한 바람이 인다.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이 서서히 뜨고 있다는 것이다.

조영남 그림 대작과 이우환 위작 사건에다 국가브랜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디자인 표절 의혹, 그리고 전직 문체부 간부의 도둑질에, 그 것도 모자라 엉터리 그림을 비싸게 강매한 짜증나는 뉴스가 넘쳐나는 시국이라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요즘 들어 예술을 사기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술은 사기가 아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이야기는 예술가들이 갖고 있던 권위와 기존 방식만 옳다는 선입견을 말한 것이지, 창작 행위 그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수 없다지만, 예술을 사기로 여기고, 예술가를 유린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돈이 최고라는 지금의 황금만능주의는 헤르만 헤세의 명언을 무색케 한다.

‘독제에 저항한 침묵의 언어’라는 한국단색화 계열 화가들의 궤변도 민망하고, 단색화열풍이 시들하니, 돈 가진 그림 장사들의 민중미술 띄우기도 속보인다. 아무리 바람 잡으려 하지만 도무지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이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대로 돈 단속하고, 없는 자들은 없는 자대로 눈 돌릴 겨를이 없으니, 오로지 작가들만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 아닌 복더위에 한 가닥 봄바람이 일고 있다.

그것도 여태껏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 사진 중에서도 설움을 가장 많이 받은 다큐멘터리사진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이다. 더 고마운 것은 기득권자들의 돈 늘리기 놀음이 아니라, 대중들의 순수한 바람이라 더 눈물겹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제사 사진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채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 사기의 허울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기록의 가치에 대한 진실성은 더욱 더 빛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일먼저 빛을 본 사진가는 우리나라 국토를 기록하는 다큐사진가 임재천씨다. 삼 년 전 제주도를 시작으로 강원도와 부산으로 이어지는 프로젝트에 매년 후원자들이 나서 그의 작업비용을 지원해 주고 있다. 한 지역이 끝나는 전시에서는 후원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서로 나누어 갖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예술 나눔 프로젝트다.

지난달의 강원도 전시를 성공적으로 끝내며, 다시 부산 작업에 대한 후원자를 모집했는데, 몇일 전 후원자 50명이 모두 성원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세 차례의 프로젝트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SNS의 위력이었다.

두 번째 성공적으로 전시를 하고 있는 다큐사진가는 성남훈씨다. 오는 23일까지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성남훈의 초창기 빈티지 시리즈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은 전시가 중반에 이르렀으나 벌써 많은 작품들이 팔려나가는 이변을 보이고 있다. '스페이스22'에서 선정한 작품을 일반인들이 소장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 아트마켓 프로젝트인 '셀렉션 앤 컬렉션‘은 우리나라 사진시장의 숨통을 터서 전업 작가들을 지원하려는 시도였다. 집시사진을 포함한 많은 사진들을 구분해, 10장씩 묶은 소장용 시리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전에 힘입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도 다큐기획전이 준비되고 있다. 30년 동안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기록한 여성다큐사진가 정영신의 ‘장날’은, 80년대 기록된 향수어린 장날 사진이라 벌써부터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는 24일부터 열리는 이 기획전의 후원자를 모집해 우리나라 오일장과 함께하려는 나눔의 미덕까지 갖춘 프로젝트다.

허구보다 진실이 앞서고, 돈의 논리보다 삶의 가치가 앞서고, 욕심보다 인정이 앞서는, 이 반가운 현상에 한 가닥 희망을 건다.

갤러리‘벽과 나 사이’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몰려 나왔을까?




▲윤길중,석인1 경기도 수원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윤길중,석인2 경기도 시흥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윤길중,석인3 경기도 용인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윤길중,석인4 경기도 용인



그렇지만 그 형상을 새겨 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윤길중,석인시리즈1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윤길중,석인시리즈2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끔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1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2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에 걸렸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사진=조문호)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성남훈의 '파리' 빈티지 시리즈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에서...SPACE22, 23일까지




꽁꽁 얼어붙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사진이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SPACE22’가 시도한 아트마켓 프로젝트 '셀렉션 앤 컬렉션(Selection &Collection)에서다.


스페이스22가 선정한 작품을 일반인들이 소장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사진시장의 숨통을 튀워 전업 작가들을 지원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집시’ 10장의 소장용 시리즈(뮤지움 퀄리티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 프린트 수작업)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Selection &collection'프로젝트 1호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의 사진이 선정되었는데, 앞으로도 새로운 작가들을 선정해 이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된다고 한다.


지난 3일,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처음 열린 성남훈의 파리 빈티지 시리즈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은

개막 첫 날부터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며 사진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전시에 투자한 전액이 환수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집시’ 10장의 소장용 시리즈(뮤지움 퀄리티 화이버 베이스 인화지 프린트 수작업)



'셀렉션 앤 컬렉션'에서 판매되는 모든 작품들은 미술관에 소장되는 수준의 화이버베이스 인화지에

수작업으로 프린트된 사진인데다, 거품을 걷어낸 가격으로 판매한 것이 주효했다.

전시작을 갤러리 수익이 포함되지 않은 특별가로 판매한 것은 비영리 대안공간 ‘스페이스 22’의

아트마켓 프로젝트였기에 가능했다.



▲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된 사진들이 좋았다는 점이다.

드레스를 휘날리며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집시소녀나 바이올린 선율로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한 집시사진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규격별로 다양화 된, 10장으로 장정된 소장용 시리즈도 인기였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성남훈 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파리'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아련한 시절의 파리 사진학교 첫 과제부터 리베라시옹 신문에 20일 간 연재한 파리 20개 구의 이방인의 시선,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옴직한 아이들 사진 등, 당시의 40여장도 빈티지 프린트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 공개되는 ‘파리’ 빈티지 시리즈 _ 파리 사진학교 이카르 포토 재학시절 과제 사진, 1990년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은 잘 알려진 사진가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보도사진 콘테스트인 '월드 프레스 포토'에서 두 번이나 수상했고,

프랑스 파리 사진대학인 이카르 포토(Icart Photo)에 재학 중에 '집시' 사진으로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르 살롱'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1999년에는 인도네시아 민주화과정을 취재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월드프레스포토에서 '일상뉴스 부문'에 선정됐고, 2009년에는 옛 동티벳 캄지역 비구니승려의 포트레이트인 '연화지정' 시리즈로 '포트레이트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 있는 수상작들이 모두 전시된다는 것이다.



▲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국내외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코소보,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발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지역, 소외지역을 다녔으며,

아직까지 유민들의 부유하는 삶을 기록하는 중이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성남훈은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리, 아이, 집시들의 사진은 기억의 서쪽이다.

불안한 20대의 나를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자 얼어붙은 나를 깨트려준 작은 바늘 같은 것이다."


‘미진프라자’의 후원으로 기획된 성남훈의 '꿈은 시간을 모른다'전은 오는 23일까지 이어진다.



▲최초 공개되는 빈티지 시리즈 _ 에이전시‘라포’ 소속 시절 첫 취재,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이민자 아이들


그리고 작가의 해설로 듣는 전시는 8월 11일(목) 6시부터 8시까지 SPACE22 세미나룸에서 진행된다.

(SPACE22 / 02-3469-0822)



▲개막식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성남훈씨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 억은 그동안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담아왔다.


▲남도풍색, 부분도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도면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남도풍색‘을 비롯하여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남도풍색, 부분도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해 온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해남 땅끝마을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5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덕룡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5cm


김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만덕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cm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작가 김억은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에 전념해 왔다. 우리 국토를 발로 따라가며 마음에 담아온 뒤 나무판을 촘촘히 깎고 그림을 찍어낸다.


▲월출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7cm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여름,가을,겨울,봄’이란 한국화전을 시작으로 수원화성, 한강 등 열여덟 차례의 개인 국토전을 가졌고,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727일 제181


 조문호 사진가


도서관의 수준을 보면, 그 지역의 수준을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도서관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도서관은 국가에서 세운 국립 도서관과 지방에서 세운 공립 도서관, 그리고 학교나 단체에 딸린 사립 도서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각각 하나씩 있고,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학교도서관, 전문, 특수도서관 등 모두 일 만개가 넘는다. 이외에도 등록되지 않은 마을의 소소한 도서관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도서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질이라는 것이다.

도서관은 기록으로 남겨진 여러 가지 책이나 그림, 사진 등의 자료를 모으고 정리, 보관하며, 여러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책 · 신문 등 인쇄물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등의 시청각 자료는 물론, 심지어 녹음테이프, 영상 필름, 마이크로필름까지 보관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과학 등 다른 분야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사진집에 관해서는 한마디로 빵점이다.

난, 사진 찍는 일이나 잡다한 일에 파묻혀 도서관을 자주 찾을 형편은 못되지만, 책벌레인 아내 덕에 종종 들릴 때가 많다. 사실 가난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입장에서 사진집을 골고루 사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에 들릴 때마다 보고 싶었던 책들을 검색하면, 백전백패다. 원하는 사진집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난달 한 평생 ‘골목 안 풍경’만 기록하다 돌아가신 김기찬 선생의 글을 쓰다, 컬러로 찍은‘골목 안 풍경’이 생각났다. 선생의 ‘골목 안 풍경’은 대개 고즈넉한 맛이 우러나는 흑백사진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두 번째 발행된 사진집은 컬러사진이었다. 서재에 분명 꽂혀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도서관을 돌아다녔는데, 어디에도 그 사진집을 비치한 도서관은 없었다. 사료적 가치는 물론, 대중 인지도까지 높은 사진집이 없다니 귀가 막혔다. 신청하면 구해 놓겠다지만, 일하다 나왔으니 마냥 기다릴 처지가 아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출판된 아카이브 ‘골목 안 풍경 전집’은 몇 쇄를 거듭하도록 인기를 끌고 있는 유일한 사진집이 아니던가? 그런 인기 작가의 서적이 도서관에 없다는 것은 다른 사진집은 보나 마다다.

도서관의 조직은 대체로 수서부문, 정리부문, 열람부문, 참고업무부문, 관리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수서부문은 도서관자료를 선택하여 수집한다. 왜 도서관 사서들이 인문학 서적 못지않게 중요한 사진집들을 비치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사진집 중에서도 다큐멘터리사진집은 바로 우리들의 살아있는 역사다.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소구력을 가진 것이 사진이다. 진실의 현장이 기록된 다큐사진집을 비치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서들의 무지를 넘어, 직무유기다.

이제 세상은 암기력이나 지식의 총량이 아닌 상상력과 창의성이 경쟁력이자 성장 동력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우는 데는, 좋은 사진집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이미 세상은 영상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전체 독서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평균 이하이며, 유엔 가입국 중에서도 하위 그룹에 속한다. 더욱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독서 인구와 독서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제 작년 통계에 따르면 한 번도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 않은 학생이 42%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조한 우리의 독서력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빈약하게 하고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도미노 현상을 가져 올 것이다. 따라서 독서력을 높이는 것은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미래의 우리 삶을 향상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사서들이여! 기케로 루보크의 명언을 되새기자.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오는 3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문진우, '비정도시'사진집.(눈빛출판사, 12,000원)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의 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거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문진우, 1985 부산 해운대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 건방이 들어 인간성 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문진우, 1984 부산 충무동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태껏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문진우, 1987 부산 기장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문진우,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나게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산복도로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 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하야리아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가 문진우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의 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통의동 ‘인디프레스’ 31일까지

‘인디프레스 서울’의 개관 2주년을 기념하는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 3인 초대전 개막식이 지난 8일, 경복궁 영추문 맡은 편에 있는 통의동 신관에서 열렸다.



▲박불똥2016 '환갑풍경'pigment print 334x148


개막식에는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작가들이 총 출동했다. 그 것도 청와대 바로 앞에 있는 전시장이 아니던가. 예전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민중미술이 뜨고 있다. 하도 시국이 어수선하니 그럴까?


▲박불똥2016'세상풍경'pigment print 334x148


오프닝 세레모니로 펼쳐진 장순향교수의 춤도 인상적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춤이라 애잔하고 슬펐다. 시위나 집회 때 마다 춤으로 저항해 온 장순향교수는 80년대 민중춤꾼 이애주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투사다.


▲개막식에서 춤을 추는 장순향교수


초대된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해 온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선두주자들이다.

특히 신학철은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장경호는 암울한 시절 ‘한강미술관’ 관장으로 민중미술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 아니던가.



▲장경호 2016 '악몽-방글라데시' oil on canvas 130.3x162,2


그리고 또 한사람 박불똥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안다.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정권에 대항하는 메시지가 매서웠기 때문이다.

기존의 그림에서 벗어나 사진 오브제를 이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현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초대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작가들의 출품작이 민중미술의 신작이기도 하지만, 장경호의 작품은 마치 그의 복귀전이나 다름없는, 잘 만날 수 없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장경호2016'귀' oil on canvas 140x150



최근 들어 독재, 군사정권, 서구 자본주의 등 사회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민중미술이 상승세를 이루며, 신학철씨의 작품은 그리기가 바쁘게 고가에 팔려 나간다.


민중미술이란 본래 물리적 또는 경제적으로 일반 대중들과 가까운 미술이어야 하는데, 민중을 위한 미술이 부잣집의 응접실을 장식하거나 권세가의 밀실에 숨어든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민중의 그림조차 돈만 되면 끌어당기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소유욕을 보는 듯 해 씁쓸할 뿐이다.



▲신학철2016'무제' oil on canvas 112x194



민중적인 미술은 다시 말해 우아함, 장려함, 위대함, 고귀함 따위로 만들어진 모든 가치는 여기서 낯선 것이 된다. 그래서 민중을 위한 미술은 당연히 반 숭고, 반질서, 비복고적인 비판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어떻게 어프로치하며, 그리고 얼마나 호소력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다. 제아무리 잘 그려진 그림도 진솔한 발언이 없으면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학철2016'별이 된 소녀' oil on canvas 112x194


초대 전시된 그림들은 강렬했다.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피부를 강제로 만지게 해서 촉각적 한기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이다. 정치, 사회를 향한 그들의 강한 메시지는 예술이 갖는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웃는, 강력한 현실발언에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다.


▲좌로부터 신학철,장경호,박불똥.(사진제공=인디프레스)



시대와의 힘겨운 투쟁 속에서 만들어 낸 작품들을 ‘인디프레스’가 찾아내 새롭게 문을 여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인디프레스 : 서울, 종로구 통의동 7-25 / 전화: 010-7397-8498]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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