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 장흥에 살았고,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만언봉사'를 상소한 존재 위백규도 장흥사람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도 장흥사람이라 장흥을 '문향'이라 부른다.

 

지닌 토요일 정동지와 ‘정남진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흥에 갔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장마당이 식당 같았다.

할머니들이 장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정겨운 풍정이었다.

 

정동지는 밥 먹으라는 인사에 기다린 듯 달라붙어 쌈을 싸 먹었다.

장돌뱅이 수 십 년에 장꾼들에게 꼽사리 끼이는 게 몸에 베어버렸다.

더러 아는 장꾼을 만나면 죽은 사람 만난 것 처럼 반가워한다.

“아이구! 어찌까이~ 이리 와보랑께~ 뽀짝 와바야~ 한나도 안 늙었네”

가까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신세타령을 풀어놓는다.

 

장터에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되지 않는 손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매실이나 양파 등 집에서 키운 야채를 가져와 펼쳐놓았지만, 파리만 날렸다.

 

그 중 어물전에 손님이 많았다. “영감 밥상에 자반이라도 한 손 놓아야제!”

사람이 줄어들어 변해가는 오일장이지만, 아직은 노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 노인는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쉼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장흥의 마동욱씨 전화를 받고서야 장터에서 벗어났다.

가는 길에 교촌리 장흥천도교당부터 들리기 위해서다.

장흥천도교당은 목조전통한옥인데, 왠지 왜색 분위기가 풍겼다.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개축할 때 정면 입구에 포치형을 덧단 형태로 만든데 다

거무스름한 나무색갈이 주는 이질감인 것 같았다.

 

대청의 중앙후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네쪽 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는데,

‘성화회실’, ‘사무실’, ‘응접실’이라 쓴 글씨체가 둔탁했다.

 

장흥천도교당은 교당 건물로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과 연계된 공간구조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양식의 변형은 전통한옥이 개화기 여러 문화와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 과정의 대표적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옥당리 효자송을 찾아갔다.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나무 높이가 12m로 가슴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넓게 퍼져있었다.

나무 나이는 150년이란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위씨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뙤약볕에 앉아 아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 스러워

그 곳에 곰솔을 심어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당리 효자송 맞은편을 바라보니 궁전 같은 이상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보니,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세트장으로 사용한 ‘전관대’라고 적혀 있었다.

인적 끊긴 천관대는 잡초만 무성했다.

 

한 때 ‘사상의학 체험랜드’로 바뀌어 한방의학이 필요하거나 농촌 숙박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는데,

찾는 이가 없어 점차 폐허화 되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는데,

풀숲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자연은 살아있었다,

 

다음에는 장동면 만수리 천관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해동사`를 찾아갔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이면 제향을 지낸다.

 

장흥 죽산안씨가 안중근 의사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55년 만수사 부지에 안중근의사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해동사로 이름하게 되었단다.

장흥의 죽산 안씨들이 장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순흥 안 씨의 안중근 의사 사당을 세운 것은

민족과 대의를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높은 정신을 볼 수있는 대목이다.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숭모와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해동사를 찾는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느라 주변일대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장흥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사찰은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다.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온 체징이 터를 잡아 860년에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이 절을 소굴로 사용하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 남았다고 한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활달한 율동감이 탁월한데,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오른쪽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쓴 동방 지국천왕이 성난 표정으로 있다,

갑옷과 천의를 입은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

발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팔뚝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낸다.

 

그 외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동부도와 서부도,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해 하층기단은 좁게 구성되었다.

탑신부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가늘고 옥개석 낙수면도 얇아 가냘픈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남 탑의 보륜은 삼륜, 북 탑은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라고 한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이다.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높은 받침과 복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의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이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장흥의 마동욱씨는 고향이 좋아 장흥만 찍어 온 사진가다.

젊은 시절 교도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사진에 미쳐 고난의 길에 빠져들었는데,

미쳐도 고향과 함께 미쳐 천만다행이었다.

 

고향을 찍은 사진가로는 장흥에서 제일 먼저 사진관을 차린 강수의 선생도 계셨다.

10여 년 전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의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사진기억들을 모아 ‘사진으로 보는 장흥 100년사’를 펴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반평생동안 고향과 사진에 미쳐 사는 이가 이번에 마을창고를 사진창고로 만들려는 마동욱씨다.

장흥은 지역 사진가들의 고향사랑이 남다른 지역이었다.

 

다들 고향을 잃은 실향민처럼 살기에, 그의 고향사랑이 더 가슴 시린 것이다.

고향이란 태어난 땅에 대한 애착에 앞서 그 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가 보여 준 장흥사진에는 장소성을 드러낸 사진이 주종을 이루지만 결국은 함께 살아 온 이웃에 있었다.

 

그동안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추억의 고향마을’, ‘탐진강의 속살’, ‘하늘에서 본 장흥’,

‘고향의 사계’, ‘하늘에서 본 보성’, ‘아! 물에 잠긴 내고향’, ‘월평-월평마을120주년’,

‘장흥파 각 문중재각’등의 고향에 대한 사진집만 수없이 펴냈다.

다들 팔리지 않는 사진집을 저렇게 만들어 어쩔 것인가 걱정했으나 어렵사리 헤쳐 나갔다.

힘들어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해 온 이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돈은 못 벌었지만, 계속 일할 수 있는 발판은 깔아놓은 셈이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열린 그의 전시 개막식에 몰린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은 물론 장흥사람들이 먼 전시장까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마치 장흥사람들 총 동창회하는 것 같았다.

그의 사람에 대한 진정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알아 챈 것이다.

 

저렇게 하려면 그동안 고향사람들에게 얼마나 베풀었겠는가?

그의 사람 사랑은 고향사람에 거치지 않고 사진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인들 전시만 열리면 먼 길을 마다하고 찾아 와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축하 받는 당사자가 송구스럽다니까... 그의 타고 난 천성인 것 같았다.

이럴 때 생각나는 유행가 구절이 있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란 사진집을 보내주면서다.

두꺼운 판형의 사진집이었는데, 처음엔 아름다운 풍경이나 찾아다니며 찍는 작가협회에 속한

전형적인 아마추어로 여겨 제대로 보지도 않고 처박아 두었다.

한 마디로 흑사리 쭉지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집착을 알고서야 달리 보였다.

어떤 이는 그의 사진이 비슷비슷한 사진이  많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건 강남 스타일이 아니라 마동욱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진보다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에 있다.

 

나 역시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살다보면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 등 돌릴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초지일관 아우르며 포용하기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 없이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는 장흥지역의 300여 마을을 드론으로 촬영하여 '하늘에서 본 장흥'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영암지역 600여곳을 찍었고 최근에는 강진 지역으로 확대해 사진 작업을 한다는데, 펴낸 사진집을 펼쳐보니 마치 지적도를 보는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전역을 떠돌며 지도 작성에 평생을 바친 고산자 김정호선생의 대동여지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겠는가?

 

이젠 집 부근의 문 닫은 새마을창고를 빌려 사진창고가 아닌 보물창고 만들 야심찬 작전을 짜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정남진 토요시장 가는 길에 마동욱씨 만나러 평장마을로 찾아갔다.

작년 11월, 평장마을 ‘새마을’ 창고에서 ‘우리 마을로 간다’는 장흥마을문화제를 열었는데,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았다며 한 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다.

 

정남진 토요시장에서 정동지와 열무비빔국수로 요기를 하고 전시가 열리는 평장마을 창고를 찾아갔더니

마동욱씨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넓은 창고공간 벽에 크고 작은 사진자료들이 빼곡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안, 대반, 덕제, 송산, 순지, 평장 등 여섯 개 마을을 기록한 전시회에는

마동욱씨를 비롯하여 문충선, 서선미, 류은숙씨 등 네 명의 지역 사진가가 참여하고 있었다.

전시된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긴 세월 마을을 지키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애환이 배어 있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를 문 닫은 새마을창고에서 보여 준 의미 있는 전시였으나,

힘들게 살아온 지역민들의 이야기만 텅 빈 창고에 메아리처럼 번졌다.

 

이 전시를 계기로 새마을창고를 전시장으로 활용할 앞으로의 계획도 말했다.

지자체 도움을 얻어 지역 자료관을 겸한 전시관으로 만들 것이란다.

천장 높은 창고의 특성을 활용한 구조설계도 좋아야 겠지만, 앞으로의 운영안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주민 이외의 외지인들을 끌어드리려면 전시나 행사 기획력이 탁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원한 냉커피나 한 잔하자며 집으로 안내했는데, 가보니 새로 지은 집이었다.

오래 전 가본 집이 아니라 대출받아 새로 지었다고 했다.

아담하고 편리해 보여 얼마나 들었냐고 물었더니, 1억이나 들었다는 답에 깜짝 놀랐다.

요즘들어 건축비에 부쩍 관심이 많은 것은 정선 집지을 생각 때문이다. 다들 자재비보다 인건비가 더 무섭다며 집짓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사진집을 출판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촬영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는데, 그는 교도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어

어떤 사진가보다 교도소 구조물의 의미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일었다.

 

이사한 것도 모르고 빈손으로 찾아 갔는데, 마동욱씨 부인은 냉장고에 숨겨둔 짱아치를 꺼내 주었다.

저렇게 안팎에서 챙기니 사람들이 꼬이지 않겠는가?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니 아내가 식당에 일하러 나간단다.

한 곳에 미쳐 사는 남편을 둔, 새까맣게 타 버린 아내의 심정을 난들 어찌 모르겠는가?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며 마당에 불러 세웠더니,

마동욱씨 표정에 아내를 향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묻어났다.

고향사진은 마동욱씨가 찍었지만, 아내 같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가능했던 합작인 셈이다

부디 힘을 합쳐 사진창고가 아닌 장흥의 보물창고를 만들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15일~21일 ‘토포하우스




다큐 사진가 마동욱의 '고향의 사계'사진전이 지난 15일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 날이었으나, 전시장엔 축하객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장흥에서 올라 온 고향 분들이었다. 대단한 고향사랑에, 대단한 인정이었다.


여지 것 전시장 개막식에 그리 많이 돌아다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 동내 이장에서부터 방귀깨나 뀌는 분들은 다 왔더라.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이귀남씨를 비롯하여 정동영, 이종걸, 윤호중, 황주홍의원 등 국회의원만 네 명이고, 장흥문화원장 등 내노라하는 분들이 줄줄이 나와 전시를 축하했다.


작가가 재벌이나 권력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개뿔도 없는 일개의 사진가에 불과하다. 이 건 고향사랑도 사랑이지만, 마동욱의 헌신적인 인간성에 매료된 것 같았다.


사진가 마동욱의 고향을 사랑하는 사진작업은 30여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그는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에서 태어나 교도관과 소방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아예 고향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찍는 사진은 돈벌이와 전혀 거리가 먼 사진이다. 안정된 직장 버리고, 돈 안 되는 사진가의 길을 택한 배짱이 도대체 뭘까? 그를 ‘돈키호테’라 칭한 어느 기자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마동욱,장흥군 유치면 신풍리


누군들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여지 것 시골을 찍어 ‘고향’이란 주제로 책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한 사진가는 더러 있지만, 자신의 고향에 30 여 년 동안 메 달려 온 사진가는 처음이다, 마동욱의 작업이 높게 평가받는 것도 일회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지속성에 있는 것이다. 그게 다큐멘터리사진의 가치다. 장흥댐 건설로 수몰될 수밖에 없었던 유치면 일대도 샅샅이 기록해 두었다.


▲마동욱,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여다지 한승원문학산책로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삶의 터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의 한이 응축된 사진들이다. 그 뿐 아니라 삶의 터전이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기록해 왔다. 그의 사진 자체가 장흥의 역사나 다름없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묵묵히 해 온 것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향으로, 시골 들판이나 정겨운 마을들이 마치 도면처럼 펼쳐져 있다. 드론(Drone) 을 이용해 찍은 300여개 마을 사진을 이어 붙인다면, 한 편의 ‘장흥여지도’나 다름없다. 그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마동욱, 장흥읍 원도리


전경을 담으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새처럼 날아 조감도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그래서 드론장비가 나오자 바로 실행에 옮겼는데, 가난한 사진가의 형편으론 버거웠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조종이 쉽지 않아 바다 속으로 빠지거나 추락해 파손된 드론만 네 대나 된다고 했으니, 그 경제적 어려움이야 보나마나다.


전시된 마동욱 사진은 많은 사진인 들에게 사진하는 의미를 되묻게 했다. 사실적인 현실이 배제된 채, 제대로 소통되지 않는 사진들이 판치고 있다. 예술이란 이름에 포장되어 허구의 이미지만 양산하는 세태라, 작가는 많지만 정작 사진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마동욱, 정남진  물축제 탐진강 2015


그러나 본질에 대한 사실적 관찰을 중시하는 마동욱의 사진은 정직하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사진들은 연출이나 트릭이라고는 전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직관과 정확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작가적 권위나 개인의 주장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작가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진도 사진이지만, 마동욱의 남을 배려하는 인간성이다. 작품에 앞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선배들로 부터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싸늘한 가슴으로 머리만 굴리는 작가들이 득실대는 현실이라, 따뜻한 심성을 가진 마동욱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일례로, 장흥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어딘데, 전시마다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며 알아차렸다. 이건 단지 돈과 시간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마동욱, 장흥군 장흥읍 사안리


이번에 펴낸 ”하늘에서 본 고향마을“과 ”고향“사진집 두 권을 비롯하여 “아! 물에 잠긴 내고향”,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 “그리운 추억의 고향마을”, “탐진강의 속살“ 등 아홉 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가난한 살림에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집을 지속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한 애향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명감이었다. 그래서 2012년 ‘전남문화상’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시골마을의 공동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 점점 사라져 가고 변해가는 시골마을을 되살려야 하는 사회적 운동이 절실한 때다. 만약 사진인 들이 힘을 모아 각자의 고향을 찍는다면, 신판 ‘대동여지도’도 가능할 것이다. 마동욱의 고향 사진전을 계기로 모든 국민들의 애향심에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



▲마동욱, 사진집 '하늘에서본장흥'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에서 '고향의 사계‘ -드론으로 본 내 고향 장흥-과 '하늘에서 본 장흥’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두 권의 사진집도 나왔다.'고향의 사계'는 256쪽, 6만원. '하늘에서 본 장흥'은 448쪽 4만원이다.


전시는 21일까지 이어진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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