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

 

강민 시인 시선집 ‘외포리의…’ 출간회서 해후

팔순의 벗들이 오랜만에 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박정희 서정란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등이 그들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팔십을 넘겼거나 팔순 언저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모두 한 세월 건너오며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라는 점도 같다. 벗 강민(81) 시인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 굽이굽이 80굽이/ 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 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 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 (중략) / 그 많던 동반들/ 아리고 아픈 내 사랑, 풀꽃 노을에 타버린/ 아리고 아픈 내 사랑/ 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 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 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


팔십이 넘은 연치에도 견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강민의 ‘산수령(傘壽嶺)’이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팔팔한 20대에 전후 황폐한 1950년대를 보냈다. 이어 4·19, 5·16,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미 그들 표현대로 ‘저 위로’ 떠나간 이들이 더 많다. 이날 인사동에 모인 이들은 지나온 세월 막역하게 부대껴온 몇 안 남은 벗들이다. 강민 시인은 모두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강민 시인의 새 시집을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모인 팔순의 벗들. 왼쪽부터 강민

신경림 박정희 시인, 극작가 신봉승, 민영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 다 먼저 가고 이만큼만 남았다”고 웃었다.


“중학교 6학년, 요즘 학제로는 고3 때 6·25를 만났습니다. 피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이여 안심하라고 방송하더니 자신은 대전 부산으로 도망가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습니다. 남은 이들은 발이 묶이고 무심히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살아온 세월은 늘 배멀미를 하듯 어질어질했는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대체 달라진 게 무언지 답답합니다.”

그는 1950년 8월 또래의 인민군을 만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을 밝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경안리’에서라는 시편에 적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나’는 철없이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경안리에서’)


강민 시인은 그때 이별의 인사말로 나누었던 “우리 죽지 말자”는 다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해 서럽다고 했다. 전후 폐허의 거리에 청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문인들의 무대는 그나마 얼기설기 엮은 폐허의 건물더미 사이에 자리 잡은 명동의 술집과 음악다방이었다. 이날 어렵사리 만난 벗들도 그 시절 명동을 누비던 추억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다.

민영(80) 시인이 시를 읊듯 말했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렸어. 강물을 지나서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서 없어지고 말았어. 여기 온 사람들 몇 명만 남았어.”

강민 시인은 그들이 명동 시대에 이어 인사동을 누비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내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린다/ 동서남북이 분별되지 않는다/ / 그이가 떠난 여기는/ 스산한 여기는/ 내 마음의 황무지// 가면을 쓰고/ 물구나무 선 이들이 다가온다/ 그리운 이들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황혼을 마신 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갈 길 잃은 내가 헤매고 있다”(‘인사동 아리랑 4-황무지’)

연전에 아내마저 떠나보낸 강민 시인은 그리운 이들이 모두 떠나간 곳은 ‘황무지’라고 썼다. 노경의 시인들이 실감하는 삶의 무게와 헛헛함이 생생한 자리였다. 이날 팔순의 벗들은 너나들이하며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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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들 “읽어도 이해안되면, 詩 아니다”

 

신경림 등 원로시인들 쓴소리

 

▲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강민(윗줄 왼쪽 첫 번째)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 기념회에서 신경림·민영·황명걸 시인, 신봉승 작가(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이 시 낭송을 듣고 있다. 서서 시를 낭송하는 이는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밤중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랑 같아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들은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9일 강민(81)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다.

이날 자리에 모인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서정란, 박정희 등 원로 시인들은 새 시집에 대한 얘기에 앞서 독자들과 멀어지고 있는 현 한국 시단의 흐름에 쓴소리를 했다.

신 시인은 “최근 나오는 시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시는 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시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일반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는 비평가들 때문에 영국프랑스의 시 경향이 지나치게 난해해졌고, 결국 독자와 호흡하지 못한 채 망가져 버렸다”며 “우리도 이들의 경향을 따라 해석이 안 되는 시들을 쓰려 하지만, 각 나라에 맞는 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은 통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강 시인 또한 “김수영 시인도 1950년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난해한 시를 썼던 ‘후반기’ 동인에 대해선 ‘그건 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며 “읽히는 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 시인은 “후배(시인)들이 정성이 담긴 시를 썼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시를 쓰면서 10번은 더 고치고, 잡지사에 보낸 후에도 다시 가서 고쳤던 기억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쓰더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자리에서 원로 시인들은 함께한 지 50년이 된 만큼 첫 만남, 동인 활동 등 추억도 자주 꺼내 이야기했다.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는 “6·25전쟁, 4·19혁명, 군사독재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온 원로 시인들의 경험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며 “문단에서 원로들과 현 활동 문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mail 유민환 기자 /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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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시]

 

그을린 도심의 빌딩 위로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다

피곤한 시민들의 우수가 떠 있다

분노가 떠 있다

 

-강민의 '만추' 중

 

 

 

 

숨막히게 더웠던 지난주 어느 날,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강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외포리 갈매기’가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소감을 말하라자 시인은 뜬금없이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동네 교회를 지킨답시고 피난 행렬에 끼지 않았다. “그때 (정부가)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얼마 후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단어가 주는 뚜렷한 기시감에 자리는 일순 침묵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물을 보며 뿜어냈던 분노와 다짐은 어느새 폭염 속에 녹아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백발의 시인은 여전히 파랗게 분노하고 있었다. 윗글은 ‘외포리 갈매기’에 수록된 첫 번째 시 ‘만추’의 마지막 연이다.

 

한국일보 /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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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인사동 아리랑 6 -세모(歲暮)

 

강 민

 

눈이 내릴 듯
우중충한 하늘이 겨울 햇살을 가린
인사동 뒷골목을
약속도 없이 배회하고 있다
섣달그믐이 내일인데
이제 곧 질곡의 경인년은 가고
새해가 온다는데
이 굽이에선 작은 꿈이라도 영글려나
흑룡(黑龍)의 임진년이 온다는 날

 

-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에서

 

[한겨레신문]

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시선 42
지은이 / 강 민
160쪽 | 205*127mm | 208g | ISBN(13) : 9791130802435
정가 : 8,000원

-시집소개-
푸른사상 시선 42권. 한국잡지기자협회 회장, 동국문학인회 회장, 한국작가회의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한 강민 시인의 시집으로, 삶은 물론이고 시대와 역사에 대한 시인의 진지하고 치열한 인식이 들어 있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만추(晩秋)
꿈앓이
찢긴 깃발의 노래
새해
소묘 4
엄마!
개망초 연가
산수령(傘壽嶺)을 넘는다
아, 불통의 하느님 들으소서
오늘은
외포리의 갈매기
인사동 아리랑 1
인사동 아리랑 2
인사동 아리랑 3
인사동 아리랑 4
인사동 아리랑 5


-추천글-

강민 시인의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거대한 뿌리」)라는 김수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민 시인이 추억하는 부모와 아내, 천상병, 목순옥, 민병산, 신동문, 김문수…… 한국전쟁, 경안리 주막, 4ㆍ19혁명, 판잣집, 인사동, 대학로, 명동, 소국당……. 그 추억들이 있는 한 시인의 가족과 친구와 동오리와 외포리와 하늘과 새와 유월에 대한 사랑은 영원하다. 시민과 그들의 함성과 촛불과 조국의 역사와 평화와 그리고 자유에 대한 사랑도 그렇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


흔히 시는 젊어서 쓰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참신하고 예리한 감각이 없어가지고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뜻일 게다. 실제로 젊어서 아주 뛰어났던 시인도 늙어서는 좋은 시를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강민 시인은 전혀 여기에 해당하지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시가 좋아진다는 평파닝 과찬이 아닐 정도다. 이 시집에도 팔순을 넘기고 쓴 시가 많은데 삶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는 이 시들은 감동적일뿐더러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젊었을 때의 시를 능가한다. 일제강점기와 남북 전쟁 그리고 국토의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온갖 수난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갖는 분노와 아픔의 노래들을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나는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었다.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하고 치열한 생각, 그리고 꿈을 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표현인 그의 시들이 말의 장난에 지나치게 탐닉한 결과 너무 난해해서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오늘의 우리 시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면 싶다.

 

신경림 (시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시인 약력-


최근작 : <외포리의 갈매기>,<당신 곁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2>,<이별을 준비한 사랑> … 총 3종 (모두보기)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63년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했다. 시집『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 보다』『미로에서』, 이행자 시인과 함께한 시화집『꽃, 파도, 세월』등이 있다. 한국잡지기자협회 회장, 동국문학인회 회장, 한국작가회의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자유와 순정을 나는 외로운 갈매기"

“어젯밤 그들은 어느 꿈에 머물다/아픈 추억 물고/여기 외포리 바다 위를 날고 있는가//북녘의 바다에서 남녘의 하늘로/남녘의 바다에서 북녘의 하늘로/내 겨레 뜨거운 가슴은 여전히 먼데”
─ 「외포리의 갈매기」 부분

강민 시인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에 실린 시편들을 읽는 내내 우리 시대 우리나라 시인들의 숙명이 떠올랐다. 해방 후 분단과 독재를 살아내는 시인의 올곧은 양심과 지조에 고개 숙여졌다. 꿈과 추억과 사랑과 예술혼을 향한 순정한 로맨티스트인데도 시에서 그런 에스프리를 접어둘 수밖에 없게 한 분단 현실이 아프고, 그런 현실을 아파하고 타개하려는 시인의 올곧은 자세가 숙연케 했다. 그런 부당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지조 있는 자세에서도 나남 없이 다 껴안는 도저한 휴머니즘에 절로 고개 숙여졌다.
강민 시인은 대학 시절 서정주, 조지훈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서정주에게서는 누구에게든 편안하게 대해주는 인간성을, 조지훈에게서는 잘못된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 선비정신, 지조를 배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은 다들 대통령이나 장군이 장래 희망이라 말할 때 당당히 문인이라 말하며 뭔지도 모르고 그저 좋아 빠져든 문학. 그러나 「지조론」의 시인 조지훈에 끌려 정 많은 사람이면서도 시에서는 의리와 지조로 일관하고 있는 시인이 강민이다.
‘지조’ 하면 대쪽 같고, 깐깐하고, 고집불통이어서 ‘메마름’이 떠오르기 십상이지만 시인은 아니다. 문단에서 술 한 번 밥 한 끼 안 얻어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한국문단사’로 불릴 정도로 선배 잘 모시고 후배 잘 챙기는 마당발이다. 무엇보다 진보며 보수, 학벌이나 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순정한 인간성으로 다들 감싸안은 도저한 휴머니스트이다.
1962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이듬해 김수영, 신동문, 고은, 송혁, 권용태 시인 등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 활동을 펼쳤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전위적인 타이틀을 내건 사람이 시인이다. 로맨티스트이고 휴머니스트인 시인이 이렇게 시에서만큼은 반세기 이상 대쪽같이 우리네 현실을 직시하며 다들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구가하려 했으니 안쓰럽고 숙연할밖에.
이 시집의 표제작으로 위 프롤로그로 올린 시 한 대목에서도 시인의 그런 자세는 잘 드러나고 있다. 분단의 최북단 강화도 외포리에서 갈매기는 한쪽 날개는 꿈과 추억의 아슴한 시적 에스프리의 바다를, 한쪽 날개는 아픈 분단 현실의 바다를 날고 있지 않은가.
“비는 멎지 않았다/희뿌연 물보라 속 그 안에서/꽃은 몸살을 앓는다/줄기에는 물이 아니라 피가 흐른다/멍든 사랑으로 햇살은 흐리고/눈먼 사람들은 제 짓거리들을 찾아 떠났다/바람이 불 때면/흔들리는 잎으로 오열을 삼킨다/시시로 더해 가는 신열이 온몸을 달구면서/달이 지는 시간에/혹은, 제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별이 쏟아지는 미명에/꽃은 핏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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