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영신


설날이지만 혼자 쓸쓸하게 제사를 지냈다.
형, 동생 모두 예수를 믿으며, 시작된 풍속도다.
하나 뿐인 아들 녀석까지 교회에 나가니, 나 죽으면 이 짓 마저 끝이다.
우리 선조들은 조상 모시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차례음식 장만은 돈도 돈이지만, 엄청 힘들었다.
연료비 아끼려다 감기 걸려, 아픈 몸으로 장만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쓸쓸하게 술을 올린 후, 아내에게 말했다.
“나 죽어 제사상 차리면, 구신이지만 상을 확 엎어 버릴끼다.”
아내 대답이 걸작이다. “같이 죽을거니, 차릴 사람이 없어 다행이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는 서민들은 시국이 흉흉하거나,
새해들어 살기가 어려우면, 점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올 해는 좋은 일이라도 생길런지, 복점이나 한 번 볼까보다.

1946년 광주 월산동에서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그들과 나누는 음식이 유난히 맛있는 설날이다. 하지만 이들 맛 좋은 설날음식이 다이어트에는 ‘공공의 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설연휴를 맞아 국내 포털사이트에서 설날 음식 칼로리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떡국부터 기름에 무치거나 볶는 나물, 전 따위 설날음식들은 칼로리가 매우 높다. 떡국은 463㎉이고 만둣국은 480㎉로, 쌀밥 한 공기의 300㎉를 넘어섰다. 또 동태전은 247㎉, 식혜는 250㎉로 밥 한 공기의 칼로리와 비슷했다.
이 밖에 잡채는 306㎉, 갈비찜은 531㎉, 삼색나물은 397㎉, 동그랑땡은 1개당 45㎉로 나타나는 등 설날음식은 대부분 칼로리가 높았다.

이들 음식에 후식으로 식혜(250㎉) 약과(172㎉) 사과(100㎉) 등의 후식까지 곁들이면 평소보다 꽤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게 된다.
이같은 ‘설날 음식 칼로리’를 접한 누리꾼은 “설날음식이 칼로리는 높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먹어보냐” “살쪄도 더 먹고 싶다” “입은 즐겁지만 몸은 괴로운 음식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새해 첫 날 떡국 먹어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민족 대명절인 '설날'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한해의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며 우리 조상들이 명절 때마다 먹었다던 떡국. 그 유래는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언제부터 떡국을 먹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조선시대 세시풍속에 관해 기록된 문헌인 '동국세시기(1849)'와 '열양세시기(1819)'에 따르면 제례음식에 없으면 안 될 음식으로 설 아침에 떡국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열양세시기에는 "섣달 그믐밤에 식구대로 한 그릇씩 먹는데, 이것을 떡국이라고 한다. 항간에서 아이들에게 나이를 물을 때 '너 지금까지 떡국 몇 그릇째 먹었느냐?'고 한다"라고 기록돼있다.

일제강점기의 문헌인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1937∼1946)'에서는 설에 떡국을 먹는 풍습이 상고시대에 새해 제사 때 먹던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떡국에 들어가는 가래떡을 길고 가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도 알고 보면 떡국에서 나온 말이다. 보통은 떡국에 꿩 고리를 넣어 맛을 냈으나, 꿩이 없을 경우에는 닭고기를 넣고 끓이기도 했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풍속이 건너오면서 귀족들 사이에선 한때 매사냥이 유행했다. 이에 매가 물어온 꿩으로 맛을 낸 떡국이나 만둣국이 고급 음식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떡국을 일컫는 명칭도 여러 가지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떡국은 그 겉모양의 희다고 해서 '백탕' 혹은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고 해서 '병탕'이라고 했다. 또 나이를 물어볼 때 떡국의 그릇 수를 물어본다고 해서 '나이를 더 먹는 떡' 즉 '첨세병(添歲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떡국은 지역별로도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개성 지역의 조랭이떡국, 충청도 지역의 구기자떡국·다슬기떡국·미역생떡국, 전라도 지역의 두부떡국·꿩떡국·굴떡국, 경상도 지역의 태양떡국·굴떡국·메밀떡국 등이 유명하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이러한 풍속은 정월달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은연자중하면서..." 
 

설날은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다.

<설>이란 말은 낯설다, 새롭다 는 뜻으로 새로 시작한 한 해의 첫날을 의미한다.

<설>을 다른 말로 원단元旦, 세수歲首 라고도 한다. 또 <설>을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말이다.

예전에는 섣달 그믐날이면 골목 여기저기서 복조리를 한 짐 메고 복조리 사라는 외침이 밤새 울려 퍼졌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소요되는 복조리를 사게 된다. 밤에 미처 사지 못한 가정은 설날 아침 일찍 사거나 미리 부탁을 하여 가져오게 한다.
이렇게 복조리를 사는 이유는 1년 동안 복을 많이 받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는데, 바로 칠성의 2번 째 별인 천선성의 조응을 받고자 한다.
천선성은 하늘의 보물창고 인간의 식록을 주관하므로 이 별의 조응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복조리뿐만 아니라 복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날에는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茶禮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한다. 그리고 덕담을 서로 나누며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게 된다.
옛날에는 설날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셨다. 이 도소주를 마시면 일 년 동안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도소주를 마실 때는 나이 적은 사람부터 마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계집종에게 음식을 차려 일가친척에게 문안을 드리게 했는데 이것을 문안비問安婢라고 하였다.

설날 새벽에 거리에 나가 새 소리를 듣고 일 년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였는데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면 풍년이 들고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징조로 여겼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하였다.

또한 나라에서는 장수하는 부인들에게 포상을 하여 경노심을 키우기도 하였다.

설날 저녁에는 원단소발元旦燒髮이라고 하여 일 년 동안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털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여 두었다가 설날 저녁에 불에 태웠다. 설날 저녁에 문 밖에서 머리털을 태우면 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초에 하는 제액으론 삼재면법三災免法이라 하여 9년마다 드는 삼재를 피하기 위하여 응삼우鷹三羽을 그려서 문 위에 붙이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삼재면법은 삼재풀이라고 하여 지금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 삼재부     ©조성제 전문위원
또 이날은 대문에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 오기 위하여 문배를 많이 붙였다.

궁중에서는 한 길이 넘는 강포 오모상絳袍 烏帽象을 그려 중합문에 붙이고 종규鍾?가 귀신을 잡는 화상이나 귀두상을 그려 문에 붙였으며, 일반 어염집에서는 벽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였다.

대문에는 용과 호랑이를 붙이고 닭은 칙간에 붙였는데 닭이 울면 귀신이 달아나기 때문에 귀신이 가장 많이 있다고 믿는 칙간, 즉 화장실에 붙인 것이다. 이런 문배를 붙이는 것은 질병을 물리치고 역신을 몰아내는 벽사?邪의 의미가 있다.

설날 밤에는 하늘에 있는 <야광귀>란 귀신이 내려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사람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고 한다. 이 때 신발을 도적맞은 사람은 그해 일 년 동안 액운에 시달리고 재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설날 밤에는 모두 신발을 방에 들여다 놓고 잤다. 이 야광귀를 막기 위하여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화약을 터뜨려 쫓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야광귀 퇴치법으론 기둥이나 마당에 높은 장간長竿을 세워 채를 걸어두면 야광귀가 하늘에서 내려와 채를 발견하곤 채의 눈이 많으므로 몇 개나 되나 헤아리다 자꾸 헷갈려서 밤새 채만 헤아리다 닭이 울면 미처 신발을 훔쳐가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또 정월의 첫 원숭이날을 상신일上辛日이라 하여 왕은 친히 사직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리고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은 농부들이 쥐를 없애기 이하여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라고 한다. 또 쥐날 밤 자시에 방아를 찧으면 쥐가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이 밤중에 방아를 찧었다. 이 날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 세시풍속. 출처:국립민속박물관     © 편집부

정월의 첫 토끼날은 상묘일上卯日이라 한다. 이 날은 남자가 먼저 일어나 대문을 열어야 한다. 남자가 특히 가장이 대문을 열어야 일 년 동안 대문으로 융성한 기운이 많이 들어와 집안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이날은 남자가 대문을 열고 난 뒤 여자들이 방문을 열고 나와 일을 하였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 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명사命絲라고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이렇게 하면 명이 길어진다고 믿었다. 또 이날 실을 짜거나 옷을 지어면 장수한다고 믿어 반드시 베틀에 올라 한 올의 실이라도 짜본다.

정월의 첫째 돼지날은 上亥日이라고 하여 얼굴이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희고 고와진다고 믿었다. 이 날은 바느질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바느질하면 손가락이 아리고 빗질을 하면 풍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궁중에서는 햇불을 들고 「돼지 주둥이 지진다.」하며 돌아다녔으며 곡식을 태워 주머니에 넣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 곡식을 담은 주머니를 해낭亥囊, 자낭子囊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비단으로 만들며 해낭은 둥글게 자낭은 길게 만들었다 한다.

마지막으로 설날에서부터 열이튿날까지 12일 동안 일진에 의해서 유모일有毛日(털 있는 날)과 無毛日(털 없는 날)로 나뉜다. 즉 12동물 중 털 있는 동물인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날은 털 있는 날 그리고 용, 뱀날은 털 없는 날이 된다.

유모일은 길일 이고 무모일은 불길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설날이 유모일에 해당하면 그해 풍년이 들고 무모일에 해당하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또 연휴를 끝내고 상점의 개점이나 새로 개업할 때도 유모일을 택하는데 특히 호랑이날이 좋다고 한다.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서 유숙하지 않는다.

특히 7일은 인일人日이라 하여 이날은 더욱 금기시 하였는데 이날 객이 집에 와서 자고 가면 그해 한해는 불운하다고 믿어 손님 재우기를 굉장히 꺼렸다. 하지만 피치 못하게 자고 가야할 사정이 생기면 주인과 객이 머리를 반대에 두고 거꾸로 자야만 그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정월달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은연자중하면서 일 년 계획을 잘 세우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달 초삼일까지 절이나 무당집에 들러 불공을 드리거나 기원을 한다.

이렇게 초삼일까지로 묵시적으로 정해진 것은 바로 달과 관련된 풍속으로 초삼일까지는 달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음기의 상징인 달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간은 여자도 달과 같이 그 기간만큼은 바깥출입을 중지하고 몸을 단정히 하여 천신께 기원하라는 뜻일 것이다.

[플러스 코리아타임즈-조성제 무천문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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