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소래포구에서 열린 ‘서해안 배연신굿’에서 뜻밖의 벗들을 만났다.
내가 어떻게 소래에 온 걸 알았던지, 김신용시인과 장경호화백이 찾아 온 것이다.
장경호가 소래포구 인근에 사는 김신용에게 연락해,
남양주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 그 곳을 찾아 온 것이다.

신학철, 박불똥 화백과의 삼인 전을 닷새 정도 남기고 있어
그림 그리느라 정신 없을 그가 아닌가?
김신용도 몇 달 전, 그의 출판기념회에서 본 후, 처음이었다.

아무튼 너무 반가워, 굿이 채 끝나지 않았으나 배에서 내려버렸다.
허름한 식당에서 대포나 한 잔 할 작정이었는데,
장경호가 바가지 쓰기 딱 좋은 횟집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아이구! 제일 싼 회가 20만원이 넘는데도 앉으라고 했다.
모처럼 바닷가에서 만났으니, 시원하게 한 잔 하자는 것이다.
정영신이가 있으니, 안되면 마누라라도 잡힐 생각으로 퍼져 앉았다.

김신용, 장경호는 모두 부산에서 올라온 인사동 떨거지들이라 속정이 깊다.
방어회 한 접시를 시켰다. 모두들 좋아하는 술이 달라, 소주 맥주 막걸리가 다 나왔다.
그리웠던 쌍다구들과 이런 저런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며 마시니, 술 맛 나더라.
배에 남은 이지하에게 연락해, 빨리 오라 했더니,
이지하는 어물전에서 밴댕이와 병어회까지, 한 접시 사왔다.

술이 취하니, 김신용의 십팔번 ‘백만송이 장미’가 듣고 싶었다.
창 밖에 “명성노래방‘이 보인다며, 김신용은 좋아했다.
‘명성’이란 노래방 이름에 더 관심있어 했다.
안 그래도 몇일 전, 김명성과 술 마시다, 신용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노래방은 싫어 하지만, 함께 일어났다.

그런데, 난리 났다.
모두들 주머니에 꼬불쳐 둔 신사임당 찾느라 정신없는데, 장경호가 모두 계산해 버렸다.
미리 준비한 듯한, 돈 봉투까지 꺼내 김신용씨 주머니에 찔러 준 것이다.
없는 놈 사정, 없는 놈이 안다고, 한 달 간 미술 강의해 번 돈, 다 턴 것 같았다.

야, 씨발! 눈물 나더라.
가진 놈들은 이리 재고 저리 재느라, 제대로 쓰보지도 못하고 자빠지는데,
씨뿔도 없는, 장경호의 깊은 속아지에, 또 감동 묵은 것이다.

노래방에 끌려가 김신용의 백만송이 장미도 듣고,

나도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보고 싶은 얼굴’ 한 곡 질렀다. 

정영신의 우아한 노래 ‘조각배’도 듣고,

장경호 노래하는데, 염장 질러가며 잘 놀았다.

김신용은  술이 취해 먼저 일어나고, 장경호씨와 나는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포구 깊숙이 박아 둔, 차를 끌고 가려니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다.

차도 이인승 코란도라 앞좌석에는 마누라가 타고, 장경호와 나는 짐승처럼 뒷 칸에 실려야 했다.

두 시간 가량 이리저리 부딪혀 온 육신이 고달픈데, 장경호는 듣기 싫은 소리 해 샀제,

니미, 미치겠더라.

인사동에 도착해, ‘아라아트’에 차 박아넣고 ‘유목민’으로 한 잔 더 하러갔다.
마누라는 힘들다며 지하철로 도망치고, 장경호와 둘만 남아 개겼다.
자정무렵, '인디프레스'관장 김정대씨가 불려 나오는 것을 보며, 바통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이틑 날, 인사동에 나가서 차를 끌고 와 보니,

회집에서 먹다 남은 회를 비닐봉지에 꽁꽁 묶어 차에 남겨 둔 것이다.
너무 아까워 곧 바로 냉동실에 집어 넣었다,
저녁 무렵 꺼내 혼자서 소주 한 잔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시원한 얼음에 쫄깃한 맛까지 나, 잘 먹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녹아,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맛이 간 회 냄새가, 그리 지독한 줄은 몰랐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배가 아파오는 것이다.
늦은 시간에 문 연 약방도 없고, 얼마나 배가 아파 혼났는지,

이제 회 소리만 들어도 이 갈린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서해안 풍어제’ 정기공연이

지난 7월2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소래포구에서 열렸다. 

첫날의 대동굿은 어시장에서 열렸고, 3일의  배연신 굿은 소래포구에 정박한 배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서해안 풍어제는 본래 황해도 해안 지방에서 정월에 치러졌던 풍어제였다.

이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서해안풍어제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의 공동제사였다. 

뱃머리에는 무신도를 올려 세운 굿청이 마련되어 있었고,

배위 여기저기 무당들이 둘러앉아 부산이나 지화를 만들고 있었다.

부산이란 짚으로 동그랗게 엮은 일종의 땟목이다.

음식을 조금씩 떼어 놓고 불을 붙여 바닷물에 띄우는 것으로 부정을 가시는 것이다.

한 쪽 구석에는 김금화, 김매물 만신이 앉아 있었는데, 두 분 다 거동이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모든 준비나 굿은 오태운, 조성연, 김혜경, 이순애, 오순근, 박이섭, 김태진씨 등 조교나 이수자들이 진행했다.

굿판에는 선주를 비롯하여 김용희 인천남동문화원장,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김신용시인, 화가 장경호,

사진가 정영신, 이지하씨등 많은 분들이 함께 어울렸다.

화려한 복장을 한 무녀들의 춤과 악사들의 떠나 갈 듯한 장단이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에 서낭기, 호기, 장군기에 서리화, 봉죽, 백모란 등의 화려한 지화장식과 선주들의 오색 뱃기가 줄지어 장관을 이루었다.

뱃사람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배연신굿은 바다 위 선상에서 펼쳐지는 뱃굿이라 흥미롭다.

개인 뱃굿이면서도 내용이나 형식, 규모가 대동굿에 버금가는 굿인데, 연희적인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그리고 신내림을 받은 강신 무당들이 벌이는 굿판이라 춤사위가 별신굿보다 훨씬 격렬하다.

신청울림, 상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울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그물올림, 쑹거주는 굿, 다릿발용신굿, 강변굿 등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배연신굿의 절정은 먼산장군거리였다.

이순신, 최영, 임경업 장군 등을 모시는 거리로 소머리에 삼지창을 꽂아 거꾸로 세우고,

손으로 쳐서 쓰러지지 않으면 굿을 잘 받은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이 날 먼산장군거리를 지켜보던 김금화 만신께서 제대로 서지 않았다며, 다시 세우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영험함이나 예능적 끼를 타고 난 김금화 만신이지만,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사실, 우리민족문화의 뿌리는 무속이었다. 악기나, 소리, 춤, 모두가 굿에서 비롯되었다.

기쁨이나 슬픔, 바람들을 굿으로 풀며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타파니 허례허식이란 억울한 죄을 뒤집어쓰고 밀려난 것이다.

오래동안 전통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 인식시켰으니, 불손하고 거친 시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무대에서는 예술이 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까지 저급문화로 홀대하는 이들이 많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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