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까지 갤러리 나우

사진가 박진호씨의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전이 오는 6월1일부터 14일까지 인사동‘갤러리 나우’에서 열리고 있다.

박진호씨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예전에서 사진을 배웠다.
홍대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공부한 후, 1992년‘아노미’전을 시작으로 아홉 차례의 개인전과 한국사진의 수평전 등 많은 단체전에 참가했다. 무엇보다 강하게 인식된 작업은 첫 전시‘아노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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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60*60cm, 디지털프린트, 2016


자신의 신체를 복사기로 형상화해 존재 자체를 확인한 작업이었다. 기계적 복제나 다름없는 인간적 고뇌를 표출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외에도 ‘어쩌다 느낀 작은 슬픔이 있을 때’ 같은 시적 이미지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달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사진이다.


이사진들은 70-200mm 망원으로 스트레이트하게 찍은 사진인데, 촬영 기법과 노출 데이터를 찾기까지 7년이 걸렸고, 촬영기간은 무려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 긴 시간동안 생각을 숙성시켜 온 것은 자유로움을 꿈꾸었다는 것, 좀 더 경쾌한 삶을 그리워했다는 것 그리고 50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주체적 사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60*60cm, 디지털프린트, 2016


그는 작업노트에서 달은 신(神)이라며, 자신도 모르는 신을 표현하려는 자체가 헛된 노력일 것이나, 신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었다고 적었다. 자연법칙을 벗어나고 우주원리를 이탈한 자유, 그런 인생을 바라지만, 너무 슬프다고 했다.


예술은 결코 감각만의 영역이 아니다. 끊임없는 생각과 회의 그리고 탐구에 감각이 더해져야 한다. 그 추운 겨울바람에 떨고, 여름 날 모기에 뜯겨가며 사진을 찍은 것은 오랜 기간의 생각과 회의에 따른 사유의 결과라고 한다. 그의 친구인 한양대교수 정재찬씨는 이렇게 전해왔다.


“그는 도도한 외로움, 고고한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저 제목은 교만도 유희도 아니다. 어쩌면 신 앞에서 응석을 부리고 싶거나, 눈물로 간구하고 싶지만 인간의 자존심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찌 그를 이해하랴. 다만 거룩하진 않아도, 거짓되고 위선에 찬 신앙보다는 네가 참 되도다, 신이 말해 줄 것이다, 라고 믿을 뿐이다.”


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지 사진평론가는 아니다. 그래서 박진호의 사진을 보며 느꼈던, 지극히 주관적인 단상들을 이야기할까 한다.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120*70cm, 디지털프린트, 2016



보통 달을 찍으려면 장시간 노출을 주어 달의 궤적이 한 줄로 이어지는데, 이 사진들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해, 마치 춤추는 달처럼 넘실댄다. 달을 소재로 택했다는 것 자체가 사진으로 시를 쓰겠다는 이야기다.


달을 생각하니, 죽은 울 엄마가 제일먼저 떠오르고, 둘째는 이백선생이 생각나더라. 왜? 울 엄마가 생각났냐면, 살아생전 즐겨 부른 노래에 달이 나오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은 모르지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 노래가사들이 잊혀 지지 않더라.


첫 소절이 “구름 속에 달빛만 엉큼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당신의 마음도 검구려”로 시작된다. 자연에 빗댄 사랑의 마음을 어찌나 은근하게 풀었는지, 노래가사가 바로 시였다,

즉 박진호의 사진 메시지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시였다. 자연과의 사랑 노래, 아니 달과의 아주 에로틱한 사랑 그 자체였다.


두 번째 떠 오른 이백 선생도 달과 인연이 너무 깊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백선생께서도 자연을 신이라 했다.


'독작(獨酌)'이란 시를 한 번 읽어보라.


꽃 사이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다
달도 그림자도 술은 못 마시지만
그들과 더불어 이 봄밤을 즐기자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을 서성거리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춤춘다
이리 함께 놀다가 취하면 서로 헤어지니
담담한 우리의 우정, 다음엔 은하 저쪽에서 만날까


이 정도면 가히 신선이다. 스스로 귀양 온 신선이라고 하였지만, 현실은 못내 답답하고 아팠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술로 한을 달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 70*70cm, 디지털프린트, 2016



여러 정황으로 보아 작가의 마음이 어렴풋이 읽혀지더라. 뒤틀린 현실에 가슴이 미어져, 자신이 몸 담아 온 사진판부터 바로세우고 싶었을 게다. 지난해에는‘최민식사진상’대상수상작 문제점을 제기하며, 친구였던 수혜자를 강력하게 비판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신이나 다름없는 달을 마음대로 움직여,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 표출도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사람답게, 그리고 세상을 자유롭게, 재미있게 살라는 말 같았다. 바로 갑이 없고 을이 없는 대동 세상을 만들어, 신선처럼 함께 놀자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문의:‘갤러리 나우’(02-725-2930)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라면, 바이칼은 한민족의 시원이다. 풍족한 호수라는 뜻인 바이칼의 영성적인 기운을 찾아 동시베리아 남부도시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춘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이어졌다.


오는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이 기획전에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민족 DNA속에 내재된 신화 속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로, 바이칼 호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작업에 반영시키는 프로젝트다.


우리 민족 DNA의 원류를 찾아...바이칼호수는 세계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



▲아직 눈이 녹지않은 설산과 호수에 깔린 기운이 심상찮다.(사진=조문호)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숲과 완만한 구릉의 초원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이며, 네 시간 넘게 달려서야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여름철 성수기를 대비한 진입로공사와 부대 시설물 신축으로 부산했다.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몰려드는 관광객 수용을 위한 최소한의 일로 보였다.


▲바이칼호에서 연결된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사진=조문호)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몰려드는 투자자들로 본래의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이칼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로 최고수심이 1,620m이며 길이 636㎞, 평균너비 48㎞, 면적 3만 1,500㎢나 되는 제주도 절반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호수에 있는 물이 다 빠져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330년이고, 담수량은 미국 5대호를 다 합친 것 보다 많다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알혼섬을 감싼 호수 왼쪽에 악어바위가 보인다.(사진=조문호)


 5억년이나 된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으로 구성되며 호수 바닥의 퇴적층 두께는 무려 6,000m에 이른다. 호반 가까이에는 사화산들의 지각변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끔 심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기후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온화해 1~2월의 기온은 평균 -19℃이고 8월평균기온은 11℃가량이다. 호수 면은 1월에 얼고 5월에 녹는다. 8월의 수면온도는 약 13℃이고 해안에서 가까운 얕은 곳에서는 수면온도가 20℃에 이른다.



▲알혼섬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부르한 바위.(사진=조문호)


파고는 4.5m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호수는 광물을 거의 함유하지 않아 수심 40m 까지 들여다보이며 염도도 낮다. 특히 이곳에 서식하는 민물세우가 물을 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하다.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위나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약 3/4은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다.


▲하보이언덕을 향하는 협곡.(사진=조문호)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오물’같은 고유종으로 특히 연어류가 많이 잡힌다. 가장 큰 종류는 철갑상어로서 길이 1.8m, 무게 120㎏에 이르며, 코메포리다이과에 속하는 골로먄카라는 수명이 짧은 물고기도 서식한다. 그 중 유일한 포유동물은 바이칼 물범이며, 주변지역에는 326종의 조류와 곰이나 사슴도 서식한다.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 그 중심에 신비한 영기가 서린 알혼섬 


바이칼호수에 있는 26개의 크고 작은 섬 중에서 알혼 섬이 가장 큰 섬으로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바이칼호수가 시베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면 알혼 섬은 바이칼호수의 심장이라 했다.



▲샤먼의 근거지답게 열세개의 세르게가 줄지어 서있다.(사진=조문호)


바지선에 실려 알혼 섬으로 들어갔더니, 사륜구동 우아직이란 별나게 생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누어 타고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로 향했는데, 원주민 기사의 운전솜씨가 만만찮았다. 두 대중 한 대는 번호판도 없는 무적차량인데, 사고 나면 끝장이겠다는 생각에 모두들 가슴 조려야 했다. 비포장 길을 얼마나 달리는지 마치 미쳐 질주하는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알혼섬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차분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기암괴석들, 넓은 해변, 호수와 산, 하늘과 맞닿은 풍경들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하게 다가왔다.



▲땅끝 지점의 하보이 언덕에 선 신목.(사진=조문호)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해변이나 다름없는 호숫가로 몰려 나가니 석양을 받은 호수는 금빛처럼 빛났고, 그 옆에 버틴 오방색 천에 감긴 신목에서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저절로 큰 절을 올리며,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제발! 저의 악업을 거두어 달라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20여 년간 끌어 온 작업, ‘생명’전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산과 바다나 늪지 등 전국의 성스러운 자연과 함께 담아 온 남성 알몸 찍기에 화가 길종갑씨가 마지막 모델로 나서 주어 가능했다.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이르쿠츠크의 통나무집들.(사진=조문호)



바이칼서 25년간 미완의 남성 알몸 찍기 ‘생명’전 마무리, 화가 길종갑씨 마지막 모델로


그 찬 호수 물에 정갈히 몸을 적셔, 기를 모아 주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웠으면 거시기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바이칼호수에 발만 담가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온 몸을 담가 영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미안한 마음은 좀 덜었던 것 같다.




▲하보이언덕 나뭇가지를 휘감은 오방색 천.(사진=조문호)


92년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30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나, 그 중 두 분이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촬영에 응해준 분들은 전시 후에 사진을 드린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늘 마음의 짐이 되어왔다. 항상 집에 걸어두고 죽은 후에는 영정사진으로 쓴다는 약속이 무산된 것이다.


사실 ‘생명’전 작업을 여지껏 마무리 하지 못한 원인은 팔리지 않는 전시인데다,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속의 육신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해 세우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번 기획전의 내용과 맞아 떨어져 밀어붙여 버렸다.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김치식당, 김치찌게가 일품이었다.(사진=조문호)


알몸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해방되려 본인 사진부터 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내 가족들이 익숙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고 나면 영정사진으로 쓰라고 아내에게 당부도 해 두었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모두들 웃으며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취지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데, 울고 불며 야단법석 떨면, 떠나는 망자의 마음이 편하겠나? 재수 없어 될 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 전통사우나인 반야라는 독특한 체험도 했다. 이는 장작불에 달궈진 조약돌에 물을 끼얹어 거기서 나오는 증기와 열기로 체온을 덥히는 일종의 증기욕인데, 자작나무 잎으로 몸을 두들기니 은은한 자작나무향이 온몸을 감싸 올랐다.




▲바이칼 호수변에서 인물스케치를 하는 화가.(사진=조문호)


자작나무 사우나 '반야'와 지금도 생각나는 바이칼 생선 '오물'


자작나무로 몸을 두들기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밖에 없어, 내가 황효창선생을 두들겨 드리려 했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설마, 시원하게 두들기지, 아프게야 할까?”


체류기간동안 사람 입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도 재차 실감했다. 몇 일간 보드카 좀 마셨다고, 그 좋아하던 소주가 싱거워 못 마시겠더라.


이튿날은 우아직에 실려 바이칼 북쪽 끝으로 내달렸다. 탁 트인 언덕위에 올라서니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더라.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한이 깊은 호수로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호수에 깔린 성스러운 공기,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내 몸속으로 베어드는 신성함에 빠질 수 있었다.



▲바이칼만의 생선 '오물'을 말리고 있다.(사진=조문호)


그런데, 도시락으로 싸왔던 '오물'이란 생선을 영 잊을 수가 없다. 생선을 쪄서 가져왔는데, 젓가락 없이 손으로 먹어야 했던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발라 먹었으니,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겠지만, 옛말처럼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정답이었다.


알혼섬에서 가장 영기가 센 바위로 불리는 부르한바위(일명: 샤먼바위)에는 대제국을 호령한 징키스칸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빼시안카에는 돌덩이 부두와 건물잔해만 남았지만, 구 소련시절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 터도 있었다. 그 곳을 지나 최북단에 이르니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가 보였다.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사진=조문호)


자식을 바라는 염원의 자리로 왼쪽 봉우리에 서면 아들, 오른쪽 봉우리에 서면 딸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유독 붉은 기운을 내뿜는 ‘삼형제바위’를 비롯하여, 사자머리와 악어형상을 한 바위 등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조망할 수 있었다.


샤먼의 고향 바이칼, 매년 샤먼축제, 샤먼은 삼(三)과 안(하늘天, 신神)의 글자 합, 삼신할머니 유래


샤먼의 고향인 바이칼에서는 매년 세계 샤먼축제가 열린다. 샤먼이란 말은 삼(三)이란 글자와 안(하늘天, 신神)이란 글자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가 쓰는 표현을 빌리면 삼신할머니란 삼신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문도 샤먼에서 나온 단어이다.


삼안이란 단어는 아주 먼 옛날부터 북부 초원지대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쓰여 왔다. 이것을 서양학자들이 듣고 자신들의 발음으로 옮긴 단어가 샤먼이다. 이 샤먼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 관습 등 관련문화를 샤머니즘이라 말한다.



▲칼호이저 야시장에 옷가지를 팔러 나온 할머니.(사진=조문호)


칭기즈칸이 통치하던 시절, 라마교의 탄압으로 바이칼이 샤먼들의 유일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부랴트족의 조상이라 불리는 호리도이의 신화가 숨 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이칼호수의 여러 신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는데, 그 중 흰 독수리 형상의 옷을 입고 지내던 '한후테-바바이’의 아들인 ‘한쑤부-노이온’이 최초로 탱그리(하늘신)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데, 그 탱그리 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점도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바이칼에서 아만에서 아빠, 엄마 나와


기록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곳이 바이칼이다. 나반과 아만에서 아빠, 엄마, 아버지, 어머니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래서 영어의 마마와 파파처럼 전세계 언어권에는 비슷하게 발음하고 뜻이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탄생한 호수여서인지 호수 성분도 어머니의 양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 칼호이저 야시장에서 옷사이즈를 재보는한 남성.(사진=조문호)



그리고 몽골족의 하나였던 부리야트 족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브리야트족은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가장 닮았다. 발길 닿는 곳곳에 솟대와 신목, 그리고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펄럭였다. 알혼섬 곳곳에 남은 샤머니즘의 흔적들이 우리민족의 발원과 유력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원주민들 눈빛과 표정 친밀감,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부터, ‘나무꾼과 선녀’,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


여행 중 두 차례에 걸친 세미나에서도 우리민족과의 동질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효창선생은 도처에 남아있는 샤먼의 흔적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거대한 자궁이라 말해 온 황재형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향을 찾은 듯 너무 편안하다고...



▲코발트의 물빛 층이 신비롭다.(사진=조문호)


야시장에서나 숙소에서 만난 원주민들의 눈빛과 표정들도 한국 사람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그렇지만, 솟대와 장승, 신목 등 우리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미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나 DNA까지 조사한 역사학자들의 고증들이 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문호 사진가


어버이날이 부끄럽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장모님께서는 이런 저런 병으로 십 여 년을 병상에 계신다.

올해로 아흔 다섯인 장모님은 폐암 말기에다 양쪽 골반이 무너져 내려 오랜 세월 고생스럽게 연명하고 있다.

두 번씩이나 산소공급기를 차단하자는 병원 측 제안에도 지극정성으로 살려 낸 아내의 효심이야 갸륵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장기간 환자를 돌보다보면 정신적, 육체적 나아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쩔쩔매며 병원으로 일터로 쫓아다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장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해,

그냥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불효를 저지르지만,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긴 세월 병원비를 내다보니 환자가족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닥아 오는 게 간병비였다.

직접 간병하면 되겠으나, 한 푼이라도 벌기위해 일터로 나서야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문제는 그 간병비를 악덕 병원 업자들이 착복한 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알았을 때는 너무 분통이 터져 병원 측에 항의도 했다.

그래도 시정되지 않아 언론사의 지인에게 하소연했더니 오래 된 관행이라 했다.

“노인복지 노인복지” 노래를 부르는 이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을 빼 먹지, 벼랑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노인들의 등을 치다니...

그렇게 더럽게 축재해, 돈 되는 노인 병원 확장에 혈안 되어있다.

문제는 보건 복지부에서 이러한 부정을 방치하며 등짐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다.

장모님이 입원하신 서울 녹번동의 노인병원에는 한 병실에 다섯 명의 환자들이

오늘 내일 하직할 날만 기다리며 연명하고 계시다.

병원비만 보내며 거들떠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마저 지쳐버려, 다들 말을 잊고 사신다.

이 분들의 간병비 부담은 하루 37,000원이다. 다섯 분이니 185,000원이 된다.

다섯 환자를 한 사람의 간병인이 돌보는데, 하루 60,000원을 받는단다.

나머지 125,000원은 어디로 갔는가? 수많은 병실이 있으니 그 착복하는 돈은 엄청나다.

환자들의 피해도 커지만, 간병인들의 대우도 엉망이다.

간병비를 적게 주려고, 약점 있는 조선족 여인네를 고용하는가 하면, 칠순이 된 할머니까지 간병인으로 쓴다.

대부분이 중증 환자인데, 그분들의 대소변을 혼자서 제대로 받아내겠는가?

그들이 병원에서 지내는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교대할 사람이 없어 밥도 간신히 짬을 내어, 서서 먹는다.

그리고 탈의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잠은 쪽잠을 잔다.

병원 측에서는 간병업체(소개소)에서 소개비뿐만 아니라 월 회비 등 각종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기 때문이라지만,

그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것을 정부에서 보조하고 관리하여, 모든 운영시스템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애정과 더불어 안전 및 사회적 공감의 욕구를 가진다.

이중 애정에 대한 욕구는 식욕,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다.

그런데 고령사회가 급속도로 진행 중인 우리의 현실은 노인들의 상위욕구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욕구마저 보장돼 있지 않다.

가정과 돈에서 소외된 노인들의 급증은 인간적 도리마저 짓밟는 비정한 사회로 만든다.

노인 문제라는 시한폭탄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는 물론 국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외로움으로 치닫는 한국 노인들의 이 암울한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환자는 간병비 부담 덜어 편하게 간병 받고, 간병사도 병원에 직접 고용되어 환자들이 더 좋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만 있다면, 환자는 물론 간병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법적 제도적 장치를 하루속히 마련해 가난한 서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바란다.


- 서울문화투데이-

오는 21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사진가 박병문 사진집 ‘아버지의 그늘’ (눈빛출판사刊) 책표지



사진들은 쇠퇴해가는 탄광촌의 현실에 앞서 광부였던 아버지를 그리는 사진가의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배어있어 사진들을 보면 슬퍼진다. 그 삭막한 폐광에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진들이 주는 잔잔한 울림 때문이다.



▲삼방동, 2014년



사진가가 보여주려 한 것도 사라져가는 탄광의 빛바랜 풍경이 아니라 아버지가 힘겹게 살아 온 공간과, 그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삼방동 언덕길, 빛바랜 월급봉투, 칠흑의 냉기에 휩싸인 지하막장,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까치발 건물과 분진이 날리는 저탄장 등 아버지가 살아 온 자취들이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나른하게 펼쳐지고 있다.



▲퇴근하는 선탄부, 2007년



사진가 박병문이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들추어내며 추억 속 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록해 온지도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꾸준히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해 온 것은 아버지의 자취를 통해 탄광촌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편으론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 보는 이의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슬픈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하는 것이다.



▲선술집, 2007년



여지껏 탄광을 촬영한 사진가들이 여럿 있었으나 대개 한차례의 작업으로 끝냈지만, 박병문씨는 달랐다. 탄광 바깥에서 들여다 본 사진가의 시선이 아니라, 탄광은 그가 살아온 추억의 공간이고 아버지의 혼이 박힌 곳이었다. 선탄부(여자광부)에 이어 진폐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갈 것이라는 그의 다짐은 한 개인의 가족사기 전에 우리 탄광의 소중한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년



박병문은 2010년 강원도사진대전 대상과 2013년 제1회 최민식사진상 특별상 대상을 받으며 알려졌다. 2014년에는 “아버지는 광부였다”란 사진전을 열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사라져가는 탄광의 아픔을 슬픈 가족애로 이끌어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얼굴에 맺힌 아버지의 눈물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우리의 시대적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눈 속의 광부 동상, 2015년


아버지를 기억하는 작업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해 '검은 땅 우금에 서다'에 이어 또 다시 ‘아버지의 그늘’을 펼쳐 보이는 등, 아버지에게 바치는 세권의 사진집을 연이어 펴낸 것이다.



▲사진가 박명문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기록으로 불러들인 기억 그리고 광부 아버지’란 서평에서 “박병문의 사진은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27일~5월3일까지 낙원동 M갤러리




▲이목일 화백의 그림에세이 <나는 영혼을 팔아 그림을 그린다>(어문학사 刊) 책표지.



화가 이목일의 ‘창달 그리고 영감’전이 지난27일부터 5월3일까지 서울 낙원동 “갤러리 M’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식이 열린 27일 오후5시에는 동료 작가를 비롯한 많은 지인들이 몰려 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행위예술가 송마루, 유진규씨의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창달 그리고 영감’이란 제목의 전시작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말하지만, 어찌 보면 작가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혼신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화려하면서도, 결코 화려하지 않은 짙은 색의 그림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저승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화가 이목일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그 카리스마의 야성이다.


다부진 그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는 야수적인 본성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 놓는다. 야수파의 대표적 작가 마티스처럼 그의 작품에도 원시적 야성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호랑이에 빠져 삼년동안 일 만 여점의 호랑이를 그리며, 야성을 불태우는 것도 보았다.



▲이목일, “氣 백두산천지” 65.1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원색은 진실이다’라는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색의 실체를 탐미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산이나 강, 하늘에 뜬 별이나 달, 이 땅에 피어나는 꽃이나 나비들의 형상들이 거친 붓질과 미세한 붓질로 뒤 섞여 표현되고 있었다.



▲이목일,“백두산 천지2”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최근에는 백두산과 연꽃에 매료되어 영적 에너지를 몰입하고 있다. 때로는 현실적이면서, 때로는 몽환적인 그의 그림들은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듯하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어 쉽게 판독하기 힘든 생명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목일,“야성, 그 위대한 본능”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작가 이목일은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함께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이게 하고, 또 원색이 진실이며 진실이 원색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혼을 팔아 그리는 내 그림은 나의 생존 그 자체다.”


이번 전시와 함께 ‘어문학사’에서 펴낸 그림에세이 ‘나는 영혼을 팔아 그림을 그린다’는 제목처럼 그는 혼신을 다하는 작가다.




▲이목일,“지리산 별빛” 90.9x 60.6cm / Acrylic on canvas 2015



몇 년 전에는 느닷없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왼팔과 다리가 마비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창작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얼마나 악착같이 그렸던지, 중풍마저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내다 파는 작가들이 들끓는 세상에, 아슬아슬한 곡예의 삶을 살면서도, 작업에만 혼신을 쏟는 작가들도 더러 있다. 바로 이목일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목일, “생명의 잎”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돈이 가치기준을 바꾸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 돈 없으면 가족에게도 버림받는 세상이다. 그 막강한 힘에 대부분 무릎 꿇지만, 일단 작가는 돈 맛에 물들면 끝장이다. 풍요가 나태를 이끌기도 하지만, 작가에게는 삶의 절박성과 아픔이 없다면 결코 그의 영혼을 작품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목일은 죽어도 영혼을 팔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가 영혼을 바쳐야 할 곳은 그림뿐이니까.



▲ 작가 이목일



이목일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창형 미술학교 판화과와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공부했다. 그동안 개인전 서른여섯 차례와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왔다. 빨래판을 화폭삼아 작품을 그리는 등 많은 일탈과 일화의 족적을 남긴 화제의 작가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한남동 ‘갤러리 서화’ 5월4일까지


▲최울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책 표지



파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돌며, 암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 온 최울가가 모처럼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그의 작업행로를 담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출판하며, 한남동 ‘갤러리 서화’에서 출판기념 특별전을 마련한 것이다. 전시는 지난 4월21일 개막돼 5월4일까지 이어진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하고 자유롭다. 도상에 화려한 색을 입힌 그림들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에서 자유로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최울가, New Storage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한 때 상승세를 타기도 했던 “Black and White” 연작에서는 기하학적인 모형들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암각화 같은 조형들이 마치 바위 위에 정으로 새긴 듯 빽빽하게 그려져, 보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에 다름없었다.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의 비판을 그만이 즐기는 놀이 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마 문학적인 그의 그림언어로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이번 ‘갤러리 세화’에 발표된 작품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 주었다. 원시주의에 천착한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들이 굵어졌고 여백의 미도 생겨났다. 일단 보는 이로 하여금 안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에 펴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읽고 그 원인을 짐작하게 됐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62x130cm, 2015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 그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캔버스 위에 생겨난 여백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여백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그의 작업행로를 돌이켜 보면, 꾸준히 변해 온 작업여건이나 주변 환경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최울가,Black Play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이번 전시와 함께 ‘인문아트’에서 발간한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에는 최울가의 예술철학과 삶의 행로가 일기처럼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신작에 이르기까지 130여점이나 실려 있는데다,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있는 그의 글들은 최울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들게 한다.


문의:한남동 ‘갤러리 서화’(02-546-2103)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조문호 사진가

2016.04.26 - 서울문화투데이-


안산 대부도 절벽의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 새끼를 찍겠다고 둥지 주변의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 서식지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또 어떤 이들은 동강할미꽃을 찍겠다고 벼랑에 기어올라 동강할미꽃을 망가트린다는 연이은 소식들로 온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


봄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동강할미꽃 찾아, 서식지인 정선 귤암리로 몰려든다. 아름다운 꽃을 찍는 걸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사진인의 잘못된 욕심들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꽃의 묵은 잎과 줄기를 없애거나, 이슬처럼 보이려 물까지 뿌려댄다.

동강할미꽃은 해가 떠올라 날씨가 따뜻해야 꽃이 피기 때문에, 핀 꽃에는 이슬이 맺힐 수 가 없다.

그리고 화면을 단순화하려 꽃을 감싼 마른풀을 뜯어내고 있는데, 생태사진은 꽃도 꽃이지만,

꽃의 습성이나 자연적인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왜 모를까?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의식은 물론, 야생화사진의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더 안타깝다


매년 이 맘 때면 화엄사 매화나무를 찍으려 하루500여명이 몰려드는가 하면, 구례 산수유 같이 꽃피는 마을들이 사진인 들로 북적인다.

꽃구경이라면 모르겠으나, 똑 같은 사진을 찍어 다들 어디에 쓸까? 때로는 모델까지 동원해 영화촬영 하듯 몰려다니는 걸 보면 정말 가관이다.


이 모든 원인은 단 한가지다. ‘사진작가협회’에 입회하기 위한 공모전 출품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단체에 들어가야 사진작가가 되는 줄 착각들 한다.


하기야 회원증에다 ‘사진작가증’이라 적어 놓았으니, 순진한 초보들이 속을 수밖에 없다.

이제 전국회원 만 명에 가까운 공룡집단으로 성장해, 그 먹이사슬에 의해 초보 사진인 들이 희생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제대로 하는 사진가들이 그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80년대 중반 단체의 구태에 환멸을 느낀 사진학과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탈퇴하므로 명실상부한 아마추어 단체로 남게 된 것이다.

회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교육은 뒷전이고, 숱한 공모전 비리나 만들어내며, 회원증 장사와 감투 늘리기에 급급하더니,

이제 그 한계점에 달한 것 같다.

문제는 그 단체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라는 점이다. 뭘 모르니 후진들을 제대로 지도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해 야생화사진의 대가라는 김정명씨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가 발표한 동강할미꽃은 마른풀이 제거되거나,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심지어는 인공조명까지 사용해, 마치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 같았다. 엉터리 사진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표하니,

너도 나도 그 짓을 따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구에 사는 장국현씨는 제 작년 울진에서, 대왕송을 찍기 위해 주변의 금강송과 활엽수를 스무 다섯 그루나 베 낸 일도 있었다.

여론의 질책에도 자성은커녕, ‘예술의전당’에서 안 된다는 전시를 소송까지 걸어 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슨 대단한 예술을 하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몰염치들이다. 내가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세월호의 원흉 유병헌도 사진한다며 국제적 망신을 시키지 않았더냐?


1983년에는 청산가리를 먹여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었던 희대의 살인마 이동식도 아마추어 사진인이었다.

취미 사진의 순수함이 이런 몰지각한 이들로 이름이 더럽혀 진 것이다.

사진이 돈 있는 자나 할 일 없는 건달들의 자기 과시욕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진을 제대로 공부했거나, 전업으로 메 달리는 사진가들은 대부분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평생을 사회기록에 매달려 온 나 역시, 남은 건 신용불량자란 딱지뿐이다.

이러나저러나 범법자이긴 마찬가지니 차라리 사진을 그만 두고 싶다.


더 이상 열심히 작업하는 선의의 사진가들을 욕되게 하지마라.







▲조문호 사진가



요즘 인공지능 알파고 바람에 말들이 많다.

로봇에 고도의 에이아이가 합해지면 통제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며 걱정들 한다. 감정 없는 에이아이가 인간의 존엄성 위협에 악용된다거나 평범한 인간은 도태된다는 우려도 한다. 그러나 인류에 도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긍정론도 만만찮다. 에이아이는 모든 게 데이터 입력으로 통제 가능하며, 만들고 통제하는 것도 결국 인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기계를 인간의 뇌와 비슷하게 만들까 고민해왔다.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한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은, 이제 인간의 판단력보다 우수한 로봇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봇은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오감을 통해 느끼고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동양의 아날로그 직관력이 더 적중한 시대가 올 것 같다.

문제는 인공지능 로봇이 활용되기 시작하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수백만 건의 법률자료에서 적합한 판례와 조항을 찾아낼 것이며, 수많은 병리적 증상에 적용될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알아낼 것이고, 온갖 변수를 감안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보다 일 잘하는 알파 변호사나 의사를 더 믿게 될 것이다. 벌써 세상에서 살아질 직업들이 줄줄이 나오고, 살아남을 직업도 거론되고 있다. 예측한 일이었지만, 그 살아남을 직업에 예술부문이 제일 먼저라는 말에, 배고픈 예술가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우린 돈 돈하며 너무 기계처럼 살아왔다.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사동을 자주 드나드는 장경호화백이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행님, 사람답게 삽시더” 누군 사람답게 살지 않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구조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게 되어있다. 이미 각종 기계에 빠진 중독증세로 사람보다 기계와 노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물질만능시대에 돈 없으면 사람취급도 못 받는 세상이다. 인간성회복이란 말에 “인간성 좋아하네, 인간성이 밥 먹여주나”하는 소리까지 나온다.

이제 인간성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온다.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면 인간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자동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의의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것은 사람을 위해 사람답게 사는 방법뿐이다. 로봇이 알아서 해주니 편히 살 수 있는 대신, 인간의 상식과 도리를 되찾아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각박해진 우리들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평화와 행복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한다.

노약자들을 배려하거나, 어려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다거나, 이웃과의 교류, 소외된 이웃들에 관심을 갖는 이런 소소한 것들이다. 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회복이다. 내 가족의 안락과 안위를 위해서 오로지 물질적 풍요만 꿈꿀 것이 아니라, 로봇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만의 따뜻한 마음을 되찾자는 것이다.

머지않아 불거질 문제는 분배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없는 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문제는 기존 가치체계를 초월해 평등하게 짜여 져야 하는데, 힘 있는 자들이 만들다 보면 그들이 유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당장 눈앞에 닥친 국회의원부터 사람다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 결국 그들이 인간성회복을 위한 패러다임을 다시 짜야하기 때문이다. 번지레하게 말이나 잘하고, 정치 맛들인 속물들은 절대 안 된다. 재벌들과 관련 있는 정치인은 더 더욱 안 된다. 문제는 아직까지 후보보다 정당을 보고 찍는 국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사람 위주로 뽑자. 착하고 바르게 일 할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을 뽑아야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의 소중한 한 표가 미래의 우리를 죽일 수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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