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호 사진가



사진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사진의 꽃이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최근 들어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연 이어 볼만한 다큐멘터리 사진전들이 열리고 있다.

권철의 ‘독대’나 양승우의 ‘청춘길일’ 등 둘 다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한 사진가들이다.

특히 조폭들의 삶을 다룬 양승우의 ‘청춘길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권철은 제주에서 풀빵장사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양승우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조직폭력’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뒤늦게 사진학과 후배였던 아내를 맞으며 노숙자 신세는 면했다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말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에선 일용직 자리마저 쉽지 않아 일본에 눌러 있다고 했다.

건축현장 노가다로 일하며 사진작업을 잇는 그의 생활은 눈물겹다.

이번 전시 뒤풀이에서 눈물을 훔친, 그 아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실을 매개로 하는 다큐작업을 그렇게 띄엄띄엄 찍어 어떻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다큐사진가들은 대학교 문전이나 기웃거리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한다.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진가들은 행여 사진으로 돈 생길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려 아귀다툼이다.

반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 온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숱한 빚을 안고 살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내년이 ‘87민주항행’ 30주년이라 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사겠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민주항쟁을 기록한 세 명의 사진을 구입한다고 했다.

그 쪽에서 원하는 오십여 장의 이미지를 보내고는 꿈에 부풀었다.

쓰러져 가는 정선집도 수리하고, 잘 하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서다.

그런데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마지막 결재라인에서 ‘87민주항쟁’ 자체가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이유는 아닌지...


사실, 이것이 정부에서 기록 사진가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혜택이기도 하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는 것이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서는 한 가닥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그 구멍이 바늘구멍보다 작아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현실이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술인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작업실에 앉아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역사박물관의 사진 소장 율을 대폭 확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시스템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다큐멘터리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여유가 있는 분은 사진 한 점이라도 소장해 주고, 사는 게 그렇고 그런 분들은 사진집이라도 한 권씩 구입해주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다큐사진 시리즈는 한 권에 12,000원이라 별 부담도 없지만,

유익한 사진들이 실려 있어 구입 가치가 높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진실이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가려진 세상의 위장막을 걷어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요한 것이다.

다큐 사진가가 살아남아야 세상이 밝아진다.

대전아트센터 쿠, 오는 9월 2일까지


▲정복수 作


‘골프존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정복수의 80년대 특별전‘ 개막식이 지난 7일 오후7시 대전 ‘아트센터 쿠’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김영찬 골프존문화재단이사장, 화가 박건 씨 등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작가의 아들 정상이 군이 이끄는 4인조밴드 ‘안녕의 온도’가 나와 멋진 축하 연주도 해 주었다.





▲정복수 作


이 전시는 작가 정복수의 1980년대 작품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몸의 지도’라는 부제 아래 억눌린 인간의 본성 표출이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탐욕의 인간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1979년 전시부터 여지껏 인간의 절단된 몸만 다루어 오고 있다.



▲정복수 作


언젠가 안성의 어느 산 아래 자리 잡은 그의 외딴 작업실에 들린 적이 있는데, 마치 음습한 정형외과를 연상시켰다. 홀로 외롭게 틀어 박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며 인간상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 곳곳에 가죽이 벗기고 사지가 잘린 육신들이 프레임 속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는데,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의 위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평생 화두였다.



▲정복수 作


그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 시절의 스케치북에도 사람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인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이후 홍익대에 진학하며 잠재적 문제의식이 고개들었는데,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의 사회문화적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되었다.



▲정복수 作


충격적인 그로테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해 온 결과, 한국현대형상 회화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정복수는 신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끄집어낸다. 신체 절단의 부정성이나 원초적인 동물성보다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정복수 作


그리고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힘찬 줄기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절단과 훼손에 따른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라는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잘린 신체의 목들이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양면성으로 위장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욕망만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영혼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림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공간을 넘는 것으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정복수 作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화면이 보다 구체적이고 폭이 넓혀져 관찰자로서의 치밀함과 부드러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캔버스 오브제 입체 색연필 드로잉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 등 기법과 형식에서도 다양성을 띤다. 외형상 절단되고 왜곡되고 기형화되어 있어도 매우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의 육체는 ‘보여주는 육체가 아니라 말하는 육체'라고도 말했다.



▲정복수 作


작가는 "내가 그리는 ‘몸’은 잃어버린 생각들을 찾고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해 떠나는 무전여행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할 것이라고도 했다.

 

▲정복수 作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는 정복수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정복수의 작품 속에서 정신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정한 실존의 조건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는 이내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애달프다. 그렇게라도 살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의 고귀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찌르는' 정복수의 그림이 안겨주는 소중한 덕목이 바로 이 것이다.”



▲작품 앞에서 작가 정복수 씨.


이 전시는 9월2일까지 이어진다.


조문호 기자/사진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 오는 20일까지




후덥지근한 장마철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전이 열렸다.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의 ‘청춘길일’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숱한 전시를 하였건만, 고국에서는 처음 있는 전시다.


몇 일전,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들을 보아 기대는 했으나,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전시장 가득 돈 냄새와 여자냄새, 마약 같은 찐득한 냄새들이 진동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듯,

내면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전시를 보고 말한 미술학자 이태호 교수의 말이 적확했다.

“고급스런 하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질스런 고급문화를 본다.

양승우의 사진을 보면 그동안 우리 다큐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참으로 소심하고

착하게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본 작가의 첫인상은 폭력배처럼 우락부락한 것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겸손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력을 읽었을 뿐이다.






조직 폭력배로 삶을 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친구가 사진 찍는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내세우는 사회에 감춰진 이면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에 앞서,

사진가로서 죽은 친구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사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스스로에게 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명분 있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양승우 사진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돈 없는 죄와 못 배운 죄를 짊어 진

사회적 약자에 다름 아니며,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찐득한 모습 뒤에 인간적인 애잔함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양승우의 사진이 껄끄럽거나,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 그렇지, 어느 정도의 양면성은 다 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섹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전시장에 오는 도중 충무로 역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차가 밀려 내려가 앞 차를 받았다.

경미한 충격이라 내려 보니 차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인사사고를 접수하라는 것이다.

영업용기사야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지내며 일당을 받을 욕심인지 모르지만,

뒷자리에 앉은 보험회사원까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예전에는 목이라도 움켜지며 아픈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의리 하나로 뭉쳐 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양승우는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에 전전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가부키초의 야쿠자를 시작으로 고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곤타씨 등 서너 개의 테마를 동시에 찍었다.




20여 년 동안 열 번 이상의 사진전과 네 권의 사진집을 냈고, 열 번 이상의 사진상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의 ‘인 비트윈 아트 갤러리’ 소속작가지만,

여전히 일용직 노무자로 일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참한 현실이다.





언급한 이력이나 유명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진들이 주변을 오가며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함께 즐기며 찍지 않고는 이렇게 강력한 소구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교도소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각오로 온 몸을 바쳐 즐기는 사진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전시된 사진들은 옛 친구들과 놀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폭집단의 실상이지만, 일본의 야꾸사들을 찍은 사진집도 펴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조직폭력배 친구들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달랐다.

찍으려는 작가의 진정성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마저 허문 독창성이 있다.

주변의 누군가에 카메라를 쥐어 주고는 자신이 사진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양승우의 사진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누가 셔터를 눌렀나 보다 함께 교감하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진가가 찍어 온 야쿠샤, 노숙자, 동성애자 사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듯 친밀하게 다가 온다.

어디가 진실이고 허구인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신이 당하는 현실 속의 분노와 욕망의 찌꺼기까지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의 솔직하고 과감한 접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을 담아낸 이 자전적 기록들은 누가 뭐래도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사진가이건만, 살아가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에 들어 와 살고 싶지만,

한국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들어, 그나마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산단다.

그 것도 몇 년 동안 길거리에 노숙하며 살았는데, 사진과 재학 때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사진가 양승우

전시 개막식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고집스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오신 여성분들이 볼 때는 제 사진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진이냐?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싸울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답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27집’ 양승우사진집 “청춘길일”이 나왔다,

가격은 12,000원이다.







 
▲배연신굿, 굿을 지켜보는 김금화만신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서해안 풍어제’ 정기공연이 지난 7월2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소래포구에서 열렸다. 첫날의 대동굿은 어시장에서열렸고, 3일의 배연신 굿은 소래포구에 정박한 배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서해안 풍어제는 본래 황해도 해안 지방에서 정월에 치러졌던 풍어제였다. 이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서해안풍어제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의 공동제사였다.

소래포구에 정박한 뱃머리에는 무신도를 올려 세운 굿청이 마련되어 있었고, 배위 여기저기 무당들이 둘러앉아 부산이나 지화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이란 짚으로 동그랗게 엮은 일종의 땟목이다. 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고 불을 붙여 바닷물에 띄우는 것으로 부정을 가시는 것이다.

한 쪽 구석에는 김금화, 김매물 만신이 앉아 있었는데,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모든 준비나 굿은 오태운, 조성연, 김혜경, 이순애, 오순근, 박이섭, 김태진씨 등 조교나 이수자들이 진행했다. 굿판에는 선주를 비롯하여 김용희 인천남동문화원장,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등 많은 분들이 함께 어울렸다.


▲배연신굿, 갑판에서 내려다 본 굿청


화려한 복장을 한 무녀들의 춤과 악사들의 떠나 갈 듯한 장단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에 서낭기, 호기, 장군기에 서리화, 봉죽, 백모란 등의 화려한 지화장식과 선주들의 오색 뱃기가 줄지어 장관을 이루었다.


뱃사람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배연신굿은 바다 위 선상에서 펼쳐지는 뱃굿이라 흥미롭다. 개인 뱃굿이면서도 내용이나 형식,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가는 굿인데, 연희적인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배연신굿, 김금화만신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그리고 신내림을 받은 강신 무당들이 벌이는 굿판이라 춤사위가 별신굿보다 훨씬 격렬하다. 신청울림, 상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울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그물올림, 쑹거주는 굿, 다릿발용신굿, 강변굿 등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배연신굿, 대감놀이굿을 하는 박영선무당


배연신굿의 절정은 먼산장군거리였다. 이순신, 최영, 임경업 장군 등을 모시는 거리로 소머리에 삼지창을 꽂아 거꾸로 세우고, 손으로 쳐서 쓰러지지 않으면 굿을 잘 받은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이 날도 한쪽에서 조용히 굿을 지켜보던 김금화 만신께서 제대로 서지 않았다며, 다시 세우라고 불호령을 날렸다. 영험함이나 예능적 끼를 타고 난 김금화 만신이지만,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배연신굿, 먼산장군거리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우리민족문화의 뿌리는 무속이었다. 악기나, 소리, 춤, 모두가 굿에서 비롯되었다. 기쁨이나 슬픔, 바람들을 굿으로 풀며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타파니 허례허식이란 억울한 죄명에 밀려난 것이다.


▲배연신굿, 무신도를 세운 굿청의 전경


오래동안 전통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만 인식시켰으니, 불손하고 거친 시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무대에서는 예술이 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까지 저급문화로 홀대하는 이들이 많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배연신굿, 배로 이동하며 흥겹게 춤추고 있다.




▲조문호 사진가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20대 국회에 문화예술 전문가가 아무도 없다.
비례대표로 뽑힌 국회의원도 없지만, 비례대표에서 지역구를 갈아탄 문화계 출신 후보들까지 모조리 낙마해 버렸다. 지금 정부가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삼아 정권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단 말인가.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문화예술을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올 수 도 없겠지만, 나온다 해도 헛다리짚을 게 뻔하다.


지역구 의원 중에는 자칭 ‘문화 전문가’라는 분들이 더러 있다. 제발 좀 웃기지 마라. 문화 예술에 대한 철학이나 전문지식도 없이 보좌관 도움으로 관련법 몇 개 발의하고, 어설픈 글로 책 한 권 냈다고 문화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문화예술 전문가가 없는 국회로 문화융성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지만, 앞으로 가난한 예술가들 살 길이 막막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 예술인들이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유명 연예인의 그림이 경매에서 고가에 팔린다는 소식으로, 평생 그림에만 매달렸던 전업작가들이 심한 박탈감을 느껴 왔는데, 이젠 조영남의 대작논란으로 사기꾼 취급까지 받게 됐다.

조영남 씨는 평소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을 즐겨 인용했다. 그 말 자체는 재미있게 풀어가려는 말이었지, 예술은 사기가 아니다. 자기가 사기를 쳤으니 사기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예술을 사기’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상식을 깨는 시도를 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나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이 진정 깨 부시고자 했던 것은 기존의 예술가들이 갖고 있던 권위이자 기존 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던 선입견이지 창작 행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기득권에 도전하던 예술가들의 창조 정신이 왜 기득권의 교묘한 방어술로 악용되는지 모르겠다. 조영남씨 경우는 대작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적 도리나 양심에서 구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난달 미술의 공공적 가치를 고민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관광 명소인 서울 이화동 벽화마을의 통로계단 그림들이 주민들에 의해 말끔히 지워 진 것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료들의 생각과 주민들의 생활상에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공공예산이 들어간 계단그림을 일방적으로 지운 것도 문제이지만, 충분한 교감 없이 시행한 주관 처는 물론, 사업에 참여한 미술인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국내에 벽화나 조형물이 들어선 마을 프로젝트는 전국적으로 200여 곳에 이른다. 10년 전부터 지자체별로 여러 가지 공공미술 사업들이 추진되어 왔지만, 주민의 삶과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작가들이 공무원들과 타협해 관광 위주의 볼거리나 환경미화에 머무르는 작업들을 내놓는 관행이 만연해 있다. 사업이 끝나면 작가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흉물이 된 사례도 곳곳에 늘려있다. 작가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책임지고 이끌게 하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 마을 프로젝트에 참여 작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 세운다면, 이처럼 소홀이 다루겠는가? 작가는 진정성을 가지고 주민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예술적 아우라를 마음 것 쏟아 부을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절실하다. 머리보다 마음을 앞세워 마을 프로젝트에 임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의 문화예술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강남의 디올 빽 사진이 여성비하라며 강제로 내려지는 등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가 하면, 예술을 우습게 보는 사회적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하기야 정치인들이 예술을 하찮게 여기니, 국민들만 나무랄 처지도 아닌 것 같다.

엊그제 가난한 다큐사진가 권철이 충무로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일본에서 모든 지위 다 버리고 귀국한지가 몇 년째지만, 그 결정이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풀빵장사를 하며 작업은 이어가지만, 한국에서 당하는 굴욕에 대한 그의 절규가 영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더 이상 악밖에 남지 않은 예술가들을 벼랑으로 내 몰지마라.

예술가들이 쓰러지면 문화예술이 쓰러지고, 문화예술이 무너지면 정신도 경제도 나라도 모두 무너진다.


-서울문화투데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20일~30일까지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사진가 ‘권철 론’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사진전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사진가 권철의 결연한 작업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은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와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권철,뎃짱1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다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테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권철,가부키초2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서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권철,야스쿠니, 국국주의의 망령1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저널리즘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3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권철, 야스쿠니,군국주의의망령4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2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 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권철,이호테우1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 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권철, 이호테우2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사진가 권철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기자/사진가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를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월30일까지 이어진다.






이름난 타악주자 김명대와 김정희의 신명이 펼쳐진 굿판


2016 강릉단오제가 음력 5월5일인 지난 9일부터 강릉시 남대천 단오장에서 열렸다.
단오제의 단오굿 제단은 화려한 종이꽃과 무당의 복식들이 눈길을 끌었고,

신위를 모신 제단 아래는 아낙들의 정성어린 소지가 올려지고 있었다.



▲양중이 김명대


축원굿과 부정굿, 군웅 장수굿 등 다양한 단오굿으로 집안의 평안과 생산의 풍요로움,

무병장수와 조상의 숭배와 영혼들의 천도를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강릉 단오 굿은 대대로 내려오는 세습무당이 벌이는 굿판으로, 사화선, 빈순애, 신성녀, 박금천,

신길자, 이순덕, 김은영, 신희라, 한민경 등 수 많은 무녀들이 돌아가며 굿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 타악연주자 장구잽이 중 한 명인 양중이 김명대(우측)와 꽹과리 주자 김정희(좌측

)

단오기간 내내 굿을 하려니, 축원굿의 수도 많이 늘었지만, 무가가 아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과부타령인데, 시집 간지 일 년이 못되어 남편을 잃고 모진 시집살이를 하다
중이 된다는 내용이었으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강릉 단오 굿은 타악기로만 연주되는데, 보통 두 대의 꽹과리와 장구, 징, 바라로 짜여 있다



▲우리나라 최고 장구잽이 중 한 명인 김명대



세습무당에 의해 전승되어 온 단오 굿이 어느 지역 무악보다 뛰어난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은
양중이들이 어머니의 배속에서부터 소리를 익혀 왔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무악의 경지였다.


특히 양중이 김명대씨는 장구잽이로, 김정희씨는 꽹과리로, 각각 우리나라 최고의 타악기 주자인데,

그 신명을 따를 자가 없다




▲굿판에서 액맥이 소지를 불사르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볼거리는 김명대, 김정희, 두 양중이가 펼치는 액맥이 가무극이었다.
굿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굿에서의 악가무극은 오래된 것이고, 다양한 예술장르가 발전하는 모태이기도하다.


관객들을 이끌어가는, 그 가무극이 얼마나 웃기는지, 모두들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굿판을 떠나오며 양중이 김명대는 무당이기 전에 타고난 광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기자/사진가

15일~21일 ‘토포하우스




다큐 사진가 마동욱의 '고향의 사계'사진전이 지난 15일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 날이었으나, 전시장엔 축하객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장흥에서 올라 온 고향 분들이었다. 대단한 고향사랑에, 대단한 인정이었다.


여지 것 전시장 개막식에 그리 많이 돌아다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 동내 이장에서부터 방귀깨나 뀌는 분들은 다 왔더라.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이귀남씨를 비롯하여 정동영, 이종걸, 윤호중, 황주홍의원 등 국회의원만 네 명이고, 장흥문화원장 등 내노라하는 분들이 줄줄이 나와 전시를 축하했다.


작가가 재벌이나 권력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개뿔도 없는 일개의 사진가에 불과하다. 이 건 고향사랑도 사랑이지만, 마동욱의 헌신적인 인간성에 매료된 것 같았다.


사진가 마동욱의 고향을 사랑하는 사진작업은 30여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그는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에서 태어나 교도관과 소방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아예 고향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찍는 사진은 돈벌이와 전혀 거리가 먼 사진이다. 안정된 직장 버리고, 돈 안 되는 사진가의 길을 택한 배짱이 도대체 뭘까? 그를 ‘돈키호테’라 칭한 어느 기자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마동욱,장흥군 유치면 신풍리


누군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여지 것 시골을 찍어 ‘고향’이란 주제로 책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한 사진가는 더러 있지만, 자신의 고향에 30 여 년 동안 메 달려 온 사진가는 처음이다, 마동욱의 작업이 높게 평가받는 것도 일회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지속성에 있는 것이다. 그게 다큐멘터리사진의 가치다. 장흥댐 건설로 수몰될 수밖에 없었던 유치면 일대도 샅샅이 기록해 두었다.


▲마동욱,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여다지 한승원문학산책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삶의 터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의 한이 응축된 사진들이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터전이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기록해 왔다. 그의 사진 자체가 장흥의 역사나 다름없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묵묵히 해 온 것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향으로, 시골 들판이나 정겨운 마을들이 마치 도면처럼 펼쳐져 있다. 드론(Drone) 을 이용해 찍은 300여개 마을 사진을 이어 붙인다면, 한 편의 ‘장흥여지도’나 다름없다. 그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마동욱, 장흥읍 원도리


전경을 담으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새처럼 날아 조감도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그래서 드론장비가 나오자 바로 실행에 옮겼는데, 가난한 사진가의 형편으론 버거웠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조종이 쉽지 않아 바다 속으로 빠지거나 추락해 파손된 드론만 네 대나 된다고 했으니, 그 경제적 어려움이야 보나마나다.


전시된 마동욱 사진은 많은 사진인 들에게 사진하는 의미를 되묻게 했다. 사실적인 현실이 배제된 채,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사진들이 판치고 있다. 예술이란 이름에 포장되어 허구의 이미지만 양산하는 세태라, 작가는 많지만 정작 사진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마동욱, 정남진  물축제 탐진강 2015


그러나 본질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중시하는 마동욱의 사진은 정직하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은 연출이나 트릭이라고는 전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직관과 정확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작가적 권위나 개인의 주장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작가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진도 사진이지만, 마동욱의 남을 배려하는 인간성이다. 작품에 앞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선배들로 부터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싸늘한 가슴으로 머리만 굴리는 작가들이 득실대는 현실이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마동욱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일례로, 장흥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어딘데, 전시마다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며 알아차렸다. 이건 단지 돈과 시간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마동욱, 장흥군 장흥읍 사안리


이번에 펴낸 ”하늘에서 본 고향마을“과 ”고향“사진집 두 권을 비롯하여 “아! 물에 잠긴 내고향”,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추억의 고향마을”, “탐진강의 속살“ 등 아홉 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가난한 살림에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집을 지속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한 애향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명감이었다. 그래서 2012년 ‘전남문화상’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시골마을의 공동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점점 사라져 가고 변해가는 시골마을을 되살려야 하는 사회적 운동이 절실한 때다. 만약 사진인 들이 힘을 모아 각자의 고향을 찍는다면, 신판 ‘대동여지도’도 가능할 것이다. 마동욱의 고향 사진전을 계기로 모든 국민들의 애향심에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



▲마동욱, 사진집 '하늘에서본장흥'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에서 '고향의 사계‘ -드론으로 본 내 고향 장흥-과 '하늘에서 본 장흥’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두 권의 사진집도 나왔다.'고향의 사계'는 256쪽, 6만원. '하늘에서 본 장흥'은 448쪽 4만원이다.


전시는 21일까지 이어진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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