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 선생님게서 정영신씨 전시 중에 집에 한 번 들리라는 전화를 몇 차례나 하셨으나.

틈이 나지 않아 전시가 끝난 지난주에야 들릴 수 있었다.

찾아 뵌 적이 한 달이 더 되었는데, 같이 식사하기 위해 부른 줄 알았다.

 

식사도 식사지만, 정영신 전시에 가보지 못해 축의금 전해주려 부른 것 같았다.

뻔한 형편에 전시하는 것이 마음 쓰였는지, 정영신씨께 봉투를 건네 주신 것이다.

항상 걱정만 끼치는 송구함에 차마 고개 들 수 없었다.

 

그 날은 선생께서 비빔밥을 드시는 요일이지만,

복국을 사주겠다며 서초동 초원 복집으로 데려갔다.

꾀죄죄한 행색에, 전 날 술 퍼마신 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선생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했다, 살아 생 전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댁으로 돌아오니, 사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들릴 때마다 벽에 걸리고 탁자에 진열된 가족사진에 먼저 눈길이 가는데,

누군들 가족사진보다 더 애착 가는 사진이 있겠는가?

 

가족사진 틈에 징그러운 내 꼬락서니도 보였다.

오래 전 선생 생신 때 찍은 단체사진에 끼어 있었는데,

선생님 모습은 젊어 보이는데, 나는 왜 그때부터 늙어 보일까?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에 선생께서 보관하고 계신 사진 파일을 보여주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전 인사동 작업실을 오갈 때 기록한 사진이라는데,

내년 봄 쯤, 사진집으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번에도 그 사진을 본 적은 있으나,

사진이 20여장 밖에 되지 않아 사진집 만든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가을에서 겨울로란 사진집 제목까지 말씀하셨다.

하기야! 사진 내용이 중요하지 량이 무슨 소용이랴.

 

그 사진들은 이전에 발표된 '고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도시풍경이 왜 그리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치 선생께서 투병으로 사진을 더 이상 못 찍게 될 걸 예견이라도 하신 것 같았다.

 

그 사진들은 선생의 허무하고 쓸쓸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많은 사진인들에게 귀감이 될 좋은 사진집이 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선생께서 마음의 병을 다스려 다시 작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 조문호

 

 

모처럼 한정식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동안 사람 만나기를 피하셨는데, 준비한 사진 산문집이 나왔다는 것이다.

 

지난 21일, 오찬 약속으로 정영신씨와 함께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함께 투병하고 계신 사모님의 건강은 확연히 좋아졌지만,

선생님의 모습도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단지, 불면증에 잠을 이루지 못해 수면제로 지탱한다는 거다.

그건 소심한 성격에 의한 마음의 병이었다.

 

주변에서 용하다고 추천하는 병원도 다녀보셨지만, 아무 소용없다고 했다.

내가 볼 때는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라 선생께서 다스려야 할 병인 것 같았다.

 

선생님 댁에 여러 차례 와 보았지만, 언제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들이 눈길을 끌었다,

장성한 자식과 귀여운 손자들이 함께한 유복한 모습이 부러웠다.

한 평생 사진을 위해 살아왔지만, 작품사진보다 가족사진이 먼저였다.

하기야!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날은 새로 나온 사진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를 한 권 받았는데,

주옥같은 선생의 사진과 산문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투병하기 전에 인사동 작업실을 오가며 기록한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암울한 도시풍경을 찍은 사진들은 기존의 작품과는 또 다른 울림이었다.

컴펙트 카메라라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마무리 했으면 좋으련만,

이제 안 된다는 체념에 가까운 말씀에 가슴이 아팠다.

 

정영신씨도 이번에 출판한 ‘장에 가자’를 한 권 드렸는데,

까다로운 선생의 눈에 찰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오찬은 외식을 하며, 동네 산책도 빠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날은 생선구이 집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나보다 더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자동차로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차마저 처분하셨단다.

여기저기 다니신다면 왜 잠이 오지 않겠는가?

 

부디 마음의 병을 고쳐 편안한 여생이 되도록 간절히 빈다.

 

사진, 글 / 조문호

 


황규태선생


지난11일 원로사진가 황규태 선생께서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올해 가기 전에 번개 밥이라도 한번 해야죠. 정영신씨와 같이요’

난,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보름이나 지나 난감했지만, 정영신씨와 연락해 시간을 잡은 것이다.



지난 26일 약속장소인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가니, 먼저 와 기다리고 계셨다.

송구스럽게도 돈까스를 사 준다며, 사간동 'GINZA BAIRIN'로 차를 몰았다.

오래 전에 그 곳에 한 번 가보았지만, 잘하는 집이라 예약해야 할 정도다.



과분한 오찬을 즐긴 후 인근에 있는 찻집 'Smoll House'로 갔다.

그동안 뵙지 못한 원로사진가들의 근황을 들었는데,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인사동에서 ‘하당’이란 화랑을 운영한 사진가 윤 옥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인사동 가게를 그만두고 소식이 끊겼는데, 황선생 께서 알고 계셨다.



이야기 중에 지인들이 임응식선생을 '예술원'에 모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철옹성같은 벽을 넘지못해 그냥 넘겼지만, 요즘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궁금했다.

‘예술원’이 폐쇄적인 집단이란 건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끼리끼리 노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무슨 정치 패거리도 아니고 명색이 예술한다는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예술원'의 벽을 허물어 원로 사진가 중에서도 누군가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청원을 올리자는 글을 올렸더니, '예술원'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이 많았다.

'예술원'을 잘 아는 분들은 친일 잔재로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영문도 모르는 황규태선생은 홍두깨 같은 소리에 연관된 듯한 포스팅이 불쾌한 것 같았다.

그런 양로원에는 관심도 없다며, 제발 망신시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스러웠다.



2017,11 / 한정식선생과 류가헌에서


사실, 황규태선생은 사진 작품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도 좋다.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개인적인 생각과도 일치해 존경하는 분이다.

미국 계실 때는 사진 유학 간 후배들 중 도움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진가에게 도움을 주었다.

작년에는 동자동 쪽방촌까지 찾아와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큰 힘을 주셨는데,

만날 때마다 어렵게 사는 걸 걱정하신다.


2018년 6월, 황규태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짚차를 몰고 동자동 쪽방촌을 방문했다


선생께서는 내가 '삼성항공' 카메라사업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사진기획전 후원 요청을 들어준 걸 아직까지 고마워하신다.

사진하는 사람이 업무의 일환으로 결재권자와 연결해 드린 것뿐인데,

괜히 부담주지 않으려고 도움줄 때마다 핑계 대시는 거다.



후배들을 위한 애정 어린 마음뿐 아니라, 사진도 최고로 평가 받는 분이다.

황규태선생 사진이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만으로도 입증된다.

작품 경향이나 라이프스타일도 젊은 사람 빰 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그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누가 선생을 팔순이 넘은 원로작가라 하겠는가?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길'


선생께서 1960년대 찍은 사진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 지켰다.

목가적인 정취도 살아있고 사진의 전형적인 구도도 남아 있었으나,

그 틀이 서서히 부서지며 초현실적 이미지의 파편이 되어갔다.

원근감이 압축되거나 화면 톤이 사라지며, 더 이상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졌다.



황규태선생의 60년대 초기작품 '소원'


70년대 발표한 ‘원 풍경’에서는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 비판의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생태환경의 문제성을 예견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며 통렬한 비판이었다.

기록적인 고발성에다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보여 준 일련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해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황규태선생의 70년대 작품 '원풍경'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기존 사진틀을 깨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최근에 발표하는 일련의 ‘픽셀’전은 시공을 초월한 작품세계인데,

평생을 새로움에 도전하는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다.


2018 년'동강사진상 '수상전에서...


황규태 선생 사진의 매력은 바로 자유로운 자의성에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하며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을 벗어던져 버리는 것이다.

사진에는 여러 차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진미학을 개척했다.


황규태작 Pixel Tvee  2011년


부디 오래 오래 건승하시어, 후학들에게 늘 모범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글 / 조문호



황규태작 Pixel 2019년



































 

지난 26일 아내 정영신과 함께 약수동의 이명동선생 댁을 찾았다.
몇 일전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으나, 년 말의 바쁜 일정에 밀려
26일 오찬을 함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찾아뵈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매번 밥값이나 찻값을 선생님께서
내셨는데, 이 날은 꼭 저가 사겠노나고 다짐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씰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니가 므슨 돈이 있노?”

일식집에서 초밥을 맛있게 먹은 후, 찻집에서 오래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은 아무리 들어도 재미있는 한국사진의 이면사인데,
이 날은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께서 바람피웠던 옛날 이야기 좀 해주이소.”
“어! 내가 뭔 바람을 피워?”
“동아일보 계실 때, 신문사 주변의 다방 마담은 모두 선생님꺼라 던데 예!”
“다방마담들이야 다 그렇고 그런 상대이지 연애 걸 상대는 아니지.
딱 한사람, 서울대학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사가 있었지”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그 간호사를 너무 좋아해 엄청 찾아 다녔다고 하신다.
그녀의 집안이 너무 가난해 여러 가지 도움도 많이 주었지만,
결국은 파독 간호사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그 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왜 몰랐겠는가마는...
마음 여린, 선생님의 잊혀져가는 옛 이야기에 코끝이 찡해졌다.

대개의 사람들이 잊혀져가는 오래된 연인이 한 사람 쯤은 있을게다.
가끔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
뭔가 마음이 허전해 가는 황혼기에 접어들면 옛 연인이라도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관절 산다는 것이 뭔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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