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 서숙희의 ‘집과 밤’ 네 번째 개인전이 지난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낮과 밤을 나눈 그의 그림들은 일련의 그림 솜씨나 말솜씨로, 보는 사람의 아늑한 감성을 건드리며, 말 걸어오고 있다.


낮과 밤으로 나뉘어 그려진 집을 비롯해 물이나 풀, 창고 등의 형체가 희미한 안개나 어둠에 묻혀있다. 선묘 형태로 형체를 흐릿하게 드러내며, 색채 깊숙한 곳에 묻은 이담의 작품은 언뜻 추상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마치 슬픈 상처를 가린 듯, 아늑한 꿈속으로 이끌어 준다.



선 2015_idam_차가 잘 다니지 않은 곳에 구멍가게를 내다_린넨...


보일락 말락  산길을 지나는 자동차의 자취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리게 했고, 안개에 가린 듯한 희뿌연 그림들은 마음속에 가라앉은 사무친 그리움을 들춰냈다. 조근 조근 속삭이는 말들이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듯, 긴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서숙희씨는 왜 그토록 집에 집착했을까?
인간의 삶이란 모든 것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집에서 비롯되지만, 또 집에서 매일같이 밤을 맞이한다.

 


선2016_idam_망초꽃핀 운동장_린넨에 아크릴채색 73x60



집은 작가의 많은 기억들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였기에 집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작품에는 변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도사리고 있었다.
오직 서숙희 만이 회억하며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되었다.


작품은 작가 스스로의 위안이기도 했지만,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도 위안을 안겨주었다.
서숙희씨가 말하고자 하는 그림 이야기는, 잊혀져가는 그리움의 기억을 찾아내고,
슬픈 상처를 다독이며 서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싱그러운 봄은 찾아왔건만, 정작 인사동의 봄은 기약이 없다. 

그토록 인사동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떠들어도 다들 ‘마이동풍’이다.

“조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며 예전 군인들이 비아냥거리듯, 관련부서는 코 방귀조차 안 뀐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사동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술집으로 흘러 다닐 뿐이다.

한 때,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인사문화마당’을 포장마차 장사꾼들로부터 되찾아 예술공간으로 활용하자”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단위 리플렛을 거리에 내 놓아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자”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처럼, 거리에서 작업도 하고 작품도 팔 수 있는 무명작가 거리를 조성하자“ /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인사동과 북촌지역을 연계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를 개최하자“는 등

예술가들의 제안을 나팔 불어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 전통문화거리를 표방하는 인사동에 ‘한국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치솟는 임대료를 못 견뎌 문화관련 업소들은 외각이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거리의 상품 90%가 중국산으로, 마치 인사동이 차이나타운 같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을 꼭 닮아간다.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100여 년간 고미술의 메카였다.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이 살던 곳이 인사동이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빠짐없이 인사동에 문을 열었었다.

이들 따라 크고 작은 화랑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공방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인사동이 명실 공히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관광객들은 넘쳐나지만, 백 개가 넘는 인사동 전시장들이 텅텅 비어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왜 인사동을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다시 올 리 없다.

그들에게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려면,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거리환경을 정비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해 작가들을 선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 곳에서 전통적인 민화나 서예, 도예 등을 제작해 외국관광객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알리는 표지판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자.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과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문채,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그리고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한 번 바꾸어보자.

아기자기한 인사동만의 골목 문화를 가꾸어,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도 담자.

다 같이 힘 모아,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는 봄바람 한번 일으키자.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사진가 / 조문호



지금 세계에서 대마초합법화 바람이 불고 있다. 심지어 미 대선까지 대마초가 이슈다.

미국은 27개 주에서 의료용 대마초와 여가용 대마초를 허용하였고, 심지어 수도 워싱턴 D.C와 콜로라도 주에서도 주민투표를 통해 오락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했다. 오래전부터 관광용으로 대마초를 허용해 온 네델란드는 물론, 우루과이, 칠레, 카나다 등 세계가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지난 해 ‘뉴욕타임스’에서는 논설위원 전체 명의로 된 사설을 통해 “연방차원의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선언했다. 미국 CNN에서는 “요즘은 마리화나를 ‘만약 합법화한다면’이 아니라 ‘어떻게 합법화할까’로 쟁점이 옮겨졌다고 했다. 그동안 대마초를 합법화한 콜로라도주에서 살인사건이 절반이상 줄어드는 등 강력범이 많이 감소하였고, 단속에 따른 예산액 절감과 대마 사업에 의한 세수확대, 그리고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등 긍정적인통계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여야 정치인까지 대마초 합법화에 적극 나서는 배경에는 대마초 성분이 제약업계의 신약물질로 산업화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의 통계에 따르면 대마와 관련이 있는 606건의 특허출원 중 309건이 중국기업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대마의 효능에 주목해 지속적으로 연구 해 왔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대마초를 다양하게 활용해 왔다. 50년대 후반만 해도 시골에는 대마초가 흔해 모기를 쫓는 모깃불로도 활용했다.

지금은 길삼 삼는 일부지방에서만 관리재배 되지만, 옛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었다. 입맛이 돋아 식욕이 생기고 천식이나 이뇨, 간질, 진통 등의 효과가 있어 한약재로서도 유용했다.

그런데 왜 인류에 유용한 약물을 마약으로 분류해 강력한 단속을 했을까?
대마초는 종이, 알콜, 담배 등 미국의 거대 재벌들 음모에 놀아나 마약으로 둔갑한 역사를 갖고 있다. 만약 대마가 여러가지 산업 용도로 활용되었다면 엄청난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득권자들이 그냥 둘리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 놀음에 등 떠밀려 70년도부터 습관성의약품관리법으로 규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갤럽의 여론 조사 결과도 대마초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58%가 됐는데, 1969년 여론조사를 시작한 이후 역대 최고치다. 그 전에는 18세에서 35세까지의 젊은 층 지지율이 높았지만, 지금은 다른 연령대에서도 고르게 지지를 얻은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그리고 대마의 중독성이 담배의 니코틴보다 약하다는 것이 정설이 되면서 대마초를 금지하는 이유도 설득력을 잃었다. 대마초보다 훨씬 위험한 것으로 확인된 담배와 술은 버젓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현실에서 볼 때, 대마초는 보건과 관련된 문제지, 범죄로 다루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70년대 중반 무렵, 부산 에덴공원에서 음악실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 미군들이 자주 들락거려 대마초를 얻어 피울 수 있었다. 당시 히피문화의 유입으로 대마가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음악 감상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78년도 교사들의 대마초 흡연사건에 엮여 곤욕을 치루적도 있었다. 부산 대연동의 ‘마약중독자진료소’라 써 붙인, 수용소인지 고문실인지 분간 안 되는 음습한데 끌려 가, 흡연한 친구를 불라며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고, 심지어 코에다 물까지 부어재꼈다. 그렇게 짐승처럼 주물다 결국 구속시켰는데, 그들 말처럼 마약중독자라면 병원에 보내 치료 받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단속한 경찰 공무원들이 대마초를 피워대는 아이러니도 엿보았다. 완전 개판이었다.

지난 해 JTBC방송의 ‘비정상회담’에 나온 강용석의원이 대마초이야기에 대화를 중단한 적이 있었다. 그의 영어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인터뷰였지만, ‘타일러’가 대마초합법화에 대해 질문하자 “여기까지만 하죠”라며 즉답을 회피한 것이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못한다는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마약이라는 무거운 족쇄에 채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금기'는 깨기 어렵다. 일단 금기의 반열에 오르면 이미 근거를 상실한 규정이라도, 맹목적으로 지키려는 일종의 관습이 따르기 때문이다. 제약의 근거가 사라지고 나서도 금기로 남은 규정이 상당한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미적거릴 일은 아니다. 국가나 법 자체가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잘 못된 법은 빨리 고쳐져야 한다. 지금도 수많은 대마흡연자들이 마약중독자란 중범죄자로 내 몰리고 있다.

이제 안락사에서부터 대마초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행복할 권리를 국가가 통제해서는 안 된다.우린 잘 못된 법을 바꿀 권리도 있고, 행복을 누릴 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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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 사진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가 술렁거린다. 누가 공천 받을 것이라거나, 누가 밀려난다는 등의 추측들이 무성하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출사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이나 열심히 하지, 정치는 무슨 정치냐고 할지 모르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고 못지않게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대변하고 구제할 수 있는 정치인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예술가들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2011년에는 연출가 최고은씨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숨졌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글을 남겨,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래서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되었다. 작년에는 연극배우 김운하씨가 고시원에서 죽었고, 영화배우 판영진(55)가 자신의 차안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 두 배우의 공통점은 한 달에 몇 십만 원에 못 미치는 극심한 생활고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이다.

‘예술인복지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는 판단아래 개정안이 추진될 예정이라지만 탁상공론으론 복잡한 현실구조에 접근할 수 없다. 이젠 예술가들이 현실정치로 들어가 현장 목소리를 전하며 잘못된 현실을 바꾸는데 앞장서야 한다. 또한 예술의 상상력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해체해야한다. 기득권과 관습이 작용하는 정치를 ‘예술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지 것 온갖 집회들이 난무했지만, 예술가의 복지나 권익을 내 세우는 집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예술가들의 체면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일상과 관습으로부터 거리를 두어 예술의 고고함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내뱉는 `예술가는 가난해야한다`는 근대적 경구가 공허하다. 그 가난의 이름은 몸의 가난이 아니라 정신적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의 창조성이다. 그러나 예술가라고 개성과 이상향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누울 잠자리와 허기를 메울 밥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만나는 예술인들마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한 달에 100만원 소득도 올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작품을 팔아서는 도저히 기본적인 생활이 되지 않아 많은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접거나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점차 어려워 진 경제상황은 예술가들을 신용불량자로 내몰며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그러한 예술가들에게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줘야 하지 않는가?

정부에서 베푼다는 예술인복지지원금이나, 지자체 문화재단에서 주는 창작지원금이 있다지만, 인사동을 오가는 주변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혜택 받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행정의 이치를 아는, 발 빠른 자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창작발표래야 용케 지원금 혜택 받는 몇몇 작가 내지는 돈 많은 집안이나,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아줌마가 되어야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예술이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나라의 격을 높인다.’ ‘문화예술을 통해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등 문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들은 뻔지레하지만, 정치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인사동의 그 많은 전시장에서 매일같이 좋은 전시가 열리고, 도처에서 좋은 공연이 열리지만, 텅텅 비어있다. 이젠 그런 말장난보다 어떻게 국민들을 문화로 끌어들이느냐에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를 끌어가는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일이 시급한 문제다.

그래서 열악한 문화예술계를 대변할 예술가들이 정치 전면에 나왔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번 선거에서 어떤 출마자가 예술가를 위해 어떤 정책을 펴고자 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자. 이를 토대로 예술가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자.

더 이상 냉혹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사진의 힘이 커졌다.


옛날엔 글로 역사를 남겼으나, 이제는 사진 또는 영상으로 남기는 세상이다. 사진은 역사이기 이전에 세상을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60년 눈에 최류탄이 박혀 마산 앞바다에 떠 오른, 김주열군의 시신을 찍은 ‘국제신문’ 허종기자의 사진 한 장이 4,19를 유발시켜 역사를 바꾸지 않았나.

사진이 처음 들어 온 광복 이전에는 외국 사진가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 고작이다. 본격적으로 사진이 자리를 잡은 것은 광복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의해 남긴 사회 기록상도 더러 있지만, 시대적 사건이나 정치적 이슈를 담은 대부분의 사진들은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남긴 것 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승만 정권이 하야하기 전 후의 많은 사진파일들이 폐기처분된 것이다.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그 당시 신문사진 현장의 최 일선에서 계셨던 이명동 선생의 증언은 충격 자체였다.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에 끼친 영향력도 워낙 크지만, 보도사진가로서 기자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4,19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에서 찍은 사진을 비롯해, 육군교도소에 잡힌 서민호선생을 찍기 위한 위장 사건, 정치깡패 추적 사진 등 사진 계에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 낸 분이다. 그 외에도 사진단체 창설 등 사진사에 남을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생께서 주도하셨다.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의 전설이자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선생께서 기록한 그 많은 사진자료들이, 역사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일부 몰지각한 사람에 의해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이명동 선생이 몸담고 계셨던 일개 ‘동아일보’사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더 심각성이 크다.

이명동선생께서 ‘동아일보’ 사진부장으로 계실 때, 일정한 기간이 지난 필름과 사진을 모아 조사부로 넘겼다고 한다. 조사부에서는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진필름들이 하나의 천덕꾸러기 신세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조사국에 들렸더니 넘긴 필름들이 깡그리 사라졌더라는 것이다. 폐기처분했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단다. 차라리 폐기처분하기 보다 누가 훔쳐갔으면 좋겠다.

그 것은 선생께서 평생 몸 바쳐 온 사진작품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신문사에서 월급 받고 신문사 필름을 사용했으니, 그 사진들은 모두 신문사 사진이라”며 필름 한 컷 넘보지 않은 아주 고지식하게 사신 분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던지 평생을 사진하셨지만 댁에 사진 한 장 없다. 몇 해 전 구순을 기념하는 개인전 때도 제자 김녕만씨가 간신히 수소문해 종군기자 무렵의 사진들과 보도된 신문 복사로 전시한 게, 생애 첫 전시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그 시절 사진이래야 일부 사진기자로 부터 흘러나온 필름들이 고작이다. 그 것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우리의 역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양심이 양심을 이기는 사례도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양심도 버려야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잘 못된 법을 만들어 휘둘러대는 부패한 정권에서는, 법을 어기는 국민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듯이, 결코 사라진 사진들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조문호 사진가


세계화시대를 맞아 그런지, 온 나라가 국제화를 외치며 ‘국제’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부와 기업, 단체들은 물론 전 국민들까지 세계화에 뒤질세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외국으로 몰려 나간다.

마치 세계로 가는 배에 오르지 않으면 낙오라도 되는 냥, 극성들이다.

사람들이 국제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우물 안 개구리" 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모양인데, 방학이 되면 학생들까지 앞 다투어 배낭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나가서는 외국문화를 무분별하게 끌어들이는데, 정작 우리의 문화는 제대로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구석은 얼마나 가보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렇다고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문화를 내보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무분별한 줄서기를 말하는 것이고, 실속 없이 이름만 내 건 겉치레의 국제화를 탓하는 것이다.

수없이 열리는 우리나라 축제들이 붙이는 ‘국제’란 말은, 허울 좋은 이름 내세우기에 불과하다.

국제음식박람회, 세계김치문화축제 같은 음식축제에서부터 국제탈춤페스티벌, 국제친선연날리기 등의

우리 전통문화를 내 세운 축제들도 많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들어본 지 없다.

특히 예술분야의 축제는 너무 난립해 헷갈리기까지 한다.

춘천국제마임축제나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자리 잡은 축제도 있으나, 연극축제, 미술축제, 사진축제들은

‘국제’가 들어가지 않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듯, 온통 국제란 이름을 달고 있다.

운영이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의 국제예술제는 제쳐두고라도

필자가 관심 있게 보아 온 국제사진축제에 대한 허실부터 한 번 짚어 보려한다.

사진축제로는 대구사진비엔날레, 동강국제사진제, 전주국제사진제,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수원화성국제사진축제 등 모두들 국제화를 지향하고 있다.

하남국제사진페스티발,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울산국제사진페스티벌과 같이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중단된 축제도 더러 있다.

문제는 예산집행규모가 가장 큰 ‘대구사진비엔날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진축제 국제화가 유명무실하다는데 있다.

대개 한 두 분의 외국작가를 초대하는 게 고작이라, 국내 사진인 들의 축제에 다름 아니다.

여지 것 외국사진인들이 축제를 보기위해 몰려온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렇게 점차 발전시켜 명실상부한 국제사진축제로 발돋움하려는 목표야 알지만,

하나같이 국제를 지향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최소한 하나 정도는 한국사진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축제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사진축제는 특성들이 없다. 적어도 한국사진을 정리, 연구하고 발전시키려는 축제도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일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사진에 대한 정립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갑작스레 밀려 온 현대사진으로 초창기 리얼리즘 사진들이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수많은 사진들이 빛도 못보고 사장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원판들은 유족의 무관심으로 버려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사진을 발굴, 재조명하는 게 무분별한 외국사진 흐름의 답습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요즘,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해외 전에 목매는 사진가들을 악용해, 한국 사진가를 끌어들여 장사하려는

축제들까지 출몰하고 있다. 초대해 놓고는 돈만 쓰고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 예로, 지난 달 ‘북경국제사진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내사진가 다섯 명이 사진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여비는 물론 체류비 까지 본인이 물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국전을 기획한 분의 체면을 봐 사진만 보내고 말았지만,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그에게 작가예우를 갖춰 줄 것을 주최 측에 요구하라했더니, 그러면 우리도 해 줘야 하니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무슨 소린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조그만 사진축제라도 다 해준다.

또 하나 문제는 사진축제가 끝 난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작품반송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북경국제사진제’ 뿐 아니라 ‘핑야오 국제사진축전’등 중국사진축제들의 만행인데,

이 모든 게 국제화 바람이 만들어 낸 웃음거리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정체성 없는 국제화 행사나 남 따라 가는 외국 나들이는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관이 바뀌고, 자칫 우리의 민족성마저 바뀔 수 있다.

외래문화가 우리문화를 잠식하게 만드는 슬픈 일이 되는 것이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평생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어왔는데, 왜 사람만 모이면 망가지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하루 평균 오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고 한다. 모이는 사람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꼬이면 돈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돈에는 원칙도 윤리도 정의도 아무 것도 소용없다. 비정할 뿐이다.


고유의 전통적 예술풍류를 바탕으로 한 인사동의 정체성은 이미 풍비박산 난지 오래다.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장인들, 인사동 풍류를 만들어가는 예술가들, 예술과 전통문화를 유통시키는 상인들, 정체성을 지켜 온 이러한 주체들이 발붙일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프랜차이즈 업체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땅따먹기를 하는 중이다.
수공예 장인이나 예술가, 영세 상인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둘 인사동을 떠나고 있다. 그 권리금 분쟁도 시끄럽다. 모두 전통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돈만 보이는 것이다.


인사동이 썩는 돈 냄새로 똥파리 같은 돈 파리들이 들 끌고 있다.
심지어 대기업까지 아가리를 들이대며 호시탐탐 노린다.

지금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몰려들다가도 별 것 없으면 돌아서는 게 군중심리고,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 또한 돈의 속성이다. 그래서 인사동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지 조차 알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전시되는 전람회 리프렛을 주단위로 만들어 거리에 내 놓자는 제안도,
예술가들의 거리를 조성하자는 제안도 모두 감감소식이다. 지역 상인들도 똑 같다.


대표적인 사례 하나 들겠다.
인사동에서 제일 큰 갤러리가 ‘아라아트’다.
그 ‘아라아트’는 시인 김명성씨가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 재산을 털어 넣은 건물이다. 한 층이 100평이 넘는 9개 층 전부를 갤러리로 만들어 인사동을 미술의 메카로 만들 작정을 한 것이다. 주위에서 말렸으나 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근 10년 가까이 끌어오며 당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 이야기들을 묶으면 책 한 권은 족히 될 정도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더라.

그렇게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도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와주거나 전시를 지원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엊그제 그를 만나 “빈손으로 물러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동의 마지막 등불마저 꺼지나 싶었다. 걱정이 태산이다.


인사동이 돈에 중독된 사람들로 가득한데, 그 병은 구할 약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돈보다 사람이 먼저 서는 세상이 되어야 하고, 또 바꾸어야 한다.
우리 인사동만의 풍류와 문화로 되돌리는데, 다 같이 지혜와 힘을 모아보자.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큰 아버님! 가람이 장가가는 날, 결혼사진 좀 찍어줘요.”

지네 시숙이 사진가라 더 잘 찍을 줄 알고 부탁을 하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예식장에서 찍는 분들이 훨씬 잘 찍는다.

잘 준비된 조명시설과 모든 과정을 훤히 깨고 있는 그들보다 어떻게 잘 찍을 수 있단 말인가?

옆에서 듣던 동생이 “나이 많은 형이 어떻게 결혼사진을 찍느냐”며 제수씨를 나무랐지만,
손자 같은 조카 찍는 일이 창피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 사진 찍는 일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들보다 잘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의 결혼사진을 벗어난 장기간의 기록 프로젝트라면 모를까...

예식사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진들은 그 방면에서 숙련된 사람들이 더 잘 찍는다.
왜냐하면 사진가는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사진기를 통해 자기의 생각들을 담아 낼 뿐이다.

근래에는 다른 예술장르에서도 사진기를 활용하는 작업이 늘어남에 따라, 이미 회화와 사진의 경계마저 무너졌다.
사진기는 한낱 연필이고 붓일 뿐이다.

그리고 꼭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진작가’라는 말을 제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들에 대한 경어로 하겠지만,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작가라고 말하는가?

작가라는 말은 창작을 하는 예술가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데도, 심지어 기자들까지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마추어 사진단체인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증에도 ‘사진작가증’이라 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어찌 남 탓만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의 오해는 사진이니까 얼마든지 프린트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대부분 한다.

물론 재미로 사진을 한다면 인쇄하듯 프린트해 나누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가마다 한 컷의 사진에 몇 장만 프린트한다는, 판화처럼 에디션 넘버가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벽에 걸어 둘 만한 사진들은 작가마다 그리 많지 않다.

또 그냥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사진가는 뭣으로 입에 풀칠한단 말인가?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국민 모두가 사진기를 가진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아 그런지 남의 사진을 대수롭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인터넷 상에 출처도 없는 사진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대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미지를 퍼 옮기고 있는데, 이건 이미지를 퍼가는 게 아니라 훔쳐가는 것이다.

아무리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출처라도 밝혀줘야 한다. 그게 예의다.

심지어는 굴지의 신문사에서 무단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발목 잡히면, 큰 코 다친다.

그리고 개인작업과 연관 되어 주변 분들의 초상사진이나 일상사진들을 많이 찍는다.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은 찍었는데, 왜 뽑아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많은 사진들을 다 뽑으려면 할 일을 제쳐둬야 하거니와, 가난한 사진쟁이가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재료비를 충당할 수 있겠나?

물론 가까운 분들의 초상사진은 인화해 주기도하나 소설이나 시집들에 그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판사를 나무라면 원고료 탐낸다는 소리 들을까 봐 그냥 넘어가는데, 심지어는 누가 찍었다는 출처를 밝히지 않는 곳도 있었다.

사진에 언제 누가 찍었다는 기록이 있으면, 그 사진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는 걸 왜 모를까?

이젠 세상이 바뀐, 전 국민 사진가 시대다. 가능하면, 자기가 찍은 사진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활용하는 것이 최고다.

사진기도 무조건 비싼 것만 찾지 말고,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기면 그만이다.

행동보다 생각이 앞선 상태에서 무슨 주제든, 무슨 사물이든, 한 가지만 꾸준히 기록해 나간다면 그게 바로 역사가 되고 작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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