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레코드
곽나연_공령문_김나리_김은지_우디_에쎄씨_로로_이정아展
2017_0503 ▶ 2017_0508



초대일시 / 2017_0503_수요일_05:00pm




기획 / 임호정(공간630)

관람시간 / 10:00am~06:00pm



희수갤러리Heesu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1-3 2,3층

Tel. +82.(0)2.737.8869

www.heesugallery.co.kr



일상(日常)에서 일상(溢想)으로 ● 공간630의 첫 기획전인 『일상레코드』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자 멀리 떨어져 산다. 그렇지만 '공간630'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야작을 하며 준비해온 이번 전시를 통해 마치 한지붕 아래 사는 이들처럼 호흡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그들의 영역이 붕괴되거나 정체성이 모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기록은 승화되며, 꿈은 여물어갈 것이다. 공간을 이끌고 있는 임호정 작가는 '교습'이라는 낡은 방식이 아닌 '참여와 유도'로서 이 기획의 처음과 끝을 맡았다. 그 과정을 채우는 것은 여덞 명의 빛나는 청춘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일상(日常)은 일상(溢想)으로 깊어지고, 다면화할 수 있었다.



에쎄씨_대초열지옥몽 大焦熱地獄夢 Nightmare of Naraka_캔버스에 아크릴과슈_33.4×24.2cm_2017


가장 먼저 살펴 볼 작품들은 에쎄씨 작가의 세계다. '안안녕'이라는 유희적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가의 작품들은 직관적으로 '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넘치는 생각'으로서의 '일상(溢想)'을 '기우(杞憂)'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작가는 과감한 그로테스크미를 통해 '일상(日常)'을 가볍게 터치해보고자 하는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블랙코미디 영화 제목 같은 '외로움은 외로움이다' 역시 그러한 익살스러움과 솔직함을 더했다. 더 나아가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와 관련한 동양적 세계관이나 설화와 같이 회화를 이야기의 차원으로 데리고 간다. 이를테면 '전복한 칠성판'은 사랑보다 성행위에 집착한 물 위에서의 유흥이 빚어낸 참사를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칠성판은 관에 쓰이는 얇은 판인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벼락을 맞고 절망으로 떨어지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자궁과 태아의 형태는 생명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죽고 싶어도 살아야 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이라는 설명인데, 이는 불교의 팔열지옥 중 하나인 '대초열지옥'을 그린 '화끈함'으로 이어나가며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곳에서는 청정한 비구니를 욕보인 자가 지옥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생전에 자신이 욕보인 비구니를 만나 애원하지만 불에 달군 쇠톱으로 갈기갈기 찢겨지고, 몽둥이질을 당하며, 험상궂은 지옥의 사자로부터 오장육부가 태워지는 벌을 끊임없이 당한다. 오늘 밤 꿈에서도 이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김은지_살갗 아래 새긴 기억(Tattoo of Memories)
-기억 지우기(Clearing Meomories), 오래된 덫(Old Trap)_실크스크린_각 20×20cm_2017


김은지 작가의 '살갗 아래 새긴 기억'은 마치 식스팩처럼 여섯 조각의 작품들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문 제목에 'under my skin' 따위는 없으며 'tatoo'라고 하여 '새김'의 의미에 더욱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소제목으로 분화된 각 작품들은 서로 마주한 작품들은 연속으로, 다른 층간의 작품들은 충분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그려나간 것이다. 이는 켜켜이 쌓인 기억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지우고 왜곡하기를 반복한 작가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그래서 작가는 계속해서 '오래된 덫'처럼 완벽하게 '기억 지우기'에는 실패한 채 '보이지 않는 해결책' 속에서 '나의 옛날이야기'의 '희생양'이 자신인지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은혜 갚은 두꺼비'처럼 해피엔딩을 위한 아이러니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디_Hello,I am M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60.6cm_2017


역시 6점의 연작을 선보이는 우디(Woody) 작가는 가상의 도깨비 'MON'을 통해 일상과 소통하는 법을 기록한다. 방을 치운다고 치웠는데 늘 지저분하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다가 '몰래 방을 어지럽히는 도깨비가 있는 거 아니야?'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작가의 넘치는 상상력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방을 넘어 세상 밖 공간으로 나래를 펼쳐나갔다. 그래서 어느덧 작가의 작품세계에는 우리네 삶과 Mon들의 마을이 병존하고, 이번 전시를 통해 Mon들을 인사시키고, 말을 걸어보고, 꿈을 사볼까 생각해볼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그러다보면 '정말 이 작가는 Mon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어떤 Mon들은 화가 나면 몸에 불이 나는 부류로, 가로등을 직장 삼아 밤이면 출근해서 그 안에서 마음대로 화내며 즐기다가 아침이 되면 식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이 말한 바와 같이 시각 매체는 때로 청각적이어서, 쿨미디어적 상상을 자극시키는 Mon들의 요란한 소리들이 들리는 듯하다. 수채 과슈 또한 이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아 보인다.




로로_죽음의 시작 The beginning of death_종이에 아크릴채색_45×35.5cm_2017


그런가하면 로로(RORO) 작가는 신을 가상의 존재로 대하고 있다. 20여 년 전, 조안 오스본(Joan Osborne)은 '일상으로 내려온 신'의 모티브로 한 'one Of Us'를 발표했는데, 크랜베리즈(Cranberries)를 비롯해 많은 락커들이 리메이크하면서 버스에서 만나는 이방인, 우리 같은 게으름뱅이, 대마초 피우는 사람 등으로 묘사되었다. 작가의 세계는 이를 떠올리게 하는데, 좀 더 몽환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생활밀착형이다. 우주와 방독면, 장미와 나이키 신발 등이 혼재된 그의 작품들을 마주하면 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꿈의 경계를 오가는 사이에 분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들의 일상도 패션에 예민하고 유행을 타며 음식과 놀거리가 계속 바뀌어가는 변화무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사실 기존의 신에 대한 생각, 즉 주체적 조물주라는 관점 자체를 끌어내 패대기치는 것이다. 그것은 신 역시 환경에 무력한 수동적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가며 적당히 가면을 쓰고 있는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쯤 되어야 진짜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닐까 싶다. 작가에게 있어 죽음 역시 하나의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며, 즐겨 사용되는 보랏빛은 공포와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데서 알 듯 모를 듯한 작가의 페르소나가 작품들의 평면성마저 부숴버리고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다.




곽나연_애착 능력 결함으로부터의 성적 의존성
Sexual dependence from lack of attachment competency_
캔버스에 유채, 모델링 페이스트, 오팔_116.8×72.7cm_2017


곽나연 작가는 우주의 기운을 다른 일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예술에서 남성적임과 여성적임으로 비교하는 것은 촌스럽다고 생각해 골몰한 결과, 로로 작가의 표현 방식을 벙커 버스터라고 한다면 곽나연 작가의 것은 지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애착 능력 결함으로부터의 성적 의존성'이라는 제목을 짓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이 부조를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날들이 필요했다. 언젠가는 그 작업을 행하는 자체가 작가의 일상에서 가장 극적인 몰아 상태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결핍과 에너지의 전환과 폭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작가에게 있어 캔버스는 하나의 뇌관이다. 타인간의 관계의존성에 대한 집착이 갖고 있는 위험함을 철없는 어린이처럼 가지고 노는 작가의 정신세계는 사랑스럽다. 낙서처럼 그려나간 '연인' 시리즈에서도 무언가 색다른 것들이 보인다. 그것이 보인다면 여러분은 음탕한 게 아니라 순수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녀의 드로잉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읊조림 "I hate you but don't leave me."을 공감할 청춘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린 벌써 그것을 놓지 말라고 하고 싶다. 당신의 그림에게 말을 걸고 싶다. 뱀과 같은 또아리에는 스스로 빨려 들어가 균형을 잃고 기절하고 싶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 속에 잠재된 형태로 존재하는 여성적인 에너지'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쿤달리니 : 똘똘 감겨진 것'에 천착한 작가의 세계를 만나보자. 여러분의 일상에도 성적 에너지가 더욱 차고 넘칠 것이다.




김나리_죽어가는 것들 Which come Die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7


역시 성적 에너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좀 더 귀엽고 가벼워보일 수 있는 소재로 엄청난 무게의 주제에 도전한 김나리 작가도 눈여겨볼 만하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굉장한 흥밋거리임이 분명하다. 특히 반려동물, 그 중에서도 개는 가장 인간 친화적인 존재로서 그것을 오브제로 삼는다는 자체로 아티스트의 일상은 한층 더 풍부해지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침대에 올라와 함께 TV를 시청하곤 하는 그녀의 반려견 '흰둥이'를 보며 한층 더 나아간 주제를 마주했다. 흰둥이의 욕망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얼마만큼 자라났고, 어디쯤에서 거세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통제될 수 없는 것인가를 탐구해보았다.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제시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이를 통해 인간 사이의 모방과 폭력에 대해 천착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흰둥이를 인식하고 따르는 과정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반려견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대개 반려견은 인간보다 약하고 일찍 죽는다. '죽어가는 것들(Things Go Die)'은 그 귀여운 것들이 죽어가는 상상을 하나의 악몽처럼 엮음으로서 마치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의 시한성도 엿보이도록 표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right)' 때문에 반려견으로 순화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철저한 타자, 그러니까 원래 우리가 부르던 대로 '애완견'일 수밖에 없다. 발정이 났는데 새끼를 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므로 중성화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사정을 딱히 여기고 있으나 어쩔 수 없는. 그런 거세된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한 사육(Love Education)', 즉 '학습된 사랑'이라는 고백만을 덩그러니 남길 뿐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뜬금없이 던져진 플라스틱 캐릭터 오브제들의 조합들을 '살아나는 것들(Things Come Live)'이라 칭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는 것으로, 죽어있는 것은 살아나는 것으로 만드는 게 인간 욕망의 본질일 것이며, '의미부여'가 생명인 문명화(culturalization)가 지탱하고 있는 미메시스(mimēsis)의 실체 아닐까.




공령문_늦여름 아침 one Late Summer Morning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7


공령문 작가의 작품에도 반려견이 등장한다. "가족, 반려동물, 연인 등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서 느꼈던 '온도'를 기록하고 정리해봤다"는, 담담하게 말한다. 작가의 작품을 어떤 설명 없이 보아도 조용히 음미해보는 어떤 날들의 추억이 소소한 재미를 줄 것 같다. 하지만 시적인 작품명들과, 작가노트의 인상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며 보는 것도 감상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다. 잠시 머물러 그림 속에 담긴 공기를 느껴볼 수 있는 새삼스러운 그 무엇들이다. 좀 더 들어가보자. 작가가 말하는 '감정의 온도'란 무엇일까. 그것을 단순히 '애틋함'이라는 단어로 귀결 지을 수 있을까. 때론 쓸쓸함이 공존하고,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되어 많은 영향을 끼치는 관계에 작가는 집중해나간다. 그래서 그녀는 이를 교호작용(交互作用)이라고 통칭하며 활력소, 소각장, 오아시스, 가시밭길 등 다양한 비유를 들어 보인다. 어느덧 우리도 그 시간의 어디쯤에 서 있다.



이정아_포목점 이씨의 사정 The Circumstances of Mr.Lee of Drapery store_
캔버스에 아크릴과슈_53×45cm_2017


이어서 이정아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보자. 작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좀 더 과거지향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그들의 시간"을 재생해봄으로써 지금 나의 일상과 만나고 있는 '그들'을 좀 더 개인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독특한 작업이다. 본인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장 싱그러웠던 순간을 포착하여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5월이라서 더욱 특별해 보이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목적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쉼 없이 인생이라는 레이스를 달리는 중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맞이하는 일시정지의 이 순간을 기억 속에 사진처럼 잔류해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가슴이 먹먹해오기도 한다. "그 섬광은 멋들어진 성취, 아름다운 희망, 사무치는 그리움, 혹은 침잠하는 불안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작가노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크릴 과슈와 유화로 칠해나간 검푸른 톤의 빛바랜 느낌과 하루하루의 끝을 연상시키는 붉은 톤의 혼재와 같이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빛의 만남으로 담아내려고 한 시선이 역력하다. ● 이렇게 여덟 명의, 자신을 둘러싼 시간을 대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비슷한 모티브를 일부분씩 공유하면서도 개성 있는 발상과 태도로 그려나간 작가들의 순수함과 위트가 함께 보인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매일 자신만의 생각과 풍부한 감각적 경험들이 차고 넘치길 바란다. ■ 마틴배런



Vol.20170504a | 일상 레코드展





서양화가 백중기의 제19회 개인전이 새달 4일까지 서울 인사동 희수갤러리에서 열린다. 강원 영월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백 화백의 이번 전시에는 동강의 절경인 어라연을 그린 ‘어라연’(193*112cm)을 비롯. ‘홍매 2’(120*60cm) 등 20여 점의 최근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두터운 마티에르 기법으로 유화 물감을 나이프로 켜켜이 찍어 그린 풍경들은 작가가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가보지 않은 길’을 추구하는 작업정신을 보여준다.




산간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던 작가는 작년과 금년 초, 바다가 있는 도시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작품 ‘동피랑’(145*97cm)은 통영 중앙어시장 뒷산 달동네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동쪽 벼랑 위의 마을)을 그린 것인데, 그는 동피랑을 관람자들에게 정겨운 우리 이웃마을로 재탄생시켜 놓았다. 지붕 위에 ‘순정다방’ 간판이 걸린 한적한 시골 길가의 외딴집, 하얀 메밀꽃밭으로 둘러싸인 산간 집, 석양에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은 빛으로 뒤덮인 풍력기가 있는 바닷가 풍경 등이 보는 이들의 눈을 매료시킨다.

백 화백은 작업노트를 통해 “내 옆에는 늘 어린 꼬마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산속 맑은 시냇물에 어린 달님 같고, 여린 몸은 신 새벽에 처음 우는 종달새의 몸짓을 닮았다”면서 “내 그림은 이 아이의 몸짓과 소망하는 꿈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작업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꼬마아이’처럼 늘 티 없이 맑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을 추구하고 있다. 또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을 헤며 숲속 오솔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울신문 / 이경형 주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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