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농음위에 콧소리가 섞인 애잔한 소리가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서도소리의 진수를 맛보았습니다.
서도소리 본거지인 달매산 아랫마을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로 구성된
창극은 재미와 함께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도 창극의 하일라이트는 이지녀씨의 대감놀이였습니다.

12월 4일 오후7시30분부터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공연에는
본회의 채현국 고문님 내외를 비롯하여 조문호, 정영신, 노광래씨를 비롯한
8명이 관람하며 보람된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공연 참 좋았습니다.

안숙선선생께서 감기가 걸려, 꼼짝도 못할 지경인데도 무대에 섰습니다.
장사익선생이 안숙선선생 몫까지 감싸안아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12월 2일 오후7시30분부터 2시간에 걸쳐 진행된 마지막 공연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객석을 가득메웠습니다.
국악관현악단 아홉의 연주와 이용탁씨의 지휘로 시작된 관현악서곡 아시아를 위한 뱃노래가 첫무대를 장식하였습니다.

안숙선선생의 리더로 제자 이애리양이 창극"춘향"중 쑥대머리를 불러주었고
창극 "청" 중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과 봉사잔치에 심봉사가 나타나 삼천리 봉사가 눈뜨는 대목까지 불렀습니다.

2부에서 관현악곡 "아리랑"이 연주된 후
싱글 벙글 나오시는 소리꾼 장사익선생께서 "황혼길"로 공연장을 다시 압도하였습니다.
아버지, 국밥집에서, 찔레꽃, 이게 이닌데, 님은 먼곳에를 극장이 떠나갈듯 열창 하였습니다.

마지막 이별마당에 장사익, 안숙선선생의 "봄날은 간다', "농부가를 서로 바꾸어가며 멋지게 무대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장사익의 태평소와 안숙선의 꽹과리 장단으로 마무리를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앵콜송으로 부른 장사익선생의"꽃구경"은 관객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의 기념사진 / 좌로부터 반민규, 김명성, 장사익, 조문호, 이성, 공윤희씨

성주 가야단에서 펼쳐진 신종플루 퇴치를 위한 개단제 뒷풀이 사진입니다.
비오는날 맨발로 춤을 추다 고뿔걸릴까봐 염려하여 즉흥시를 낭송해주신 황명걸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에 답해
다시 맨발로 비오는 발코니에서 춤을 추는 무나미선생님의 즉흥무는 보는이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답니다.
끝까지 마무리를 해주신 공윤희이사님 고맙습니다.


 

 

 

 

 

 

 

 

 

 

 

 

 

 

 

 

 

 

 

 


"그때 맺은 인연, 가족이 됐다" 

 


(당시 마산경찰서 부근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한 김의권 씨)

민병욱 기자 min@idomin.com


◇"음악감상실 DJ도 유신체제 반대" = 김의권 씨는 자칭 '히피(hippie) 1.5세대'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젊은 시절부터 우리 사회가 효율과 경쟁을 앞세우는 사회가 되기보다 좀 더 여유롭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사회가 되기를 꿈꿨다. 국민을 억압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봤던 유신체제를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김 씨는 1978년 당시 마산경찰서 부근에 있던 '수림 음악감상실' 사장으로부터 DJ 제의를 받는다. 다달이 3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마산에서 제일 잘 나가던 DJ 월급이 8만 원이었으니, 최고의 대우였다.

"20대 초반부터 음악에 빠졌죠. DJ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장님이 음악감상실 경영을 맡아보라고 해서 가게 세를 주면서 운영하게 됐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반전이니, 왜색이니 하면서 금지곡을 양산했어요. 문화적 통제를 아주 심하게 했는데, 그래도 '금지곡'은 다양한 경로로 구입해서 들었습니다. 아무튼, 신문과 방송이 당국의 검열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은 그나마 자유롭게 모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젊은이의 '정신적 스승'은 리영희, 함석헌 선생이었고,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말했다. 당시 DJ도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에서 '억압의 상징'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멘트'를 종종 날렸다고 했다.

◇부마항쟁 최고의 선물은 결혼 = 그는 부마항쟁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에 '결혼'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김 씨는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만나 시국을 논하던 최갑순(현재 ㈔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장) 씨와 81년 결혼했다. 최 씨는 부마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됐었다.

1978년 부마항쟁 당시 음악감상실을 운영했던 김의권 씨. 김 씨는 그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김구연 기자 sajin@

"부마항쟁을 보면서 시민의 힘이라는 게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 학생지도자 그룹이 촉매제 역할을 했지만, 시민에 의한 자발적인 혁명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부마항쟁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물론 드라마틱한 격렬한 싸움도 없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과는 달리 큰 희생을 치르지 않은 까닭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항쟁 덕분(?)에 우리 마누라를 만난 거나 다름없지요. 부마항쟁이 가족을 형성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부마항쟁으로 자유와 평등, 환경을 공통분모로 하는 수많은 사람과 맺게 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30년 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것 같아 걱정" = 김 씨는 부마항쟁으로 민주주의가 힘찬 걸음을 내디뎠지만, 우리 사회가 다시 3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했다. '안보와 조국 근대화'의 구호가 사라진 자리에 '성장 만능주의'가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30년 전에는 타도 대상이라도 분명했으나, 지금은 싸워야 할 대상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안보에서 벗어나면 왕따를 당했는데, 요즘은 성장에 대해 조금만 이의를 제기해도 왕따를 당하지 않습니까.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다돼 가는데, 우리 시대가 다시 30년 전으로 되돌아갈 개연성이 갈수록 농후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의 자화상이 만든 모습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깨뜨려내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하면 경쟁이 좀 더 덜한 사회가 될 것 같아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뒤처지거나 못난 사람을 보듬어 안고 가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사회'라고 말하는 김 씨. 30년 전 '그날의 히피'는 여전히 건재했다.

 


인사동에 주막"푸른별 이야기"를 차린 최일순씨가
17일부터 18일까지 신촌 "씨에트 제로"에서 공연한 일인극 사진들 입니다.

 

 

 

 

 

 

 

 


 

농심마니의 2009년 가을 산행이 지난 31일부터 11월1일 까지 정선, 만지산에서 실시되었다.
이날 산행에는 본 회의 김명성, 박인식, 조문호, 이 성, 전인경, 김정남, 강기숙씨를 비롯한 농심마니 회원 30여명이 참여하였다
정선읍 귤암리에 여장을 풀고 전야제를 치룬 농심마니 회원들은 모두들 굳은 날씨를 걱정하였으나
다행이 이튿날에는 비가 먿고 날씨가 풀려, 모두들 낙엽에 싼 산삼을 들고 산속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강원지회 "한국사진굿당"이 소재한 만지산의 당집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4년생 산삼 200그루와 씨앗들을 심었다.

산삼을 심고난 뒤에는, 구름이 연기처럼 만지산을 휘감는 장면이 연출되어 산의 정기를 눈으로 보는듯 신비로웠다.
그 이튿 날에는 첫눈까지 내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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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최종대씨 모친 장례식에서..|

 

지난 9월26일 최종대씨 모친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습니다.
서둘러 서울을 떠났으나 이미 장례행열은 끝나고 봉분을 다지는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선소리꾼의 매김소리에 상두꾼들의 '어 허 달구나'라는 뒷소리와 그들의 발질만 분주했습니다.

최종대씨 모친은 만지산에서 태어나 만지산에 뭍힌, 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오랫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셨기에 대개들 호상이라고 하나 이 또한 모순입니다.
강원도 산골의 밭들은 비탈져 대개 남정네보다  여인네들이 농사의 주체가 됩니다.
평생을 비탈진 밭에서 일하며 팔 남매를 낳아 키웠으나 부양의 부담 때문에 모두들 힘들었나봅니다. 
요즈음은 집안의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급속히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을 뵙기위해 가족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에나 겨우 만나는 실정입니다.
그것도 기독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으면 더욱 어렵지요.

장례가 끝난 후, 고생한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 저녀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사진굿당'에서는 백설기 떡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맏 상주인 최종대씨는 장례식에서 손님치느라 고생한 부인 이선녀씨에게 하루동안 금주령을 해제해 주었습니다.
신바람난 이선녀씨의 노래소리가 오랫만에 만지산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최백호 작품집에서 옮긴 이두식교수의 발문과 최백호의 글과 그림

 

 

 

 

 


무세중의 도극퍼포먼스 "곡 난장굿" 네번째 공연인 통미의 쐬굿 "광란의 금도깨비들" 공연사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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