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방 an open room

권인경/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2023_1027 2023_1225

권인경 _ 열린 창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 아크릴채색 _135X197cm_2023

 

권인경 홈페이지_www.inkyungkwon.com

페이스북_www.facebook.com/inkyung.kwon.5

인스타그램_@artist_inkyung

 

초대일시 / 2023_1027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엠보이드 5,6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열린 방 이번 전시에서 권인경은 방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 방은 개인의 연장, 또는 확장으로 간주된다.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말했을 때, 그곳은 자폐적인 공간이기보다는 세계로 열린 일종의 플랫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예술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다는 것은 그 전에 닫힘을 전제한다. 자기가 없다면 그저 세계에 흡수될 것이고, 자기만 있다면 세계는 그저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두 극단은 모두 문제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세포막의 차원에서부터 닫힘과 열림이 유동적이다. 그래야 그가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개인의 방'은 심리적인 차원이 강조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 대해 '각 인간들의 최소 안식 공간인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심리적 상황, 떠오르는 상념들, 수집하는 대상들'을 다룬다고 밝힌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있는 지인에서 출발했지만, 이러한 난관은 정도의 차이일 뿐 현대인이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이다, 같은 외부 풍경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개인이 있으며, 작품에서는 그런 개인의 공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개인의 관점이 평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원근법적 세계는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력한 지배적 관점이 고정되는 것이 문제다. 장기적으로 고정된 체계는 궁극적으로는 변화하지만, 개인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다. 권인경의 작품이 다소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시점을 운용하는 것은 지배적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다. 장면 또는 풍경은 건축적 구조를 따라 펼쳐지지만, 그 구조들이 실제 건축처럼 합리적이지는 않다. 공간 사이에 언제든 새로운 공간이 끼어들 수 있고 또 사라질 수 있다. 한 화면에 많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촘촘하게 구획된 구조다. 합리적 공간의 선형적 이동에 따른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가 다성(多聲)적으로 들려온다. 현대인에게 분리된 독립 공간은 누구나 원하는 물리적, 심리적 자원이다.

 

권인경_너의 마음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136X176cm_2023
권인경_홀로 앉은 기억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136X176cm_2023
권인경_서로 다른 기억들1_한지에 수묵,아크릴채색_194X130cm_2023
권인경_떠오른 기억들4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72X140cm_2023
권인경_떠오른 기억들1_옻칠지에 수묵,꼴라쥬,아크릴채색_53X73cm_2023
권인경 _ 떠오른 기억들2_ 한지에 고서 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47.5X79cm_2023
권인경 _ 떠오른 기억들3_ 옻칠지에 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47X90cm_2023

방 안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외부적 사회관계로부터 탈주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 선택이지 강제가 아니다.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의 풍경들은 사람의 흔적을 보여준다. 심리적 공간이라고 해서 '단순한 흔적'이어선 안되고 '기록으로 서로 다른 그곳들을' 남기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이 스며있는 현대적인 사물 뿐 아니라, 고서를 꼴라주하는 형식에서 나타난다. 기억은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을 넘나든다. 작품 속 가구나 건축적 구조 등에 주로 꼴라주된 고서는 '말이 내뱉어진 순간'을 고착하는 것이며, '언어가 삶에 묻어'있음을 강조한다. 고서에 적힌 언어라서 고풍스럽지만, 그 또한 지금의 상용어처럼 한 시대의 지배적 언어였을 것이며, 주체를 구성했을 것이다. 인류학이나 언어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 사회의 지배적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기호, 기표/기의가 분리되는 언어 자체의 분열적 조건에 당면한다. '환자'는 이 조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 일 따름이다. 속해야 하지만, 완전히 속하기 싫은 애증에 찬 구조이다. 정신분석학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구조적 이론에 저항하는 저자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카오스모제]에 의하면, 상징적 질서는 결정론적인 납 망토처럼 죽음의 운명처럼 무형적 세계를 짓누른다. 그에 의하면 말(발화)은 법의 차원, 즉 사실, 동작, 감정의 통제 차원에 고정된 문자적인 기호학의 지배 아래 통용될 때 공허해진다.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을 염두에 둔다. 마단 사럽이 해석하는 라깡의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상징계를 통해 주체가 구성되므로, 주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담론에 의해 그에게 할당되는 장소가 있다. 상징계가 자율적인 구조가 될 때 인간의 자리는 과연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결정론으로부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이라는 구조적 공간을 개인과 비유하면서 종횡무진 연결망을 구축하는 것은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넘어서려는 방식이다.

 

권인경_그때의 기억1_한지에 고서꼴라쥬,수묵,아크릴채색_53.5X107.5cm_2023
권인경 _ 서로 다른 기억들 2_ 옻칠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 아크릴채색 _142X;73cm_2023
권인경 _ 너와 나의 이야기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197X135cm_2023
권인경 _ 붉은 기억 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176X136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2_ 한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 아크릴채색 _72X;50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 1_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35.5X55.6cm_2023

권인경은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형식주의는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에 대한 서사는 인간이 등장해야 자연스럽지만, 작품에는 정작 인간이 없고, 간혹 뜬금없이 등장하는 의자는 인간의, 요컨대 부재함으로서 현존하는 자리를 상징한다. 인간관계로부터 출발하는 현대적 병이 있지만, 작가이기에 자기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방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가까운 이가 어릴 적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앓았고, 이후 오지랖 넓은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 폭력을 겪으면서 외부와 단절된 상황과 관련된다. 타인과의 언어적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그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지만, 문을 조금은 열어 놓는다고 한다. 세상과의 조그만 통로의 확보이다. 하지만 정상/이상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보통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우호적인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본능이 개인으로 하여금 점점 오래 방에 머물게 한다. '스마트'한 세상이 열리면서 나가지 않는(않아도 되는) 경향은 강화된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대면' 관계는 상대화된다. 대면은 이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된 것이다. 세계로 열리는 문이나 창이라는 비유는 물리적인 만큼이나 가상적이다. 하지만 정보혁명의 시대에는 현실을 대신하는 코드들의 세계에 갇혀 있기 십상이다. 방의 역할을 강화되고 있다. 개인공간이 아닌 상업시설에도 'OO'이 많지 않은가. 대부분 일탈적인 'OO'''이라는 공간 특유의 비가시성에 대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권인경의 방들은 자족적이지 않고 계속되는 연결망이 특징적이다. 내부와 외부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고 이러한 변화무쌍한 공간관은 이와 연동되는 시간관과 연결된다.

 

권인경 _ 그날의 기억3_ 한지에 고서꼴라쥬 ,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4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 5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그날의 기억6_ 장지에 고서꼴라쥬 ,수묵 ,아크릴채색 _26.2X18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 4_ 고서에 수묵 _15.5X24cm_2023
권인경 _ 마주한 그날5_ 고서에 수묵 _15.5X24cm_2023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명사적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강조했다. 저자에 의하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선험적 공간이 아닌 찾아내야 하는 자리는 시간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시간은 무엇보다도 서사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기억 시리즈에서 '기억'이라는 키워드는 시간과 관련된 범주이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공간들은 관객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속에 많이 쟁여져 있는 시공간만큼이나 빠른 보폭을 요구한다. 국면의 빠른 전환은 대도시를 통과할 때의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도시에서 촘촘하게 자리하는 방들은 철저히 계층적이다. 가난한 1인 가구의 허름한 주거지가 된 고시원부터 시작해서, 보다 보편적으로는 아파트의 방들이나 오피스텔이 그렇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펜트하우스까지 공간은 가장 값비싼 물적 자원이다. 방은 초라하든 화려하든 개인의 심리적 연장이자 보호 역할을 맡는다. 우리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킨다. 인간은 생산/소비적 체계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구조가 내면화 되어 개인은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 한다.  이선영

 

Works for the Heart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2023_0525 ▶ 2023_0627 / 월요일 휴관

김명숙_HT20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9

김명숙 홈페이지_www.myungsookkim.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indipress.modoo.at

@indipress_gallery

www.facebook.com/INDIPRESS

 

2007년 무렵부터 2018년경까지 이어진 이 심장연작은 가슴의 상흔들에 관한 공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업들은 나의 심우도였을지도 모를 미노타오르스 연작과 Works for Workers 연작, 그리고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에 관한 Katabasis 연작들과 동시에 진행되어 아마도 그 연작들에 내재되어 있을 상흔들이 Heart라는 도상을 빌어 재현된 것이리라. 연작들 중에는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리던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자기도 모르게 쥐어뜯어 삼킨 머리카락들이 어지러이 뭉쳐있는 흉부 X레이 사진을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머리카락들과 담뱃재를 자리공이라는 식물의 즙에 섞어 그린 심장이 있다. 민간에서 자리공은 살충제나 지혈제로 쓰인 약재이며 신선들에게는 불로장생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심장을 인체화한 삼면화는 정신의 구심력과 원심력,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형상화한 작업이었다. 이 삼면화에서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그 피를 지혈해주는 제의적 의미로 자리공의 즙이 사용되었는데, 몇 년이 지나니 탈색이 되어 마른 피 자국처럼 되어버렸다.

 

김명숙_HT16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6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심장의 역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뇌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한편 수피즘에서 심장은 내부의 황제로서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고, 신성으로 통하는 문으로 인식되었으며, 인도인들에게 심장은 브라만이 거처하는 마음의 지성소였다. 니체의 심연의 아이들은 '빛나는 어둠'의 세계인 가장 깊은 정신의 심연으로 내려가 마침내 심장의 박동 소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대지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난다.

 

김명숙_영정07_종이에 먹물_95×75cm_2013

 

심장 연작이 마무리될 무렵, 작업실의 심장 그림들은 더이상 물감으로 재현(represent)되기를 거부하며 오브제로 제시(present)되기를 요구하였다. 폐차에서 떼어낸 찌그러지고 녹슬고 삭은 부품들로, 숯으로, 재로, 얼음으로, 깨진 거울들로, 누더기로, 피 묻은 거즈로, 오래된 문짝으로, 진주를 품은 조개로, 연꽃으로… 하지만 제한된 작업실 공간에서 거대한 심장 오브제들을 작업하기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아 마음 속 무한의 공간에 하나씩 만들어 두기로 하였다. 비록 그날 심장들의 요구에 응하지는 못했지만, 작업실에 오래도록 놓여있던 의학 사전과 응급처치법에 관한 소책자로 Heart of Master를 재현해 보았다. 낡은 의학 사전은 도교에서 말하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난 깨달은 자의 심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이 살면서 앓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마침내 깨달은 자가 된 자의 심장에 나있다는 일곱 개의 구멍의 의미는 몇 년 뒤 우연히 어린 손녀에 의해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엄마 없이 두 주일을 보내게 된 손녀가 내게 이런 문자들을 보내왔다. "가슴에 구멍이 세 개쯤 뚫린 것 같아요." "오늘은 가슴에 구멍이 열 개도 더 뚫린 것 같아요." 살면서 가슴에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릴 만큼의 고통을 겪어낸 자만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First Aid라고 적혀있는 낡은 소책자에는 내 자신에게 응급처치가 되어 줄 만한 문장들을 발췌하여 군데군데 적어놓았다. 돌 심장 오브제들은 아파트 화단에서 우연히 하트모양의 돌을 주운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오가며 눈에 띄어 하나씩 모아진 것으로 심장연작의 완결작으로 미루어 왔던 Bulletproof Heart, 즉 마침내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된 방탄심장을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돌 심장은 손녀가 작업실 구석의 방탄심장들을 보고는 며칠 뒤 길에서 손톱만한 돌맹이를 주워 "이건 상처가 다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는 심장이야."라며 내 손바닥에 올려 준 것이다.

 

김명숙_새_종이에 혼합재료_220×320cm_2004

 

1990년대 초반에 그려진 화산 연작은 휴화산 상태의 나의 심장이 표현되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직 그려내지 못한 채 오래도록 마음에만 품고 있는 심장들이 있다. 전사의 심장, 제단에 바쳐진 심장, 인간의 영혼에 깃든 신성이 육화된 심장,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 김명숙

김명숙_Harassed land_종이에 혼합재료_245×245cm_1990

 

이 심장들에는 관객을 향해 마주한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어 타들어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에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체액이 베어든듯한 장기는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들이다. ■ 이선영

Vol.20230525d |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Flowing Moment-순간은 밤하늘의 별과 같다

허유진展 / HUHYOOJIN / 許有辰 / photography 

 

2022_0919 ▶ 2022_0925

 

허유진_Fancy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초대일시 / 2022_0919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아트비프로젝트

art B project

서울 종로구 삼청로 82 3층

Tel. +82.0507.1358.3076

www.artbproject.com

 

우리 곁에 있는 우주의 깊숙한 곳 ● 허유진의 작품들을 누가 봐도 별이 가득한 신비로운 우주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무엇을 찍어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나중의 일일만큼 압도적인 유사성을 가진다. 별을 보며 하는 생각은 일상과는 다소 다르다. 일상의 잡다함을 털어내는 초월적 경지로 누군가에게는 황홀한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밤하늘을 보는 것은 낭만적이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영혼과 꿈 : 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 관한 시론』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우주적 무한과의 소통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응시하는 것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종교를 떠올릴만한 근본적 차원에 몰입하게 한다. 종교는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십년 이십년의 시간이 아닌 억겁의 시간에 걸친 진리와 지혜를 말한다. 허유진의 전시 부제 『Flowing Moment-순간은 밤하늘의 별과 같다』에는 시간에 대한 키워드가 여럿 들어가 있다. 그것은 별이라는 작품 소재와 관련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주요 매체인 사진도 그렇다.

 

허유진_Fancy 02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0.9×81.3cm_2021
허유진_Fancy 03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작가가 '순간'을 강조하는 것은 사진이 시공간의 절편을 담아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볼 때 인간은 영원을 생각한다. 물론 우주 또한 생성과 소멸을 겪지만, 워낙 관찰자인 인간의 시간관념을 뛰어넘는 시간을 전제하기에 영원처럼 느껴진다. 길어야 100년 남짓한 인생은 우주적 시간에 비한다면 거의 순간에 해당된다. 순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지금 자기 눈에 닿은 별빛으로 그 별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에서도 온다. 먼 거리를 생각할 때 그 별은 이미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지속이 아닌 순간만이 확실하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찍어온 허유진에게 몸의 연장이나 다를 바 없는 카메라는 무엇보다도 순간을 포착한다. 별을 품고 있는 우주는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지만,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별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주체다. 작가는 『Flowing Moment』 전의 사진들이 '나라는 사람을 예술적 표현으로 보여준 사진이고 나의 세상이고 우주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허유진_Fancy 04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허유진_Fancy 05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하지만 우주적 풍경처럼 보이는 작품은 그것이 세차 구정물이라는 점에서, 그 낙차에서 오는 충격이 있다. 자동차 세차장에서 발견한 비눗물은 빛이나 날씨의 조건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나지만, 전시되는 대다수의 작품에서 우주적 풍경이 느껴진다. 최초의 발견은 우연이었지만, 작가는 집중적으로 한 주제에 매달려 작품 형식을 가다듬어 왔다. 현재까지는 자동차 창에 비춰진 거품이 중심을 이루지만 앞으로 넓혀가려 한다. 아직 20대니까 충분히 가능한 목표라고 본다. 이 시리즈가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최소 7-8년은 넘게 붙잡고 있으면서 심화, 확장 시키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 밖에 작가가 관심을 가진 소재로는 동굴이 있다. 동굴 또한 구체적인 자연이면서도 추상적인 느낌으로 확장될 수 있는 소재다. 우주나 (아직 발표는 안된) 동굴 이미지는 허유진의 관심이 자연의 이미지에 있음을 알려준다. 과학자들의 도구인 현미경이나 망원경은 자연을 확대하여 분석한다.

 

허유진_Fancy 06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2
허유진_Blossom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허유진의 도구인 사진은 그 연장선 상에 있다. 복잡한 자연적 현상에서 질서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방식은 과학과 예술에 공통적이다. 전시된 작품은 자연에 내재한 심미적 차원을 활용한다. 거품이 자아내는 우주적 풍경은 모두 물질과 에너지의 패턴과 관련된다. 가령 기하학자라면 불규칙적인 거품의 형태에서도 규칙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오반 로버츠는 기하학자 콕세터의 평전 『무한 공간의 왕』에서 '모듈화된 공간의 컴팩트화'에 대한 연구의 예를 든다. 이 평전의 주인공은 '최밀 충전과 거품 덩어리'에 대한 강의에서 '거품 덩어리에서 하나의 거품과 접촉하는 거품의 수를 공식화'한다, 과학자가 공통의 규칙을 찾는다면 예술가는 보다 직관적인 시각적 비유법을 구사한다. 허유진의 작품에서 비누 거품과 우주는 시각적인 유사성(resemblance)으로 연결된다. 유사성은 시각예술에서 의미가 확장되는 중요한 연쇄 고리가 된다.

 

허유진_Blossom 02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1
허유진_Blossom 03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유사성은 16세기 말까지 서구문화에서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땅은 하늘을 반영했고 사람의 얼굴에는 창공의 별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회화는 공간의 모방이었다. 푸코에 의하면 표상은 반복의 형태로서, 즉 인생의 무대나 자연의 거울로 이루어졌다. 『말과 사물』은 유사성과 공간과의 연쇄에 의해, 말하자면 유사한 사물들을 한데 모으고 인접한 사물들을 동화시키는 힘에 의해 세계는 마치 하나의 사슬처럼 서로 연결된다고 서술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사물에 주어진 장소를 극복한다. 인간의 그의 지혜를 통해 세계의 질서를 닮아가고, 세계의 질서를 자신의 내부로 전위시킴으로서, 자기의 내면의 창공 속에서 저편의 다른 하늘의 움직임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는 보편적인 적용영역을 갖게 된다. 전 우주의 모든 형상들은 유비에 의해 한데 모여들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길이 나 있는 이 공간상에는 하나의 특권을 가진 중심점이 존재하는데, 이 지점은 바로 인간이다.

 

허유진_Blossom 04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1
허유진_Blossom 05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1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비트루비우스 인간』(1490)으로 유명하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상응 관계에 있어서 위대한 중심점이다. 모든 관계들은 이 중심부으로 집중되며 다시 그 중심부에 의해 새롭게 반사된다. 그렇게 해서 소우주와 대우주와의 조응관계가 성립된다. 푸코에 의하면 소우주라는 개념은 만물의 위계 질서 내의 자기보다 더 높은 등급 속에서 자기의 거울상과 대우주적 정당화를 발견한다. 역으로 말하면 가장 높은 천구의 가시적 질서는 지상의 가장 어두운 심연 속에서도 반영된다는 것이다. 자동차 창유리의 거품 세제의 흔적에서 대우주의 이미지를 보는 허유진의 작품 또한 푸코가 이론화한 것과 같은 유사의 연쇄고리를 따라간다. 작품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설거지통 속에도 우주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기원도 품고 있는 저 숭고한 우주의 광경이 그렇게 하찮고 더러운 것이었다니. 하기야 저기 빛나는 별 또한 내 발치에 채이는 돌멩이와 비슷하지 않겠나.

 

허유진_Fantasia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2
허유진_Fantasia 02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2

작가는 '사진작가의 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무심하게 바라봤던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두가 거리의 문제다. 미학 또한 낯설게 하기 등의 방식을 통해 거리를 활용한다. 현대과학은 시간과 공간의 밀접한 관련을 말하는 만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시대상과의 관련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사진 매체가 사실을 다루는 범위는 이렇게도 광대하다. 실제의 우주나 별에 대한 이미지는 고도의 천문학적 기구들이 받쳐줘야 하는 피사체이기는 하지만, 허유진은 사진기 하나로 그러한 효과를 찾아낸다. 이 작품 사진을 천문학자들에게 보여주면 여기가 어디냐고 먼저 물을 듯하다. 전문가들에게는 그들만의 좌표가 있기에 그 수많은 별들에서 어떤 별이 새로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만이 차이의 감식안을 가질 수 있다.

 

허유진_Fantasia 03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1
허유진_Fantasia 04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2

허유진은 이번 전시의 작품을 자기만의 분류방식에 의해 여섯 갈래로 나누었다. 가장 많이 출품된 『Fancy』 시리즈는 하늘 저편, 우주의 깊숙한 곳의 풍경 같다. 검은 융단에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아름답다. 관객은 이 찬란한 풍경이 어떻게 비누 거품일 수 있지라고 묻겠지만, 우주의 모양에 대한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가 거품 우주론이라는 사실이다. 비누 구정물로부터 출발한 것일지라도 같은 거품이기에 비슷한 형상이 나온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가설 중 우주가 양자 거품(quantum foam)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은 허유진의 작품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널리 회자되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양자 거품이란 무정형의 빈 공간으로서, 원자보다 훨씬 작은 물질의 거품이 1조의 1조의 1조분의 1초보다 더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한다'(다음백과, 양자거품 항목). 양자 거품에 의해 생겨나는 막(membrane)은 빅뱅에 의해 탄생한 우주에 직관적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

 

허유진_Fantasia 05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2

실제로 우주를 보는 망원경에서 찍은 허블의 거품 성운(NGC 7635)의 이미지는 유명하다. 이 성운만 해도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찍었지만, 얼마 전부터 그보다 100배 더 세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새로운 심우주 영상을 송출하고 있다. 예술과 과학은 자연의 책을 각자의 방식으로 읽는다. 시오반 로버츠는 『무한 공간의 왕』에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정한 '우주라는 완전한 책(grand book)'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이 완전한 책, 즉 우주에 쓰여 있으며 우리가 계속하여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글자는 삼각형, 원, 기타 기하학 도형이다. 이러한 글자가 없다면 어두운 미로를 헤매게 된다' 자연의 책을 읽으려는 시도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도전이었고 그것은 뉴턴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글릭은 뉴턴의 평전 『아이작 뉴턴』에서 자연이라는 책은 질서정연한 양식으로 설계되어 지식을 담는 용기였고, 실재를, 그리고 필경 자연까지도 기호로 부호화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허유진_Fantasia 06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27.9×37.2cm_2021

자연이라는 책. 즉 신이 그 책을 썼고 이제 우리가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책에 이미 진리가 쓰여 있다는 사고는 창조가 아닌 발견에 방점을 찍는다. 시오반 로버츠는 과학자들이 신봉했던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의 선구자로 플라톤의 예를 든다. '참인 모든 것은 언제나 참이었고 사람들은 그저 그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여 참인 사물들을 재구성해낼 뿐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자연의 패턴에서 보이는 여러 흐름 속에서 '불규칙한 조화가 이루는 변화'를 추적하는 필립 볼의 주장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각각의 성장패턴은 독특하게 장식이 되더라도 주어진 성장 조건에서는 우리가 플라톤적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필연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사실을 다를 수 있지만 형식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전시된 작품 20여점의 규격은 4x3의 비율로 마치 창문같이 바라보는 시점이 전제된다.

 

허유진_Fresh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발견할 수 있어야 창조도 할 수 있고 창조적인 사람이 발견도 할 수 있지만, 창조/발견의 입장은 엄연히 다르다. 우주는 내 머리 위에 일단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말이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강한 기대치가 있다. 허유진이 일상 속에서 재발견한 우주는 실재에 대한 직관을 상상적으로 보여준다. 일상에서 우주를 발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앞서 인용된 바와 같은 '자연의 책'을 음미하게 한다. 이 우주는 연결되는 시리즈 작업을 통해 환상부터 멜랑콜리에 이르는 인간적 감정을 표현한다. 통상적인 비눗물과 다른 점은 자동차 유리창을 닦은 물의 순간 이미지라서 빛을 투과했다는 점이며, 육안과 다른 시점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의 힘이다. 허유진의 작품은 가장 사진적인 사진 중의 하나다. 작가는 색감이나 밝기 외에 크게 수정한 것이 없다. 과학자가 찍은 실제의 천체 사진도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해 그러한 보정을 하지만, 둘 다 형태 그 자체는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유진_Secret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0.9×81.3cm_2021

작가는 창조자보다는 발견자의 입장을 택한다. 나머지 5개의 시리즈도 감성 충만한 제목을 가졌지만, 천체 사진 같은 느낌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약간씩 방점이 다르다. 작가는 이 여섯 개의 시리즈가 모두 시간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시간에 대한 작가의 감각은 무엇을 찍든 모든 사진들이 '찰칵 하는 순간부터 과거'라는 깨달음에서 온다. '하루는 1,440분이고 일 년은 525,600분이다. 매 순간 지나간 시간들 그리고 흘러간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흘러내리는 거품도 반짝이는 별처럼 그 순간에 아름다웠다가 사라져 과거가 된다.' 「Blossom」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에 비해 색이 더 화려하다. 활짝 핀 꽃이나 그 꽃들이 질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 다른 작품에서 별처럼 보이는 입자는 이 시리즈에서 꽃잎처럼 보인다. 비눗 구정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뽑혀 나오는 것은 화학용품이 틀림없을 액체의 색감 자체가 화려해서 그렇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 1점만 발표되는 「Fresh」 시리즈는 하나의 색으로만 이루어졌다.

 

허유진_chaconne 01_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8.2×51cm_2021

디즈니가 1940년에 만든 애니메이션 판타지아가 떠오르는 제목을 가진 「Fantasia」 시리즈는 입자들이 운율감 있게 배열되어 있다. 음악을 추상화로 표현하면 이런 모습이 될 듯하다. 영화 『판타지아』가 음악과 이미지의 환상적인 조합이었듯이, 추상미술의 탄생에는 이미지와 음악과의 활발한 교감이 있었다. 비밀을 감춘 듯 베일에 감싸인 풍경이 있는 「Secret」 시리즈는 자연에 대한 발견자, 탐사자의 관점이 있다. 자연이라는 책에 쓰여있는 기호들은 그 자체로는 신비하다. 그것은 보는 이가 거듭해서 해독해야 하는 미지의 기호들이다. 허유진의 작품이 모호한 것은 광학적 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자동차 유리창 뒤로 배경이 깔려있지만, 선택과 집중에 의해 약화되었고, 작품은 평범한 풍경을 우주화 했다는 '비밀'을 간직하게 됐다. 푸른 색감 때문에 어둡고 깊은 느낌을 주는 「chaconne」 시리즈는 「Fantasia」 같은 운율을 유지하면서, 희열부터 우울까지 여러 감정을 이끌어낸다. ■ 이선영

 

Vol.20220919d | 허유진展 / HUHYOOJIN / 許有辰 / photography

The Turn of Life

 

최미향展 / CHOIMIHYANG / 催美香 / photography 

2021_0910 ▶ 2021_0916 / 일요일 휴관

 

최미향_#마른 슬픔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100×66.6cm_20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서진아트스페이스

SEOJIN ARTSPACE

서울 중구 동호로27길 30

Tel. +82.(0)2.2273.9301

www.seojinartspace.com

 

서진아트스페이스에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신작작가 창작지원 공모'에 당선되어 이번 전시를 열게 되었다. 최미향 작가는 현재 홍익대학원 사진디자인학과에 재학중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50대의 여성이면 누구나 한번쯤 겪고 지나가는 갱년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은유적이며절제되고 압축된 상징어법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지나간 일에 대한 추체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아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용을 풀어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크게 느끼게 되는 시기가 있다. 호르몬에 의한 신체의 급격한 변화는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엔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춘기가 제2의 성을 찾아가는 시기라 한다면 갱년기는 그런 성을 상실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허나, 사춘기와는 반대로 제2의 성을 잃은 시기로 받아들이기에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적인 역할과 맞물려 더욱 그러해 진다. 갱년기가 병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변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우울, 의욕상실, 불안, 강박, 분노, 소외, 허무 등 추상적인 감정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담담하게 표현해 보려 한다." (최미향)  서진아트스페이스

 

최미향_#복종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최미향_#찰나의 연속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어느 날 다가온 육체의 감옥을 직시하며 ● 가장 이상적인 예술은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예술이 내적인, 외적인 삶의 기록이라면 사는 것과 기록하는 것이 자명하게 일치되지는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수 천 년을 지내온 그동안의 인류 문명이 무색하게 기록하는 하는 삶이 일상화된 SNS시대다. 최미향의 사진 작품들은 그러한 두 갈래 길에서의 긴장을 표현한다. 자신의 삶이 담긴 작품들은 지나간 일에 대한 추체험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아닌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절제되고 압축된 상징어법을 구사하며 작업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역사 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은 『개인의 발견』에서 개인의 어원에 내재된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은 어원상 'in-dividuum', 즉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개체를 뜻한다. 그러한 개인은 '집단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개체'를 말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가족과 동일시되었기에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작품 속 여성들이 사회가 바라보는 여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 사이의 간극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극화되는 이유이다.

 

최미향_#오늘은 또 어떤 일이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최미향_#변해가네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여성에게 50세 전후는 인생 2막이 펼쳐지는 생애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심리 생리학적으로는 갱년기와 겹친다.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고통인 이유는 호르몬상의 문제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도 존재한다. 이번 전시는 전체적으로 진중한 분위기다.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비장미가 흐른다.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하는 절제된 선택들로 채워져 있다. 회색이나 검정 같은 무채색은 어둡고 묵직하며 초록이나 보라 같은 유채색 또한 수동적이며 우울한 느낌을 준다. 색감에서의 전체적인 세련됨은 느낌의 이면에 불과하다. 몸의 대표적인 부분인 얼굴 없이 무엇인가 설득력 있게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2대 3 비율의 프레임을 택함으로써 초상화의 기본 틀을 활용했다. 관객이 마주하는 화면에는 그 무엇이 있더라도 초상의 느낌을 주는 암묵적인 시각의 관습이 있다. 그것은 얼굴 없는 초상화도 가능함을 알려준다.

 

최미향_#그리고, 다시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120×80cm_2020

작품 속 동년배의 여자들은 작가와 다를 바 없는 동병상련을 겪고있는 이들이다. 그녀들은 특정 세대와 성별이 각인된 전형성을 가진다. 대부분 얼굴은 익명적으로 처리되었고 한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보편적 코드를 잡아내고자 했다. 작품들은 관객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고 있지만, 작가의 치열한 자기 응시의 장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사는 일상 공간을 심리극의 무대로 삼는다. 작품은 독백보다는 대화적 상상력의 결과다. 각각 독립된 장면이라도 전시 전체가 같은 주제를 반향 하고 있기에 상호적으로 참조되어 읽혀진다. 사진이라는 무언극에서 사물의 역할은 크다. 얼굴 자리에 빈 거울을 놓은 충격적인 작품은 실재가 아닌 상상을 투사하는 거울을 비워 놓는다. 보여 지는 여자가 아니라 보는 여자로의 변신이 일어나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상상의 무대는 치워져야 했다. 작품 속의 거울이라는 장치는 거울의 메타적 차원을 예시한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의 보조자라고 말한다. 이는 모방의 수동적 거울이 아니라 변형의 능동적 거울을 강조하는 것이다. 거울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이상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거짓말쟁이이며 동시에 훌륭한 조언자인 이 반사상의 이중성을 마주해야만'(사빈 멜쉬오르 보네) 한다. 새로운 단계를 위해 벗겨져야 할 상상의 단계로서의 거울은 내면 성찰의 자리가 된다. 최미향의 작품은 사진이라는 거울로 인간-여성-자신을 상징적 해부대에 올려놓는다. 이 육체적 심리적 해부대는 잔잔하면서도 파장이 큰 서사가 짜여지는 무대가 된다. ■ 이선영

 

최미향_#나를 찾아줘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0
최미향_#거울 속 나는 누구일까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1

사람들은 누구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크게 느끼게 되는 시기가 있다. 호르몬에 의한 신체의 급격한 변화는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엔 몸과 마음의 불일치로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사춘기가 제2의 성을 찾아가는 시기라 한다면 갱년기는 그런 성을 상실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허나, 사춘기와는 반대로 제2의 성을 잃은 시기로 받아들이기에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적인 역할과 맞물려 더욱 그러 해진다. 갱년기가 병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변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우울, 의욕상실, 불안, 강박, 분노, 소외, 허무 등 추상적인 감정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담담하게 표현해 보려 했다.

 

최미향_#왕관을 쓴 여인_새틴 바라타 용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70×50cm_2021

60년대 생인 나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였다.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찍 결혼함으로써 한 가정의 아내, 엄마, 며느리로 저마다 사회적 역할 안에서 살아간다. 나 또한 나보다는 상대방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택했다. 최선을 다한 삶 속에 보람도 있었지만 때론, 그 누구의 연결된 존재가 아닌 본래의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역할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복합적인 감정들이 생기게 된다. 늘 그렇듯 어제와 같은 변함없는 일상, 뭔가 조여 오는 불안감, 어느 순간 불룩 나온 배, 자식들의 빈자리를 반려견이 대신하고,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함을 느끼곤 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여성성 상실로 인한 왜소해진 자아를 표현하고자 했다. 많은 생각들 속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바람이 있다면 역할 속에서 규정되기 이전의 하나의 주체로서의 나를 찾고 싶은 것이다. 존재감을 찾고자 하는 맘은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변화의 시기에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밟는 절차로 받아들이는 게 옳을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있는 50대의 나와 나의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낯선 사람처럼 드러내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객관화시켰고, 주체이지만 마치 다른 사람인양 낯설게 함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시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 감정들에 함몰되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잘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갱년기는 커다란 변화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므로써 나 자신이 소중한 존재란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잘 가꾸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아울러 인생 경험을 통한 통찰력과 노년의 여유가 젊을 때의 아름다움보다 가치가 있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 최미향

 

 

Vol.20210910b | 최미향展 / CHOIMIHYANG / 催美香 / photography

기뻐하라 Be glad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 

2021_0501 ▶ 2021_0514

 

김명진_기뻐하라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72.5×60.5cm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0906c | 김명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5월14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cafe.daum.net/gallerydam

 

작가의 글  축제 ●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뻗는다. / 손과 손 사이에 연한 바람이 맴돈다. / 나와 이웃과 침묵의 잔해. / 명멸하는 빛. / 흙으로 빚은 듯한 종이 인형. / 얼굴의 알 수 없는 빛과 얼룩의 향연. / 저마다 빛나는 얼굴들. / 얼굴은 자신이 빛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 당신의 눈동자처럼, 오소서! / 인형은 소녀의 고백에서 태어났다. / 그네 뛰는 소녀와 그 아래의 어깨, 광대의 줄타기, 뿔난이들, 광야에서의 경주, / 하얀코끼리, 곡예사, 가면쓴 이, 세례식, 나무를 옮기는 사람, 빛을 캐는 사람, 고독한 왕, / 광인의 행렬...........현실의 안쪽과 바깥에서의 줄타기. / 선택 받은이, 이방인, 여행자도 좋다. / 축제다. / 형제여, 주술이든, 충동이든, 여름 밤의 꿈이면 어떤가. / 두려움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 그래, 축제다. (2020. 8월) ■ 김명진

 

김명진_고해_캔버스에 한지, 재, 안료, 콜라주_53×45cm_2020
김명진_마더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재, 콜라주_130×97cm_2020~21
김명진_나를 위하여_캔버스에 한지콜라주, 먹, 안료_100×80cm_2021

어둠 속에 명멸하는 타자들의 행렬 ● 김명진의 [축제] 전은 어느 구멍으로 새어 들어온 지 알 수 없는 빛이 활주하는 암흑 상자 안 존재들은 '창 없는 방인 모나드'(라이프니츠)같은 어두운 화면에서 서로를 비추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명석 판명한 이성을 지향하는 대낮의 철학에 대해, 밤하늘의 별같이 다양하게 빛나는 세계를 지향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빛남의 조건인 어둠은 불가피하게 무거움 또한 내포한다. 김명진의 작품은 하나의 규칙으로 총괄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등장인물이 여러 화면에 등장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김명진의 최근 작품들은 죽어야 사는 희생양의 기제를 깔고 있다. 잔혹성이 포함된 즐거운 유희이다. 살과 피의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검은 화면, 그리고 드물게 나타나는 주묵의 붉은 빛은 카니발에 가까운 축제를 말한다. 먹과 한지 꼴라주 등으로 만들어진 모노톤의 작품들은 어둡고 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 바닥이 없기에 가라앉을 수도 없다. ● 그렇지만 중력감은 존재하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가는 줄 위이나 그네 등에 매달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광대의 뾰족 모자와 들어 올린 발치를 관통하는 긴장감이 검은 화면을 횡단하는 선들을 통해 전해져 온다. 오래전부터 실험해온 한지 꼴라주 작업에서 가늘게 오려낸 얼룩진 선들은 최근 작품에서 내용을 담은 형식이 되었다. 어둠속 빛을 연상시키는 선은 순수한 광선은 아니지만, 추락과 익사, 또는 그 직전에서 고통 받는 존재들을 들어올린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들은 급격한 존재의 변환을 겪는다. 피에로 복장이나 가면을 쓴 인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가장(假裝)은 동일자 안의 타자를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정체성과 만난다. 타자로서의 예술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자이기 보다는, 미지의 힘을 통과시키는 매개자다. 우주적 밤을 떠올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존재들은 축제의 행렬을 이룬다.

 

김명진_숲으로 가자_종이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48×38.5cm_2021
김명진_아무것도 아닙니다_캔버스에 한지, 먹, 안료, 콜라주_53×45cm_2021
김명진_인형극장_판넬에 대, 장지, 먹, 안료, 한지, 콜라주_77×131cm_2019
김명진_어지러워_캔버스에 한지콜라주, 먹, 안료_194×130cm_2020~21

 

심연으로부터 들어 올려지긴 했지만 그들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줄은 가느다란 버팀대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속박, 운명, 조종 등 부정적인 상징 또한 선명하다. 수없이 추락해 본 노련한 광대만이 그가 타고 움직이는 칼날 같은 좁은 입지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곡예사들은 줄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위에서만 비상할 수 있다. 서사는 축제처럼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막막한 바깥에서 펼쳐진다. 조각들이 덧붙여지고 때로는 긁어내며, 재도 포함되는 김명진의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이 섞이는 장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축제를 호출한 것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 관련된다. 원근법을 비롯한 재현의 장치로부터 벗어난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축제는 작품의 한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학과 닿아있다. 김명진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광은 아니다. 굳이 자연광과 비교하자면 햇빛이 아니라 달빛에 더 가깝다. ● 그들은 저 너머에서 오는 빛을 반사한다. 얼룩덜룩한 신체는 빛을 받는 존재의 이질성을 나타낸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김명진의 작품은 경계 위반을 일삼는다. 한지 꼴라주라는 그의 형식은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넘나든다. 휴지통 안에 모아놓은 한지들은 오려지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면서 화면에서 뒤섞인다. 한지의 물성을 재발견 하는 중인 최근 작업은 점차 두꺼워지고 있다. 재를 활용하여 울퉁불퉁한 화면을 만들기도 한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과 파편이 겹쳐지고 재로 뒤덮인 묵시록적 세계, 이러한 복합적 바탕에서 마술의 상자처럼 무엇이 솟아난들 놀라울 것이 없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 실험이라기보다는 때로 신비함으로도 이어지는 존재의 불투명성과 닿아있다. 종교인에게 기도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듯이, 작업 또한 그러하다. 축제라는 판을 가정한 행렬은 묵상 중에 명멸하는 무명의 존재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환상적 무대를 연출하게 한다. ● 종교적 묵상과 예술적 상상은 자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 그리고 사회적 맥락까지 확장된다. 먹에는 수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먹을 포함한 복합적 재료가 사용되는 그의 화면에서는 형태 또한 찾아진다. 작업은 잠재적 형태가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축제와 서커스를 표현한 작품은 이 전시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어둡고 희박한 공기 속에서 유희하고 고뇌하는 존재는 종교적 주체를 떠올리지만, 그는 자연에서도 자신을 지탱할만한 힘을 느낀다. 꽃이 피고 지는 뒷산에서도, 열매가 열리는 텃밭에서도, 살아가는 기술이 이미 입력된 채 태어나는 생명체들에서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섬에 대한 기억에서도 종교에서 받았던 위안을 느낀다. 자연에도 종교의 두 특성인 율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타자라는 같은 처지의 예술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자연을 관통하는 세계의 신비와 접촉하는 또 다른 축제다. ■ 이선영

 

 

Vol.20210502a |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

RE-connect

 

김자혜展 / KIMJAHAE / 金慈惠 / painting 

2021_0407 ▶ 2021_0413

 

 

김자혜_doubt as a layer_캔버스에 유채_116.8×80.3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326e | 김자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단절되며 연결되는 시공간 ● 김자혜의 작품에는 해변처럼 시야가 탁 트인 장소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서있는 야자수 바로 옆에는 노을지는 붉은 하늘이 배치되어 있곤 한다. 풍경은 장소의 가치를 알리는 중요한 지표이다. 대개 그런 풍경이 가능한 곳의 실내 또한 넉넉하다. 실내여도 넓고 환하고 깨끗하다. 인적은 없고 주변의 빛과 그림자만 살랑거린다. 푸른 하늘과 물을 반사하는 평면들이 상호 상승효과를 발휘한다. 천정까지 이어진 통가림막은 보이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절경을 약속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의자(그리고 책상이나 조명)은 외적 풍경이 내적 심상과 연동됨을 알려준다. 다양한 계열의 푸르름으로 가득한 화면은 복닥거리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이나 바닥부터 휴양지같은 풍경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은 도시적 시점에서 본 자연이다. 자연은 대개 구조와 구조 사이에서 부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도시 풍경 자체가 추상에 기반하며, 순수한 추상적 요소 또한 존재한다. ● 그럴듯한 풍경이지만 여기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은 없다. 바닥을 발로 디딜 수 없는 반영상으로 채운 작품들은 그 점을 더욱 강조한다. 바닷가로 통하는 창문이 있는 작품에서 이편의 바닥 또한 풀장의 물 같은 느낌이다. 바닥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얕은 수면이 잔물결을 일으킨다. 식물 같은 자연물 또한 재현에 충실한 부분은 조금이며, 대부분 하얀 벽이나 푸른 물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처리되어 있다. 연못이나 분수대 등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 등은 자연의 현존을 암시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자못 견실한 건축적 구조나 실재의 대표라고 할 만한 자연 모두 불확실하게 다가온다. 김자혜의 풍경에는 도약과 비약의 지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원래 그림은 실제로 완보할 수 없는 가상의 장이지만,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그러한 속성을 가속화시킨다.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계단은 문, 창문, 거울, 그림 등과 더불어 잠재적 이동을 약속할 따름이다.

 

김자혜_two chairs on the line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20

 

 

공간이 또한 시간이라면 이 작품에는 하루의 여러 시간대가 공존한다. 여러 시공간들은 잘린 직선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연결하기 위해 자른다. 그림의 틀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사선을 지지해주며, 부드러운 천 소재의 커튼이 기하학을 완화시켜 준다. 다른 장소들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반영상들이 교묘하게 짜깁기된 작품은 언뜻 단일한 푸른 풍경처럼 보이지만, 직선 또는 사선으로 세워지거나 바닥에 깔린 거울들이 각을 맞춰있다. 휴양지의, 또는 그에 준하는 풍광들이 섞여 있는 작품들은 이국적이긴 하지만, 탐험가만 도전 가능한 오지의 자연은 아니다. 그곳들은 쫙 깔린 육해공 교통 인프라를 통해 매끄럽게 도착할 수 장소들로 보인다. 풍경은 여러 근심을 자아낼 인간사가 깔끔하게 정리된 시공간들로 뚫려있다. 여기에는 불연속을 통한 연결이라는 역설 어법이 있다. 부조리한 관계로 맞붙은 경계들로 이루어진 광경에서, 거기로 갈 수 있는 시각적 징검다리는 부재하다. ● 문, 창문, 거울, 그림, 얇은 수면 같은 반사면들은 공간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것들은 단지 풍경의 시각적 요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gate)'과 같이 작동한다. 작가에게 그림은 그자체가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문의 역할을 한다. 여기에 좌우로 접히고 상하로 늘려지고 급작스럽게 끼어드는 평면들이 가세한다. '순수' 회화에서 금기시된 패턴이나 장식도 배제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금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뛰어넘고자 하는 여러 경계에는 회화와 디자인/공예도 포함된다. 이미 그러한 경계는 사라졌는데, 그것이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이전 시대에 그어진 경계에 안주하고 있는 기득권의 입장일 따름이다. 모더니즘에서 (단순한)장식과 (심오한)조형성을 구별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경계는 미학적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선명하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공간이 혼재하는 상황은 마치 압축파일과도 비교될 수 있다. 김자혜의 작품은 가상현실 또한 비중이 높아지는 현대에 그러한 또 다른 현실에도 적용될만한 시공간적 상황을 보여준다.

 

김자혜_sign beyond the line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20

 

 

요컨대 유화로 그린 그림 안에는 순간적인 시공간 이동이 편재하는 인터페이스같은 국면이 존재한다. 공간은 시간과 연동되므로 복잡한 공간은 여러 시간대를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층(Layer)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층은 순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지질학적 시간대와 달리 이 층들은 매우 얇다. 하지만 차이를 각인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 안에서 운동은 효과로서 산출된다고 본다. 차이들로 가득한 강렬한 세계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층과 층 사이는 여백처럼 보일만큼 크기도 하고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맞닿아있기도 하지만, 그 불연속 지대가 변화의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 따스한 색감의 사물이 군데군데 배치된 작품은 물을 비롯한 여러 반영 상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공간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는 조형 요소들은 시각적인 산책이 가능하다. 그러나 면과 면 사이에 내재한 간극은 합리적인 공간과는 거리가 있다. 간극과 균열은 보다 커져 여백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명암법이 적용된 하얀 커튼이 제쳐지고 풍경이 보이지만, 그 안쪽을 실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공간성을 보여준다. 대지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 공중에 붕 뜬 듯한 공간들의 조합이다. 순수 여백의 공간도 보인다. 실제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기저 면은 좁거나 부재하다. 노랑, 빨강, 파랑 등 발랄한 팝적인 분위기의 여러 실내의 장면들이 모인 작품은 바닥이 없다. 많은 작품에서 바닥은 반영 상으로 이루어졌다.

 

김자혜_boundary stair; for potential movement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20

 

 

그것은 공중에 붕 떠 살고 있는 현대를 반영한다. 초고층 빌딩의 거주자들은 자신의 바닥이 누군가의 천정이다. 토지 소유권은 1/n로 설정된다. 서로 다른 층들로 이루어진 다차원 공간 속에서 '평면으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시간은 멈추게' 된다. 건물이나 물건으로 대변되는 인공물이 이 직선적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자연물은 변화하고 있다. 작품 속 식물, 물, 구름은 그자체가 유동적이며, 반영 상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자연은 이제 그 자체의 본질을 가지기보다는 막에 싸인 듯이 거듭되는 해석을 통해서만 자신의 몸체를 드러낼 것이다. 또는 작품에 간혹 등장하는 계단처럼 인식의 층을 통과해야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통상적으로 보기 좋은 풍경은 입구와 출구가 있고 그 사이에 시각적 산책이 가능한 통로들이 있다. 반면 김자혜의 '풍경'은 끝없이 열리는 창 같으면서도 막다른 길목 또한 산재한다. 고즈넉하고 넉넉한 풍경에 초대하지만, 관객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방법을 모른다. 복잡한 공간을 미로 삼아 추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든지 도약과 비약을 요구받는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에서 인간 운명에 관한 하나의 의미, 즉 세상의 질서를 추상화시킨 것이 미로라면, 현대인은 미로를 헤매는 가상 유목민, 즉 이미지와 환영을 좇는 여행자로 바뀌고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미로는 불투명한 장소이며 그 길을 설계하는데 어떤 법칙도 없다. 오늘날 미로란 불안정하면서 위험스러운 통과지점이며 두 개의 세계 사이에 터져 있는 틈바구니와 같은 것이다.

 

김자혜_the point on the diagonal line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20

 

 

미로는 보편적이다. 『미로』에 의하면 신화에서 소설까지, 동화에서 비디오 게임까지, 가장 신비로운 서사시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학과 오락은 절대의 추구로, 또는 미로와 같은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고 쫒고 쫒기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근대에 미로는 잊혀졌다. 직선과 투명함, 단순함을 옹호하는 근대 문명은 미로를 쫒아냈다는 것이다. 경제란 빨리 가고 똑바로 걷고 시간을 벌고 시야를 넓히고 미래에 대해 예측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합리성의 정점에서 불합리 또한 번성한다. 그에 대한 자의식이 근대 이후에 대한 비전이다. 곧고 투명한 것이 수시로 나오지만 결국 그것을 배반하는 김자혜의 작품은 미로적이다.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작품 속 시공간은 미로처럼 불투명하지만 그것이 유연한 공간임은 틀림없다.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는 것은 신화시대에 천지창조 행위 같은 초월과 자유로움을 줄 것이다. 한계 지어진 지금 여기에 앉아서 무한을 꿈꾸는 것이다.

 

김자혜_lights cross the place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21

 

 

김자혜의 작품은 거의 실험실적인 깔끔함이 특징이지만, 현실은 편재한다. 관료주의와 상업주의를 모두 관통하는 익명적 체계 자체가 중성적이다.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이 익명적 체계의 작동방식을 가속화시켜 눈에 띄게 만들 따름이다. 예술작품 특유의 낯설게 하기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더 흥미롭고 불가사의하게' 만든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도시 문명 또한 황야처럼 열린 집합이다. 그는 바다만이 이 마력에 비견될만하다고 본다. 또한 구름 역시 애초부터 분리 불가능한 것의 모델이다. 카오스는 열린 공간이다.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카오스의 공간은 대개 직선이 사라지는 공간이다. 김자혜의 작품처럼 준거 없는 어떤 공간에 그려진 선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술이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의 구성이라고 본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결합이 중요하다.

 

김자혜_between vertical line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20

 

 

예술은 조이스의 말대로 하나의 카오스적 우주론(chao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카오스와 투쟁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오스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카오스의 여러 경계턱들을 통과하게 된다. 예술은 카오스의 한 조각을 틀 안에 고정시켜 감지 가능해진 구성된 카오스를 형성하거나 그로부터 다양성으로 재편된 카오스적 감각을 끌어낸다. 끝없이 열리는 창같은 화면은 예측 불가능한 단편들로 조합된다. 미셀 세르는 이러한 공간에서 카오스의 비유를 본다. 그는 하나의 통일된 공간이 아니라 한없이 다시 나타나는 어떤 평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몸은 어떤 유일한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공간들 전체의 힘겨운 교차의 지점이다. 이 교차지점, 이 연결지점은 언제나 구성해야 할 어떤 것이다. 김자혜의 작품은 과학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만, 사회적 요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김자혜_between the curtains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서사가 부재한 듯하지만, 켜켜이 중첩된 시공간이 진공은 아니다. 작가가 주로 다루는 공간, 즉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는 공간은 물신주의의 정점에 오른 값비싼 재화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의 물질적 진보를 낳은 생산력의 혁명은 대량소비를 필요로 하고, 이 조건은 다시 생산 관계에 피드백 된다. 대부분 각자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던 전통사회는 기회를 찾아 끝없이 이동하는 사회로 변했다. 도시화와 세계화는 비슷한 과정의 다른 차원이다. 소비 밀집 지역에 생활 인프라가 깔리다 보니 지방보다는 수도(권)이 개인주택보다 아파트같은 공동주택이, 소규모보다는 대단지가 더 선호되는 흐름을 낳았다. 수도권에 인구의 반 이상이 밀집돼있는 상황은 인구 대비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인 듯하다. 분단으로 반이 뚝 잘려 있는데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국의 정치적 물리적 조건, 그리고 불과 몇 십 년 동안 압축적 근대화가 진행된 경제적 조건까지 더해져 공간은 사회적 관심과 갈등의 중심이 됐다.

 

김자혜_The new layer in the lair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20

 

 

과도하게 모여 살아야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공간은 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집을 포함한 공간의 부족은 후세에 유전자를 전달하려는 자연의 추세마저도 무력화 시켰다. 다수의 사회인이 참여하는 경쟁의 꼭대기에 바로 공간이 있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현대주의적 지배는 수평적으로는 기하학적 도로계획이, 수직적으로는 국제양식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낸 격자화된 도시의 이미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격자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비판하듯이 그러한 근대적 공간은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근대주의는 형태가 기능뿐 아니라 이윤을 따른다는 법칙을 강요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탈근대의 조건으로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시공간 압축의 강도를 지적한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이 과정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비워지고 더욱 추상적으로 되며 사물과 사람은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탈피되게 된다고 본다.

 

김자혜_where the shdows shine_캔버스에 유채_116.8×80.3.cm_2021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가속화는 주체와 객체 모두의 비워짐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공간이기 보다는 공유공간, 머무르기 보다는 지나가는 공간, 어디에 가도 비슷한 공간이 현대를 특징짓는다. 데이비드 하비는 공간을 통제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분쇄와 분절화를 통한 것이라면 그러한 분절화의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주장하듯이 공간이 항상 사회적 권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공간의 재조직은 언제나 사회적 권력이 표현되는 틀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사회적 결정이라는 뿌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적 이미지'(푸코)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재현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현대의 예술가가 공유할만한 목표이다. 공간은 무엇인가 담는 물리적인 그릇을 넘어 물신적 체계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는 추상화되어야 한다. 비워진 공간은 한없이 가벼워져서 예술적 유희의 대상이 된다. 현실 속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예술의 해방적 기능이 있는 김자혜의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는 유토피아 속의 이질적 장소, 즉 헤테로토피아에 해당된다. ■ 이선영

 

 

Vol.20210407b | 김자혜展 / KIMJAHAE / 金慈惠 / painting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드로잉 오디세이-펜슬리즘展

2020_0701 ▶︎ 2020_07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 김범중_문기전_박미현_표영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제1전시관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펜슬리즘-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 갤러리 밈이 기획하고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展은 각 작가의 드로잉을 오디세이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작가 별로 다른 역에 도착한 것 같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던 길 멈추고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밀도감이 공통적이다. 인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선의 여행과 함께하는 동반자는 연필 한 자루다. 유목민의 지혜가 알려주듯, 떠나는 자의 짐 꾸러미는 가벼워야 한다. 삶의 편리를 보장해 준다고 믿어지는 점점 늘어나는 짐 꾸러미 때문에 떠나기 힘든 시대는 여행을 원점으로 회귀할 따름인 아늑하고 안전한 소비 품목으로 변화시켰다. 예술은 제자리에서도 가능한 여행이다. 가상현실 기술도 그와 유사한 체험의 제공을 약속하지만, 게임 참여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아닌 손의 감각'(들뢰즈)을 되살리기 위해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플라스틱 펜도 있지만, 그 둔탁한 감도는 펜슬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 선과 함께 떠나는 또 다른 시공의 여행에는 다양한 서사가 깔려 있다. 자크 아탈리의 미로나 유목에 대한 단상에 나오듯, 미로를 유목하는 사람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온다. 이 전시에서 서사의 범위는 소소한 일상의 단상부터 장대한 우주적 풍경에 이른다. 그들의 주재료인 펜슬은 'The Pencilism'이라는 낯선 용어로 묶여졌는데, 그것은 소박한 필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 매체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한다. 연필 한 자루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선은 마치 인생처럼 나아간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여기까지 어찌 왔나 싶을 예술가의 길이 쭉 뻗은 고속도로는 아니다.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이 있는가 하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선도 있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에 시간 낭비인 방황은 금기시 된다. 하지만 목적지가 각기 다른 이들에게 시점과 종점 간의 최단 거리는 허구적이다. 모두를 위한 속도는 정체를 낳는다.

 

김범중_Oscillo 외_장지에 펜슬_100×20cm×5_2019

 

모두가 다 같이 바라는,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은 속도를 위한 속도에 치이는 삶을 낳았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은 이제 타자에 대한 경계를 극도로 강화해야 하는 진정한 재난과 마주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매우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이제 미술은 대규모 관중을 모으는 시각적 흥행물이 아니라, 찬찬히 자기 길을 걸어왔던 작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작품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전시에서 선의 여행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주름의 배치, 그리고 그 안팎에 퍼진 입자들의 분포는 현대의 전형적인 시각 이미지와 다르다. 현대의 스펙터클은 타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자본과 노동의 산물로서의 스펙터클은 이윤과 연관된 관심끌기가 중요하다. 점점 무뎌가는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강도도 커진다. 주의 깊지 않은 시선으로도 단번에 파악되는 얄팍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 전시의 작가들은 밀도로 승부한다. ● 그 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종이와 펜슬은 현대적 가치를 반성하는 근본적 과제수행에 적합해 보인다. 펜슬 드로잉만으로 꾸려진 이 전시는 기본과 실험을 연결시킨다. 연필 또는 샤프펜슬은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이 있는, 즉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손에 잡아봤던 것이다.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생산수단의 감축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오랜 연마에 의해서 손의 연장처럼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필력은 감춰진 에너지나 무의식의 발현(김범중, 표영실)부터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모델(문기전, 박미현)까지 이른다. 각 작품들은 아득한 시공에서 발생한 파동의 리드미컬한 반향(김범중)부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형식(박미현)까지, 경계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의 게임(표영실) 부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적 도해(문기전)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 나무와 식물성 잔해로 이루어진 연필은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를 부른다. 나무라는 원재료가 그렇듯이 가지처럼 끝없이 갈라지는 길에서의 선택이다. 그 선택들의 쌓임은 매체와 형식에도 내재한다. 내용과 형식이 보다 긴밀해질수록 작은 변화의 파장도 크다. 드로잉, 특히 펜슬 드로잉은 모국어 같은 위상을 가진다. 모국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지를 많이 사용하고, 필기구가 모노톤이다 보니 동양화 같은 분위기도 있다는 점 외에는 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펜슬 드로잉은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상용어나 산문을 넘어서 꿈도 시도 가능하게 하는 몸/무의식과 일체화된다. 그것은 모국어의 습득처럼 타자의 소리로부터 와서 스며들 듯이 체화된 것이다. 연필은 아이가 사회 속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처음 손에 쥐었던 도구였다. 삐뚤빼뚤 글쓰기와 그리기는 잊혀져 있지만 문명권의 구성원들에게는 공통된 체험이다.

 

박미현_04_보드지에 펜슬_40×50cm_2014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질로 대체된 잊혀진 감각이다.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에서 대상의 윤곽선과 그림자(음영)를 위해 죽죽 긋는 무심한 사선의 감각으로, 완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밑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도 뭔가 자신과 관련된 소중한 것을 쓰기 위해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작가에게 펜슬은 이제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고양된다. 무엇인가 쓰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차 쓰기 그 자체를 위해 쓰게 되고, 결국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쓸 수 있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누보로망의 작가들의 주장처럼,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알기 위해 쓰게 된다. 의미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야 온다. 심지어는 대상도 그렇다. 펜슬로 그리기는 잠재적인 쓰기이다. 쓰기/그리기는 모두가 다소간은 맹목적인 시작, 그리고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유에서 무의 창조라기보다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에서 계산과 전략은 결정적이지 않다. ● 작업, 특히 드로잉은 머리 뿐 아니라 몸과 손을 통과해야 하는 원초적이고도 치열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로잉은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성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듯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것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에 마지막이, 마지막에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한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의 유희는 무한하다. 거듭해서 떠남은 예술의 조건이다. 완성된 작품이 하나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다. 선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또한 포함하는, 샛길과 우회로 가득한 미로 속에서 나아감은 역행이나 회귀이다. 우주같이 막막한 시공간에도 웜홀이나 블랙홀, 화이트홀 같이 도약과 비약, 가속과 감속을 허용하는 특별한 길이 있다.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모두에게 강제함으로서 권력의 효과를 생산하는 하나의 길에 대한 탈주로를 만든다. 자기 방식대로 가기와 탈주(누군가에게는 탈선)를 연결시킴으로서 다른 길도 있음을 제시한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예술가를 포함한 모두에게 강요되는 폐쇄회로를 빠져나가는 일이다. 효과적인 권력의 작동에서 하나의 지배적 언어를 강요하는 것은 필수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보편적인 문법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럽고 분란과 전쟁까지도 낳는 보편적 문법은 지배적 권력 지형도의 산물이다. 뻔한 것이 보편으로 행세하는 시대, 이해하기 힘든 세상보다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더 괴로울 정도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보편의 존재는 이질적인 지층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표상의 세계는 사회의 세력 관계에 의해 항상 위조되어 있다.

 

문기전_Quantum_판화지에 펜슬_100×100cm_2019

 

『기계적 무의식』은 한 어린이가 자신의 언어를 배울 때, 혹은 그 어린이가 자신의 말 행위를 결정하는 특정한 코드를 배울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이 끼어 들어간 사회구조의 요구들을 배운다'(베른슈타인)고 인용한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개인에게는 법칙에 대한 완전 복종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 식으로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꿈꾸는 것까지 따라오게 한다. 그러나 사랑처럼 언어도 독점을 요구한다. 몇 가지 언어를 통달해도 어느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수 십 년 전 떠난 고향이 그립다고 눈물 지으면서도 정작 한국어는 잊어버린 교포들을 종종 본다. 선제하는 상징의 산물인 주체는 자유롭지 않다. 『기계적 무의식』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는 근대의 이상인 자율과 자유의 인간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체계적인 격리차별, 전면화 된 수용소'(가타리) 등을 낳았다. ● 자유를 원하는 예술가는 그 누구라도 구조의 우연한 결정체에 불과한 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이질성(몸, 무의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이와 펜슬은 해부대와 칼을 연상시키는 분석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작업은 (재)발견의 장이기도 하며,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가 하면 우주적 질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를 비추고 공명한다. 종이와 펜슬은 그림에 한정되기 보다는 그림을 포함한 언어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던 시기의 매체로 주목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걸음마 훈련이 있다면, 손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이 지배적 구조로의 환원보다는 탈피와 변형을 강조하듯이, 현대 예술 또한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험적 장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언어의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 물론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의식화된 자연이며, 더 적절한 비유로는 언어이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모국어이다. 모국어가 우연찮게 세계 보편 언어가 된 국가의 국민은 근대를 선점한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했다. 종이와 연필은 한국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국어와의 비교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 언어의 통일성조차 항상 어떤 권력구성체와 분리할 수 없다'(펠릭스 가타리)고 본다.

 

표영실_경계의 사람들_종이에 펜슬_28×35cm_2020

 

면접을 보기 위해 사투리를 교정하거나 한국어에 대한 제 3세계에서의 학습 열기를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영어 학습 열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결국 힘의 논리는 무엇이 지배적인 언어인가에 대한 인정의 체계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재현된다. 보편성의 탈을 쓴 지배적 언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은 기술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애쓴다.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 권력은 끊임없이 세세하게 각 기표적 관계를 재검토 한다'고 하면서, 표상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어디엔가 우연히 태어나는 개인에게 시간과 자원의 가능성은 무한하지 않다. 선택과 집중에는 정치경제학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기계까지 더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연필보다는 전자기기에 먼저 친숙해지지만, 연필과 종이가 그때그때 업그레이드 시켜줘야 하는 기기/상품과 다른 점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과의 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필을 쥔 작가의 모습에는 경전을 필사하는 수도승처럼 절대적 타자와의 고독한 대화가 있을 뿐이다. ● 이 전시의 작가들이 선호하는 펜슬은 내향적인 매체이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주장하듯, 읽고 쓰기에 의해 자의식을 형성했던 내향적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읽고 쓰기보다 정보검색과 소통이 중시되는 시대에 내향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받는 외향성의 내용을 내향성이 만들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사 및 인쇄문화의 시대에 내향성은 논리정연한 지식인을 낳기도 했지만, 점차 희귀해지고 금기시 된다. 금기 위반의 충동을 강조했던 바타유라면 내밀성이라고 표현했을 이질적 지향은 누군가는 범죄로, 누군가는 예술로 부를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선명하다. 보다 지배적 언어는 고속도로 같은 비유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각자의 언어와 문법으로 말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작가에게는 최대한 이물감 없는 매체가 필수적이다. 자기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요구되는—체계는 쓸데없는 진입장벽을 높이 세우곤 한다--훈련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대학에 가기/다니기 위해 배운 것을 애써 잊어야만 하는 씁쓸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끼어드는 것(기구, 제도 등)이 많을수록 본질은 희미해진다. 현대의 관료주의는 본질을 잊고 형식을 본질화 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분업이 촉구하는 분과과학은 형식주의로 흐른다. 언어를 과학의 단계까지 정련했다는 현대철학의 한 사조는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당한 배제는 본질을 문제 삼는 예술을 유령화 한다. 그러나 유령은 편재한다. 체계를 지시할 뿐인 체계의 공허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인 어떤 소박하거나 야심찬 활동을 꿈꾸는데, 이때 예술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재발견될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와 펜슬은 여러 미술도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각 작품들은 펜슬이 본질의 탐구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객과의 거리도 단축시켜준다. 관객도 종이와 펜슬이 주는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범중_Phrase_장지에 펜슬_50×10cm×4_2020

 

김범중; 일파만파(一波萬波)하는 내재적 리듬 ● 얇은 띠 형태가 길쭉한 화면에 담겨 다양한 파동으로 굽이치는 작품 「Phrase」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한다. 파동은 입체감 있는 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표면과 이면이 수시로 바뀌는 민감한 표면은 마치 대지 깊숙한 곳에서 발생한 요동을 파동으로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자신이 속한 환경을 민감하게 반영할 것이다. 현악기 같은 비율을 가진 화면은 악기의 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구음을 연상시킨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배열된 화면은 그자체가 분절화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설치방식으로 확장 될 수 있다. 그러나 화면 안의 형태는 어느 지점에서 잘려도 자연스러운 나풀거림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이 유연하다. 여러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작품 군은 각기 진행 중인 상태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것 같은 확장성을 가진다. 단편으로 전체를 암시하는 방식이다. 동심원으로 파가 퍼져 나가는 형태 좌우로 두께와 명암이 다른 기둥 모양으로 배열된다. 거기에는 악기를 모델로 한 작품 특유의 시각적 울림, 즉 공(共)감각이 있다. 마치 지문처럼 섬세하게 새겨진 선들은 마주치는 면에 짙은 협곡을 만든다. ● 소리/형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협곡은 또 다른 선을 이룬다. 그것은 점과 점이 만나는 기하학적 선의 정의를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넷 또는 다섯이 시리즈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n개의 패널로 증식될 수 있다. 그림처럼 나란히 거는 것은 여러 배치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무한한 시간의 축을 따라 다르게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은 실재의 다양성에 대한 은유이다. 같은 모양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선의 간격과 배치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것이 음악이라면 차이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가 될 것이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모든 텍스트에 내재한 차연의 세계 또한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같은 리듬과 박자를 강요하곤 한다. 그래야 생산/소비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섬세함은 묻혀 버리기 일쑤이다. 동일성의 논리로부터 탈주하려는 현대철학자들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들뢰즈와 가타리)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물리학자들 또한 변화의 순간에서 원자 운동에 내재한 작은 변이 또는 요동을 강조한다. ● 펜슬로만 이루어진 형태는 분자들의 배열 상태만 달리 함으로서 존재들 사이의 변환을 보여준다. 선의 밀도와 강도, 방향의 차이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고체 액체 기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우주의 창조성으로 보면서, 이러한 현상을 사회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필립 볼)는 우주에 편재하는 질서의 표현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전이의 질서는 형태와 소리로 번역된다. 일찍이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파동)와 음의 연결로 천체의 조화를 말했다. 근대과학은 고대의 질적 우주를 수량화했지만, 정교한 시계와 비교된 근대적 우주에서 소리는 여전히 우주적 조화에 대한 상상 속에 울려 퍼진다.

 

문기전_Q-piece 40_판화지에 펜슬_20×63cm_2019

 

문기전; 인식의 불확정성, 또는 자유 ● 문기전은 '최소 에너지 단위이자, 저장 공간으로 형상화시킨 Quantum 이미지'를 비롯해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며, 기억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에겐 왜 이렇게 보여 지고, 생각 되는가'와 관련된 가설적 구조는 사각형 안의 사각형, 원, 먼지처럼 흩어지거나 뭉치는 입자 등으로 나타나며, 때로 눈 코 입 같은 해부학적 기관의 일부들과 연결망을 이룬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는 문기전의 작품에서 작품과 작품 간의 배치 또한 중요하다.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것들은 시리즈처럼 보이고 때로 다른 종류와 조합되어 작동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일련의 단위 구조가 되어 조합되면서 세상이 인지되고 의미화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판화지 위에 펜슬로 그려진 형태들은 분석적이며, 과학적 도해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은 해부학도 생리학도 로봇의 설계도면도 아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이해방식과 관련된 일종의 은유적 다이어그램이다. 빛의 잔상 시리즈는 명암과 비율의 차이로 계열화된 직사각형들을 보여준다. ● 사각형 안의 사각형이 기본 형식인데, 흑연의 입자가 퍼져 나가는 식이므로 경계선을 정확하게 확정지을 수 없다. 가운데가 어두운 경우와 바깥이 어두운 경우로 나뉜다. 시각적 관습 상 가운데는 형태, 바깥은 배경으로 간주된다. 중심의 짙은 사각형이 커지면 밝은 배경은 줄어들고, 중심의 밝은 사각형이 줄어들면 어두운 배경의 비중은 커진다. 명/암, 중심/주변 등 구별되는 항은 연동된다. 사각 구조와 달리 먼지 형태의 분포로 빛의 잔상을 표현한기도 한다. 하얀 종이 배경 안에 점이 번져 만들어진 얼룩들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먼지입자가 뭉쳐지거나 흩어져서 별이 생성 소멸되는 우주의 풍경부터 거듭하여 확대된 미시세계의 흐릿한 모습까지 다양한 형태가 연상된다. 원이나 사각형처럼 비교적 분명한 도상 또한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입자로 되어 있기에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적이라고 해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도 아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불(不)-'로 시작되는 불완전성(괴델), 불확정성(하이젠베르크) 등의 개념은 엄밀한 인과론 보다는 확률과 통계에 의지한다. ●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을 미술과 비유하자면 반(反) 형식주의에 가깝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사고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결정론보다는 확률론이 좀 더 위로를 주고, 전통/근대를 넘어선 현대와도 조응한다. 단독으로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으로도 나타나는 작품 「Quantum」은 100x100cm 크기의 정방형의 판화지 위에 원이라는 응집력 있는 형태가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경계는 흐릿한데, 여기에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전이의 지대로 오차와 우연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작품 「청각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은 귀라는 감각기관과 연결된 망으로, 최종적으로 검은 「Quantum」과 연결 된다 시각, 후각, 미각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의미 또는 해석으로 전환될 자극의 주요 통로들은 「오감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으로 배치된다. 그의 작품에서 펜슬은 분석과 종합의 과정의 표현에 딱 맞는 듯하다.

 

박미현_07_보드지에 펜슬_40×50cm_2014

 

박미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이상적 관념 ● 보드지에 샤프펜슬로 그린 같은 크기의 작품들은 그 정교함에 있어 펜슬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러한 경지가 가능할지 싶다. 흑백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너무 엄격하고 세밀해서 기하학적 도형이나 도면같은 면모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보기 위한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에 그어진 선 또는 수없이 그어진 흑연에 의한 반사면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지만, 그것들이 풍경처럼도 보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을 이어주는 수평의 선과 사선에 중력감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하얀 원두 개는 일월도(日月圖)처럼 안정감 있게 이 우주를 비춰준다. 그런 비유라면 허공의 도형 또한 중력과 무관치 않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와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양 말단에 같은 모양의 도형이 있는 세 개의 밝은 기둥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시작도 끝도 같은, 변치 않는 규칙적 여정을 연상시킨다. ● 한 화면 내에서, 또는 다른 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박미현의 작품에는 흑백 반전의 관계가 자주 나타난다. 흑/백, 네거티브/포지티브 스페이스, 상하좌우, 수직과 수평선은 기하학이 토지 측량술에서 나왔듯이, 풍경이나 중력감이 배어 있다. 검은 바탕에 하얀 창문이 연상되는 도형이 있는 작품에서,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배치된 원들은 정지 가운데 움직임이 잠재한다. 흑백 반전 버전의 작품에서 반사광 때문에 제자리에서 팽글팽글 도는 느낌을 주는 교차 면의 원들은 사각형의 각도를 유연하게 해줄 것이다. 대칭적 형태는 만다라처럼 평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다소간 디자인적 요소가 있는 박미현의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기능의 먼 흔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기능주의 미학을 낳기도 했지만, 기능은 모더니즘이 선전한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상에 단단히 서있기 위한 공학적 방법은 그 합리성에 있어서 예술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 틀과 표면의 물리적 관계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서 그림의 형식적 조건을 실험하려던 유파는 미술사의 한 장을 이룬다. 박미현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보다 정신적 연원을 가진다. 작가는 플라톤이 '우주의 생성을 요소론으로 설명하려 한 내용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고 밝힌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에 의하면, 플라톤에게 물리학은 기하학이 된다. 플라톤은 원소들이 특정한 공간적 구조들을 지닌다고 여겼다. 가령 플라톤은 정이십면체의 공간적 구조를 물에게 부여했고, 정팔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공기에게, 정사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불에게, 정육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흙에게 주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흙은 정육면체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네 원소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밑면들을 지닌다.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념을 상징한다. 이데아가 실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이데아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의성에 좌우되지 않는 어떤 든든한 근원에 대한 욕망은 과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준다.

 

표영실_상실의 무게_종이에 펜슬_38×28cm_2019

 

표영실;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같은 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표영실의 작품에서 언어적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와 함께 발표되곤 하는 단상들이 위의 전시 부제처럼 문장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복되는 마찰로 생긴 주름',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접힌 채 기울어지고,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바퀴벌레 등짝 같은 얼굴들'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한 미완성의 문장, 또는 단상에는 시각적 상상력이 풍부해서 작품 제목으로 붙인다면 이미지와 단어의 밀착도는 매우 높을 것이다. 물론 '부드러운 바람에 상처가 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기는, 슬픔'같이 추상적인 차원도 있다. 단어 또는 문장의 긴 목록을 훑어보자면, 표영실은 평소에 그리기만큼이나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말과 사물의 관계가 그렇듯,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로 충분하다면 열심히 그릴수록 (예술적 난관까지는 아니더라도)삶의 난관에 부딪히는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 만약 그림으로 충분하다면 작품을 깍아 먹을 수도 있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말보다 더 완벽하고 충만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펜슬이라는 매체는 상보성을 가지는 말과 이미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언어는 선형적이다. 단어들이 한 줄로 배열되기 때문에 아무리 함축적이어도 이미지에 비해서 단정적이다. 가령 '얼굴에 붙은 가면'이라는 단상은 정말 가면처럼 보일정도로 단순하고 얇은 표영실의 인물상을 설명해 해준다. 얼굴 방향과 눈구멍 방향이 다른 가면을 쓴 듯한 얼굴도 보인다. '뜨고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또는 눈동자 없이 퀭한 눈구멍은 가면과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의 소외된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본질/가상의 이분법이 무화되면, 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남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만한 가짜들의 세상이다.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는 펜슬은 이러한 가변적 존재들과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어떤 형태를 확정짓는 경향이 있다. ● 외곽선을 모호하게 하는 흑연 입자의 흩어짐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누런 액체의 표현 등은 인물/인체의 표현에 강렬한 감정을 싣는다. 인체 모양이 액체로 변하는 작품 「상실의 무게」를 비롯하여 사지가 다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은 손목에 체액이 흐르는 작품 등이 그렇다. 감정은 대개 넘치거나 터져 나온다. '아무렇게나 뭉개진 물렁물렁한', '찐득하고 더러운 눈물'은 주체도 대상도 아닌 경계위의 것이다. 이 분류 불가능한 것은 인류학, 심리학, 문학 등에서 '비천'(abject)하다고 명명된다. 작품들의 면면은 상처, 우울, 공허, 고독, 자학,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이다. 작가의 실제 성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펜슬을 쥐었을 때의 자의식과 관련될 것이다.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이라도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써 있는 문장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호한 감정/상태마저도 깔끔하게 마무리한 작품들은 작업이 작가에게 미쳤을 긍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완벽하게 표현된 것, 즉 조리 있게 정리된 것은 사태의 잠정적 해결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200702a | DRAWING ODYSSEY-The Pencilism展

어디도 아닌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20_0421 ▶︎ 2020_0502


이은미_바깥_캔버스에 유채_45×54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312a | 이은미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이 세상의 끝, 다른 세상의 시작 ●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 전은 '어디'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듯, 어떤 자리나 공간에 대해 말한다.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 의하면, 구체적 자리(place)와 추상적 공간(space)은 차이가 있지만, 어떤 구체적 자리로부터 시작되어 추상적 공간으로 마감되는 이은미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경계 위에 존재한다. 「자리잡기」는 공간을 명사로, 자리를 자리잡기라는 동사로 이해하면서 기존의 종교적 해석의 중심보다는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 중심은 결국 없을 수도 있으며, 부재하는 중심을 양파처럼 에워싸는 기나긴 미로 속의 여정만 남는다. '중심의 상실'(제들마이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형이상학적 정점(定點)으로 작동하는 중심보다는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적 과정이 더욱 설득력이 있으며, 그것은 이은미에게도 그렇다. 예술적 서사는 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접혀진다. 이렇게 목적지가 불분명한 이동인 유목은 현대문화 키워드 중의 하나가 된다. ● 어느 장소의 부분인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단 벽, 바닥, 계단, 조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마치 어디인지 알면 바로 작품의 진의가 파악될 듯이 말이다. 추상화가 아니면서도 교묘하게 지시대상을 괄호 치는 작품들은 그 어디도 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다. 길은 어디로도 뚫려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둥근 빛」은 갤러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명이지만, 천정 모서리의 선은 언뜻 수평선이나 지평선으로 확장되고 구멍은 항성(태양) 또는 위성(달)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디를 선택하든 비슷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그림들은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상상의 공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넣었다가 빼낸 공간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탈주자에게는 희망의 구멍일 수도 있다. 조너선 스미스가 차이를 둔 자리와 공간이라는 의미를 포괄하기 위해, 일단 '자리 없는 공간'(블랑쇼)이라고 해두자. ● '어디도'에 바로 따라붙는 '아닌'은 자리나 공간의 불확실성을 말한다. 전시부제는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서 영감 받았다. 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말라르메, 카프카. 블랑쇼, 바르트 그리고 누보로망의 소설가들이 묘사한 현대의 익명성과 무관치 않으리라 추측한다. 대중적 익명성은 작가라는 주체에게도 연동되어 '작가의 죽음'(바르트)이 주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는 (후기)구조주의를 비롯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 문학적 논의지만, 이를 미술에 적용시킨다면, 르네상스식 고전주의나 이를 19세기의 당대성에 적용시킨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확고한 재현의 체계가 해체되는 과정과 밀접하다. 재현의 대상이 불확실해지면, 재현의 주체 또한 그렇게 된다. (문학에 비해)그림이라는 구체적인 형식은 '아닌'이라는 부정어를 모호하게 한다. 이항 대립적 사유의 보편화는 부정적인 정의를 쉽게 이해되는 어법으로 만든다.



이은미_벽과 벽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9


가령 우리는 천국을 잘 모르지만, 그곳이 '이세상이 아닌 곳'은 분명하다. 근대적 담론의 확고함에 비해 느슨한 근대 후기의 어법은 ' --이다' 대신에, '--이 아니고'의 연속으로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한다. 가령 주체는 여성이 아니고, 아시아인이 아니고, 이슬람교도가 아니고, 동물이 아니고, 성적 소수자가 아니고....궁극적으로 타자가 아니다. 이 부정어는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어디도 아닌'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인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의 예를 들어보자. 리차드 해리스는 「파라다이스」에서, 유토피아는 1516년 토마스 모어가 이상적 사회를 주제로 쓴 책제목으로, 그리스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의 outopia와 '완전한 곳'이란 뜻의 eutopia사이의 모호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고 썼다.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란다우어는 현실의 모든 질서를 'topie'라고 한다면, 이상은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라고 한다. ●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의하면, 무정부주의자인 란다우어는 혁명이나 유토피아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그 밖의 모든 토피아(존재질서)를 악한 것으로 보았다. 유토피아는 토피아와 상보적인 관계이다. 칼 만하임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기존의 질서가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토피아 중 한 가지 양식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그것은 제한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은미의 그림에서는 무엇이 아니기 위해 그 무엇이 일단 드러나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작품에서는 '부재'와 '흔적'이라는 관념이 그렇게도 많이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이중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작품들은 확실하고도 단호한 면이 있다. 개인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붓질은 감춰지고, 이미지 또한 선과 그 연장인 면으로 이루어진다. 본 것을 기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적 프레임이 화면 내부의 선의 배치를 결정한다. 선들은 관계적이다. ● 차이의 관계 속에서 여러 좌표들이 설정된다. 작가의 동선을 알 수 있는 어떤 기표도 생략된다. 현대 소설가들이 '특징 없는 인간'을 묘사하려 했을 때, 그들이 있었을 법한 특징 없는 공간/자리이다. 회색과 보라색이 주조인 색감도 서늘하다. 형태(포지티브) 보다는 그림자(네가티브)에 가깝다. 따스한 노랑색이 부족한 색감은 빛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된 자리는 대개 인공적 조명에 의해 다양한 드라마가 연출된다. 배우 없는, 심지어는 사물도 없는 드라마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워둔 시공간을 빈 서판(書板)으로 삼아 관객들로 하여금 쓰기를 자극한다. 시작은 작가가 했지만, 마무리는 관객이 한다. 그 반대편에 읽기가 놓인다. '---읽기'는 계몽적 개괄서의 제목으로 자주 활용되며, 롤랑 바르트가 소비라고 비판하고, 수잔 손택이 해석이라고 비판한 문화산업의 국면을 말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결국 연동되어 있지만, 시작을 책임지는 일, 즉 작가의 과업은 여전히 무겁고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은미_둥근 빛_캔버스에 유채_60×41cm_2019


'아닌'이라는 방식으로 보면, 이은미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역설의 세계가 조금은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우선 아닌 것을 살펴보자. 텅 비어있다시피 한 작품은 소유와 지배를 향하는 도구적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소유와 지배는 향유와 변화와 반대 항에 놓인다. 단편적 정보로 나타나는 빈곤한 지식들은 가슴이나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뇌까려지곤 하며, 대화를 빙자한 독백은 작품의 개념이나 작가의 사고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작품은 침묵하는데 작가만 떠드는 상황이다. 특히 가다만 여정은 원래의 맥락을 탈구시켜 왜곡까지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말이나 생각보다 시선이 우선한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의 구석들을 그런 식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을 주시하면서 거기에서 끝없는 이야기꺼리를 끌어낸다. 관객의 상상력은 작은 조명구에서 우주적 웜홀을 보고, 계단에서 주름진 시공간을 보는 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 작가는 주변이나 소외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석들을 주목하기는 하지만, 소박한 감정이입은 아니다. 거기에는 바라보기 특유의 거리감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그것과 접촉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즉 접촉 속에서 오는 혼돈을 피하고자 한다. 블랑쇼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가 만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보는 방식은 '감각적인 접촉'인데. 여기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 중 그 어느 것도 다른 하나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블랑쇼). 이은미는 자신이 조우했던 장소들에서 '딱딱함, 흩어짐, 멀리 보이는...' 등의 감성을 끌어내곤 한다. 이야기는 바로 앞선 내용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이 침묵속의 대화는 할수록 할 말이 많아지는 생산성을 가진다. 대부분의 독선적 대화, 즉 독백은 주체가 임의적으로 확정한 시나리오를 반복해서 강요한다. 반면 침묵의 대화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틀어가는 길을 만든다.


이은미_한 조각_캔버스에 유채_65×50cm_2020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어디도 아닌' 곳이지만, 정적이지는 않다. 그곳은 '무한히 움직이고 있는 비어있음'(블랑쇼)의 자리/공간이다. 최근 몇 년 간의 전시부제인 「어떤 곳」 (2019), 「건너편」 (2018), 「멀고도 가까운」 (2017), 「스미다」 (2015)를 보면, 공간적으로 경계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고, 그곳들이 경계인 한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대개 어딘가 가다가 멈춰 서 본 곳/것들이다. 그러나 본 것의 핵심은 뺀다. 이전작품에서 이러한 선택의 극명한 예는 허공에 떠있는 외투그림이다. 외투에서 사람을 뺀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황당한 작품에서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는 서양 속담처럼 물신적 사고에 대한 비평을 볼 수도 있다. 기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은미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표를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 「사이」는 단순하게 벽에 붙은 하얀 종이를 보여준다. 뭔가 그려져 있었을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벽에 붙은 종이를 그린 캔버스는 동어반복처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거기에는 그림 자체에 주목하기 위해 지시대상을 삭제했던 현대미술의 역사가 있다. ● 그러나 추상화가 말레비치의 화법과 다르게, 종이(삭제된 그림)는 벽에서 살짝 들려서 그 사이의 그림자를 강조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빈 그림자다. 작가가 이미지를 빼버린 것은 환타지 소설의 원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차원을 넘나드는 거울처럼, 이동하기 위해서다. 재현적 원근법이 외눈박이 시선을 고정한다면, 이 무명의 장소/공간은 '빈 종이처럼 텅 빈 장소였다. 항상 걷고 싶어 했던 곳,...그것은 나의 내면을 찾아가는 여정이다'(2018년 작가노트) 중심이 아닌 주변, 동일자가 아닌 타자, 전체가 아닌 단편, 읽기 보다는 쓰기, 고정이 아니라 과정을 선택하는 이은미의 작품에서 형태 대신에 그림자를 종종 주인공으로 나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작품 「바닥」에서 약간 볼륨감이 있는 사선은 대상을 뺀 그림자를 보여준다. 원래의 대상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은 없다. 또 다른 작품 「바닥」은 바닥과 벽이 만나는 선을 보여주는데, 꺽어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무엇의 그림자인지는 공간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이은미_옆에 있는_캔버스에 유채_91×113cm_2019


작품 「한 조각」은 벽에 비친 반투명한 그림자로, 대상이 아닌 반영 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그림자는 바로 대상 옆에 비켜서 있는 것이며, 작가는 앞이 아니라 옆을 주목한다. 검은 사각형이 공간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작품 「짙고 단단한」은 모서리를 만나 굴절되는 빛을 견고한 본질이나 실체처럼 내세웠다. 이은미의 작품은 덕지덕지 많은 칠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표현하려는 심연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심연은 깊이 있게 칠해지지 않은 표면에 있다. 단지 친숙해서 확고해 보일 뿐인 일상(그리고 상식)은 명확한 좌표축 위에 배열되어 있는데, 이은미의 작품에서는 이 좌표축이 불안하다. 좌표가 없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선택의 유희를 통해서 다양화된다. 그것은 근대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상대화시키는 '좌표적 정의'의 공간이다. 세상의 어느 자리/공간을 이루는 구석은 대개 한 개 이상의 선으로 이루어진다. ● 어떤 작품은 매우 많은 선이 교차한다. 어떤 것은 인체의 일부를 떠오르게 하는 육감적인 선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무엇의 일부인지 가늠하기 힘든 해체적(구성적) 선의 유희가 있다. 모서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 「모서리들」은 무엇인가의 일부인 단편이 전체의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것은 공간의 유기적 관계를 해체한다. 모서리를 이루는 면이 화면을 가로지르면서 공간적 단층을 이루는 이 작품은 평면, 즉 추상에 가까워진다. 작품 「층」은 회화라는 창을 가득 메운 층의 일부로, 접힌 면 같은 효과가 있다. 벽과 바닥 사이의 모서리가 짙은 음영이 있는 작품 「벽」은 원근감이 있지만, 모서리를 이루는 선들이 화면의 프레임에 닿아있어 평면성을 강조한다. 세 개의 모서리 선이 모이는 작품 「구석」은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같기도 하다. 무엇의 일부인지, 무엇에 사용되는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가 한가운데 자리한 작품 「어떤 것」에서, 미지의 대상은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다양한 강도로 공간에 배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작품 「벽과 벽」은 물리적 공간에 의한 선과 광학적 효과에 의해 생겨난 선이 거의 동급으로 작용한다. 회화라는 좌표축 안에 또 다른 좌표축들이 설정하는 유희가 행해진다. 회화의 논리로 소화된 기하적 상상력이다. 작가가 장황하게 어떤 기하학이나 형이상학 등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는 그러한 이지적 감성이 녹아있다. 혹자는 보잘것없는 구석들을 소외라는 근대 특유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막장이라는 어둡고 텁텁한 공간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나는 이은미가 그린 세상의 구석들에서 막장을 보았다. 점점 사라져서 탄광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이때, 막장은 더 이상 갈데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막장에 가야 귀중한 자원을 캘 수 있으며, 워낙 깊이 들어가다 보니 뭔가 캐냈어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나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작업장인 막장이 무덤이 되어, 보석을 품은 채 발굴되는 유해가 가득한 곳이 바로 예술계 아닌가. ● 문예사조사는 그러한 추세가 대세가 된 시대를 근대라고 정확히 규정한다. 근대의 예술가는 지도가 없거나 지도가 더 이상 지시하지 않은 막장에 있다. 그곳에서 예술가들은 길을 만든다. 그 길은 때로 탈주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애초에 작가가 막장으로 파고든 것이 탈주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에 놓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름다움은 너무 닳고 닳아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 탈주는 세상의 지배적 질서가 가리키는 장소의 아래 또는 옆을 향할 수 있다. 작품 「옆에 있는」은 굳게 닫힌 셔터 문을 보여주는데, 셔터의 수평선들의 녹슨 얼룩들은 시간의 침식을 드러낸다. 이 열리지 않는 철문을 통과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은 수직선 보다 많은 평행선들을 활주하는 것, 그 평행선 위에 불규칙적으로 침식되어 가는 약한 부분을 활용하는데 있다. 작품이 암시하는 바로는, 길은 앞이 아니라 옆에 있다. 벽과 모서리 등 주로 실내의 구조물 일부가 소재로 등장하는 이 전시의 작품 중, 유일하게 바깥이 암시되는 작품은 「바깥」이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상승 감을 준다.

 


이은미_구석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그렇지만 바깥의 절정인 하늘은 작은 퍼즐조각처럼 화면 한 귀퉁이에 자리할 뿐이며, 정작 작가는 계단참 아래의 음영을 미세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칙칙한 시멘트 구조물과 대조되는 화면 귀퉁이의 하늘색은 진짜 하늘과 관련된 색일까. 이전 작품에서 계단이 나오는 「도달할 수 없는」을 염두에 둔다면, 비약이든 단계별 이동이든 초월적 방향의 이동(또는 탈주)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초월은 관념적이다. 관념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엄밀하게 규정되지 않을 때 손쉬운 타협책이 된다는 점이다. 이은미는 모호한 것을 그려놓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는 부류는 아니다. 명료함은 작가가 지향하는 또 다른 축이다. 위로의 방향은 초월적이며, 종교의 역할을 계승한 근대예술에서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아래는 그 반대방향이다. 신이 있으면 악마가 있듯이 말이다. 이은미의 작품은 위도 아래도 아닌 옆을 가리킨다. 현대과학이나 철학이 주목하는 뫼비우스적인 시공간 모델은 바로 옆이 역변의 자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 「그 옆에」라는 작품제목도 있다. 옆은 확실하지만 무엇의 옆인지는 불확실하다. 구상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선까지 진입했지만, 실재감을 위해 여전히 추상으로의 선을 선뜻 넘지 못하는 작가는 대상의 기표를 제거하거나 프레임 조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상과 추상을 왕래한다. 옆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또는 중요하지 않지만), 무엇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존재는 옆 공간의 위상에 영향을 준다. 현대우주론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상자같이 담아내는 공간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 안보이지만 영향력이 있는 무엇이 있다. 마치 비어있는 상징처럼. 조너선 스미스는 비어있는 상징을 설명하기 위해 레비 스트로스처럼 영(0)을 예로 든다. 그에 의하면 영(0)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표시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숫자들과 결합할 때면 의미로 가득 찬다. 그것은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은미의 작품에서 옆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의미작용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 구조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그 요소들은 기표이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된 체계'인 '무수한 기호들'로 기능한다. 옆은 '순수한 차이내기'의 결과이다. 우리말에 '삐딱선 탄다'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삐딱선은 맞서지 않지만 물러나지도 않는다. 승화도 퇴행도 아니라, 비스듬하게 피해간다. 옆이 중요할 뿐 무엇의 옆인지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정확히는 관심도 없다. 중요한 작품이 걸려 있었을 전시장의 한 구석이 생각나는 작품은 빈 바탕이나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이은미의 '어디도 아닌'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는 것은 편파적이다. 근래 몇 년간 매년 전시해온 그녀의 작품들에는 피난처의 아름다움 또한 포착되어 있다. 작년에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에서 전시한 「어떤 곳」에서, 시골 쌀 창고가 서있는 황량한 풍경에는 예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있다. 미술에 비해 서사성이 강한 영화에서 지고의 아름다움 장면은 탈주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이은미_사이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9


영화 속 탈주자인 델마와 루이스가 '우리 다시는 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주행을 하며 보았을 멋진 풍경이 떠오른다. 그곳은 이 세상의 끝이자 다른 세상의 시작일 터이다. 요즘은 에베레스트 산도 줄 서서 등반할 만큼 번잡하다고 하는데, 가기 힘든 곳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색다른 비전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멀리 있는 유명한 곳에 가지 않는다. 일상적 주변, 정확히는 자기가 있는 곳의 옆이다. 위는 초월을 아래는 퇴행을 앞은 대결을 뒤는 추리를 요구할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무리수가 따른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하기 위해 투입되는 에너지가 크다. 그러나 이은미가 바라보는 옆은 큰 몸동작이나 힘겨운 이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작은 그림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응한다. '어디도 아닌' 전에 제시된 세상의 구석들은 CCTV가 있다면 사각 지대에 놓여있을 이상한 자리/공간들이다. ● '어디도 아닌'은 미셀 푸코가 근대의 감시 및 조절 기관인 패놉티콘을 설명하면서 비유한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즉 이전시대 신을 닮은 편재하는 시선에 대응 할 수 있는 장소이다. 거대한 감시의 그물망으로 포착하기 힘든, 포착된다 해도 그 의미와 기능을 알 수 없는 그래서 권력이 간과할 수 있는 자리/공간이다. 여기에 주변적인 타자의 시선이 닿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어디도 아닌' 이 구석진 곳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중심지향성의 압력이 느슨한 그래서 소외와도 연결되는 해방구이다. 현실보다는 환상으로 간주되는 영역이다. 한 사회의 상징적 우주를 지배하는 시선이 주목할 만한 코드로부터 탈구된 영역이다. 물론 탈영토화는 재영토화될 수 있다. 패놉티콘이 거시적이라면 '어디도 아닌' 구석들은 미시적이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때의 그런 우묵한 장소이다. 현대인은 집에 있으면 직장에 자리가 있는 양, 직장에 있으면 집에 자리가 있는 양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집과 직장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이전 시대처럼 자기가 태어난 집과 천직이 없는 세상이다. 누구와도, 어디에서도 교환 가능한 존재를 요구하는 코드의 세계에서 집과 직장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고, 그 연장선상에서 집과 직장의 연장이랄 수 있는 주체 또한 그러하다. '어디도 아닌', '아무도 아닌' 등과 같은 흐릿한 또는 시적 표현은 2015년 개인전 제목 「스미다」처럼 우리 옆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있다. 이은미의 작품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추동된 탈주의 결과물이었지만, 그것들은 현실을 지시한다. 또는 현실에 도달한다. 현실은 우회로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미지의 대상이지 자명할 출발점이 아니다. 나, 그리고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도달점을 출발점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서 모든 오류와 독선이 야기된다. 이은미가 보고 표현한 세상의 구석들은 일견 잔잔하다. 그 현실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서 머리가 얼얼하다. 현실은 단순하지만 거기에 내포된 진실은 복잡하다. 이때 예술은 현실을 각성시키는 아름다운 폭력이다. ■ 이선영


Vol.20200421b |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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