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나목’ 그 황량함에 대하여...사진전이 

 96일부터 23일까지 충무로2가에 위치한 아주특별한사진교실에 초대 전시되고 있다.

 

 먼저 나목이란 제목 자체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나목으로 등단하기도 했지만, 신경림 시인의 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각예술로는 박수근화백의 나목에 이어 사진가 임응식선생의 대표작이 줄줄이 떠오른다.

벌거벗은 나무로 벌거벗은 인간을 말한 그 상징성이...

 

1983년 발행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 게재된 임응식선생의 '나목', 글은 고 이명동선생께서 쓰셨다 .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대 부산에서 촬영한 임응식선생의 나목은 포화에 불타버린 앙상한 가지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려는 당시 시대상황을 대변했지만, 박종호의 나목은 사진으로 쓴 시에 가깝다.

 

박종호는 작가노트에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며, 조용히 준비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그 봄을 말이다.

그 때가 오면 앙상했던 나목에는 푸르름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나목은 우리에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모진 겨울 한가운데 서서 그 시간을 인내하라고 한다.

그 속에 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채, 그 속에 생명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나목은 찬란하게 빛날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다.

 

 박종호의 작업노트를 읽다보니,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이 나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두가 나목처럼 벌거벗은 존재로 오지 않던가?

 

 박종호의 사진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앙상한 나목을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이미지의 형상성이나 심미감에 앞서 작가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깔려있는 것이다.

 

아래 적힌 신경림시인의 나목시구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목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소외된 자들의 상징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은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인간의 간구일 수도 있겠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시는 9월 23일까지 열린다.

 

/ 조문호

 

박종호 나목그 황량함에 대하여...’

전시기간 202396-23(12:00-19:00, ,월 휴관)

서울 삼일대로(충무로2)414 신원빌딩 401

아주특별한사진교실’ 02-771-5302

 

 

 

뮤지엄한미 삼청, 개관 기념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
1929년 첫 개인 사진전~예술매체 인정받은 1982년 미술관 전시까지 다뤄
사진·자료 총 300여점 대거 나와···1880년대 ‘역사적 사진’들도 선뵈
“한국사진사 정립위해 ‘한미사진미술관’의 지난 20년 역량 총동원”

한국사진사 정립을 위한 뮤지엄한미 삼청(옛 한미사진미술관)의 개관 기념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개인 사진전을 연 최초의 사진가 정해창의 작품들(1920~1930년대,Gelatinsilverprint). 뮤지엄한미 소장, ⓒ정형식. 뮤지엄한미 제공

사진은 등장 200년이 된 현재 독자적 예술매체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기계조작의 결과물”로 치부하던 예술계의 무시, 비아냥을 극복한 것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1820~30년대 니엡스, 다게르 등 선구자들이 사진 역사를 열어젖힌 이후 세계 사진가들이 치열하게 작업하고 사진 미학을 구축한 덕분이다.

조선인이 사진을 접한 것은 기록상 1860년대다. 1880년대에는 서화가이던 김용원·지운영·황철 등이 사진관을 세웠다. 1900년대 초반에는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 등이 신문광고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최초의 개인 사진전이 1929년 3월 이 땅에서 개최됐다. 정해창(1907~1968)이 서울 광화문빌딩 2층에서 연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다. 사진가·평론가인 최봉림(뮤지엄한미 부관장)은 “정해창은 사진을 예술매체로, 자신의 미학적 역량을 개인전이라는 근현대미술의 사회적 형식으로 선보인 한국 최초의 사진가”라며 “한국 사진사에서 본격적인 예술은 이 전시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전시 등은 있었지만 정해창과 달리 작품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고 작가 이력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진은 50여년 후인 1982년 변곡점을 맞는다. 당시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대전으로 사진가 임응식(1912~2001)의 ‘임응식 회고전’이 열린 것이다. 최 부관장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매체로,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전시와 함께 사진이 미술관의 전시·소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 사진은 1982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회고전이 열리면서 마침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미술관 전시와 소장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당시 전시 팸플릿. 뮤지엄한미 제공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사진가들은 국내외의 주목 속에 여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사진계가 이룩한 갖가지 성취의 뿌리, 역사적 토대와 흐름을 살피고 짚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사진사 정립을 위한 치열한 연구·노력은 곧은 성장을 담보하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국 사진의 튼실한 발전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뮤지엄한미 삼청’(서울 삼청동)에서 열리는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는 주목할 만하다. 1929년 정해창 개인전부터 1982년 임응식 회고전까지 50여년 동안 한국 사진이 어떤 조건·환경 속에서 발전했는지 새롭게 고찰해 의미가 크다. 사진 200여점, 자료 100여점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획전으로, 쉽게 마련하기 힘든 보기 드문 사진전이다.

사실 한국사진사를 다루는 대규모 기획전은 여러 이유로 쉽지 않다. 사진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데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소장·관리·자료의 부실, 빈티지 프린트의 한계는 물론 아직도 소유권·저작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여전해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 소장품에 개인·기관 소장품들까지 모은 전시는 그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시는 한미약품을 모기업으로 한 가현문화재단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동에 미술관을 신축하고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재탄생한 개관 기념전이다. 국내 최초이자 한국 대표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관장 송영숙·사진가)의 내공, 자부심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정해창의 작품으로 시작해 먼저 1920~1930년대 사진들을 살펴본다. 회화주의 사진(살롱사진)이 중심이었지만 ‘신흥사진’으로 불린 모더니즘 사진에 대한 사진가들의 관심도 엿볼 수있다. 1930~194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사진가들에게 공모전 입상은 사회적 인정, 예술적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형록·임응식·김정래·최계복·정도선·구왕삼·정인성 등 당시 각종 공모전 수상작들을 만난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응식의 포토그램 습작1 부양(1933,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이형록의 전원(1934, ⓒ이명민), 임석제의 반출(1948,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소장

해방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은 여느 분야처럼 사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극단적 이념 대결과 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사진계는 기존 회화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의 객관적 기록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룬다. 르포르타주(르포)도 부상했다. 사회의 부조리, 전쟁, 노동현장, 농업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조짐 등 있는 그대로의 현실·현장을 담아내는 것이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을 다룬 이경모, 전쟁터나 전쟁에 따른 고단한 삶을 기록한 임응식·이명동·구왕삼·임석제·임인식 등의 작품은 당시 사진계를 잘 보여준다.

구왕삼의 작품(1950년대, 동강사진박물관 소장, ⓒ구경훈, 위 사진)과 임인식의 6.25전쟁-군번없는 학도병(1950, 청암아카이브 소장,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제공
이해선의 명암 (1950년대, 개인소장, ⓒ이길주, 위 사진)과 이해문의 제일보(1957, 개인소장, ⓒ이성주). 뮤지엄한미 제공

1950~1960년대 해외 공모전들도 사진사에 영향을 준 제도적 조건의 하나다. 사진가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프랑스·영국 등의 해외 공모전에 적극 참여했다. 국내 공모전 심사의 불신, 문화 선진국에 대한 선망 등에 따른 것이다. 전시장에는 국내 사진가의 최초 해외 공모전 입상(19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으로 알려진 임응식의 ‘병아리’를 비롯해 김한용·박영달·이해문·한영수·배상하·최민식 등의 작품과 관련 출판물 자료가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이어 ‘인간가족’전(1957년)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등의 영향을 살핀다. 신한국·김종헌·김테레사·한정식·홍순태·정진필·배동준·육명심·차용부 등의 작품을 만날 수있다. 여기에 리얼리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고민·시도한 ‘싸롱아루스’와 ‘현대사진연구회’의 이상규·김형오·황규태 등의 작품들도 선보인다. ‘인간가족’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세계 순회전의 하나로 한국을 찾아 42만명의 관람객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규태의 빅 브라더(1968, 몽타주, 작가소장, ⓒ황규태, 왼쪽 사진)와 김종헌의 격정(1965, 개인소장, ⓒ김선미). 뮤지엄한미 제공
강운구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수분리(1973, 뮤지엄한미소장, ⓒ강운구, 왼쪽 사진)와 홍순태의 갈치 (1971, 개인소장, ⓒ홍성희). 뮤지엄한미 제공
육명심의 사별(1974, 작가소장 ⓒ육명심, 왼쪽 사진)과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연작)(1978, 작가소장, ⓒ차용부). 뮤지엄한미 제공


1960~1970년대가 되면 사진가들은 공모전을 넘어 개인전, 출판 작업에 활발하게 나선다.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 등을 비롯해 서순삼·이해선·전몽각·강운구 등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통문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고건축물·유적·명소를 촬영한 작품들이 쏟아진 것도 이 시기다.

전시장 한쪽에는 기획전과 별개로 역사적 사진들이 나와 있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수장고와 접해 마련된 전시공간에서는 황철의 1880년대 사진, 고종·흥선대원군 초상사진, 최초의 여성사진가로 알려진 이홍경의 작품 등이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은 이번 기획전을 통해 한국 사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1920년대 이후 근현대의 다양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있다. 사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송영숙 관장은 “한국 사진사 정립을 위한 소중한 기회라는 책임감으로 이번 전시에 지난 20년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며 “전시 성과를 사진계, 문화계가 공유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와 연계한 세미나도 마련돼 2월 11일에는 ‘미술관·박물관의 사진 컬렉션과 사진의 진본성’을 주제로 제2차 세미나가 열린다.

뮤지엄한미 삼청은 소장품(2만여점) 보존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저온·냉장 수장고도 갖췄다. 또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진은 물론 설치와 영상·사운드 전시도 수용가능하며, 관람객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비움의 구축’이란 건축철학으로 유명한 원로건축가 민현식 대표(기오헌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미술관은 개관과 더불어 건축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시는 4월16일까지.

한국 최초이자 대표 사진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거듭났다. 사진 왼쪽은 신축 개관한 뮤지엄한미 삼청전경(ⓒ김재경)이다. 오른쪽은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뮤지엄한미 삼청의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경향신문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사내가 애를 업고 다니냐?’

 

지금은 남자들도 애를 보지만, 옛날에는 쪽팔리는 일이었다.

조롱하는 친구의 동작과 쑥스러워 하는 표정이 너무 정겹다.

등에 업힌 어린애의 눈길 한 번 보라.

이게 사는 재미고, 이게 사진이다.

 

1972년 이수종선생께서 찍은 사진을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동생을 업고 공부하는 학생

 

학교에서 동생을 등에 업고 공부하는 걸 생각이나 해 보셨나요?

모두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힘들게도 배웠다.

너무 많이 배워 탈인 요즘 보니, 아픈 추억도 그 때가 그립다.

 

부천의 김수열선생이 1974년 낙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고삐 풀린 소

 

소 몰고 나온 소녀에게 이변이 생겼다.

왜 소의 고삐가 풀렸을까?

안간힘을 다해 소꼬리를 움켜진 소녀의 표정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다.

 

1968년 장지영선생께서 포착했다.

‘동아사진컨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한정식선생의 “Don’t go!”

 

이 사진은 한정식선생께서 아마추어로 활동하시던, 1968년에 찍은 사진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한 사진이다.

지금은 선(禪)에 가까운 사진을 하는 선생의 사진세계를 헤아린다면,

너무 재미있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해학적인가?

특히 외래어 쓰는 것을 싫어하는 선생께서 “Don’t go!”라는 사진 제목을 붙인 것도 이례적이다.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봄 사건 났네.

 

모처럼의 봄나들이에 마냥 즐겁다.

봄바람에 치마만 날리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날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1966년 봄에, 진주의 이영달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꽃 팔러가는 처녀들

 

아침 햇살을 머리에 이고 꽃 팔러 나서는 처녀들의 뒷태가 너무 정겹다.

70년 전 임응식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의 처녀들은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셔도 백수가 가까운 할머니들이다.

임응식 선생께서 부산 계실 때는 주로 광복동에서 활동하셨으니,

아마 국제시장으로 국화 팔러 가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응식회고 사진집'에서 옮겼다.

 

 

그 시절이 그립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풀풀 날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 당시는 길을 오가며 흙먼지께나 뒤집어썼다.

때로는 자동차바퀴에 튄 자갈에 맞아 이마가 터지기도 했지만...

 

1962년 부산의 김복만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해방의 순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 사진가 현일영선생께서 찍은 감격의 순간이다.

 

"광복60년, 사진60년 / 시대와 사람들"도록에서 옮겼다.

 

 

여기는 마포 종점이 아니라 마포 나루터다.

 

1945년도 정남영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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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역사전' 도록에서 옮겼다

 

 

북녘, 도심의 한 모습이다.

 

유령의 도시처럼 텅빈 거리와,

군복을 입은 아버지 가슴에 안긴 애기의 모습에서 찡한 인간애를 느낀다.

 

1997년 평양에서 찍은 Martin Parr 사진이다.

-PRESTEL- 'A YEAR IN PHOTOGRAPHY'에서 옮겼다.


황규태선생


지난11일 원로사진가 황규태 선생께서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올해 가기 전에 번개 밥이라도 한번 해야죠. 정영신씨와 같이요’

난,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보름이나 지나 난감했지만, 정영신씨와 연락해 시간을 잡은 것이다.



지난 26일 약속장소인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가니,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다.

송구스럽게도 돈까스를 사 준다며, 사간동 'GINZA BAIRIN'로 차를 몰았다.

오래 전에 그 곳에 한 번 가보았지만, 잘하는 집이라 예약해야 할 정도다.



과분한 오찬을 즐긴 후 인근에 있는 찻집 'Smoll House'로 갔다.

그동안 뵙지 못한 원로사진가들의 근황을 들었는데,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인사동에서 ‘하당’이란 화랑을 운영한 사진가 윤 옥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인사동 가게를 그만두고 소식이 끊겼는데, 황선생 께서 알고 계셨다.



이야기 중에 지인들이 임응식선생을 '예술원'에 모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철옹성같은 벽을 넘지못해 그냥 넘겼지만, 요즘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궁금했다.

‘예술원’이 폐쇄적인 집단이란 건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끼리끼리 노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무슨 정치 패거리도 아니고 명색이 예술한다는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예술원'의 벽을 허물어 원로 사진가 중에서도 누군가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청원을 올리자는 글을 올렸더니, '예술원'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이 많았다.

'예술원'을 잘 아는 분들은 친일 잔재로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영문도 모르는 황규태선생은 홍두깨 같은 소리에 연관된 듯한 포스팅이 불쾌한 것 같았다.

그런 양로원에는 관심도 없다며, 제발 망신시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스러웠다.



2017,11 / 한정식선생과 류가헌에서


사실, 황규태선생은 사진 작품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도 좋다.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개인적인 생각과도 일치해 존경하는 분이다.

미국 계실 때는 사진 유학 간 후배들 중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진가에게 도움을 주었다.

작년에는 동자동 쪽방촌까지 찾아와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큰 힘을 주셨는데,

만날 때마다 어렵게 사는 걸 걱정하신다.


2018년 6월, 황규태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짚차를 몰고 동자동 쪽방촌을 방문했다


선생께서는 내가 '삼성항공' 카메라사업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사진기획전 후원 요청을 들어준 걸 아직까지 고마워하신다.

사진하는 사람이 업무의 일환으로 결재권자와 연결해 드린 것뿐인데,

괜히 부담주지 않으려고 도움줄 때마다 핑계 대시는 거다.



후배들을 위한 애정 어린 마음뿐 아니라, 사진도 최고로 평가 받는 분이다.

황규태선생 사진이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만으로도 입증된다.

작품 경향이나 라이프스타일도 젊은 사람 빰 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그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누가 선생을 팔순이 넘은 원로작가라 하겠는가?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길'


선생께서 1960년대 찍은 사진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 지켰다.

목가적인 정취도 살아있고 사진의 전형적인 구도도 남아 있었으나,

그 틀이 서서히 부서지며 초현실적 이미지의 파편이 되어갔다.

원근감이 압축되거나 화면 톤이 사라지며, 더 이상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졌다.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소원'


70년대 발표한 ‘원 풍경’에서는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 비판의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생태환경의 문제성을 예견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며 통렬한 비판이었다.

기록적인 고발성에다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보여 준 일련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해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황규태선생의 70년대 작품 '원풍경'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기존 사진틀을 깨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최근에 발표하는 일련의 ‘픽셀’전은 시공을 초월한 작품세계인데,

평생을 새로움에 도전하는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다.


2018 년'동강사진상 '수상전에서...


황규태 선생 사진의 매력은 바로 자유로운 자의성에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하며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을 벗어던져 버리는 것이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진미학을 개척했다.


황규태작 Pixel Tvee  2011년


부디 오래 오래 건승하시어, 후학들에게 늘 모범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글 / 조문호



황규태작 Pixel 2019년



































 

 

-임응식 회고 사진집에서 스크랩-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 서울 명동에서 촬영한 위의 ‘구직’사진은

사진인은 물론 일반인들도 잘 아는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모자를 눌러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벽에 기대선 사람은 구직(求職)이란 팻말을 목에 걸고 있다.

좌절한 표정이나 몸짓이 얼마나 처절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시대적 실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연출에 의한 사진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5년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삼성포토스페이스’ 개관 초대전으로 임응식선생 회고전을 열 때였다.

당시 삼성카메라 사업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는데, 그 회고전엔 ‘구직’사진도 전시되었다.

전시기간 중 관람객을 상대로 한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 사진은 연출에 의한 사진이라고 밝힌 것이다.

 

임응식선생께서 초창기에는 토속적인 소재나 회화적 사진을 추구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나섰는데,

우리나라 리얼리즘의 대표적 사진가로서의 말씀으로는 너무 뜻밖이었다.

 

사진에서 묘한 연출냄새가 풍기기는 했으나,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 자리에는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지 않았던가.

더 황당무계한 것은 연출의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지나치다 찍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창의력에 의한 연출로

시대적 실직 난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적 의도였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실상을 홍보하는 사진으로는 이해가 되나,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최초로 주창하고 실천해 오신 분이 아니던가?

문제는 처음부터 그 사진이 홍보사진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기록사진에 편승해 왔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임응식선생은 우리나라 사진 일세대로서 최초의 사진교육에 이바지해 오신 분이었다.

서울대를 비롯한 유명대학에 출강 하셨고, 최초로 사진과가 생긴 ‘서라벌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들을 양성하신 원로사진가 말씀으로는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다. 


난. 그 일에 더 이상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사진계 일각에서도 그 사실을 아는 분이 있겠지만, 다들 모르는 일처럼 쉬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임응식 선생의 ‘구직’사진이 '서울옥션' 경매에 나와

사회적 관심이 모아짐에 따라 자칫 역사적 왜곡을 불러 올 수 있기에, 더 이상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사진은 기록 사진이 아니라 연출사진이라는 것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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